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양라면 고(故) 전중윤 회장의 기업가 정신 “국민이 배불러야 세상이 평화롭다”
삼양라면 고(故) 전중윤 회장의 기업가 정신 “국민이 배불러야 세상이 평화롭다”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4.12.08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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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글로벌 한류’ 한국 라면 대박記 ②
 

1950년대 말 국내 굴지의 보험회사 사장이 어느 날 남대문 시장 골목길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것을 보았다. 처음 보는 광경에 그 사장은 호기심이 일었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다름 아닌 ‘꿀꿀이 죽’이라고 불렸던 서민들의 음식을 파는 식당이었다.

당시 미군부대에서 먹다 남은 음식들을 모아서 끓인 꿀꿀이 죽은 한 그릇에 5원이었다. 그 광경을 본 보험회사 사장은 참담함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고 며칠 동안 그 광경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얼마 전 일본 출장에서 맛본 한 음식이 떠올랐다. 기름에 튀긴 마른 국수를 삶고 거기에 육수 분말을 풀어먹던 음식. 바로 라면이었다. 맛도 좋았지만 기름에 튀긴 음식이라 먹고 나서 든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국에 쌀은 부족해도 밀가루는 미국 원조로 넘쳐나지 않는가!’
사장은 결국 잘 나가던 보험회사에 사표를 내고 본격적으로 라면 개발사업에 뛰어들었다. 바로 당시 제일생명 사장이었던 삼양식품의 전중윤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1963년 한국에 라면은 그렇게 시작됐다. 전중윤 회장은 사재를 털어 작은 공장을 짓고 일본을 오가며 라면 제조기술을 배웠다. 당시 일본에는 묘조식품이라는 회사가 인스턴트 라면을 한국보다 4년 전에 출시해 판매하고 있었다.

전 회장은 묘조식품 회장을 찾아가 라면 제조기계 판매와 기술전수를 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당연히 묘조식품회사의 입장에서 선뜻 허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묘조식품 회장은 전중윤 회장이 잘나가던 국내 굴지의 금융인이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리고 전회장의 인품을 보고 라면기계 판매와 기술 전수를 결심하게 된다.


굶주리는 서민 위해 라면사업 시작

하지만 문제는 일본의 라면기계를 사올 달러였다. 당시 달러화는 정부가 관리하고 있어서 아무나 구입할 수 없었다. 라면기계 하나에 5만달러. 총 두 대를 살 10만달러를 구하기 위해 전중윤 회장은 정부를 집안처럼 드나들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러다가 전중윤 회장은 지인의 소개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게 된다.

김종필 씨는 전중윤 회장의 라면 사업 이야기를 듣고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한다. 당시 쌀은 귀하고 먹을 것은 부족하던 터에 밀가루는 그나마 충분해서 수제비와 칼국수 같은 음식이 국민의 허기진 배를 달래주고 있었다. 문제는 밀가루만 가지고는 칼로리를 조달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전중윤 회장은 김종필 씨에게 라면이 가진 장점을 내세우며 설득을 했다고 한다. 밀가루 200g으로는 얻을 수 없는 500칼로리와 18g의 단백질, 그리고 지방을 라면 200g 한 봉지로 가능하다는 말에, 김종필 씨는 라면 시제품을 먹어보고 나서 두 말 않고 그 자리에서 적극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겨우 겨우 미 농무부가 지원해 주기로 한 10만달러를 전중윤 회장에게 불하해줬다. 하지만 난리가 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사실을 알고 대노했지요. 그까짓 튀김국수 만드는 기계에 국가가 가진 달러를 다 쓴다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어요. 김종필 씨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아주 난감해 했다면서 당시 상황을 저희에게 털어놓았지요.”

삼양라면에서 오래 근무했던 한 임원의 이야기다. 그는 그러면서 다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삼양라면이 막 출시를 앞두고 있을 때였지요.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식을 해보시더니 ‘이거 좀 닝닝한데…고춧가루와 양념을 더 넣어서 좀 맵게 해봐’ 그러시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모든 제조공정을 그렇게 바꿨습니다. 그게 일본과 달리 우리 한국의 얼큰한 라면이 나오게 된 계기입니다.”

 


라면 1개 팔아 5전 남겨

삼양라면은 1963년 그렇게 첫 선을 보였다. 전중윤 회장은 자신의 기업 이념을 ‘식족평천(食足平天)’으로 정했다. 즉 국민이 배불리 먹으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으로 전중윤 회장은 삼양라면의 가격을 꿀꿀이죽 5원보다 5원 더 비싸고 당시 짜장면 가격 50원보다 40원이 더 싼 10원으로 정했다.

그러나 라면 한 개를 팔아 5전을 남기는 박리다매였기 때문에 삼양라면은 출시 후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라면을 플라스틱으로 오해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양라면은 이듬해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2년 후인 1965년에는 롯데라면을 비롯 대여섯 개의 라면들이 시장에 나왔다.

하지만 삼양라면은 선풍적인 인기에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품질로 자신을 넘어보라는 배짱과 서민들을 위한 봉사라는 기업 마인드는 소비자에게는 행복이었지만 결국 삼양라면을 품질로 이기려는 롯데의 농심라면 경쟁력을 크게 키워주게 됐다.

삼양라면은 1993년 우지파동으로 매출에 큰 타격을 입고 법정관리로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6년을 끈 소송에서 삼양라면은 대법원 무죄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당시 검찰과 언론은 2등급 우지(쇠기름)를 ‘가공해야 먹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공업용’이라고 몰아붙였다. 2등급 우지는 이미 일본에서도 라면과 마가린에 쓰였던 식용이었다.

한국 라면의 선구자 전중윤 회장은 올해 7월 향년 95세로 고인이 됐다. 고인이 되기 전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가장 섭섭했던 것은 제 아들이 집에서 라면을 먹으면 제가 화를 낸다는 루머였습니다. 저는 매일 라면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합니다.”

전중윤 회장은 1972년부터 강원도에 동양 최대의 대관령목장을 만들었다. 그는 라면에 더 높은 영양가를 넣기 위해 직접 소를 길러 육우를 스프에 첨부한 ‘쇠고기라면’을 출시했다.

“제가 왜 라면 사업을 하는지는 대관령 목장을 보면 아실 겁니다.”
전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1971년 삼양라면에 고전하던 롯데가 쇠고기라면으로 공전의 히트를 치며 삼양라면의 시장을 단숨에 20%를 점유했을 때 사실상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롯데 쇠고기라면에는 쇠고기가 없었다. 고(故) 전중윤 회장은 그의 철학 ‘정직과 신용’을 실천하며 끝까지 소비자를 왕으로 섬기고 사랑했던 것이다. 

한정석 편집위원 kalito7@futurekore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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