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檀君)은 왜 중국 사서에 기록이 없을까
단군(檀君)은 왜 중국 사서에 기록이 없을까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3.16 18:4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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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석의 역사파일]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불렀는데 중국의 요(堯) 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 삼국유사-

고대사를 연구하는 국사학자들에게는 말 못할 속사정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니라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단군왕검에 대한 역사 기록이 우리에게만 있을 뿐 중국 25사(二十五史)라는 정사(正史)에는 그 이름이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중국의 정사뿐만 아니라 아예 중국의 어느 야사에도 단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점 때문에 식민지 조선의 역사학자들은 실증사관으로 무장한 일본 역사학계 앞에 무력함을 맛보아야만 했다.

단군왕검에 대한 기록의 원전(原典)은 물론 삼국유사다. 삼국유사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서 지은 역사서다.

일연은 고조선의 단군왕검의 존재가 위서(魏書)에 기록돼 있다고 했지만 현존하는 어떤 위서에도 그런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일연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착각을 한 것일까. 이 문제는 우리 역사학계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문제다.

더구나 정사(正史)로 대우하는 삼국사기에도 고조선의 단군왕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다만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에 대해 삼국사기는 ‘옛 선인왕검(仙人王儉)이 다스리던 곳’이라는 언급 정도로 넘어갔다. 그렇다면 이제 의혹은 보각국사 일연에게 모아진다.


삼국사기에도 없는 단군왕검

▲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1206~1289)

왜 일연은 기록에 없는 중국 사서에 단군의 존재를 언급했던 것일까. 일단 일연에 대해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 일연은 칭기즈칸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한 해에 태어났다.

그리고 몽골의 고려 침입기에 성장했다. 14세에 출가해 78세 때는 국사(國師)가 된 고승이었는데 그의 이름은 경상도 남해의 정림사(定林社) 주지로 부임하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이후 일연은 약 10년이 지나서 <중편조동오위(重篇曺洞五位)>라는 불교 서적을 저술하게 된다. 삼국유사는 그의 나이 76세에 쓰였다. 당시 고려 충렬왕은 일연에게 여러 자문을 구하던 상황이었다. 고려시대에 국사(國師)란 왕의 자문역을 하는 고승의 지위였다.

국사가 되기 위해서는 승과시험을 거쳐야 하는데 일연은 이 시험에서 장원을 했다. 그렇다면 일연의 학식과 지성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국사라는 지위를 가진 일연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지도 않은 단군이야기를 일부러 꾸며 인용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국사 일연이 인용했던 위서(魏書)로 시선을 돌려보자.


일연이 단군을 언급한 위서(魏書)의 정체는…

사실 위서(魏書)는 한 종류의 책이 아니다. 수많은 이름의 위서(魏書)가 있어서 고조선을 연구한 학자 윤내현은 ‘위서계열’이라고 불렀다. 이 가운데 국사 일연이 인용했다고 보는 위서(魏書)는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가 편찬한 <삼국지(三國志)>의 위서(魏書) 30권이다.

이 가운데 <동이전>은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에 포함된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등 이른바 ‘동이(東夷)’에 관한 기록이다. 물론 이 기록에도 단군의 존재나 언급이 없다. 학자들은 이 책에서 누락된 정본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추정에 반론을 제기한 학자가 있었다. 김성수 청주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AD 289년 진수가 편찬한 위서에 지금으로부터 2000년전 단군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면 고조선은 BC 1711년이 건국 시기가 된다는 점을 포착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단군의 개국이 요(嶢)임금과 같은 시기, 즉 BC 2340년과는 너무나 많은 시간적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일연이 인용했던 위서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일연은 위서(魏書)와 위지(魏誌)를 정확하게 구별해서 삼국유사에 기록을 남겼다.

   
▲ 고조선의 유물, 다뉴세문경(잔무늬거울), 청동유물

다시 말해 그는 위서와 위지를 혼동하지 않고 구별해 썼는데 이 점으로부터 김성수 교수는 일연이 인용했던 위서는 중국의 위서가 아닌 다른 나라의 위서(魏書)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다소 얼떨떨할 것이다. 다른 나라의 위서(魏書)라니… 김성수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조선(古朝鮮)을 왕검조선(王儉朝鮮)이라고 병기하고 나중에 위만조선을 따로 구분했다. 그런데 일연은 이상하게도 중국사서에 등장하는 衛滿의 이름을 魏滿으로 적었다.

한차례도 아니고 일관적으로 그렇게 표현했던 일연은 衛滿과 魏滿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학승(學僧)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일까.

이 수수께끼의 열쇠는 위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에게 있다. 그는 사기 조선전에서 위만에 대해 ‘朝鮮王滿, 燕人’(조선의 왕 滿은 연나라 사람이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씨를 아예 기록하지도 않은 것이다.

이후 위만의 성이 위(衛)라고 등장한 것은 후한서였다. 그렇다면 일연은 이 사기와 후한서를 참고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衛滿을 魏滿으로 일관되게 썼던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 김성수 교수의 의문이었다. 이로부터 그는 대담한 가설을 하나 제시한다.즉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서 참고했던 위서(魏書)는 중국의 사서가 아니라 위만조선(魏滿朝鮮)의 역사서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위만이 스스로 조선의 개국자 단군으로 칭했을 가능성

이러한 가설은 우리에게 고조선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위만의 정체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조선의 변방 지킴이에서 쿠데타를 통해 고조선의 왕이 됐던 그가 국호 조선(朝鮮)의 사용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연나라를 떠나 고조선에 들어갈 때 상투를 틀고 호복을 입었다는 점으로부터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 아니라 고조선 변방계열의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연국(燕國) 고조선 교포’라는 이야기다. 그런 위만조선은 강대했다.

사마천의 사기와 기타 다른 중국의 역사서는 고조선의 힘이 강대해서 ‘연(燕)과 대등할 정도’였으며 심지어는 연(燕)과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연을 치려할 정도로 ‘교만했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정도의 강국 고조선이 자신의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았을 리 없다. 더구나 위만의 정권교체로부터 고조선 백성들과 그 연합세력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알리는 작업도 필요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위만의 단군(檀君)이 등장했다는 가정은 정말로 황당한 것일까.

   
 

이제까지 우리는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을 별 개의 존재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단군조선은 어쩌면 위만조선의 다른 이름이거나 위만세력의 역사적 기억을 그들이 정복한 왕조 고조선과 결합시키려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위만이 스스로를 조선의 새로운 개국자 단군(檀君)으로 칭했을 가능성은 없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면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의 전승도 이해가 된다.

결국 위만세력과 손잡은 곰 부족은 단군 위만과 하나가 됐지만 호랑이 부족은 위만세력과 하나가 되지 못하고 떠난 것이다. 그 호랑이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위만세력을 거부한 고조선의 이전 기자(箕子)세력들이 아닐까.

그들이 새로이 정착한 곳은 한반도 이남이었다. 마한(馬韓)의 세력이 그들이었고 만주에서는 곰 숭배사상이, 한반도에서는 곰보다 호랑이 숭배사상이 압도적인 이유도 어쩌면 위만의 스토리로부터 설명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만은 도대체 누구였던가. 앞으로 역사학계가 풀어야 할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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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2017-09-15 09:04:49
요순시대에 황실에서 간행된 산해경에 단군조선에 관해 두 곳이나 정확하게 밝히고 있고 후한서 동이전에 자세하게 기록되었으며 유교경전인 상서 요순의 전기에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데
"중국의 정사뿐만 아니라 아예 중국의 어느 야사에도 단군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글쓴이는 역사공부를 엉터리로 했네요.

重傳/이희빈 2015-03-30 17:44:14
역사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동안 이 땅의 역사가 끊어져서 맥을 이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땅에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배우고 가르친 무리들이 오 죽 하겠습니까?
또다시 그러한 무리들에게 수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 민족들은 시급하게 사법 정화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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