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대화는 요술램프가 아니다
남북 대화는 요술램프가 아니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1.21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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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길] 박상봉 편집위원 (명지대 교수)

통일대박에 이어 을미년 새해는 통준위의 남북회담 제의와 김정은의 신년사가 화두다. 우리의 당국회담 제의에 북한이 최고위급회담도 가능하다며 한발 더 다가섰기 때문이다. 언론은 마치 남북대화가 재개돼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온 듯 호들갑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거론한 회담의 전제조건을 가만히 뜯어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김정은이 제시한 전제조건은 한미군사훈련 중단, 대북전단살포 금지, 제도통일 포기다.

한미군사훈련 중단은 안보 무력화를 위한 꼼수이며, 대북전단살포 금지는 자유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공격이요, 제도통일 포기는 헌법의 폐기이자 적화통일을 위한 포석이다.

미국은 한미군사훈련을 중단하면 핵실험도 중단하겠다는 궤변을 북한의 ‘암묵적 위협’이라며 반대했다. 이와 달리 우리 정부는 또 다시 ‘대화’ 타령이다. 통일부 장관은 대화만 하면 북한과 동계올림픽도 가능하다고 했다 말을 바꿨다.

통준위 부위원장은 흡수통일은 비현실적이며, 통일을 1국가 1체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며 북한 달래기로 나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조건은 없다고 말했다. 5.24 조치 해제도, 통일도 대화만 재개하면 풀어낼 수 있다는 식이니 걱정이다.

   
 

남북대화가 요술램프가 아님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통해서도 증명된 바 있다. 오히려 북한의 비정상적 태도에는 원칙적인 대응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박근혜 대통령 임기 초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 때에도 드러난 바 있다.

그런데도 ‘대화’라는 주술만 반복한다. 이러니 북한과의 샅바 싸움은 연전연패다. 급기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는 대북전단살포 중단 결의안을 채택하고, 통일부는 전단살포를 제지하고 나섰다.


동·서독의 정상급 회담, 통일은 의제가 아니었다

독일통일로부터 배울 것이 없다는 분위기도 가관이다. 전 세계가 독일통일을 현대사의 기적이라고 보고 있다. 동독과 서독이 단계적으로 통일협상을 추진해 이뤄낸 평화적인 합의통일을 흡수통일의 틀 속에 가두는 것도 아마추어 수준이다. 독일 좌파들의 인식을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는 꼴이다.

통일 전 서독과 동독은 총 6차례 정상급 회담을 개최했다. 1, 2차 회담은 브란트 정권 하에서 1970년 3월과 5월에 동독 에푸르트와 서독 카셀에서 순차적으로 열렸다. 분단 25년 만의 일로 동방정책의 일환이었다. 3차 회담은 슈미트와 호네커 정상의 대화로 1981년 12월 동베를린에서 있었다. 2차 회담이 열린 지 11년만의 일이었다.

동독이 고정간첩 기욤을 통해 총리실을 도청하고 비밀자료들을 빼돌렸던 사실이 적발돼 브란트가 총리직을 사임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차 정상회담은 새로 집권한 기민련의 콜 총리가 호네커를 본으로 초청해 이뤄졌다.

콜은 1982년 집권 후 전임 총리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분단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1983년과 1984년에는 19.5억 DM을 동독에 지원했고 호네커는 국경에 설치된 자동기관단총을 철거했다.

동독의 양심범이나 노약자들의 서독 이주의 길도 대폭 열어놓았다.문화, 스포츠, 교통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교류와 협력도 활발했다. 그야말로 일방통행식 교류 협력이 아니라 쌍방향 교류와 협력이었다.

5차 회담은 1989년 12월 19일 콜의 드레스덴 방문 후 이뤄졌다. 5차 회담은 과거 4번의 회담과 달리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호네커가 실권하고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직후에 이뤄진 회담이었다는 것과 최초로 통일을 의제로 다뤘다는 것이었다.

동독 공산정권의 위기 상황에서 등장한 모드로브 총리는 콜에게 통일 카드를 제시하며 경제적 지원을 얻고자 했다. 동독과 서독이 조약공동체를 거쳐 통일국가를 만들어 가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콜 총리는 모드로브의 제안을 거절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재확인했다. 핵심은 향후 통일 문제를 포함한 동독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동독 내 자유선거를 실시해 민주적 지도자를 선출하라는 것이었다.


입에 발린 ‘대화타령’‘통일 남발’ 이제 그만

대내외적으로 궁지에 몰린 모드로브 총리는 콜의 역제안을 수용해 1990년 3월 18일 자유총선을 실시했다. 동독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로 공산정권을 대체할 민주권력을 창출하는 순간이었다.

이 선거에서 드메지어 총리가 선출됐다. 콜 총리는 1990년 4월 24일 본에서 드메지어 총리와 6차 정상회담을 열고 본격적으로 통일협상을 추진하게 됐다.

이상 6차례 정상급 회담을 보면 1~5차 회담은 분단으로 인한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였으며 통일을 의제로 한 만남은 6차 회담이 유일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공산권력과의 회담은 분단으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고, 독일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 통일은 민주적 절차로 창출된 정권과 논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우리는 대화를 통해 통일문제를 포함한 남북 간 모든 현안을 논의해 평화통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동일한 체제 내 여야 영수회담도 온갖 잡음과 다른 해석이 난무했는데 어설프기 짝이 없다.

‘통일대박’에 대한 북한의 대답은 ‘2015 통일대전’이었고, 통일부와 통일전선부가 거론하는 통일이 같을 리 없어도 대화를 방패삼아 은신해 있는 모양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은 이런 반복되는 입에 발린 평화통일, 대화타령에 식상하다. 북한이 핵무기 소형화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파다한데 정부는 북한의 도발에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말만 반복한다.

핵무기를 능가할 무기를 개발하든가, 북한 핵을 무력화시킬 대안은 없는데도 말이다. 통일에 대한 인식이 대통령과 통준위가 다른 것도 불안하다.

분단 시절 서독은 공식적으로 통일이라는 단어를 한마디도 거론하지 않았다. 분단 문제와 대동독 정책을 다뤘던 기관도 내독성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인 1989년 12월 18일 드레스덴을 방문했던 콜 총리가 환영하는 동독 주민들에게 던진 말은 “여러분, 자유를 위해 싸우십시오”였다. 정부가 통일을 남발하고 있다.

 

박상봉 편집위원 · 명지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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