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독립론의 쌍둥이’ 이승만과 마사리크
‘외교독립론의 쌍둥이’ 이승만과 마사리크
  • 미래한국
  • 승인 2015.01.3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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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은의 이승만 탐구] 이승만의 외교독립론④
 

우리는 흔히 넬슨 제독을 이순신 장군에 비교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을 비교할 사람이 있을까? 이승만이 그의 외교독립론의 학문적 논거가 되는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한 것이 1910년이고 그것이 프린스턴 대학에서 출판된 것이 1912년이다.

그리고 2년 후 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이때 체코를 탈출한 사람이 있었으니 프라하 대학 철학교수 마사리크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300년 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지였다.

이 나라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 이러한 나라로부터 긴 시간에 걸쳐 식민통치를 받은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은 거의 말살될 지경에 이르렀다. 언어, 종교, 토지를 빼앗겼다. 독립정신은 사라졌다. 이러한 환경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의 부활을 촉구하는 이가 나타났으니 그가 자로 마사리크 교수이다.

이승만과 마사리크는 거의 가망이 없는 상태에서 조국의 독립을 믿었다. 두 사람 공히 사형 선고를 목전에 둔 적이 있었으며 폭력과 무력을 혐오하는 평화주의자에 왕조의 해체를 주장하는 공화주의자가 됐다. 부인도 모두 외국인이었고 독립운동 과정에서 아들을 전염병으로 잃었다는 점마저 닮았다.


칸트의 영구평화사상 신봉한 책벌레들

▲ 미사리크

두 사람 모두 칸트의 영구평화사상을 신봉했다. 이승만은 감옥에서조차 잠시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을 정도로 독서광이었다. 마사리크 역시 책벌레였다.

모두 문필가로 여러 책을 썼다. 이승만이 ‘일본내막기’를 써서 일본제국의 도발과 몰락을 예측한 것을, 마사리크가 ‘자살론’을 발표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른바 국가자살의 길로 빠지는 것을 예측한 것과 나란히 둘 수 있다.

이승만이 한글보급과 국민계몽을 목적으로 한국 최초의 일간신문인 ‘매일신문’을 창간할 무렵, 마사리크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잡지 ‘학술진흥’을 창간했다.

이승만은 영어사전을 통째로 암기했고 마사리크는 라틴어사전을 통째로 외웠다. 두 사람 공히 모국어 이외에 4개 이상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당대의 최고 지성인이었다.

국내에 가족을 두고 해외에 거점을 둔 망명독립지사, 개혁가, 언론인, 박사, 교수, 학자, 대의원, 저술가, 외교가, 웅변가, 선전선동가, 평화주의자였다.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외교독립론을 우선적으로 주창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 모두 역시 학자-교수 출신인 평화주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의 정치사상에 크게 기대하고 그를 목표로 외교활동을 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 모두 성격이 급했다. 측근 정치를 선호했으며 정적에 대해 관대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독선적이라고 말하지만 마사리크 또한 고집불통의 독선적인 인물이다. 조건 없는 충성을 요구했다. 윌슨 역시 그 같은 면이 강했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인의 후손이라서 완고하다.” 윌슨은 비판에 매우 민감했으며 침지 못했다. 이승만과 마사리크가 독선이라고 비난받는 이유는 그들의 시야가 깊고 원대했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강제합병이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거쳐 영국, 프랑스, 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인 서곡이라고 마사리크는 인식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일본제국의 한국합병이 만주사변을 거쳐 중국 그리고 미국을 전쟁에 불러들인 전초라고 이승만은 예측한 바 있다.


공산주의의 핵심을 뚫어 보다

▲ 이승만

대부분의 한국 독립지사들이 사대주의 틀에 갇혀서 중국에 또는 이념에 사로 잡혀 새로 등장한 소비에트러시아에, 대부분의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지사들이 범슬라브주의에 현혹돼 제정러시아에 커다란 기대를 건 것은 당시로서는 자연스런 안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승만과 마사리크가 모두 이를 탈피 세계 대세를 정확하게 읽고 미국을 이용해 조국을 독립시키려는 외교정책을 밀고 나가 마침내 성공했다는 공통점은, 오늘날은 당연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아직 강대국이 아닌 미국의 국제적 지위를 고려하면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만큼 선견-선각이었다.

이승만은 줄기차게 중국, 러시아, 일본의 세력균형 완충장치로서 동아시아 평화에 있어서 한국의 독립이 필수적임을 외교선전을 통해 미국조야에 역설했고 마사리크 역시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력균형 완충지로서 유럽 평화에 있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역할을 미국에 강조했다.

마사리크는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최초의 조직적 저서를 쓴 사람답게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격렬한 반대자였고 이승만은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야심을 청년기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반소,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승만이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편승한 것은 마사리크가 미국의 개신교, 민주주의, 자본주의에 기댄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으로써 이승만은 조국의 존재를 그 역사에서 최초로 대륙세력이 아닌 해양세력에서 찾은 만큼, 마사리크 역시 시야를 넓혀 모국의 존재를 그 역사에서 처음으로 범슬라브주의가 아닌 전 유럽내지는 전 세계 속에서 인식했다.

이승만은 상해의 임시정부 본부와 별도로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서 미국을 상대해 외교활동을 했으며 마사리크 역시 파리 임시정부 본부와 별도로 런던사무소에서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 후에는 미국을 외교적으로 상대했다는 유사점도 눈길을 끈다.

마사리크와 이승만은 외교독립론의 쌍둥이다. 이승만이 1910년에 책으로 쓰고 마사리크가 1914년에 실천에 옮겼으니 이승만이 선구자인 셈이다. 이 점이 외교독립론에 있어서 이승만의 독창성이다.


김학은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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