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마저 학살한 일본 ‘연합적군’의 광기
동료마저 학살한 일본 ‘연합적군’의 광기
  • 미래한국
  • 승인 2015.01.0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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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적군파>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著, 교양인
 

1960년대 후반 일본의 대학가의 경우,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격렬했다. 시위현장에 각목과 화염병은 물론 쇠파이프로 만든 사제폭탄까지 등장했다.

서로 생각을 달리하는 학생운동계파들 간에 벌어졌던 ‘우치게바’라는 내부 투쟁은 납치와 살인으로 이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날로 과격해지는 학생운동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럴수록 학생운동은 점점 더 자기들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대표적인 게 1969년 등장한 적군파(赤軍派)였다. 이들은 ‘총에 의한 섬멸전’과 ‘세계혁명’을 내걸었다. 일본 내에서 가망 없는 투쟁에 절망해 가던 젊은이들이 그 치열한 구호에 매료돼 적군파에 가담했다.

그리고 1972년 6월 적군파와 또 다른 극좌단체인 혁명좌파가 합쳐서 만든 ‘연합적군’이 드디어 대형 사고를 쳤다. 경찰의 추적에 쫓기던 13명의 연합적군 조직원들이 가루이자와의 아사미산장을 점거하고 열흘간 경찰과 대치하면서 총격전을 벌인 것이다.

경찰 두 명과 시민 한 명이 죽었다. 결국 경찰에 의해 진압돼 끌려 나오면서도 당당하게(?) 세상을 쏘아보는 이들에게, 변혁을 꿈꾸다가 좌절하거나, 일본 사회 특유의 꽉 짜인 기성질서 속에서 숨 막혀하던 당대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연합적군은 시대의 우상이 됐다. 아니, 될 뻔했다.

1주일 후 연합적군의 은신처 인근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연합적군 조직원 야마다 다카시의 시신이었다. 처음에는 경찰의 프락치로 오인 받아 동료들에 의해 살해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내 엄청난 사실이 드러났다.

연합적군 내부에서의 숙청극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렇게 죽은 조직원이 모두 12명이나 됐다. 이들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연합적군을 향했던 동경도 함께 사라졌다.


<국화와 칼> 같은 ‘일본문화론’

이 책은 함께 혁명을 꿈꾸던 동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데까지 이른 1960~70년대 일본 극좌파 학생들의 광기(狂氣)를 사회심리학적으로 해부한다.

1972년 텔아비브공항 총기 난사 사건을 저지른 오카모토 고조와의 만남에서부터, 1960년대 후반 일본학생운동이 적군파와 같은 극단주의를 향해 달려가고, 산악지역에 혁명기지를 건설하겠다며 모인 25명의 연합적군 조직원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미친 짓을 저지르는 과정을 그려낸다.

나의 기대와는 달리 저자는 이 사건을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광기라는 식으로 분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군데군데서 나름, 혁명의 이상을 품고 잘못된 현실에 항거하려던 젊은이들이 그런 용서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 데 대해 안타까움을 피력한다.

저자는 그런 비극을 야기한 이유의 상당 부분을 ‘일본적’인 역사, 문화와 풍토에서 찾는다. 일례로 텔아비브공항 총기 난사사건을 저지른 오카모토 고조는 “혁명가와 반혁명가는 그 심정과 열의에 공통점이 많다”면서 자신은 기타 잇키와 사이고 다카모리를 존경하고 미시마 유키오를 높이 평가한다고 말한다.


인간을 목적에 필요한 희생자로 생각한 연합적군

그러나 ‘공산주의화’라는 모호한 개념 아래, 동료들을 ‘총괄’하면서 잔혹하게 죽인 연합적군의 광기는 일본적 문화의 소산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하나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공산전체주의의 소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이 부분을 애써 직시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곳곳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대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386운동권은 화염병을 던져 경찰관을 살상하고, 경찰프락치로 오인한 젊은이를 붙잡아 고문하기는 했지만, 적어도 적군파처럼 총을 들고 나서지는 않았다. 왜일까?

그건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의 학생투쟁이 별다른 소득 없이 막을 내렸다는 데 강한 불만과 답답함을 표출했던 오카모토 고조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386들이 100% 자기들이 추구했던 만큼은 아니더라도 권위주의정권(군사정권)의 해체라는 목적은 달성했고, 그들 중 일부는 정계나 권력화한 시민단체 등을 통해 기득권세력의 일부로 자리 잡는 데 성공한 것이 역설적으로 그들이 더 이상 과격화하는 것을 막은 건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카모토 고조의 부모에 대한 대목이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한 후에는 사회봉사에 열심인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둘 다 선량하고, 사회 정의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었다. 가정도 화목했다. 하지만 오카모토의 형은 요도호 납치범 중 하나가 됐고 동생은 텔아비브공항 총기 난사범이 됐다.

이에 대해 저자는 “1960년대 미국의 학생 활동가들 중에서도 오카모토처럼 진보적이고 사회에 관심이 많은 중류층 가정 출신이 적지 않았다”는 조사 결과를 인용한다.

"가정교육을 통해 사회의식이 굳건히 뿌리내린 아이들이 자기 주변의 부당함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겠다는 열의에 불탄다. 그리고 변혁의 그날이 좀처럼 오지 않는 데 조바심을 느끼다가 더 빨리 사회를 진보시킬 방법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긴다. 과연 그 부모들이 자식에게 의식 혹은 무의식 중에 가르친 진보적 의식이 진정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현실에서 살아서 숨쉬는, 피와 살과 정신과 꿈을 가진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가르쳤을까? 그들이 사랑할 대상으로 가르친 인간은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인간(인류)’이 아니었을까?

오카모토의 아버지가 아들의 행위에 대한 원인을 자신이 꾸린 가정이 아니라 더 큰 사회의 억압에서 찾은 것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아마도 오카모토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살아 있는 인간, 책임의 주체인 개인에 대해 가르친 적이 없을 것이다.

과거에 소위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경력을 자랑하고, 입만 열면 ‘사람 사는 세상’ ‘해방세상’을 외치던 자들이 탈북자들이나 김씨왕조 아래서 억압받는 북한동포들은 잔인할 정도로 외면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말하는 ‘사람’이 ‘생명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라, 자신들의 관념 속에 자리한 추상적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이리라. 그들은 오카모토 고조나 모리 쓰네오의 절친한 친구들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얘기일까?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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