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독립 공채표’
이승만의 ‘독립 공채표’
  • 미래한국
  • 승인 2015.02.17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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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외교독립론⑤]
 

무장독립에는 천문학적 재정이 소요된다. 러일전쟁의 승자 일본을 이기려면 일본처럼 런던시장에서 기채(起債)할 정도의 실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모집한 돈도 모자라 나중에는 자금난에 허덕였다. 전비가 모자라기는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외교독립을 주장했다. 양자 모두 돈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아무래도 후자가 훨씬 경제적이다. 체코-슬로바키아를 300년 만에 독립시킨 마사리크는 외교독립운동 4년 동안 약 100만 달러를 지출했다. 그는 “이처럼 저가의 혁명은 역사에 없을 것이다”라고 방점을 찍었다.

당시 미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의 수는 대체로 8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1902년 알렌이 시작한 하와이 노동이민을 1905년 일제가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이 인구 가지고는 어린이, 노인 할 것 없이 1인당 평균 100달러 이상 구매해야 100만 달러가 된다. 당시 하와이 노동자의 월급이 18달러에 불과했으니 1가구당 반 년 치 수입에 해당하고, 4인 가족이라면 2년 치에 해당한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취임하고 1919년 9월 1일 미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로 공채표를 발행했다. 이른바 ‘독립’ 공채표이다.

이것은 공채가 아니라 공채표이다. 영어로 표현하면 ‘certificate of indebtedness’ 또는 ‘certificate of bond’이다. 이승만이 발행한 것의 영문이름은 전자이다. 공채와 공채표는 무엇이 다른가?

당시 미국에는 청천법 ‘blue-sky statutes’라는 것이 있었다. 실체가 없는 단체 또는 부실한 단체가 마치 푸른 하늘만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해 투자자들의 손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법률의 눈에는 승인받지 못한 정부로서 법률적인 요건이 갖춰지지 않은 단체에 불과했다. 이러한 단체가 공채를 발행하는 것은 불법이다. 따라서 이승만은 공채를 발행하지 못하고 공채표를 발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거의 같은 시기인 1920년 1월 21일 아일랜드 정부의 드 바레라 대통령이 발행한 공채증명서의 예를 드는 것이 적절하다. 당시 아일랜드 정부는 미국 정부가 승인하지 않은 상태이었다. 드 바레라는 1919년 6월에 미국으로 모금하러 떠났다.

▲ 구미원부 발행 50달러 독립 공채표

1845년 이래 연속 4년 동안 아일랜드에는 감자 흉년이 들었다. 이때부터 1910년대까지 약 60년 동안 아일랜드를 떠난 인구가 500만 명이었다. 대부분 미국에 정착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운데에는 이미 상원의원, 주지사, 대법원판사 등이 배출됐다. 이것이 드 바레라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자산이다.

미국은 영국 편이었기에 드 바레라의 입국을 환영하지 않았고 그의 독립운동도 지원하지 않았다. 윌슨 대통령은 드 바레라의 접견도 거부했다. 1차 세계대전의 뒤치다꺼리인 파리 강화회담 참석도 거절했다.


아일랜드 보다 한발 앞선 이승만의 공채표 발행

처음에 드 바레라는 공채를 발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곧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영국계 미국인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보스턴의 출판업자는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이를 막으려 했다. “드 바레라가 공채를 판매하는 것은 사기죄에 해당한다.” 어떤 상원의원은 “미국과 평화관계에 있는 국가에 대항하는 군사적 임무”는 기소감이라고 주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반대하는 칼럼을 게재했다. 윌슨 대통령도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이 두 나라에 속하는 이른바 양다리 걸침(hyphenism)을 경계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 후일 미국 대통령이 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이다. 그는 해군 차관을 그만두고 본업인 변호사로 돌아갔다. 그는 공채발행은 위법이므로 이를 피해 공채표를 발행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조언했다.

공채표의 소지자는 장차 아일랜드가 독립해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으면 아일랜드 정부가 발행하는 공채와 교환할 수 있거나 현금으로 수령할 수 있다. 드 바레라는 이 합법적인 방법으로 500만 달러를 모금하는 데 성공했다.

 

이승만이 발행한 공채표는 영문, 한문, 국문으로 적혀 있다. 국문 문장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공채표.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이 증표를 가진 사람에게 금화 일백 원을 채부한 것을 증거함이니, 북미합중국 정부가 대한민국을 승인한 후 1개년 내로 대한 경성에서 대한정부 재무부 총장에게 이 표를 들이면 곧 합중국에서 통용하는 금화의 대등으로 보상하기를 대한민국의 명예와 신용으로 담보하노니, 이 보상 금액은 현금으로나 대한민국의 공채증권으로 대신하거나 대한민국 정부 재무부 총장의 편의를 따라 처리할 것이며, 이식은 소불하며 연에 백분지 4로 정하며 이상에 말한 대로 보상할 때까지는 매년 백분지 6의 이식으로 계산함. 대한민국 원년 9월 1일. 대한민국 집정관 총재 리승만. 특파주차구미위원장 김규식.>

이 공채표는 미국 관계 법률에 맞게 작성됐다. 드 바레라가 발행한 공채표도 이와 유사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승만이 발행한 공채표의 발행 날짜가 드 바레라가 발행한 것보다 4개월 앞섰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누구와 상의한 것일까? 이승만은 미국 대학에서 법을 공부했으므로 이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드 바레라는 수학 교수였다. 철학 교수였던 마사리크는 아예 미국에서 공채표를 발행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거부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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