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폭침과 함께 국군도 침몰했다
천안함 폭침과 함께 국군도 침몰했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3.18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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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천안함 폭침 5주년, 반성과 교훈

정신만 똑바로 차렸다면 천안함 비극 막을 수 있었다
참혹한 경계·작전 실패, 무너진 보고라인, 자신들의 실수와 잘못 은폐, 보고서 조작…
청와대의 이상한 행보: “어뢰 피격으로 몰고 가지 마라”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이 5·24 조치를 발표하고도 남북정상회담,
G20 정상회의 등을 이유로 5·24 조치의 핵심이었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스스로 철회


3월 26일은 천안함 폭침사건이 발생한 지 5주년 되는 날이다. 그동안 범국민적 추모 열기, 숱한 논란과 의혹, 문제 제기의 파고를 넘어 이제 천안함은 망각의 법칙이 작동되어 잊혀져가고 있다.

국민들은 천안함 순국(殉國) 장병들에 대해 진심으로 추모했고, 국가도 정중한 예우를 갖춰 그들의 순국을 기렸다. 이제는 천안함 폭침으로부터 반성과 교훈을 도출하여 다시는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 시작되어야 할 때다.

천안함 폭침 도발사건은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1200톤 급 초계함이 불과 130~150톤에 불과한 초소형 잠수정이 야밤에 발사한 어뢰 한 방에 두 동강이 나 격침됨으로써 40명의 승조원이 전사(戰死)하고 6명이 실종된 세계 전사(戰史)상 치욕스러운 패전이다.

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어뢰 피격과 사후 처리 과정에서 우리 군(軍)이 노출한 참혹한 경계 및 작전의 실패, 무너진 보고라인, 자신들의 실수를 은폐하기 위한 거짓말과 변명과 허위보고, 적나라한 각 군 간의 이기주의였다. 결국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온갖 유언비어를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패학이란 학문이 있다.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 도쿄대 교수가 원조인 이 학문은 실패로부터 반성과 교훈을 도출하여 성공의 길로 나가는 길을 제시하는 방법론이다.

이제 우리 군이 어쩌다가 ‘거지 군대’나 다름없는 북한에게 참혹한 패전을 당했는지,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차분한 마음으로 복기하고, 그로부터 반성과 교훈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 하여 개인 이력을 밝히자면 기자는 해군 수병 205기 출신으로 1980년 우리 해군의 주력 전투함정이었던 충무함(구축함·DD-911)의 전탐수병으로서 욕지도 간첩선 격침작전에 참여했으며, 동해 저진 앞바다에서 북한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수중물체와 두 차례나 실전 대치를 한 경험이 있다. 기자에겐 후배 되는 천안함 순국 장병들에게 다시 한 번 추모의 마음을 전하며 이 글을 쓴다.

#D-136일 : 대청해전

천안함 폭침은 서해 NLL 부근에서 그 전에 벌어진 1·2차 연평해전, 대청해전과 날줄 씨줄로 엮여 있다. 1차 연평해전(1999년 6월 15일)은 우리 측 승리, 2차 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은 선제 기습에 성공한 북한 측의 승리였다.

천안함 도발 4개월 전에 벌어진 대청해전(2009년 11월 10일)은 우리 측 피해는 전무한 상황에서 북한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한국 해군의 완승이었다.

충격을 받은 북한은 대청해전 사흘 후 통지문을 보내 “무자비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후 김정일은 인민군 총참모장 김격식을 해주를 관할하는 4군단장으로 임명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군 내 서열 1위에 해당하는 합참의장을 군단장으로 보낸 셈이니, 지독하게 파격적인 인사였다.

김격식은 해안포를 100문 이상 증강하고 장사정포를 다량 배치했으며 잠수함과 잠수정, 대공(對空)미사일, 인간 어뢰 부대, 공기부양정 부대 등 대대적인 전력 증강에 나섰다.

이로써 서해 NLL 부근에서 우리 군이 북한에 비해 전력의 우위를 보인 것은 수상함뿐이었고, 수중전력(잠수정, 잠수함)이나 지상전력(해안포, 지대함 미사일) 등은 절대 열세 상황이 되었다.

북한의 전력증강에 맞서 우리 군은 ‘NLL 대비계획’을 새로 작성하고 2009년 11월 24일부터 접적(接敵) 수역인 백령도 서남방에 초계함이나 구축함 같은 대형 함정을 전진 배치했다.

후에 해군은 천안함에 장착된 음파탐지기(소나)는 우리 해군이 보유한 소나 중 가장 노후한 것이라서 잠수함(정) 소리만 식별·탐지 가능할 뿐, 어뢰 소음 탐지 기능은 없다고 밝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잠수함(정) 공격이 예상되는 시기에 이를 탐지하는 기능을 갖추지 못한 초계함을 접적 수역 경비에 투입한 셈이니, 이것은 치명적인 작전상의 실수였다.

NLL 부근의 전력 증강이 끝나자 김정일은 자신의 후계자 김정은 체제의 확립을 위해 ‘통 큰 도발’을 계획했다. 말하자면 천안함에 대한 북한의 어뢰 공격은 김정은 후계 세습을 위한 제물이자, 대청해전의 패전에 대한 복수극이었던 셈이다.

당시 상황을 정밀하게 복기해 보면 천안함 폭침은 우리 군이 정신만 똑바로 차렸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주한미군 측이 2009년 11월 대청해전 이후 지속적으로 우리 합참에 NLL 부근에서 북한이 잠수함 등을 이용한 비대칭 도발 위험을 경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군 수뇌부 중 누구도 이 경고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군이 특히 그랬다.

   
▲ 1998년 6월 속초 앞바다에서 꽁치 그물에 걸려 우리 군이 노획한 북한 유고급 잠수정. 이 잠수정의 저열한 성능을 확인한 우리 군은 북 잠수정의 작정 능력을 우습게 보기 시작했다.

1998년 6월 속초 앞바다에서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이 침투 도중 꽁치 어망에 걸려 우리 측에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획한 북한 잠수정의 고철이나 다름없는 퇴물 장비와 저열한 성능을 확인한 해군은 북한 잠수정을 ‘떠다니는 깡통’이라고 얕잡아보기 시작했다.

“이런 고물 잠수정이 어떻게 물살이 거세고 시계도 탁한 데다가 수심도 얕은 백령도 근해에서 작전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해군은 이런 안이한 생각에 젖어 총체적으로 정신무장이 해이해졌다.

대청해전 이후 예상되는 북한의 보복 도발에 맞서기 위해 우리 군은 경계 강화 조치를 취했다. 시간이 흘러도 도발 징후가 보이지 않자 군은 2010년 2월 18일 경계 강화 조치를 해제했다. 그리고 한 달 후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D-7일 : 해군참모총장 이취임식장

천안함 사건 1주일 전인 2010년 3월 19일. 정옥근 해군참모총장이 물러나고 김성찬 대장이 새 총장에 취임했다. 이날 김태영 국방장관을 비롯한 국방부와 각 군 고위인사, 예비역 장성들은 계룡대에서 열린 해군참모총장 이취임식에 참석한 후 오찬을 함께 했다.

이날 오찬장에서 전(前) 2함대 사령관으로 1차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박정성 예비역 해군 제독은 김태영 장관을 만나 우리 군의 ‘NLL 대비계획’이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며 “북한이 잠수정을 이용해 우리 함정에 대한 공격을 할 가능성이 농후하니 백령도 근해에 북상해 있는 초계함과 구축함을 남쪽 수역으로 이동시켜 달라”고 수 차 당부했다. 본지가 단독 인터뷰 한 박정성 제독의 말이다.

“제가 김태영 장관과 함께 근무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분을 개인적으로 잘 압니다. 그날 테이블에서 주스를 마시면서 김 장관에게 백령도 인근은 북한의 잠수정과 해안포, 지대함 미사일, 수상함이라는 네 가지 위협이 중첩되어 있는 대단히 위험한 수역이다.

이런 곳에 초계함 같은 덩치 큰 배를 백령도에 바짝 붙여서 경비 작전을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만에 하나 북의 소형 잠수정이 불시에 우리 함정을 어뢰 공격하고 도주할 위험이 있으니 초계함을 빼내고 고속정을 투입하는 게 정석이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김 장관은 박 제독의 설명을 귀담아 듣는 표정이 아니었다고 한다. 박 제독은 “김 장관이 그때 내 건의를 수용해서 실천에 옮겼다면 천안함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그때까지 우리 군, 특히 해군의 머릿속에는 “동해는 대잠전(對潛戰), 서해는 NLL 사수(死守)”라는 도식화된 철학이 지배했다. 서해는 수심이 얕고 해저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북한의 잠수함(잠수정) 작전은 불가능하니 수상함을 동원해 해상 도발에 대비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게다가 대청해전에서 우리 군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직후라서 북한의 어떤 도발도 막아낼 자신이 있다고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북한은 1996년부터 서해에서 잠수함(정) 작전을 은밀히 준비해 왔다. 그 계기는 이렇다. 1996년 북한의 유고급 잠수정 한 척이 우리 영해로 침투했다.

그런데 잠수정이 부상했다가 잠항하는 과정에서 주수(注水)밸브(잠항이나 부상할 때 물을 담거나 배수 때 사용하는 밸브)가 고장이 났다. 이 잠수정은 잠항이 불가능해지자 대담하게도 수면 위로 부상한 상태로 우리 군의 해안 레이더와 감시망을 뚫고 모항으로 도주하는 데 성공했다.

이 놀라운 일을 성공시킨 잠수정 정장(艇長)은 소좌에서 대좌로 2계급 특진과 함께 영웅 칭호가 부여되었다. 북한 군부는 동해에서 성공한 잠수정 작전을 서해에서도 실행하기 위해 잠수정들을 기차에 실어 서해로 이동시켰다.

이때부터 북한군 서해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남포와 비파곶, 해주, 사곶 8전대 기지에서 잠수함과 잠수정이 무시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은 우리 군 정보당국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준비를 하지 않았고, 방심했을 뿐이다. 천안함 사건 직전에도 우리 군 정보 파트는 북한이 잠수함을 이용하여 함정 공격 연습을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고, 합참은 2010년 1월 북한의 잠수함 공격에 대비하여 함정의 진행 방향을 수시로 바꾸는 등 상황별 대응 조치를 지시했다.

▲ 천안함 사건을 추적한 이종헌 씨의 '스모킹 건'

사건 당시 청와대 국방비서관실에서 천안함 TF를 담당했던 이종헌 씨의 저서 ‘스모킹 건(Smoking Gun)’에 의하면 천안함 사건 직전인 2010년 3월 23일부터 북한 서해 기지의 잠수함(정)들이 거의 동시에 움직여 상어급 2척은 3월 23일부터 28일까지, 연어급은 3월 24일부터 31일까지 감쪽같이 우리의 정보망에서 사라져버렸다.

천안함 피격 당일인 3월 26일 해군 2함대에는 ‘또 다른 공작 예비 모선과 연어급 잠수정 1척이 기지를 이탈하여 미식별되고 있다’는 정보가 전파되었다. 바로 이 잠수정이 백령도로 침투하여 천안함을 공격한 것이다.

우리 군 수뇌부는 북한이 잠수함(정)을 이용한 도발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뢰 소리를 탐지할 수 없는 구형 소나를 장착한 천안함을 전진 배치했다. 이종헌 씨의 ‘스모킹 건’에는 당시 우리 군이 연어급 잠수정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안함을 공격한 연어급 잠수정이 사라졌지만, 시운전 상태이고 아직 전력화가 안 돼 공격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작전 파트는 이런 다양한 미식별 첩보와 잠수함정 도발 가능성 판단에 대해 실질적이거나 핵심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76쪽)

#D-3시간 : 유성 자운대 교육사령부

천안함 폭침 사건 발생 6시간 전인 3월 26일, 유성 인근의 자운대에 위치한 육군 교육사령부에서는 이상의 합참의장 주관 하에 군정과 군령을 맡은 군 최고 수뇌부 150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우리 군 최초로 ‘합동성 강화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서 육·해·공군의 통합과 합동성을 강조하는 합참의 의견에 대해 각 군 참모총장들은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합참 의견대로 육·해·공군을 통합한 합동군 체제로 전환하면 기득권을 쥔 육군이 해·공군을 지휘하겠다는 뜻 아닌가. 이런 생각 때문에 참석했던 해·공군 장성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불편한 심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참석자들 중 최고위 간부 20여 명이 유성의 육군휴양소(계룡스파텔)로 자리를 옮겼다. 그들은 만찬을 하며 와인과 국산 양주를 마셨고, 이상의 합참의장은 식사를 끝내고 밤 9시 27분 서대전역에서 서울행 KTX에 올랐다.

▲ 천안함 사건을 추적한 김종대 씨의 '서해전쟁'

이때 만찬장에서 이 의장의 음주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 의장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2010년 7월호)에서 양주 10여 잔을 마신 사실은 시인했으나, 술에 취해 사실상 지휘 책임을 포기했다는 언론보도에 대해서는 강력 부인했다.

그러나 당시 언론보도와 여러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 의장은 KTX에 오를 때부터 상당히 취해 있었던 것 같다. 서울에 도착한 이 의장은 잠시 합참 지휘통제실에 들렀다가 보좌관의 부축을 받으며 의장 집무실로 복귀했는데, 군사전문가 김종대 씨가 쓴 ‘서해대전’에는 당시 정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의자에 앉혀진 그(이상의 합참의장)는 스르르 잠이 들면서 의자에서 넘어져 카펫이 깔린 바닥에 널브러졌다. 의장실에 설치된 CCTV가 이를 녹화하고 있었다. 어두운 방의 바닥에 있는 검은 물체, 바로 합참의장이었다.

계룡호텔 만찬을 끝내고 서대전역 인근 식당에서 동창들과 만나 또 한 잔 한 것이 문제였다. 수행하던 부관과 보좌관들도 옆방에서 마찬가지로 음주를 했다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D+2시간 : 무너진 보고 체계

술 취한 이상의 의장이 서울행 KTX에 오르기 5분 전인 밤 9시 22분, 천안함은 백령도 서남쪽 1.8km까지 접근하여 시속 2~3노트로 서행하다가 매복하고 있던 북한의 연어급 잠수정으로 추정되는 수중 물체가 발사한 어뢰에 격침되었다.

국방부 대변인의 발표에 의하면 천안함이 백령도에 이처럼 가까이 접근한 이유는 그날 마침 파도가 높은데다가 적의 동굴진지에 있는 해안포, 그리고 사정거리 80~90km의 지대함 미사일을 피해 음영(陰影·그늘)구역으로 기동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백령도를 은폐·엄폐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천안함은 좁은 접적 수역에서 작전상 규정 속도를 무시한 채 거의 붙박이처럼 저속으로 기동하다가 피격 당했고, 피격 직전까지 어떤 위기 징후도 느끼지 못했다.

이종헌 씨의 저서 ‘스모킹 건’에 의하면 피격 당일 오후 2시부터 천안함 승조원 식당에서는 골든벨 퀴즈 대회가 열렸다. 각 파트별로 5명씩 선발하여 휴가 포상을 걸고 문제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김연아의 동계올림픽 갈라쇼 TV 중계가 예고되어 있었다.

잠수함(정)이란 수중으로 은밀하게 침투하여 어뢰로 적함을 격침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고도의 무기체계다. 따라서 저성능 소나를 장착한 천안함이 불과 130~150톤에 불과한 소형 잠수정을 소나로 탐지하여 이를 방어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어뢰에 피격 격침된 것은 불가항력이라고 할 수도 있다.

   
▲ 처참하게 파괴된 천안함 함미 절단면. 우리 군이 정신만 차렸다면 천안함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사건 당일은 한미 연합 키 리졸브 훈련이 벌어져 북한 인민군에 비상이 걸려 고도의 경계망을 펴고 있는 상황이었고, 4개월 전 대청해전의 복수를 위해 “무자비한 군사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예고한 상황이었다.

천안함 백서에 들어 있는 천안함 생존 음탐사 김○○ 하사의 증언에 의하면 “음탐사 정위치에서 음탐기로 들어오는 신호음을 청취하고 있었으나 어뢰 소음이나 잠수함으로 의심되는 신호음은 없었음. 따라서 처음 사고 시 생각난 것은 상선과의 충돌로 생각했음”이라고 되어 있다.

잠수정은 먼 거리에서 은밀히 움직였으니 그 소리를 청취하거나 식별하는 것은 어려웠다고 치자. 그렇다면 잠수정이 어뢰를 발사하려면 발사관 뚜껑을 열고 해수를 채운 다음 고압 압축공기를 불어넣어 어뢰를 발사관 밖으로 밀어내는 과정에서 큰 소음이 발생한다.

또 발사된 어뢰는 뒤꽁무니에 달린 프로펠러로 추진되어 40~50노트의 고속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소음이 발생한다. 아무리 오래 된 고물 깡통 소나라 해도 어뢰가 천안함 가까이 접근했을 때는 그 소음을 충분히 들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천안함이 정상 상태였다면 가까이 다가온 어뢰 소리를 탐지했어야 ‘정상’이다.

사건 발생 후 해군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천안함 소나는 어뢰 소음을 식별할 수 없는 고물 구형”이라고 밝혔다. 왜 그랬을까? 소나가 어뢰 소음을 탐지할 수 없는 고물 구형이어야만 경계근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면탈할 수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천안함 소나가 그렇게 고물 깡통 구형이었다면 만사를 제치고 소나를 성능 개량하는 등 특단의 조치를 취했어야 정상이다.

불행하게도 우리 해군은 천안함과 동일한 소나를 탑재한 함정을 지금도 정상적으로 운용하고 있다. 천안함 소나에 대한 해군의 설명이 맞는다면, 우리의 해군 초계함 승조원들은 언제 또 다시 적 잠수정의 어뢰에 맞아죽을지 모르는 비참한 상태에서 하늘에 운을 맡긴 채 경비작전에 임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 천안함 합동조사단장을 맡았던 윤종성 예비역 장군은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음탐사가 깜박 졸았는지, 아니면 당직 중 잠깐 자리를 비웠는지 등의 여부는 규명하지 못했다”면서 “솔직히 말하면 해군이 서해에서 잠수함 작전은 어려울 것이라는 지배적인 생각 때문에 대비 태세를 소홀히 하다가 당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어뢰 피격 자체는 불가항력이었다고 치자. 군은 보고가 생명이다. 아무리 사소한 사건사고라도 발생 즉시 지체 없이 상부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군의 기본 생리다.

그런데 천안함 피격 29분 후인 오후 9시48분, 합참에 근무하는 한 해군 중령이 합참의장과 국방부 장관 등 지휘라인에는 정식 보고도 안 된 상황에서 청와대에 파견 근무 중이던 해군 상관인 김모 행정관(해군 대령)에게 휴대전화로 “선배님, 백령도 근처에서 천안함이 침수되고 있습니다. 선배님도 확인하십시오”라며 사건 소식을 먼저 알렸다.

김모 해군 대령은 즉시 휴대폰으로 김병기 국방비서관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고, 김병기 비서관은 김성환 외교안보수석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비상이 걸린 청와대는 합참으로 확인 전화를 거는 소동이 벌어졌다.

공식 보고절차가 아닌, 해군의 인간관계에 의한 보고채널이 가동되어 합참의장과 국방부 장관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청와대에 먼저 상황이 전파된 것이다.

반면에 합참 지휘통제반장은 밤 9시45분 2함대사령부로부터 “원인 미상의 선저 파공으로 침수 중”이라는 상황 보고를 접수했다. 이들은 더 정확한 상황 파악을 위해 지체하다가 합참의장에게는 사건 발생 49분 후인 밤 10시11분, 국방부 장관에게는 그보다 3분 더 늦은 10시14분에야 휴대폰으로 최초 보고했다.

문제는 또 있다. 사건 발생한 직후인 밤 10시 인천해양경찰청에 갑(甲)호 비상령이 발령되었고, 전국 경찰에는 을(乙)호 비상령이 발동되었다. 그런데 합동작전 지휘부서인 합참은 허둥지둥하다가 사건 발생 6시간여가 지난 3월 27일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군 대비태세 강화’ 지침을 전 군에 하달했다.

청와대가 합참에 전화를 걸어 천안함 침몰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합참의 작전본부나 지휘통제실은 청와대에 어떠한 보고도 하지 않았다. 청와대의 상황 확인 요청을 받고서야 합참이 거꾸로 움직인 꼴이 되었다.

만약 문제의 해군 중령이 청와대의 김모 해군 대령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면 청와대는 사건 발생 한 시간이 넘도록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천안함으로부터 “어뢰 피격으로 판단된다”는 보고를 받고도 해군 2함대사령부는 “설마 백령도 해역에서 적 잠수함이 어뢰를 쏠 수 있겠느냐”고 예단하고 이 사실을 합참, 해군작전사령부 등 상급부대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고 발생 초기 군과 청와대는 좌초, 침몰, 파공, 침수, 어뢰 피격 가능성을 놓고 허둥지둥하다가 ‘파공으로 인한 침몰’로 대응 방향을 잡았다.

2함대사령부의 보고 누락 행위는 초동 단계에서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심각한 장애요인이 되었고, 이것이 후에 걷잡을 수 없는 유언비어를 양산하는 원인 제공을 했다.

만약 사고 발생 초기에 ‘적 어뢰에 의한 피격’이라는 사실이 군 보고라인을 통해 확실하게 보고됐다면 더 많은 대잠(對潛) 전력이 북상하여 어뢰 공격을 하고 도망치는 잠수정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강력한 대잠 포위망을 펼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건 발생 후 보고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뿐만 아니라 구조 과정, 사고 수습 과정에서도 합참과 해군 사이의 책임 떠넘기기, 사건 발생 시각에 대한 네 차례의 수정과 번복, 부정확한 폭침 장소, 군에 불리한 정보의 은폐와 변명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졌다.

도저히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되자 청와대는 행정관들을 2인 1조로 편성하여 국방부에서 진행되는 모든 회의에 참석시켜 합참, 해군, 국방부 주장 중 누구 말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정치에 오염된 軍, 초기 보고서 변조 의혹에 휩싸인 합참

천안함 사건 발생 당시 합참의 핵심 지휘라인은 이상의 합참의장, 육군 대장 황중선 합동작전본부장(육군 중장), 김학주 작전참모부장(육군 소장), 양철호 작전처장(육군 준장), 박철희 합동작전과장(박철희 대령)이었다.

이들 중 합동작전 유경험자는 황중선 중장이 유일했다. 이상의 의장을 비롯하여 나머지 네 사람은 합동작전 경험이 거의 없는 육사 출신이었다. 합동작전에 익숙지 않은 육군 야전 출신들이 해상에서 벌어진 사건을 작전지휘하다 보니 무수한 시행착오와 실수가 연발되었다.

윤종성 예비역 장군은 “합참에서 합동작전 전문가들이 씨가 마르다시피 한 이유는 군 인사의 정치화 때문”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를 비롯하여 국방 장관의 주요 핵심참모, 군의 요직에 근무했던 합동작전 전문가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반(反) MB 리스트’라는 괴문서에 의해 거의 대부분이 진급에서 탈락되거나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그 자리를 비전문가들이 차지한 결과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이상의 합참의장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2010년 7월호)에서 “북한의 잠수함 공격 도발이 예상되니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을 예하부대에 하달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청해전 이후 합참은 수상함에서 승산이 없어 잠수함(정)으로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대비했죠. 솔직히 군은 서북해역이 수심이 낮고 조류가 빠르고 탁류(濁流)라 잠수함 기동을 간과한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잠수함(정) 공격을 대비한 전술토의를 부쳤습니다. (2009년) 11월 1차 토의를 거쳐, 12월 말일 2차 전술토의로 확정해 (2010년) 1월 20일 예하부대에 하달했습니다. 키 리졸브 훈련에 합참이 매달리다 보니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고심 끝에 4월 중 검열을 하기로 했죠. 그래야 예하부대가 준비를 하니까요. 아이로니컬하게도 천안함이 기습당하기 전날인 3월 25일, 합참 전비태세검열실은 검열을 위한 준비회의를 열었습니다. 만약 예하부대가 지침대로 준비를 제대로 수행했더라면, 천안함을 공격한 적 잠수함을 오히려 잡는 전과(戰果)를 올렸을 겁니다.”

그러나 이상의 의장의 이 발언은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들이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당시 합참의 전비태세검열실 차장으로 근무하던 오모 준장은 천안함 사건 발생 직후 휘하의 장교들과 함께 검열을 한 후 ‘천안함 사고조사 보고서’를 작성하여 이상의 합참의장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오모 준장이 의장실에 다녀온 직후 무슨 까닭인지 최초 작성된 보고서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부 인터넷 언론은 신상철 씨의 저서 ‘천안함은 좌초입니다’라는 책 내용을 근거로 “오모 준장이 최초 보고서 중 40여 곳을 수정, 혹은 조작했으며 이상의 합참의장이 사고조사 보고서의 조작을 지시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자신이 진급할 것으로 굳게 믿고 있던 오모 준장은 진급에서 누락되어 2010년 말 한미연합사 화력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자신에게 보고서 내용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이상의 전 합참의장이 자신의 고향(경남 사천)에서 19대 국회의원 출마를 발표하자 그는 진실을 밝히는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최초로 밝혀낸 군사평론가 김종대 씨(‘디펜스21플러스’ 편집장)는 “오 장군이 집필한 내용은 A4 용지로 300매 이상 되는 방대한 기록이었는데, 이 원고에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자료와 함께 군 수뇌부의 비겁한 행태, 사실관계를 조작한 내용의 진실 등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런데 오모 장군이 진실을 폭로하는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밖으로 새나가 어느날 군 검찰 수사관들이 오모 장군의 집무실과 자택을 덮쳤다. 군 검찰은 오모 장군이 집필한 원고와 자료, 노트북 등을 압수하고 2주간에 걸쳐 공무상 기밀누설 혐의로 조사를 했다.

그는 조사를 받은 후 군복을 벗었고, 책 출간과 함께 천안함 사고조사 보고서를 조작한 사실에 대해 양심선언을 하려던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김종대 씨는 여러 경로를 통해 오모 장군이 집필한 원고 내용을 직접 봤다는 사람들을 만나 그 내용을 취재했다. 그 결과 이상의 합참의장이 월간조선에 인터뷰했던 ‘북한의 잠수함 공격을 예상하고 예하부대에 미리 대잠 준비태세 확립을 지시했으며, 검열까지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2함대가 이를 이행하지 않아 천안함 사건이 벌어졌다’는 부분이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기자는 오모 장군을 만나기 위해 그와 여러 차례 통화와 문자로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그는 “지금 관련 내용을 원고로 쓰고 있는데, 여러 가지 사정 상 언론 인터뷰에는 응할 수 없다”면서 완곡히 거절했다.

#국군 치욕의 날

2010년 4월 29일 평택 2함대사령부에서 천안함 46용사 영결식이 엄수되었다. 이날 김성찬 해군참모총장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준 세력들이 그 누구든지 우리는 결코 좌시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내 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라고 추도사를 낭독했다. 이 추도사는 청와대와의 조율을 거쳐 작성된 것이었다.

이상의 합참의장은 5월 10일 국방부 대강당에서 합참 소속 간부 6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특별 정신교육에서 “이번 천안함 사건의 가장 큰 책임은 (합참) 의장에게 있다.

우리 군이 대청해전이라는 조그마한 승리에 도취해 적의 전술적 변화를 미처 감지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영해에서 적대세력의 기습에 천안함이 피습당한 날을 국군 치욕의 날로 인식하고 통렬히 반성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 백령도 천안함 46용사 위령탑 동판에 새겨진 희생자 얼굴. 이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천안함 폭침사건 발생 2개월 후인 5월 4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군(全軍) 주요지휘관회의를 주재했다. 군 통수권자가 군 주요지휘관회의를 직접 주재한 것은 건군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날 이 대통령은 “우리 군이 매너리즘에 빠졌다”면서 군의 경계태세와 정신자세에 문제가 심각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천안함이 피격당한 3월 26일을 ‘국군 치욕의 날’이라고 선언했다. 다음날 중앙일보는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했던 대통령의 비공개 발언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농민들이 자식같이 기르는 소나 돼지가 죽어도 나에게 10~20분이면 보고가 되는데, 우리 장병들이 탄 함정이 침몰했는데 (합참의장에게 49분 만에 보고될 정도로)보고가 늦었다니 말이 되는 일이냐. 세계 곳곳에 진출해 있는 대기업도 어느 한 곳에서 사고가 나면 10분 안에 총수에게 보고된다.”

사건 4개월 후인 7월 14일, 김태영 장관 주재 하에 천안함 소속부대인 해군 2함대사령부에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이날 김 장관은 “천안함 사태로 대군(對軍) 신뢰도는 급락했고, 군 내부적으로는 자괴감과 제대별 계층 간 불협화음이 드러나는 등 지금 우리 군은 총체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질타했다.

감사원은 2010년 5월 3일부터 28일까지 30명의 감사인력을 투입하여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해군작전사령부 등 8개 기관을 대상으로 감사를 실시하고 6월 10일 감사 결과를 발표했다. 감사원은 천안함 사건 과정에서 대비태세 소홀과 허위늑장 보고, 부적절한 군사기밀 관리 등 총체적 부실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특히 합참의장과 국방부 장관에게 뒤늦게 보고하고, 사건 발생 시간도 9시15분을 9시45분으로 조작했으며, 국방부는 소집하지도 않은 위기관리반을 소집했다고 상부에 거짓 보고한 사실 등을 지적했다.

감사원은 총체적 경계 및 작전, 보고 부실 등의 책임을 물어 이상의 합참의장을 비롯하여 해군작전사령관, 합참 정보작전본부장, 공군작전사령관, 해군 2함대사령관, 국방정책실장 등 장성 13명과 영관급 장교 10명, 고위공무원 2명 등 25명에 대한 징계를 요구했다.

이러한 감사 결과 발표에 대해 군은 강력 반발했다. 이상의 합참의장은 “감사원이 군사작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군사전문가 집단의 의견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고 질타했다.

이런 반발에 대해 박시종 감사원 행정안보감사국장은 기자회견에서 “이상의 의장이 징계 대상이 된 것은 지휘 책임과 개인적 책임이 같이 있다”고 말했다. 합참의장의 개인 책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묘한 여운을 남겼다.

결국 이상의 의장 등 2명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총괄적 책임을 지고 전역 조치되었고, 6월 23일 장성 인사에서 장성 5명은 전보 조치되었다.

그 해 11월에 열린 군 징계위원회는 1명에게 정직 3개월, 장성 5명에게 감봉 및 견책, 4명의 영관급 장교에겐 근신, 견책 등 솜방망이 처분을 내렸다. 이들은 징계처분에 불복하거나 항고하여 징계가 완화되거나 취소되었다.

# 청와대의 이상한 행보 : "어뢰 피격으로 몰고 가지 마라"

대청해전이 벌어지기 18일 전인 2009년 10월 23일,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 부장이 극비리에 싱가포르에서 접촉하여 남북 정상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그로부터 18일 후인 11월 10일 대청해전이 발생했고, 11월 13일부터 언론들은 ‘남북 비밀접촉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이명박 대통령이 합참의 고위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합참은 대청해전 승리 직후라서 당연히 대통령이 작전에 대해 치하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말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 합참의 고위 관계자(이상의 합참의장으로 추정됨)를 취재한 이정훈 신동아 기자는 합참 고위 관계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승리에 대해 칭찬해주실 줄 알았는데, 대통령은 그 승리로 인해 3차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될 가능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 화까지 낸 것은 아니지만, ‘왜 그렇게 강하게 대응했느냐’며 매우 서운해 했다.

말씀을 다 한 다음에도 미진한 감정이 남았는지, 계속 혀를 차며 전화를 끊지 않았다. 전화 통화라 직접 얼굴을 뵐 수는 없었지만 (대청해전으로 인해)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될 수 있음을 무척 안타까워하는 느낌이었다.”(신동아 2014년 7월호 ‘결정적인 시기에 군은 왜 약해지는가?’)

2010년 5월 15일 백령도의 사건 현장 부근에서 쌍끌이 어선이 북한이 천안함에 발사한 음향감응식 중어뢰(CHT-02D)의 잔해를 수거하는 데 성공했다.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결정적 증거물이 발견된 것이다.

이 결정적 증거물을 찾아내기 전까지 청와대는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인한 폭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북한의 어뢰 공격 가능성을 차단하는 조치를 적극 취했다. 2010년 4월 2일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 과정에서 김태영 장관에게 청와대 메모가 한 장 전달되었다.

김종대 씨의 ‘서해전쟁’에 의하면 이 메모에는 “VIP(대통령)께서 장관님의 답변이 어뢰 쪽으로 기우는 것 같은 감을 느꼈다고 한다. (침몰 원인은) 초계함을 건져봐야 알 수 있으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고 말해 달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확고부동한 증거물이 발견되기 전까지 청와대 고위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북한의 어뢰 공격 가능성을 부인하다가 그제서야 북한 어뢰 공격 사실을 수용했다. 5월 24일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에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집단과 대치하고 있다는 현실을 잊고 있었다”면서 강도 높은 5·24 대북제재 조치를 발표했다.

이어 김태영 장관은 “6년 만에 대북 심리전을 재개한다”고 선언했다. 북한이 “대북 심리전을 전개하면 격파사격을 하겠다”면서 강력 반발했다.

북한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5월 24일 오후 6시부터 ‘자유의 소리’라는 이름으로 FM 라디오 방송이 재개되었다. 그리고 군사분계선 지역의 확성기, 전광판 등의 설치와 대형 기구를 이용하여 전단지를 날리는 작전도 준비했다.

전방 확성기 방송을 위해 전방 지역 11개소에 장비를 설치했으며, 6개의 전단지 작전지역을 준비했다. 합참은 북한이 만약 대북 심리전을 위한 확성기와 전광판에 대한 격파사격을 하면 바로 북한 GP를 공격하기 위해 GOP 부대에 토 미사일을 배치했다.

우리 군은 7월 25일부터 28일까지 미 해군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 호(CVN-73)가 참여한 가운데 우리 해군과 동해상에서 ‘불굴의 의지(Invincible Spirit)’라는 합동작전을 실시했다.

천안함에 대한 응징의 일환으로 실시된 훈련이었던 만큼 그 어느 때보다 공세적인 훈련이 전개되었다. 합참은 이 작전 기간 중에 대북 심리전을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정부의 승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에 미련을 갖고 있던 이명박 정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이종헌 씨의 ‘스모킹 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가장 폭발 가능성이 높은 뇌관은 바로 확성기였다. 확성기는 설치되었으나 시행은 지연되었다. 확성기는 여러 여건을 고려하여 천안함 관련 유엔 안보리 조치 이후로 미뤄졌다.

잠정적 보류 상태는 계속 이어졌다. 2010년 11월 11일부터는 서울에서 G20 정상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안정적 회의 개최를 위해서는 한반도의 위기관리가 더 중요해졌다. 결국 5·24 조치의 중요한 부분이었던 여러 종류의 대북 심리전은 재개되었으나, 그중 핵심적 요소 중의 하나였던 확성기 작전만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이 5·24 조치를 발표하고도 ‘여러 여건’ 즉 남북정상회담, G20 정상회의 등을 이유로 5·24 조치의 핵심이었던 대북 확성기 방송을 스스로 철회했다.

#D+8개월 : 그렇게 당하고도…

천안함 폭침 사건 8개월 후인 11월 23일 오후 2시 34분, 연평도에서 우리 군의 호국훈련이 종료된 지 한 시간 후 북한은 연평도를 무차별 포격하여 해병대 연평부대원과 주민 등 2명이 사망하고 16명이 부상을 당했다.

보고를 받은 이명박 대통령은 한민구 합참의장에게 “단호하게 대응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는 해석 난감한 지시를 내렸다. 이 내용이 언론에 알려져 “대통령이 확전 방지를 지시했다”고 속보로 보도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군대 간에 처음으로 벌어진 대규모 지상 포격전이 아직 끝나지 않은 급박한 상황에서, 그것도 우리 영토를 포격당한 상황에서 나온 대통령의 최초 메시지는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확전 방지 지시’가 보도된 후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자 아연실색한 청와대는 “대통령은 확전 방지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정정했다가 “이 대통령이 ‘확전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하라’고 지시했다”고 수정했으며, “단호히 대응하되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고 변경했다.

급기야 저녁에는 홍상표 청와대 홍보수석이 기자들에게 “확전 자제와 같은 지시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부인했다.

청와대 벙커에서 긴급 안보관계 장관 회의가 소집되어 대책회의를 하고 있을 때, 아무런 보고도 받지 못한 김태영 장관은 국회 예결위에 출석해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연평도 포격 사실을 알게 된 의원들이 “김 장관, 빨리 가 봐야 되는 것 아니오?” 하고 채근하자 그제서야 김 장관은 청와대로 달려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348쪽)에는 “뒤늦게 회의에 참석한 김 장관에게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회에서 시간을 지체한 데 대해 크게 나무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천안함 폭침 이후 그토록 “단호한 조치로 보복”을 외쳤던 군은 연평도가 포격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단호하지 못하게’ 대응하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결국 김태영 장관은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 직후인 11월 25일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언론에서는 연이어 해군참모총장을 비롯한 군 최고위 인사들의 방산비리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관련 보도를 취합해 보면 해군은 비리 건수나 뇌물 액수, 관련자들의 계급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1위다.

고위 장성들은 무기업자들에게 뇌물 받아먹느라 얼이 빠졌고, 지휘관과 간부들은 부하 여군 겁탈과 성추행으로 망신살이 뻗쳤다. 고참 사병들은 후임들을 왕따 구타로 때려죽이고, 말단 사병들은 화를 참지 못하고 총기를 난사하여 동료들을 쏴 죽이는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우리 군은 현재 아군이 아군을 상대로 내전을 치르고 있는 셈이니 장개석 군대만도 못하다는 평은 지나친 것일까.

천안함 5주기를 맞아 우리 군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천안함 폭침사건을 통해 무엇을 반성했고, 무슨 교훈을 얻었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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