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시위대의 퇴로는 비웠어야…
② 시위대의 퇴로는 비웠어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3.2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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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광주에 최초로 투입된 7공수 33·35대대장의 진술②

<편집자 注> 이 문건은 1980년 5월18일 새벽에 처음으로 광주에 투입된 7공수특전단 33·35대대장의 검찰진술 요지이다. 두 대대장은 검찰진술에서 5월18일 광주 투입 첫날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정웅 31사단장이 공수부대 운용에 있어 미숙한 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권승만 당시 7공수 33대대장 진술조서(요지) 1996년 1월 5일 서울지방검찰청


시위대의 퇴로는 비웠어야…

-그럼, 진술인이라면 어떻게 부대 운용을 하는 것이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하는가요.

“당연히 퇴로는 비워 놓았어야 했다고 봅니다.”

-5월18일, 33대대 병력이 공용터미널에 도착한 시간과 금남로에 도착한 시간은 언제인가요.

“16시경에 공용터미널을 경유해서 금남로에 있는 한일은행 앞에 도착했습니다.”

-당시 그곳의 시위 상황과 시위대는 얼마나 되는가요.

“처음에 도착했을 때는 2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도청 앞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가 공수부대가 도착하니까, 우리 방향으로 돌려 그때부터 한일은행 앞에서 충돌이 시작됐습니다.”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고, 시위군중들은 어떻게 대항했나요.

“먼저 자진해산하도록 선무방송을 하고, 2차 최루탄(사과탄)을 던져도, 오히려 돌을 던지고 해서 후방에 있던 1개 지역대 병력을 전방에 투입해 시위진압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서로 공방전을 벌이면서 1백 3명 정도를 체포 연행했습니다.”

-부대원들이 시위군중을 때릴 때 어떻게 하던가요.

“평소 교육한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진압봉으로 때리고, 군화발로도 찼으며 부대원들도 시위군중에게 맞고 했습니다.”

▲ 시위 도중 붙잡힌 광주 시민들.

-시위진압은 몇 시경에 종료가 되었고, 그와 같은 상황은 지휘계통에 따라 보고했나요.

“16시 30분경에 종료가 되어 31사단 상황실에 보고했습니다.”

-정웅 사단장의 진술에 의하면 33대대는 16시 50분경에, 35대대는 16시 30분경에 큰 무리 없이 시위가 진압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하는데 어떤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35대대가 저희 부대보다 늦게 상황이 종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진술인이 금남로에서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을 하달한 사실이 있는가요.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평상시 시위진압훈련을 할 때, 전면에 나서서 시위 주동을 하는 사람을 체포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5월18일 15시경 이후 대한극장 앞 도로와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공수부대의 상상을 초월한 검문검색과 과잉진압으로 많은 피해자가 확인되는데 33대대 병력이 그곳을 거쳐 갈 때의 상황이 아닌가요.

“저희 부대가 지나갈 때는 전혀 그런 상황이 없었습니다. 특전사 전투상보에 의하면 ‘35대대, 공용터미널 일대까지 작전을 확대해 19시경 작전종료’라고 되어 있다는 것만 참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진술인은 16시경 이후에 본격적인 진압작전을 했다고 하지만, 목격자들은 그날 14시경부터 이미 금남로 일대에서 공수부대가 출현, 소규모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주장하는데요.

“그 사람들이 기억을 잘못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명령을 받은 시간이 14시가 넘은 시간인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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