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혈혁명으로 독일통일을 이끈 동독의 시민단체와 시민운동가들
무혈혁명으로 독일통일을 이끈 동독의 시민단체와 시민운동가들
  • 미래한국
  • 승인 2014.12.09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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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동유럽 체제전환 과정에서도 그렇듯이 독일통일 과정에서 시민운동은 동독 무혈혁명과 통일을 엮어낼 수 있었던 유일한 끈이었다.

동독 공산정권 말기 분출하는 주민들의 요구를 결집해 원탁회의를 결성해 호네커를 몰아낸 힘, 베를린 장벽을 해체시키고 동독에 자유선거를 실시해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통일의 기초를 마련해낸 일련의 사건들, 그 저변에는 늘 시민운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처럼 독일통일은 시민과 시민단체의 활동을 빼고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통일과 관련해 동독에서 일어난 시민운동의 효시는 전통 야당도시 라이프치히 니콜라이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회(Friedensgebet)였다.

▲ '민주주의 지금' 로고

무혈혁명의 주역, 시민운동

1981년 시작된 평화기도회는 작은 교회 기도운동에 불과했다. 동독 정권에 억눌린 사람들을 위로하는 소박한 평화기도회가 공산당에 대한 저항운동의 메카가 된 것은 1988년이었다.

이때부터 교회 속 기도회가 교회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시위의 출발점은 늘 니콜라이교회였고, 공안당국은 이 교회를 집중 감시했다. 심지어는 교회를 포위해 시위를 막는 일도 있었다.

니콜라이교회 평화기도회는 공산정권의 감시 하에서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1989년 가을부터는 본격적인 저항운동으로 변화됐는데, 9월 4일 월요일 기도회를 마친 1000여명의 주민들이 “슈타지 사라져라!(Stasi raus!)”라며 거리로 나섰다.

서독 여행을 막으면 탈출도 불사할 것이라는 목소리도 커졌으며, 이때 슈타지의 무력진압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70여명의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이런 가운데 10월 16일 월요데모는 통일운동의 획을 그었다. 무려 12만명이 참가했다. 시위구호도 변했다. “우리는 주권을 가진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가 통일을 요구하는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로 바뀌었던 것이다.

▲ '뉴포럼' 로고

저항운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하고, 그것이 점차 통일운동으로 승화돼 갔다. 다른 한편으로 폴란드나 체코 주재 서독대사관에 진입한 동독 주민들의 탈출 소식이 전해지며 시위대의 사기는 고조됐다.

대내외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지만 호네커(Erich Honecker)의 오기는 극에 달했다. 그는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만 집착했다. 건국 행사에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주도했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고르바초프는 40주년 축하연설에서 호네커의 기대와는 달리 “삶은 시기를 놓친 자를 벌할 것이다(Wer zu spaet kommt, den bestraft das Leben)”라며 개혁을 설득했다.

하지만 호네커는 연설에서 “과거 40년 동안 동독이 이룩한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고 “동독인의 탈출과 반공 시위는 서독 정부의 흑색선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동독 공산당도 이해할 수 없는 연설이었고, 결국 당이 나서서 호네커를 출당시키고 서기장과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박탈했다. 사통당 정치국은 1989년 11월 8일 자로 폐쇄됐다.

호네커가 축출되고 공산당이 약화되자 시민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시민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뉴포럼’(Neues Forum), ‘민주주의 지금’ (Demokratie Jetzt), ‘민주봉기’(Demokratischer Aufbruch) 등이 생겨나 정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 '민주봉기' 로고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

‘민주주의 지금’은 1989년 9월 12일 민주주의 개혁과 주민의 정치 참여를 모토로 내걸고 설립됐다. 민주주의 지금은 사통당, 교회, 시민운동, 위성정당 등이 참여하는 ‘4자 회의’(Vierseitiger Tisch)를 열자는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이것이 후에 ‘원탁회의’로 발전했다.

또한 사통당(SED)의 주도적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동독 헌법 1조를 개정하기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해 두 달만에 7만5000명의 서명을 모았다. 민주주의 지금은 1990년 1월 정치 참여를 공식 선언하고 3월 18일 자유선거에 동맹 90의 일원으로 출마했다.

‘민주봉기’는 1989년 10월 시민단체로 조직됐고 12월에는 창당을 위한 전당대회를 열고 정당 활동을 시작했다. 초대 총재에는 변호사 볼프강 슈누어(Wolfgang Schnur)가 선출됐다.

민주봉기는 정당 프로그램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추구할 것과 정당의 목표로 통일을 내세웠다.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지 못했던 리더들이 떠나고 반공 개혁주의자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이 대변인, 오스발드 부츠케(Oswald Wutzke)가 사무총장에 임명됐다.

민주봉기는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 기민련(CDU), 독일사회연맹(Deutsche Soziale Union)과 독일연합(Allianz fuer Deutschland)을 결성해 출마했다. 선거 결과는 독일연합에 공동 참여한 기민련(40.8%)이나 독일사회연맹(6.3%)에 비해 저조한 득표율인 0.9%를 기록했다.

동독 급변기에 조직된 시민운동 중 가장 두드러진 단체는 ‘뉴포럼’이었다. 뉴포럼은 ‘항아리를 넘치게 한 마지막 물한방울(Tropfen, der das Fass zum Ueberlaufen brachte)’이라는 정의에서 나타나듯이 1989년 동독 민주화운동의 절정으로 공산당을 몰락시키는 데 최후의 일격을 가한 시민단체였다.

니콜라이교회와 겟세마네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이 교회로부터 시작된 운동이라고 한다면, 뉴포럼은 교회 밖에서 시작된 최초의 전국 규모의 민주화운동이었다.

뉴포럼은 동독의 전환기인 89년 9월 9일 전국 11개 지역에서 30명이 참가한 가운데 결성됐다. 대표적 반체제 인사이자 1982년 타계한 화학자 로베르트 하페만(Robert Havemann)이 거주했던 그륀하이데 자택에서 참가자들은 ‘봉기 89’ (Aufbruch 89) 선언을 채택하고 공동서명했다.

 

봉기 89는 당시 상황을 국가와 사회가 불통해 주민들 고통이 심하며, 서독으로 탈출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동독 헌법 29조에 규정한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찾기 위해 시민들이 일어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모임은 결성 초기부터 당과 슈타지의 표적이 됐고 그들의 모든 일정은 슈타지 보고문서에 기록으로 남겨졌다. 하지만 반체제 인사였던 베어벨 볼라이(Baerbel Bohley), 옌즈 라이히(Jens Reich) 등 많은 인사들이 블랙리스트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역사적 현장에 가담했다.

참가자들은 또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폴란드 솔리다르노스크, 체코의 헌장 77과 같은 개혁 시민운동에 크게 고무됐다.

30명의 창립 발기인들의 집에는 연인 동참을 원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창립 선언 'Aufbruch89'에는 두 달 만에 20만명이 서명하게 됐다.

이와 같은 동독 주민들의 시민운동으로 인해 독일통일 과정에 다음 두 가지의 결실을 이루는 성과를 얻었다. 하나는 동서를 물리적으로 가로막았던 베를린 장벽을 붕괴시킨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탁회의’(Runder Tisch)라고 하는 시민운동 연합체를 탄생시킨 것이었다.

원탁회의는 호네커 실권 후 총서기에 오른 크렌츠 집권기인 1989년 12월 7일 정식 발족됐다. 정치적 격변기에 동독 무혈혁명을 주도했던 시민단체와 교회 대표들이 주요 멤버였다.

원탁회의가 동독 격변기 실질적인 주도세력으로 부상하자, 개혁공산주의자로 총리에 오른 모드로브는 1990년 1월 28일 정부도 원탁회의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이후 국가 통치는 원탁회의와 모드로브 정부의 이원체제 하에서 이뤄졌다.

원탁회의는 공산당 SED 일당독재를 청산하고 다양한 정치활동을 보장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당의 창과 방패로 공산권력의 시녀였던 슈타지의 해체를 공론화하고, 헌법 개정과 조속한 시일 내에 동독 내 자유선거를 실시할 것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990년 3월 18일 동독 땅에 최초로 자유 민주선거가 전격 실시됐다.

동독 마지막 총리 드메지어는 1990년 10월 2일 통일 전야제에서 “이별은 슬픔을 의미하지만 동독과의 이별은 기쁨이요 희망”이라고 연설을 하고 임기를 끝냈다.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상임지휘자이자 월요데모의 주역이었던 쿠르트 마주어(Kurt Masur)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를 연주했다.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지도자로

통일과 함께 동독 무혈혁명을 이끈 시민운동가들은 정치지도자로 변신하게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앙겔라 메르켈 총리다. 메르켈은 1954년 7월 17일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신학자였던 부친은 메르켈 출생 후 바로 동독으로 이주 브란덴부르크 주 한 마을에서 목사가 됐다. 물리학을 공부한 메르켈은 1989년 동독 무혈혁명 당시 민주봉기의 일원으로 시민운동에 헌신한 후 헬무트 콜의 도움으로 정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통일 직후 1990년 12월 2일 전체 독일에서 실시된 연방하원(Bundestag) 총선에서 당선됐고 콜의 4기 내각(1991-1994)에서 여성 청소년부 장관을 지냈으며 5기 내각(1994-1998)에서는 환경부 장관을 지내면서 콜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1998년 이후 그는 기민련(CDU)의 사무총장을 지내며 정치적 역량을 축적했다. 1999년 콜 총리가 정당기부금법에 저촉돼 조사를 받게 됐을 때는 콜의 탈당을 요구해 당을 수습하고 리더십을 확고히 했다.

이후 양아버지로 여겼던 콜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메르켈은 2000년 4월 10일 당대표에 출마해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됐다. 당 대표로 선출된 후 선거에서 패배해 사민당이 집권하게 됐고 2005년 연방총리로 선출될 때까지 야당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연방총리로 선출된 후 그는 대내적으로는 동독재건, 대외적으로는 유럽통합을 이끌며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2009년 연임에 이어 2013년 3선에 선출되는 기염을 토했다.

요하임 가우크(Joachim Gauck) 대통령은 동독 시절 목사로 1989년 뉴포럼에 참여해 무혈혁명을 이끌었다. 1990년 6월에는 슈타지 해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 통일 후 슈타지 문서관리청(일명 가우크청) 대표로 선임됐다. 2012년 3월 18일에는 11대 대통령에 선출돼 지금까지 독일을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있다.

이외에도 볼프강 티에르제(Wolfgang Thierse)는 동독 튀링겐 주에서 출생하고 성장했다. 훔볼트 대학에서 독문학과 문화학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대학 연구소에서 활동하다 문화부로 이직했다.

문화부에서 일하던 1975년에, 그는 동독 반체제 인사 비어만(Biermann)의 시민권 박탈에 서명하라는 지시를 거부해 퇴직해야 했다. 동독 무혈혁명 때는 뉴포럼에 참여해 활동하다 동독 사민당에 입당해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90년 6월 9일에는 동독 사민당 대표로 선출됐고 통일 후 동서독 사민당 통합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됐다. 티에르제는 1998~2005년까지 연방하원 의장, 2005~2013년까지 부의장으로 활동했다.

만프레드 슈톨페(Manfred Stolpe)는 동독 개신교 장로로 정치범들을 돕고 서독으로 이주시키는 활동하다 통일 후 동독 브란덴부르크 주 지사로 선출된 인물이다. 동독 시절 대부분을 슈톨페는 동독 개신교 연맹 사무총장과 부총재로 활동하다 통일 후 동독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 1990년 브란덴부르크 주지사에 당선돼 2002년까지 활동했다.

이외에도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 자유선거를 통해 총리로 선출된 로타 드메지어, 현재 슈타지 문서관리청장인 마리안네 비어틀레(Marianne Birthle) 등 동독 출신 시민운동가로 통일독일을 이끈 인물들이 있다.

이와 같이 통일 후 독일은 동독 무혈혁명을 이뤄낸 시민운동가들을 키워 정치무대에 데뷔시켰다. 다른 한편 이것이 독일의 저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통일 후 오시즈-베시즈 하며 동서 갈등과 같은 부작용을 염두에 둔다면 이런 독일의 사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동독을 중심으로 독일에 불고 있는 좌파당(Die Linke)의 약진은 통일 후 지역감정의 골이 얼마나 크고 공산세력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강력하게 항변하고 있다. 

 

박상봉 편집위원, 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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