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던 사나이
‘리틀 노무현’으로 불리던 사나이
  • 김범수 편집인
  • 승인 2014.12.26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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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

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손꼽히던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를 지난 12월 8일 김포의 새정치민주연합 지역위원회 사무소에서 만났다. ‘인간 김두관’에 대해 궁금했다. 어떻게 경남 마을 이장으로 시작해 최연소 군수가 되고 행정자치부 장관이 되고 경남도지사가 될 수 있었는지. 왜 야권의 잠재적 대권 후보로 세간에 오르내려 왔는지, 어디까지가 실체이고 혹은 어디까지가 허명인지. 

마을 이장에서 최연소 단체장으로

- 최연소 민선 단체장 기록을 갖고 계신데, 그게 1995년이었죠. 어떻게 정치를 시작하게 된 겁니까. 간략한 개인사에 대한 설명을 바랍니다.

벌써 20년이 지났네요. 1995년 당시 삼풍백화점 붕괴로 3개월간 사고 뉴스가 도배되다가 그해 10월부터 최연소 단체장으로 제 이름이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경북 영주에 소재한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습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학원자유화, 광주항쟁이 일어났는데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던 저도 학내 시위에 적극 참여했죠.

졸업 이후에는 고향에 돌아와 남해농민회를 결성해서 농민운동을 하고, 오늘의 북카페 원조인 책사랑나눔터도 하고 마을 이장도 하는 등 많은 지역 활동을 했죠.

최연소 군수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지역신문입니다. 준비기간 2년을 포함해서 남해신문을 제가 10년간 발행했습니다. 당시 유일한 지역 언론으로서 2만 부를 발행하면서 군민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 ‘리틀 노무현’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계셨죠.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겁니까.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나건 제가 농촌으로 투신해서 10년 고생을 해서 군수가 되고 어느 정도의 성과와 색깔을 갖고 난 이후입니다.

2002년 남해군수를 두 번 마치고 경남도지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로부터 정치를 같이 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 겁니다.

2002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로 확정돼 있었고, 부산 울산 경남지역 시·도지사 후보를 영입해야 하는데 어려우니 저에게 연락을 한 겁니다.

처음엔 망설였는데 ‘어떤 놈하고 정치하려고 나하고는 안 할라 하노’, 그러더군요. 그렇게 인연이 됐죠. 그런데 무소속일 때는 25% 정도 지지율이 있었는데, 새천년민주당 입당하면서 9%로 떨어졌고, 선거기간 동안 열심히 해도 17%가 안 되더군요. 4년 뒤 2006년에 25.5%, 다시 4년 뒤 2010년에 53.5%로 경남도지사에 당선됐습니다.

 

“내가 보는 노무현 탄핵 원인”

- 노무현 정부에서 행정자치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전국적인 지명도도 생기게 되셨고.

그건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힘든 일이었죠. 국정개혁과제 중에서 국가균형발전과 지치분권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내무부와 총무처가 합쳐진 행정자치부를, 패러다임을 변화시켜서 지방자치가 잘 되도록 지방정부를 도와주는 도우미부처, 지원부처 성격으로 바꾸고 싶어 했어요.

저의 작은 군수 경험이지만 이를 토대로 행정자치부를 혁신할 수 있다고 본 거죠. 저에 대한 배려도 있지만 역으로 보면 노 대통령의 본인 기조와 자기 색깔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측면도 있었을 겁니다.

- 소위 노무현 정신은 무엇이었고 그 장단점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직 유효하다고 보시나요.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정치가 풀어야 할 숙제를 남기신 분이죠. 지방분권, 균형발전, 권위주의 해체, 반칙과 특권이 없는 사회 같은 여러 가지 의제들을 던졌는데 아젠다가 세팅은 됐지만 추동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나 당·정부·국민의 지지가 있어야 되잖아요.

실제로 추동력을 받지 못하니까 미완으로 끝났고,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죠. 우리 국민들은 노 대통령이 제기한 의제에 대해서 여전히 관심이 있지만 지금은 그것을 뛰어넘는 것을 요구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대통령을 거치면서 국민들이 노 대통령을 더 그리워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도 훨씬 더 그를 그리워하고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역대 누구보다도 많은 비판을 받은 대통령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죠. 탄핵 원인이 어디에 있었다고 보시나요.

국민들은 국민들과 편하게 대화하고 소통하기를 좋아하고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고지도자로서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제가 남해군수 시절에 상갓집에서 막걸리 마시면서 있으면 좋아하면서, 한편으로 군수가 할 일이 없어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느냐는 비판을 하거든요. 제가 생각할 때 노 대통령은 국민들과 처음으로 소통했던 대통령입니다.

말이나 글로 표현하다 보니깐 친근하고 편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가볍게 보여서 대통령이 말을 가려서 하지 않나 이런 오해를 받았고, 그것이 상당히 부정적 평가가 될 수 있죠.

본질적으로 말이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가원수로서 발언이 적절했나 하는 논란들이 있죠.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의 발언은 신중해야 하는 게 사실입니다.

- 노 전 대통령의 대북인식 등 지적하고 싶은 이슈가 많지만 일단 최근 문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요즘 새정치민주연합의 지지율이 10%대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새정치민주연합, 통칭 민주당이 야당 역할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이죠. 10년 동안 집권을 했던 정당인데 민생문제나 주요 현안문제에 대안을 제시하고 수권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당내 일부 계파들이 패권적인 모습을 보였죠. 중도를 지향하지만 제도를 바꾸고 사회를 바꾸는 중도개혁노선에 충실하지 못했고 경제민주화, 정의로운 복지, 한반도 평화추구 등에 대해서도 당원들이나 대의원들이 혼란을 갖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의 정체성과 역사성에 대해 당원들이 체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종북문제도 있습니다. 지난 대선과 총선에서 당시 민주(통합)당은 지금 헌재가 해산 재판중인 통합진보당과 연합했죠.

이른바 숙주 논란인데요, 통진당 RO조직에 대한 책임은 물을 수 있겠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면 그들을 제도권 안으로 영입했다는 것 자체로는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들이 만약 제도권 밖에 있었다면 이슬람 IS 조직처럼 총칼 들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겠습니까. 국회 내에서 녹여내야지, 발붙일 곳 없이 밀어내면 한국 사회를 더 위험하게 빠뜨리게 만든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건강성을 갖고 있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대체할 만한 시스템이 없잖아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모든 생각, 이념을 포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인권법안에 반대 

- 근 10년째 국회에서 표류 중인 북한인권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유엔이 결의안을 통과하고 주요 국가들은 이미 다 통과시켰는데요.

북한에서도 인권은 존중돼야 합니다. 다만 북한인권법 제정은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북한인권법이 제정된다고 하여 북한 주민들에 대한 일반적인 인권을 개선하도록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남북의 긴장관계를 높이는 것은 국가적 실익이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에 삐라를 살포하는 것이 오히려 북측의 총격으로 군사적 긴장만 유발한데서 보듯이 남북의 현안은 다양하고 포괄적 측면이 강합니다.

북한인권법은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보다는 탈북자와 탈북단체 지원에 맞춰져 있고 남북화해협력을 위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대행위를 부추겨 긴장이 높아지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 듣는 자리이니 논쟁은 하지 않겠습니다. 내년 초 새정치민주연합의 전당대회가 예정돼 있고, 한편으론 당을 깨야 한다는 신당론도 불거지고 있습니다. 당대표 경선 등 김 전 지사님의 당내 역할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십니까.

당 대표는 지난 7.30 보궐선거에서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서 어렵죠. 저는 초심으로 돌아와서 김포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포 현안을 살피는 데 주력하고 있죠. 당 대표로 박지원, 정세균, 문재인 후보가 출마한다는데 제가 누구를 당 대표를 만드는 역량은 부족합니다.

다만 당 대표와 최고위원을 분리해서 뽑기 때문에 최고위원 중에서는 저와 뜻이 맞고 잘 할 수 있는 분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김포에서 중앙정치 시작하고 싶어 

- 경남이 고향이고 정치적 기반이 있는 곳인데 지난 보궐선거에서 김포에 출마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습니까.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이 고전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지난 6·4 지방선거와 7.30 보궐선거에서의 공천 실패가 꼽히기도 하는데요.

지방선거 후에는 민주당이 우세한 분위기였는데 보궐선거에서 또 참패를 했죠. 그건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의 책임이라고 봅니다. 김포 같은 경우도 어려운 지역인데 시간을 많이 주지 않았어요. 그래도 43%를 얻었죠.

지난 대선 이후 독일 연수를 다녀오면서 중앙정치를 하겠다고 생각했고, 7.30 보궐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엔 상징성 있는 동작을에서 나서기 원했지만 당에서 김포 출마를 권유했고, 고심 끝에 수락해 출마를 한 겁니다.

저는 김포, 손학규 지사는 수원으로 가서 둘 다 떨어졌죠. 아시다시피 동작을에서 허동준, 기동민 후보가 막장 드라마를 연출했고 광주 광산에 권은희 후보를 공천준 것도 실수였다고 봅니다.

- 다음 총선에서도 김포에서 출마할 계획이시지요?

김포에서 중앙정치를 시작해서 김포에서 정치를 끝내고 싶습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분단을 극복하자는 의지를 갖고, 분단된 조국에서 가장 남쪽에서 태어나서 접경지역인 김포에서 정치를 해서 여생은 통일된 조국에서 최북단 함경북도에서 노후를 지내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

- 외모적으로 중국 시진핑 주석을 닮았다는 말 가끔 들으시죠. 노무현 정부 시절 정부와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은 미국보다 중국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바람직한 한중관계, 한미관계에 대해 어떤 입장이십니까.

미국은 특수한 관계잖아요. 정치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죠. 한미동맹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 이상으로 굳건해야 하고요. 중국은 무역규모가 1조가 넘었잖아요.

중국이 대외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 반면, 미국은 10%, 일본이 7%에 불과하죠. 중국경제와 밀접한 연동이 돼 있는 겁니다. 미국과 함께 중국과도 잘 지내야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저는 광해군의 합리적인 외교, 다자외교를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한미동맹을 결속하면서도 중국과의 경제적인 분야가 넓혀졌으니까, 중국에 가서는 중국이, 미국에 가서는 미국이 중요하다고 해야 합니다.

 

경남도지사를 중도에 사퇴했던 건... 

- 정치를 하면서 후회한 적은 없으십니까. 지난 대선에서 경남도지사를 하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야당 대선 경선에 뛰어드셨죠.

출마를 하고 선택되면 임기 동안 성실하게 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한 셈인데, 도지사에서 중도 사퇴하는 바람에 약속을 못 지켰죠. 임기 중간에 그만둔 건 옳지 않았다고 봅니다.

박근혜 후보를 꺾을 필승 카드로 부각되면서 대선 출마를 결심했는데 당내 경선에서 3위로 밀려났죠. 중심을 잡고 있었으면 안 그랬을 텐데 부화뇌동한 것 인정합니다. 후회되거나 미안했던 부분은, 부족했던 나를 선택해준 경남도민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 점입니다.

- ‘통 큰 정치,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의 연정’ 얘기를 하시는데, 그렇다면 경남에서 정치를 하면서 굳이 민주당에 집착해온 이유는 뭔가요. 김 지사님 이미지의 강점은 ‘야당이지만 합리적일 것 같다’는 건데, 해보는 말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당을 옮길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아이고, 내가 지금 와서 무슨 더 큰 영광을 보겠다고. 정도(正道)를 지켜야죠.

- 정도가 뭔가요?

정치에 정도는 없죠. 그래도 자기정체성이 분명해야죠. 새누리당 역사를 보면 민정당은 전두환 정권의 ‘광주학살’을 기초로 탄생한 정당이어서 제가 경남사람이지만 그 정당하고는 정치를 같이 하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주변의 권유, 유혹도 있었지만 결국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게 된 거죠.

 

김두관 전 지사는 모든 이슈에서 철저하게 정확한 ‘정답’을 얘기했다. ‘저쪽’ 편에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진보진영에서 볼 때 그는 여전히 좋은 ‘말(馬)’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나를 여러분의 도구로 써 달라”고 했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인터뷰/김범수 편집위원 www.kimbumsoo.net
정리/박진우 기자 newsthat@futurekorea.co.kr
사진/정연호 객원기자 mychunsh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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