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의 기원, 기독교를 간파하다
자유주의의 기원, 기독교를 간파하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1.19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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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은의 이승만 탐구] 이승만의 외교독립론③
 

이승만은 프린스턴대학의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에는 학과가 분화되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프린스턴 신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학위 취득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승만은 동진하는 서양세력에서 선교와 통상의 중요성을 꿰뚫어본 한국에서 거의 유일한 당대 인물이다. 그리고 그 뒤에 자유주의가 있음을 간파했다.

그가 자유를 발견한 것은 배재학당에 등록하면서이다. 서재필은 그의 본보기가 됐다. 여기서 그는 사서삼경을 읽던 위정척사의 과거 응시자에서 자유주의 정치학도로 변신했다.

같은 시기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인물이 후일 세브란스 의학대학을 세운 제중원 선교의사 에이비슨 박사이다. 거의 매일 찾아가서 영어를 습득하며 대화를 나눴다. 후일 대통령이 됐을 때 이승만은 회고했다.

“에이비슨 박사는 그가 이 땅에 전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오는 자유주의 사상의 상징으로서 본 대통령[이승만]의 신실한 친구이었으며 또 본 대통령의 청년 시기에 기독교 민주주의의 새 사상을 호흡케 하였다.”

▲ 이승만의 유학 시절 프린스턴대 기숙사에서

기독교 정신에서 배운 자유주의

서세동점을 맞이해 조선, 청, 일본이 각기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찾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일본은 신도(神道)를 강화했고 중국은 유교에서 엉거주춤한 형국이었는데 유독 조선만이 기독교를 수용해야 할 새로운 정신으로 봤다.

일본에서 최초로 서양 사정을 수입했다는 후쿠자와는 서양문명 뒤에 있는 정신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자 니토베가 일본의 종교는 무사도(武士道)라고 주장하는 논란거리 책을 썼다. 무사도의 성경은 칼이다.

그래서 일본 작가 나쓰메는 영국에 유학해 서구문명을 부러워하던 가운데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태도를 바꿔 우수한 일본문명의 증거라는 글을 써서 서구의 복장까지 흉내 내던 당시 분위기를 일거에 국수주의로 바꾸어 놓는 데 일조했다.

한편 중국에서 최초로 서구 자유주의를 수입한 엄복은 서구문명 뒤에 자유라는 사상이 있음을 알고 당시 유행하던 양무(洋務)운동을 비판했지만 그 자유주의의 기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은 무력에 의한 국가 자살로 치달았고, 중국은 공산주의에 빠져 버렸다. 정신의 공백은 이처럼 무섭다.

그러나 이승만은 서구문명 뒤에 있는 자유주의의 기원이 기독교였음을 알아차렸다. 앞서 이승만과 에이비슨의 관계에서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에이비슨 박사를 한국 땅에 전한 “기독교 정신으로부터 오는 자유주의의 상징”이라고, 본 그대로 기독교와 자유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임을 인식했다.

그래서 “이[기독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자유 권리를 중히 하려도 평균한 방한을 알지 못할지라.” 그 이유는 “대한에 자초에 유교가 있어 정치와 합하여 행하여 세상을 다스리기에 극히 선미한 지경에 이르러 보았은즉, 사람마다 이 교[유교]만 실상으로 행하면 다 이전같이 다시 되어 볼 줄로만 생각하여 다른 도리[기독교]는 구하지 않고 다만 이 도[유교]를 사람마다 행치 않는 것만 걱정하니, 비컨대 어려서 입어 빛나던 옷을 장성한 후에 다시 입으려 한 즉하여 무색할 뿐만 아니라 몸에 맞지 않는 줄은 생각지 못하고 종시 입기만 하면 전같이 찬란할 줄로 여김과 같[기]” 때문이다.

선미한 경지의 유교시대가 지나고 새 시대가 돼 “찬란한 다른 도리”로써 이승만이 발견한 것이 기독교이다. “이것[기독교]이 곧 지금 세계상 상등 문명국의 우등 문명한 사람들이 인류 사회의 근본을 삼아 나라와 백성이 일체로 높은 도덕지위에 이름이라. 지금 우리나라가 쓰러진 데서 일어나려 하며 썩은 데서 싹이 나고자 할진대, 이 교[기독교]로써 근본을 삼지 않고는 세계와 상통[통상]하여도 참 이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공자는 사람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니 “유교는 사람의 도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도”인 고로 “예수교 받드는 나라들이 문명부강 태평 안락하다.”


기독교야말로 나라 살리는 길

이승만은 외교권이 빼앗긴 한국이 일제에 의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채 거대한 감옥으로 변했을 때 기독교에서 유일한 외부 창구를 발견했다. 당시 미국 기독교는 흥왕했다.

이를 뒷받침하기라도 하듯이 1907년 한국을 방문한 국제기독청년회 마트 총재는 강연에서 “한국은 근대선교사상 완전히 복음화된 유일한 비기독교국가가 될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나라를 살리는 길은 기독교밖에 없습니다”라고 용기를 불어 넣었다. 이상재 역시 “한국의 유일한 희망은 기독교에 있다. 다른 나라들도 기독교 진리를 통해서만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라고 전도했다. 이상재는 감옥에서 이승만이 개종시킨 정부 고관 출신이다.

이승만에게 기독교가 단지 개인의 신앙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구국의 동력으로 인식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중국과 일본의 기독교가 미약하다는 사실과 대비하며 그는 아시아의 첫 번째 기독교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아 미국의 건국 목표와 일치시켰다.

그가 미국을 주목한 것은, 미국이 기독교 정신에 의해 탄생했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프랑스 혁명 정신이 현대 자유민주주의와 계몽주의가 돼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으로 봤으며 그것이 아시아의 끝자락에 있는 한국에서 대미를 이루기 바랐기 때문이다. “나중 난 뿔이 우뚝”하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기독교입국론은 결실을 거뒀다. 개신교 한국 전파 100년 만에 140배로 커진 1985년 뉴욕타임스는 한국 개신교 선교 백년 기념 기사에서 한국 기독교 인구가 장로교 본산인 스코틀랜드 장로교 인구와 캐나다 장로교 인구와 미국 장로교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다고 보고했다.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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