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의 功과 過
백범의 功과 過
  • 미래한국
  • 승인 2014.11.1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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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길] 김광동 편집위원 (나라정책연구원장)
김광동 편집위원
(나라정책연구원장)

역사학자 출신 이인호 KBS 이사장이 국회에서 과감히 백범 김구선생을 재평가한 바 있다. 잘 알다시피 백범이 독립운동가이고 민족주의자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한국 임시정부 주석을 맡아 중국 장제스 국민당정부와 협력하며 항일운동의 선두에 있었다.

일본이 천하를 뒤덮던 시절, 우리 민족이 독립의 꿈을 잃지 않게 하고 임시정부활동과 윤봉길 의거 등을 통해 독립의 횃불을 높이 든 것만으로도 겨레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다. 더구나 스탈린과 모택동 공산당이 또 다른 공산주의 제국을 만드는 혁명수단의 하나로 항일운동을 하거나 계급투쟁을 한 것도 결코 아니었다.

항일을 넘어 백범은 대한민국 탄생과 관련하여 또 다른 중요한 결정을 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국을 신탁통치 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결연히 맞서 반탁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당시 국경을 함께했고 승전국의 위치에 있던 공산주의 소련은 한반도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였고, 중국마저 공산체제로 치닫던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스탈린의 지배에 들어갔다면 그것은 동유럽처럼 소련 공산주의의 위성국가로 가는 길밖엔 없었다.

미국은 태평양 건너에 있는 나라여서 한반도에 커다란 이해가 없던 상황에서 공산 전체주의는 한반도 전역을 지배했겠지만, 신탁통치 거부는 대한민국에 유엔(UN)과 미국 주도적 근대 문명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신탁통치를 거부하자, 이승만과 김구는 바로 좌파로부터 ‘민족반역자’와 ‘반동’ 혹은 ‘테러주의자’란 저주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그랬던 김구 선생에 대한 아쉬움은 그 이후의 노선 때문이다. 유엔관리 하에 자유민주적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김일성이 참여를 거부하자 대한민국 수립도 반대하는 우를 범했다.

비록 명분은 통일정부가 아니라면 반대한다는 것이었지만 이미 북에는 공산정부가 수립되고 남한까지 공산체제로 끌고 들어가고자 하는 공작과 전쟁준비에 있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했다.

공산주의자에게 ‘통일’이란 곧 대한민국을 공산제국에 편입시키는 것임은 간파하지 못했다. 일제로부터의 독립투쟁과 마찬가지로 공산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야말로 근대적 자유민주국가로 가기 위한 필수적 건국투쟁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실체는 백범 사후 전개된 6·25침략과 지금까지 지속된 북의 봉건전체주의로도 입증된다.

우리는 식민체제보다 더 가혹한 공산전체주의와 맞서 있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선전선동 용어로 사용되는 ‘평화’는 물론이고 ‘민족’ ‘화합과 공존’ 등에 휩쓸리지 않으며 북에 자유와 번영을 확산시키는 민족해방투쟁에 나서야 하는 입장에 있다.

북에선 건국과정에 반대하며 김일성의 남북연석회의에 김구를 참석하게 만든 성시백을 대남공작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친북좌파가 기리는 것도 오직 백범의 그 부분만이다. 김구에 대한 공과 과를 재조명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과가 반복되지 않기 위함이다.

 

김광동 편집위원
나라정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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