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보험의 함정 … 약관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민간보험의 함정 … 약관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 미래한국
  • 승인 2014.11.24 11: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0년대 초 푸르덴셜과 ING, 메트라이프 등 외국계 보험사들이 종신보험상품을 들고 나와 국내 보험시장을 휩쓴 적이 있었다.

당시 주로 아주머니들이 보험 모집을 담당하던 국내보험사와 달리 외국계 보험사들은 말쑥한 정장 차림의 소위 넥타이 부대를 앞세워 ‘가장이 갑자기 사망하는 경우 가족들의 생계부담을 줄여야 한다’며 ‘가족을 위한 마지막 선물’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성공을 거뒀다.

외국계 보험사들이 선두주자였고 국내 보험사들이 후발주자였던 종신보험이 한바탕 보험시장을 휩쓸고 간 후 보험사들은 곧 CI보험이라는 새로운 상품을 개발해 보험시장을 공략했다.

CI보험은 가입자가 사망한 이후에 보험금이 지급되는 종신보험과 달리 가입자가 중대한 질병(Critical illness)에 걸리게 됐을 때 보험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지급하는 보험상품이다.

즉 살아 있을 때 보험금을 받아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거나 가족들에게 돈을 나눠줄 수 있도록 한 상품인 것이다.

보험사들은 “죽고 나면 돈이 무슨 소용이냐, 살아 있을 때 보험금을 받아서 쓰는 게 좋다”는 전략을 들고 나왔다. 이 전략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외국계 보험사가 선두를 달린 종신보험과 달리 삼성/교보/대한 등 국내보험사들이 앞장선 CI보험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수 년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CI보험에 가입했다.

그러나 CI보험에 가입한 사람 중 CI보험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매우 적다. 뿐만 아니라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보험사의 ‘수상한 약관’ 때문이었다. 가입자에게 '중대한 병'이 발병하더라도 보험금을 지급하는 조건을 지극히 까다롭게 만든 것이다. 내용을 살펴보자.


급성 심근경색인 경우

급성 심근경색이란 심장에 영양을 공급하는 혈관(관상동맥)이 막혀서 심장 근육의 일부가 죽는 것을 뜻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질환이다.

보험상품을 판매할 때 보험설계사들은 “급성 심근경색이 급증하고 있는데 CI보험에 들어두면 이 병이 발병할 때 보험금을 지급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급성 심근경색은 식생활의 변화 때문에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질환이어서 설계사들의 말에 귀가 솔깃한 이들은 보험에 가입한다. 그러나 실제 약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 중대한 급성 심근경색증이라 함은 (…) 발병 당시 다음의 2가지 특징을 모두 보여야 한다.
1) 전형적인 급성 심근경색의 심전도 변화(ST분절,T파,Q파)가 새롭게 출현
2) CK-MB를 포함한 심근효소의 발병 당시 새롭게 상승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 분들은 매우 적을 것이다. 그런데 일단 여기서 유의할 사항은 이것이다. ‘보험사에서는 위 2가지 특징을 반드시 모두 보여야만 급성 심근경색으로 인정한다’는 구절이다.

급성 심근경색이 발병하면 심전도에 변화가 온다. 그러나 급성 심근경색은 다양한 양상을 보일 수 있어서 새로운 Q파가 출현하지 않는 급성 심근경색도 있다. 더욱이 CK-MB라는 심근효소는 심근경색의 초기에 증가했다가 수일이 지나면 정상수치로 떨어진다.

따라서 만일 환자가 심근경색의 급성기에 병원을 방문하지 않거나 지역의 작은 병원을 방문해서 발병 초기에 시간 내에 CK-MB검사를 못했다면 나중에 심장전문의로부터 심근경색 확진 판정을 받아도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보험금 지급기준을 지나치게 까다롭게 해놓은 것이다.

보험사는 여기에 더 강력한 안전장치를 해놓았다. 약관에 “혈액 중 심장효소만으로 급성 심근경색증 진단을 내린다든지 심전도검사만으로 급성 심근경색증 진단을 내리는 경우는 보장에서 제외되며 또한 심초음파 검사나 핵의학검사, MRI, PET 등을 기초로 급성 심근경색증 진단을 내리는 경우도 보장에서 제외, 심근의 미세경색이나 작은 손상도 보장에서 제외한다”고 기재돼 있다.

의사가 급성 심근경색이 확실하다는 진단을 내리더라도 보험사가 약관에 써놓은 기준에 맞지 않으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말기 간질환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질병인 간질환의 경우에도 문제가 복잡하다. CI보험의 약관에는 이렇게 기재돼 있다.

- 말기 간질환이라 함은 간경변증을 일으키는 말기의 간질환을 말하며 다음의 3가지 특징을 모두 보여야 한다. ①영구적인 황달(혈중빌리루빈 수치 3mg/dl 이상) ②복수 ③간성뇌병증

역시 마찬가지다. 3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해야 보험금을 지급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생명을 위협하는 말기 간질환 상태에서도 복수가 차지 않거나 간성뇌병증에 빠지지 않을 수도 있다.

결국 말기 간질환 환자 중 CI보험의 혜택을 받는 이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다.

더욱이 간성뇌병증이란 간이 해독기능을 잃어 독성물질들이 쌓여 뇌기능의 이상을 가져와 의식의 혼돈이 오거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 간성뇌병증에는 1단계부터 4단계(혼수상태)까지 있지만 중증단계에서 진단이 되는 경우가 많다.

즉 간성뇌병증을 진단받은 환자들은 대부분 보험금을 받아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굳이 CI보험에 가입한 원래의 취지가 퇴색된다. 과연 의사가 아닌 일반인이 보험사가 약관에서 말하는 간성뇌병증의 의미를 알 수 있을까?

   
 

말기 폐질환의 경우

- 환자는 다음의 특징을 모두 보여야 한다. ①FEV1이 정상의 25% 이하 ②저산소증으로 인해 영구적인 산소치료 공급이 필요(PaO2 60mmHg 이하)

마찬가지다. FEV1이란 1초에 힘을 주어 내뿜을 수 있는 공기량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양한 폐기능검사의 측정항목 중 하나다. 위 약관에 의하면 보험사는 이 수치가 정상의 1/4 이하로 떨어졌을 때에만 말기페질환으로 인정하고 보험금을 지불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폐질환의 종류에 따라 각기 다른 항목의 변화를 보인다. 즉 만성기관지염과 같은 폐색성폐질환은 FEV1이 크게 떨어지지만 폐섬유화증과 같은 억제성폐질환은 FEV1의 감소 이외에도 FVC의 감소가 특징적이다.

말기폐질환의 상태를 FEV1과 산소수치 단 두 개의 항목으로 판단할 수 없다. 실제 말기폐질환에 빠졌으면서도 위 항목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보험사의 이런 약관 때문에 실제 말기 폐질환환자 중에서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외 다른 중증질환들에 대한 약관들도 모두 비슷한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일반인들 중 위 약관의 의미를 이해하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보험사들은 보험가입자가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인이 아니라면 약관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는 약점을 이용해 보험금 지급조건을 매우 까다롭게 만들어 놓은 것이 사실이다.

   
 

판매자도 금감위도 모르는 ‘복잡한 사정’

보험금을 지급받기 위해서 까다로운 조건을 만들어놓고 의학적 상식이 없는 일반인들에게 이 사실을 숨기고 판매한다면 그것은 정당하지 않은 행위다.

그런데 이 정당하지 않은 일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보험 상품을 감독하는 금융감독위원회 위원들도 이러한 까다로운 규정들의 의미를 잘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들도 의료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약관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보험업계에 종사하는 이들의 고백에 따르면 CI보험이 실제로는 ‘암보험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다른 중증질환들과 달리 암진단에 대해서는 지급조건이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보험관계자에 따르면 실제로 CI보험금의 수혜자 중 80%가 암환자들이라고 말한다. 즉 CI보험은 거창한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암보험과 다를 바 없으며 그나마도 피부암 중 기저세포암은 지급대상에서 제외되고 악성흑색종만 보험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등 제한적인 암보험이라는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에 불었던 CI보험의 열풍은 이후 변액보험과 투자상품이 등장하면서 다소 가라앉았으나 2010년 이후 종신보험과 결합된 상품으로 다시 판매가 시작되고 있다. 보험사들은 계속 새로운 상품들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CI보험을 의료보험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질병을 담보하는 보험상품이라는 점에서 의료보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보험가입자가 이렇게 까다로운 규정을 만든 이유는 보험금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이며 보험사기로부터 보험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지나친 보험사의 보호정책으로 인해 보험가입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험사가 ‘중대한 질병’의 기준에 대한 임상적 가이드라인만 제시하고 환자가 여기에 해당되는지를 판단하는 의사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보험사는 의사를 믿지 못하고 의사들이 내리는 진단이 옳은지 여부를 판단할 능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오늘도 아무 것도 모르는 보험가입자들은 여전히 약관의 함정에 빠지고 있다.
   

노환규 편집위원·전 대한의사협회 회장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