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조선 처녀 이야기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조선 처녀 이야기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3.2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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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역사 파일] 아무도 모르는 조선 이야기②

중국은 조선이 진정으로 사대를 하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말과 소만 요구한 것이 아니다. 여자와 내시 등도 끊임없이 요구했다. 중국이 여성을 요구한 것은 전략적 차원의 배려라는 증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미 고려 시절부터 이 땅의 아리따운 처녀들이 원나라로 끌려가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고려의 여인들 중 운이 좋아 원나라 황족들과 인연을 맺은 사례도 많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원(元)나라 말기 황제인 순제(順帝․惠宗)의 두 번째 부인이 된 기황후(奇皇后)다.

기황후는 고려 사람 기자오(奇子敖)의 딸로서 몽골에 들어가 1333년 고려인 내시 고용보(高龍普)의 도움을 받아 원나라 황실의 궁녀로 있었는데 순제의 총애를 받아 두 번째 황후로 책봉됐고, 황태자 애유식리달엽(愛猷識理達獵)을 낳아 원 황실의 황통(皇統)을 잇게 했다.

또 개빈 맨지스의 저서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에 의하면 명나라의 창업자 주원장(朱元璋․洪武帝)도 고려인 여인을 후처로 맞았다고 하는데, 고려인 여인이 낳은 넷째 아들이 중국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라고 기록하고 있다.

▲ 조선 시대에 많은 여성들이 중국에 궁녀로 바쳐졌다. 그 중에서는 중국 황제의 후궁이 된 여성도 있다(사진은 드라마 ‘기황후’의 한 장면)

이런 인연 때문인지 중국인들은 조선 초기부터 미모가 출중한 여성들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첫 단서는 태종실록에서 발견된다.

태종 8년(1408) 4월 16일 중국 사신이 서울에 도착하여 “네가(중국 사신) 조선 국왕에게 말하여 미녀 몇 명을 골라 데리고 오라”는 칙서를 낭독했다. 태종 이방원은 “어찌 감히 마음을 다해 명령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같은 해 7월 2일에는 중국 사신 황엄(黃儼)이 경복궁에서 처녀를 선발하는 장면이 보인다. 이날 중국 사신은 “처녀들이 한결 같이 박색”이라고 화를 내며 담당 관리를 포박하고는 “어째서 아릿다운 처녀가 없느냐. 네가 감히 다른 뜻을 가지고 형편없는 여자들만 뽑아 올린 것 아니냐” 하며 윽박지르자 황희가 “이 계집아이들이 부모의 곁을 떠날 것을 근심하여 먹어도 음식 맛을 알지 못해 날로 수척해진 때문이니 괴이할 것 없소. 다시 중국의 화장을 시켜놓고 보시오” 하고 달래는 모습이 발견됐다.

이날 실록은 행여 자신이 선택되어 이역만리 중국 땅에 끌려갈까 무서워 갖가지 꾀를 쓰는 조선 처녀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날 평성군 조견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입이 반듯하지 못하고, 이조 참의 김천석의 딸은 중풍이 든 것같이 머리를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의 딸은 다리가 병든 것같이 절룩거리니 황엄이 매우 노했다. 사헌부에서 딸을 잘못 가르친 죄로 조견은 개령에, 이운로는 음죽에 귀양 보내고 김천석은 정직시켰다.”

태종 8년 7월 3일 의정부에서는 각도에 순찰사를 파견하여 다시 처녀를 선발하도록 하고는 “지난번엔 도내의 처녀들 중 빠진 자가 많았다. 각 지방에 용모가 아름다운 처녀가 있거든 모두 정결하게 빗질하고 단장시켜 중국 사신의 사열을 기다려라. 만일 여자를 숨기고 내놓지 않거나, 침을 찌르거나, 머리를 자르고 약을 붙이는 등 꾀를 써서 선택을 피하려는 자는 모두 ‘임금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죄’로 처단하거나 가산을 적몰하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전국에서 난리법석을 벌인 끝에 같은 해 11월 12일 사신 황엄은 처녀 5명을 선발해 중국으로 떠났으니 태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끌려간 처녀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공조 전서 권집중의 딸(18세)
인녕부 좌사윤 임첨년의 딸(17세)
공안부 판관 이문명의 딸(17세)
충좌 시위사 중령호군 여귀진의 딸(16세)
중군 부사정 최득비의 딸(14세)

이밖에 수행원으로 28명이 동행했는데, 이들의 행차에 생이별의 피 끓는 마음이 담긴 부모 친척들의 울음소리가 길에 가득했다고 한다. 길창군 권근은 비운의 처녀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바쳤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구중궁궐에서 요조숙녀를 생각하여 만리 밖에서 미인을 뽑는다… 부모를 하직하니 말이 끝나기 어렵고 눈물을 참자니 씻으면 도로 떨어진다 슬프고 섭섭하게 서로 떠나는 곳에 여러 산들이 꿈속에 들어와 푸르도다’

중국으로 끌려간 처녀들은 나라 전체를 뒤지다시피 하여 찾아낸 만큼 미모가 출중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태종 9년(1409) 5월 3일 중국 사신이 와서 하는 말이 "지난해 너희가 바친 여자는 살찐 것은 살찌고, 마른 것은 마르고, 작은 것은 작아서 모두가 좋지 못했다. 

다만 너희 국왕의 공경하는 마음을 생각해 비(妃)로 봉할 것은 비로 봉하고 미인(美人)으로 봉할 것은 미인으로 봉하고, 소용(昭容․비와 미인, 소용은 중국에서 궁녀에게 내리는 관명)으로 봉할 것은 소용으로 봉하기를 마쳤다. 왕이 만일 뽑아둔 여자가 있거든 한두 명을 다시 데리고 오라"며 또다시 처녀를 요구했다.

이후로 중국은 기회만 나면 처녀를 요구해 왔다. 세종 8년(1426) 4월 10일에는 차와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 노비를 보내라는 요구에 20명을 뽑아 보냈으며, 중종 16년(1521) 4월 29일에는 “어린 화자(火者․중국에 보내던 환관 후보자)와 음식을 잘 만드는 여자와 어린 계집을 선발하되 성질이 부드러워 부리기 쉬운 사람으로 수십 명씩을 뽑아 보내라”는 요구가 왔다.

이런 요구에 대해 조정은 궁중회의를 열어 논의할 끝에 중종 16년 6월 2일 처녀 선발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국왕 명의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여자 뽑는 일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일이지만 어찌 원통한 일이 없겠느냐. 9세부터 12세까지 각 도 감사가 친히 가려 뽑아서 사신들로 하여금 시비 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혹시라도 구덩이에 몸을 던진다든가 목매 자살하는 폐가 있을지도 모르니 조심해 보내라. 뽑힌 자가 정밀하지 못하면 담당 관원과 감사를 힐책하겠다”

이 시절 중국으로 끌려간 여인들은 운이 좋게도 출세하여 중국 상류사회로 진출한 사례도 더러 있었다. 태종 17년 5월 9일 “중국에 보낼 처녀 두 명을 뽑았는데, 황 씨와 한 씨를 상등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한 씨는 한영정의 딸로서 품위 있고 아름다운 용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명나라로 들어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여비(麗妃)로 삼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세종 6년 10월 17일에는 한 씨가 대행황제(大行皇帝․명나라 태종)가 죽었을 때 순장(旬葬)을 당했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황제가 죽자 궁인으로 순장된 자가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식사가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됐다.

한씨가 죽을 때 유모 김흑(金黑)에게 이르기를 “낭아 나는 간다” 했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관이 걸상을 빼어 죽었다. 여러 궁인들이 마루에 올라갈 때 인종(仁宗)이 친히 들어와 고별하자 한 씨가 울면서 인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어미가 노령이니 조선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했다.’

한 여인의 드라마틱한 죽음에 이어 세종 9년 5월 1일 실록에는 한영정의 막내딸, 그러니까 대행황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순장을 당한 여인의 동생이 이 또다시 중국으로 끌려가는 사연이 등장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영정의 맏딸은 명나라 태종 황제의 궁에 뽑혀 들어갔다가 황제가 죽을 때 따라 죽었고, 말내딸도 얼굴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중국에서 그녀를 뽑아가게 되었다.

한 씨가 병이 나서 그 오라비 한확이 약을 주자 먹지 않고 말하기를 “누이 하나를 팔아 부귀가 극진한데 무엇을 위해 약을 쓰려고 하오” 하고 칼로 침구를 찢고 재물을 모두 친척들에게 주었다. 침구는 시집갈 때를 위해 준비했던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 막내딸이 중국으로 끌려가 또다시 중국 황제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으니 그 정황은 성종 10년 7월 4일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실록에 의하면 한확(韓確)의 누이가 중국 조정에 뽑혀 들어가 선종황제(宣帝․명나라 4대 황제)의 후궁이 되고 성황황제(成帝․명나라 5대 황제)에게 총애를 받았다. 

환관 정동(鄭同)과 결탁하여 자주 정동을 조선에 파견하여 옷과 노리개, 음식 등을 바치게 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혹독하게 거둬들여 큰 병폐가 됐다고 한다.

또 칙령으로 한 씨의 일가친척을 해마다 성절사(중국 황제 생일에 파견하는 사신)로 입조하게 하므로 한치례와 한치인, 한치의(이들은 모두 한확의 아들임), 사촌인 한치형, 한충인, 조카인 한한, 한찬, 한건이 번갈아 중국 조정에 드나들었다. 

한 씨 일족은 앉아서 부귀를 얻고 해를 나라에 끼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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