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아직도 오리무중인 ‘위례성’의 위치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1.31 01:0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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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첫 도읍인 ‘위례’의 지명을 놓고 지방자치 단체들 간에 한바탕 선점 투쟁이 일고 있다.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 서울 송파구가 최근 ‘위례동’ 지명을 선점하기 위해 경쟁 파열음을 내고 있는 가운데 충남 천안시가 뛰어들었던 것.

천안시는 최근 백제 온조왕 사당 건립을 추진하는 등 ‘위례’ 지명 선점에 사활을 걸고 있다. 천안이 ‘위례’ 지명을 오래 전부터 사용해온 만큼 천안시만 쓸 수 있다는 입장이다.

누구나 백제가 처음 건국한 도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것쯤은 배워서 안다. 온조가 부여에서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도읍한 곳이 바로 위례성(慰禮城)이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 풍납토성

그런데 이 위례성은 국사학자들에게는 유령의 성과 같은 불가사의한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도저히 찾을 수도 없거니와 ‘여긴가?’하면 ‘저기다’라는 주장이 나오고, 그래서 ‘그곳인가?’하면 ‘아까 거기가 맞다’라는 주장이 나온다. 적어도 백제의 초기 수도 위례성의 후보는 9개에 달한다.

한강 이북으로는 파주 적성(積城)으로부터 세검동, 중랑천을 거쳐 강남으로 풍납토성, 몽촌토성에서 천안에 이른다.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위례성을 찾아 경기도를 샅샅이 뒤지다시피 했지만 아직까지 확신을 갖지 못한다. 다수결로 하자면 풍납토성이 유력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스터리는 남는다.


오리지널 위례성은 어디인가

백제의 초기 도읍이 한강유역에 있었다는 믿음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온조는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에 있던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한산이 다름 아닌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의 남한산이라는 것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해 명확했다. 문제는 그곳으로 옮겨진 초기 백제인들이 있었던 위례성의 위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 학자들은 이 위례성이 당시의 직산(오늘날 천안)의 ‘성거산 위례성’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성거산 위례성에 1690척의 성이 있고 우물이 하나 있다고 전해지며 온조왕 13년(AD 1세기)에 이곳으로부터 경기도 광주지방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 믿음에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바로 정약용이었다. 그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검토한 결과 온조가 낙랑과 말갈의 침입 때문에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옮겼다면 위례성은 직산(천안)이 아니라 더 북쪽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약용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온조왕의 순행 구절에 주목했다.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라는 대목이었다.

정약용은 이 구절이 바로 온조왕의 초기 위례성이 한강 이북에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처음에 한강 이북 어딘가에 오리지널 위례성이 있었고, 그곳이 낙랑과 말갈의 침입을 자주 받으니 강을 건넌 곳이 하남 위례성이었고, 다시 한산으로 옮겨갔다고 본 것이다.

정약용의 생각은 파격적이었지만 합리적이었다. 문제는 일제시대 일본 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신뢰하지 않았다. <일본서기>와 차이가 난다는 이유였다.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같은 이들은 <삼국사기> 기록을 무시한 채 하남 위례성을 광주, 한산을 남한산에 비정하고 하남 위례성에서 한산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주장했다.

   
▲ 몽촌토성 재현 모습

또한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은 고고학적 관점에서 지금의 풍납토성을 하남 위례성으로 간주하게 된다. 해방 후에도 그러한 관점은 계속됐다. 어쨌거나 백제의 초기 수도였던 위례성은 이제 더 이상 천안이 될 수 없었다. 한강 유역 어디여야만 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학설에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속수무책일 때 획기적인 관점에서 위례성을 찾으려는 이가 있었다. 바로 오늘날 친일 식민사관의 거두라고 비판받는 이병도(李丙燾)였다. 그는 일본학자들의 실증주의 방법론을 받아들였지만 무엇보다 정약용이 분석한 ‘하북 위례성’에 주목했다.

이병도는 오늘날 세검정 유역을 하북 위례성으로 비정하고 여러 전승과 기록을 종합해 광주고읍(古邑)과 남한산성이 조선시대에 임금의 피난처이기도 했다는 점을 들어 그곳을 하남 위례성으로 비정했다.


코미디 같은 ‘위례 선점’ 지자체 싸움

상황이 이렇게 되자 좀 더 대담한 학자가 등장했다. 역사학자 김영수는 온조가 처음 도읍한 (하북)위례성을 오늘의 임진강 남쪽 고양(高陽) 부근으로 추정했다. 그가 주목한 것은 파주를 지나는 임진강의 옛 이름이 적성강(積城江)이라는 사실과 위례성이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이라는 점이었다.

당시로서는 황당한 주장이었지만 결국 시간이 흐른 뒤 파주, 고양 일대에서 백제 초기 유물이 대거 발굴되면서 ‘위례성=파주, 고양설’은 단숨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다.

이렇게 영역이 넓어진 위례성은 1980년대 고고학의 발전과 서울시 개발에 따른 유적지 발굴이 겹치면서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 풍납토성, 이성산성 등의 지역이 백제의 초기 수도인 위례성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가장 흥미로운 주장은 하북 위례성은 현재의 중랑천 지역이었고 이곳에서 이동한 하남 위례성이 한나절 거리였을 거라는 차용걸 충북대 교수의 주장이었다.

   
▲ 백제인 의복 재현

특히 백제 고분들이 나오는 석촌동 고분군과 몽촌토성 거리가 2km내라는 점에서 차용걸 교수는 하북 위례성-하남 위례성-한산이 사실은 서로 아주 가까운 지역 내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이는 북방민족 백제가 한강을 통해 남하하는 루트로서 제시된 임진강 위례성론과는 또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역사서에 기록된 사건은 일종의 대이동이 아니라 관내 이동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의문이 든다. 온조왕이 우려했던 낙랑과 말갈의 침입은 어디서 온 것인가. 이 문제에 답하고자 초기 백제의 수도를 한반도가 아닌 만주지역으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

다시 우리는 궁금해진다. 그래서 위례성은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대답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다만 위례성의 ‘위례’라는 음가에 주목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이 말이 투르크-몽골어로 ‘나라’, ‘백성’을 뜻하는 ‘Ulus’의 음차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백제의 귀족계층은 고구려와 같은 언어를 썼으며 고구려의 언어에는 몽골어와 투르크어간에 천연성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니까 위례성은 온조 집단들이 모여서 사는 곳을 그들이 ‘울루스’라고 말하는 것을 ‘慰禮(위례)’로 적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백제 전체가 울루스이자 위례였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위례’ 선점 갈등도 사실 좀 코믹한 면이 있다.
 

한정석 편집위원·전 K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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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룡 2017-05-01 16:31:01
고구려 백제 신라는 다 중원에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야 모든 맥락이 맞아 떨어지요
1. 백제 동성왕은 북위의 기병이 침입하자 맞서 싸웠다고 하였습니다.
2. 백제의 백만 대군 때문에 근심하였다는 중국 역사서도 있고
3. 무엇보다 백제의 8대 성씨는 모두 중국에 있습니다.
4. 삼국사기에도 메뚜기 피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는 전부 나중에 교쳐 쓴 것이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지금도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 주장하는 사기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