로테르담을 ‘방랑’하다
로테르담을 ‘방랑’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11.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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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
▲ 로테르담 기차역

5번 플랫폼이라고 했나? 승강장으로 내려가며 기차표를 샅샅이 훑어봐도 출발시각이나 좌석번호도 없이 그저 ‘ZONE BRUXELLES -> ROTTERDAM C.’라고만 적혀 있다. 매표소 언니가 몇 번 게이트로 가서 몇 시 차를 타라고 설명해줄 때 귀담아 들어둘 걸. 이대로 프랑스나 독일로 가는 기차라도 타면 낭패다.

다시 가서 물어보고 오긴 시간이 촉박한데. 앞으로 들어올 열차들 중에 하나는 바로 갈 테니 일단 아무 열차나 들어오는 대로 타고 물어보기로 한다. 배낭 하나 지고 작은 트렁크를 들고, 오는 열차마다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다 문득 불안해졌다. 승강장 번호는 제대로 들은 걸까? 국경을 넘나드는 열차 타는 곳에서 무슨 티켓에 차번호도 시간도 안 적혀 있담. 괜히 다른 데 탓을 해 본다.

우리나라의 사정과는 달리 기차로 여러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유럽의 한복판에 아무런 준비 없이 길을 나선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서야 겨우 열차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손닿는 곳에 짐을 놓고 등받이에 뒤통수를 대자 방금까지의 긴박감은 온데간데없이 녹았다.

심지어 현지에 살고 있는 동창과 전날 연락이 닿아 목적지로 삼았을 뿐이라며 다른 곳으로 가는 차를 잘못 탔어도 괜찮았을 거란 여유도 뒤늦게 부려 본다. 참, 인간의 마음이란. 낯선 시가지와 사람들, 녹음이 스쳐가는 차창을 설레는 마음으로 구경하다 문득 낯익은 것이 그리워져 복거일의 산문집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를 펼쳐들었다. 마침 방랑에 관한 글이 있다.

‘방랑은 20세기적 현상으로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방랑하기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방랑은 사람들이 일상의 바퀴 자국에서 벗어나 마음의 지평을 넓히는 일로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낭비가 아니다. 이런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이들이, 더 많은 형태로 방랑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

 

‘새로움’에 담긴 슬픈 사연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고 정치적으로 이동의 제약이 줄어든 덕에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마음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음껏 방랑을 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이야기다. 무엇 하나 버릴 것 없는 단어들로 이뤄진 문장을 찬찬히 곱씹다가 승무원의 안내방송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테르담이다.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어서였을까. 도시적인 도시(urban city) 로테르담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몬테비데오나 큐브하우스 같이 재미 있는 디자인의 현대식 건축물, 엄청난 물량의 컨테이너가 드나드는 항구 유로포트, 배가 지날 때면 윗몸을 일으켜 길을 내주는 에라스무스 다리,

잘 정비된 개천과 공원에서 쭉 뻗은 시가지. 대부분에서 유럽식 예스러움보다는 신상(brand-new)의 느낌이 강하게 풍겼다. 이유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침공으로 거의 폐허가 됐기에 도시를 새로 건설해야 했다고.

로테르담의 밤거리를 걸으면 간혹 바닥에 붉은 조명이 켜져 있는 게 보인다. 네덜란드 친구는 “그 지점이 바로 나치의 폭격을 맞은 자리”라며 말을 이었다. 어느 날, 독일인 여행객 2명이 길을 물어와 본인이 안내를 해주며 로테르담의 인상을 물었단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오래된 건물들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답했단다. 그 말에 옛 건물들이 없는 게 누구 때문인지 당장에 알려주고 싶은 충동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말을 아꼈다고 한다.

현재의 이 사람들은 과거의 그 사람들이 아니고, 로테르담을 즐겁게 여행하고 돌아가는 것이 어디까지나 서로에게 유익한 일이며, 언젠간 이 도시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겠지 생각했단다. 비슷한 상황에서 나라면 어땠을까. 상대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란 쉽지 않기에 고도로 전략적일 수 없다면 생각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실행하기보단 너그럽게 내버려두는 편이 득일지도 모른다.

 

▲ 마스 강변

관광하기 좋은 도시, 방랑하기 좋은 도시

붉은 조명을 하나 둘 지나 근처 식당(pub)으로 갔다. 맥주를 드니 여태껏 마셔본 가운데 손에 꼽을 정도로 맛있었다. 막 8개월의 금주를 끝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원이 다른 하우스 맥주의 풍미가 콧속에서 맴돌았다. 언젠가 한국에서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맛있는 것을 소개해준 답례로 계산을 하려는데 카드를 퇴짜 맞았다.

로테르담에서 비자나 마스터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은 기차역이나 기념품을 파는 곳 정도다. 대부분의 카페나 마트에선 로컬용 직불카드 또는 현금만 취급했다. 수수료 때문이란다. 가격경쟁에서 승리한 지역의 카드회사에겐 축하할 일이지만 가게 입장에서는 해외손님의 지갑이 반만 열릴 것도 고려해봄직할 텐데.

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시(city) 차원에서도 하고 있었다. 기차역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려고 유로로 50센트(한화 약 700원)를 냈다. 또 로테르담 투어용 지도는 관광안내소에서 1유로(약 1400원)에 살 수 있었다.

한국에서 무료로 이용하는 공공시설물들이 로테르담에서는 유료였다. 시에서 정한 가격이라 완벽한 ‘시장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얼마가 됐든 공짜란 없다는 인식을 자연스레 갖게 하니 비용도 아끼면서 1석2조의 효과를 보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관광안내소에서도 지도를 거저 주지 말고 로테르담처럼 팔아보면 어떨까.

연안크루즈를 타고 보니 닮고 싶고 갖고 싶은 것들이 눈에 더 들어왔다. 독특한 건축물들과 강변에 잘 정비된 공원들, 관람용 군함과 수만 명이 묵을 수 있는 선상호텔, 그리고 세계 최대 항만시설까지. 모두 둘러보면 그들이 내건 캐치프레이즈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세계적 항구를 가진 세계 도시 로테르담(Rotterdam World Port World City). 방랑하기 참 좋은 도시다.

 

이유진 프리덤팩토리 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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