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의 비극, 이렇게 시작됐다
ⓛ 광주의 비극, 이렇게 시작됐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3.2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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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광주에 최초로 투입된 7공수 33·35대대장의 진술ⓛ

“퇴로 차단한 채 강경진압한 것이 초기 유혈상황 초래했다” 

<편집자 注> 이 문건은 1980년 5월18일 새벽에 처음으로 광주에 투입된 7공수특전단 33·35대대장의 검찰진술 요지이다. 두 대대장은 검찰진술에서 5월18일 광주 투입 첫날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정웅 31사단장이 공수부대 운용에 있어 미숙한 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권승만 당시 7공수 33대대장 진술조서(요지) 1996년 1월 5일 서울지방검찰청
 

5월 18일 전남대 앞 상황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나요.

“제가 메가폰을 들고 ‘계엄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졌으니 자진해산하라’고 했으나 시위대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10시 30분경까지 그런 상태였습니다. 당시 금마에 있는 여단본부로부터 여단장이 11시경 전남대를 방문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단순한 시위진압을 한다는 차원보다는 여단장 오기 전에 시위대를 빨리 쫓아 내고 정리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20명을 선발대로 뽑아 정문 쪽으로 나가 시위군중을 해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병력이 시위대 쪽으로 돌진하자 모두 흩어지면서 일부가 ‘금남로 쪽으로 모이자’는 소리와 함께 달아나 버렸기 때문에 정문 앞 상황은 금방 끝났습니다.”

-당시 전남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수영 씨 증언(한국현대사 사료연구소)에 의하면, 5월 18일 10시 30분경 ‘공수부대원들은 순식간에 학생들 대열 사이로 뛰어가 곤봉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차면서 진압하기 시작했다. 

-전남대 사거리 쪽으로 도망가는데 앞선 공수부대원들은 대열을 따라 잡아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한 대학생이 도망가다 자전거에 걸려 넘어졌다. 따라온 공수대원이 발로 머리를 걷어차고 손으로 자전거를 들더니 학생에게 던졌다’라고 했는데, 그 당시 33대대 병력이 과잉진압을 했던 것은 사실 아닌가요.

“저는 부대원들로부터 그와 같은 보고를 받지 못했습니다.”

-설사 부대원들이 이와 같이 했다 하더라도 대대장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보고하리라고 보는가요.

“개인적으로는 보고를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같은 날 10시경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전남대 후문을 지나던 범진염 씨(광주 북구 생용동)의 증언에 의하면 ‘공수부대원들이 버스에 올라오더니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그 후 젊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끌어냈다. 

-나를 포함해 20여명 가량이 전남대 후문 담 쪽으로 끌려갔다. 담 벽에 서서 또 한 번 구타를 당한 뒤 구내로 들어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잠시 후 학생이 아닌 게 확인돼 풀러났으나 후문을 빠져나오면서 또 한 차례의 구타를 당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후문에서 일어났던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받지 못했나요.

“저는 그와 같은 상황은 보고받지 못해 모르고 있었는데 최근에 후문에 있었던 7지역대장 고성준 대위(현재 6사단 근무중령)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버스에서 야유와 소리를 질러 보초를 서던 초병이 몇 명을 끌어내 몇 대 때리고 무릎 꿇게 하여 지역대장이 교육을 시켜 돌려보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생리상 몇 대 때리기도 했을 것으로 봅니다.”

▲ 광주에 출동한 계엄군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몽둥이로 무자비하게 시민을 패고 있다. 초기에 투입된 공수부대가 이처럼 무자비한 진압을 하면서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 광주의 비극을 불러왔다.

-신우식 여단장이 몇 시 경에 전남대에 왔으며, 보고한 사항과 지시받은 사항은 무엇인가요.

“11시경에 세단차로 전남대의 33대대 주둔지를 방문해서 숙영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날 10시경 정문 앞에서의 학생시위 상황과 도착 이후 활동상황 등을 보고했고, 특별한 지시내용은 없었습니다. 잘하라는 취지의 격려의 말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5월18일 10시경 광주교대로 33대대 일부 병력이 출동하게 된 경위는 어떤가요.

“31사단의 지시에 의해 1개 중대 30여명을 그쪽으로 보내 교내를 장악하도록 지시했습니다.”

-당시 광주교대 앞에 거주하던 전계량 씨(5·18 유가족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오전 10시께 젊은 학생이 교대 쪽으로 오자 공수부대원 3명이 그를 잡기 위해 쫓아갔다. 도망가던 학생이 멈춰서자 그들은 다짜고짜 진압봉으로 뒤통수를 내리쳤다. 

-쓰러진 학생의 어깻죽지를 내리친 뒤 학생을 인근 공터로 끌고 가더니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개머리판 등으로 구타한 다음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와 같은 사실도 알고 있는가요.

“그것은 전혀 몰랐던 사항입니다. 여기서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그 이후의 33대대 병력의 활동 상황은 어땠는가요.

“주둔지에서 정비를 하고 부대원들은 휴식을 취하면서 14시경까지 있었습니다. 그후 31사단장이 헬기로 대대본부로 와서 광주시내 상황을 알려주고 ‘16시를 기해 금남로에 출동하여 시위진압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정웅 31사단장의 진술에 의하면, 16시에 ‘33대대장에게는 광주 시내 금남로 부근 공용터미널에서 도청 방향으로, 35대대장에게는 도청 앞 분수대로부터 터미널 쪽으로’, 이를테면 공격개시선을 정해 병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했다고 하는데 맞는가요.

“제 기억으로는 저희 대대는 금남로에서 도청 쪽으로 올라가면서, 35대대는 금남로 양쪽에 있는 도로인 충장로와 또 다른 도로에서 금남로 방향으로 사이 길을 좁혀 오면서 시위진압을 하도록 했고, 도청 앞에는 경찰병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시위진압 방식은 시위군중들의 퇴로를 전면 차단하여 오히려 충돌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예상이 되는데 31사단장이 그와 같은 강경한 시위진압을 지시했다는 말인가요.

“퇴로가 차단되어 충돌 가능성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정웅 사단장이 강경한 시위진압을 지시했다기보다는 공수부대 운용에 있어 미숙한 점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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