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땅굴 발견으로 제2의 6·25 좌절시켜
제2땅굴 발견으로 제2의 6·25 좌절시켜
  • 이성은 기자
  • 승인 2015.03.1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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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오늘] 제2땅굴 발견 40주년(1975년 3월 24일)

1975년 3월 24일 강원도 철원, 최대 지하 160m에 이르는 깊숙한 지하에서 총 길이 3.5km에 달하는 땅굴이 발견됐다. 이것의 정체는 북한의 기습남침용 제2땅굴이었다. 실체를 드러낸 제2땅굴은 높이 2m, 폭이 2.1m로, 이는 북한이 유사시 한 시간에 야포 등 중장비를 포함한 1만6000명의 무장 병력을 침투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제2땅굴의 징후가 발견된 것은 1973년 11월 20일, 6사단 청성부대 장병들이 경계 작전 수행 도중 지하에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폭음과 진동을 감지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 2일까지 총 43회 571번의 지하 폭음이 보고되자 군은 땅굴 탐지 전담반을 편성하여 시추작업에 착수했다.

군의 지속적인 시추 끝에 제2땅굴은 1975년 3월 24일 지하 54m 지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수색 도중 북한의 방해대책에 의해 한국군 7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제2땅굴 발견은 6·25 휴전 이후 국군의 대(對)북한군 침투 경계 작전 중 가장 빛나는 전과로 평가받는다.

   
▲ 북한의 남침용 땅굴인 제2땅굴. 제2땅굴은 강원도 철원 부근에서 1975년 3월 24일 발견됐다.

제2땅굴은 북한의 전쟁 도발을 미연에 차단하는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만약 우리가 제2땅굴을 찾지 못했다면 그해 11월에 북한이 밀고 내려왔을 것”이라며 “제2땅굴 발견은 북한의 남침 음모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제2의 6·25 전쟁을 막아낸 훌륭한 업적”이라고 의미 부여를 했다.

제2땅굴 발견은 시기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제2땅굴 존재 가능성이 가장 처음 제기된 1973년 당시 사회 분위기는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로 남북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올라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2땅굴 발견은 북한의 변함없는 군사적 위협을 전 세계에 알리고 국민의 안보의식을 제고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현재까지 우리 군이 찾아낸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제1땅굴(1974년 경기도 연천)을 시작으로 제2땅굴(1975년 강원도 철원), 제3땅굴(1978년 경기도 파주), 제4땅굴(1990년 강원도 양구)까지 총 4개다.

한편 남침 땅굴을 찾는 사람들(남굴사)을 비롯한 일부 민간단체들은 아직도 북한의 남침용 땅굴이 서울 경기 일대를 비롯하여 수십 개 존재하며, 현재도 굴착 작업이 진행 중인 곳도 있다면서 국방부에 현장조사를 하라는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 민간단체의 땅굴 탐사는 주로 다우징(dawzing) 탐사기법에 의존하는데 이것은 풍수지리 학자들이 수맥을 찾을 때 사용하는 비과학적인 방법이다.

민간단체들의 남침용 땅굴 존재 주장은 국민들의 불안 심리를 증폭시켰고,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땅굴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국방부는 서울 경기 일대의 장거리 남침용 땅굴 존재설 주장에 대해 “모든 과학수사를 총동원하여 검토한 결과 땅굴과 관련한 어떠한 징후도 식별되지 않았다”고 입장을 밝혔다.

과학을 넘어선 주장은 미신이 된다. 제2땅굴 발견 40년, 군 당국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땅굴이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지하에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 제2땅굴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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