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에게도 고구려의 피가 흐른다?
중국인에게도 고구려의 피가 흐른다?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3.27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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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석의 역사파일]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서북공정에 맞서려는
중앙아시아 학자들과 연대하여 중국의 역사침탈 봉쇄전선 구축해야

한국인들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단 분노가 치민다. 중국이 우리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 왜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북공정에 대해 알고 있는 중국인들은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역시 황당해 하기는 마찬가지다. 

필자는 몇 년 전 중국에서 동북공정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는 중국의 한 학자와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인들은 고구려 사람들에 대해 무얼 아느냐”고 물었다. 고구려 사람들에 대해 무얼 아느냐니…. 그런데 막상 떠오르는 적당한 대답이 없었다. 

그 학자는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신라는 고구려를 계승하지 않고 대동강 이북으로 쫓아냈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수십만의 고구려인들이 중국 영토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에는 고구려 조상을 둔 중국인들이 많다. 한국인들이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고구려 남자들이 우리 중국인 어머니들과 결혼해서 지금 우리 중화민족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중국인들에게는 고구려의 피도 흐른다. 중국은 그런 역사적 대가정(大家庭)이다.” 

이쯤 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중국인들 혈관에 고구려의 피가 흐르고, 그래서 고구려인들도 자신들의 조상이라는데 어쩔 것인가. 차라리 중국이 고구려를 쳐서 이겼기에 고구려 역사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우기면 ‘당나라 혼자 했나?’라고 할 말이라도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란 이런 식이다. ‘너희 나라 역사는 우리 것이다’라는 주장이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가 우리에게 이른다’는 이야기다. 이를 ‘다민족 통일 국가론’이라고 한다. 


중국이 생각하는 ‘국민’과 ‘영토’의 개념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중국이 국가(國家)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그것에는 두 가지 차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외교나 안보와 관련해서는 우리나 다른 나라들처럼 영토, 국민, 주권의 개념을 적용하지만 중국(中國)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사용할 때는 문화 강역(疆域)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문화 강역은 중화(中華) 민족이라는 가상적 공동체의 활동 영역으로 규정된다. 윤휘탁 고구려연구재단 위원은 중국의 다민족 통일 국가의 개념을 “하나의 한족(漢族)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고 한족 왕조와 이민족 왕조가 상호대립·충돌·흡수·융합·통일되어 다수 민족으로 형성된 중화민족이 ‘국민’이 되고, 다양한 민족들이 세웠던 왕조들의 각각의 관할 범위(疆域)들의 총합이 ‘영토’가 되는 셈”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아는 국가 개념과는 많이 다르다. 그렇기에 중국(中國)을 근대 법치국가, 국민국가로만 생각하면 낭패를 볼 수 있으며 거대한 문화집단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한국인들은 그러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중국 역사학계는 이러한 다민족 통일 국가의 정당성을 역사에서 추출하기 위해 몇 가지 개념을 활용한다. ‘중(中)’과 ‘외(外)’, ‘화(華)’와 ‘이(夷)’, ‘천하(天下)’와 ‘사해(四海)’, ‘국(國)’과 ‘야(野)’의 개념들이 그것이다.

 

중(中)의 개념은 중국(中國)과 중원(中原)의 개념이며 외(外)는 경제·문화적으로 변방의 강역이지만 결국 이는 천하일가(天下一家), 중외일체(中外一體)라는 개념으로 통합된다. 

여기에서 활동한 종족은 본족(本族)이라는 화하(華夏)이며, 그 강역은 고대(古代) 하(夏), 상(商), 주(周)를 포함한다. 한편 중외(中外)와는 다른 영역, 즉 화하의 문화가 미치지 못한 곳은 만이(蠻夷), 융적(戎狄)이라는 오랑캐의 영역이다. 

이들과 중국은 문화적으로 상이하지만 정복이나 조공, 책봉의 질서를 통해 위계가 형성되면 사해(四海) 안에 포함되어 중화일체(中華一體)가 된다. 이것이 중국이 생각하는 다민족 통일 국가의 모습이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관념으로 고구려를 해석한다. 여기에는 크게 세 갈래 논의가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구려의 수도는 평양 천도 후 북한에 있었으므로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방정부가 아니라 이웃 나라에 속한다.-탄치샹의 주장이다. 

2. 고구려는 중국 동북에서 동이(東夷)가 세웠고 평양 천도 이후 북한의 영역이므로 동북지방사와 조선사 양쪽(一史兩用)에 들어간다.-쟝멍산(姜孟山)의 주장이다. 

3. 고구려는 중화다원일체(中華多元一體)의 측면에서 중국사에 속하며, 수·당(隋塘) 왕조의 고구려 정벌은 중앙왕조와 지방정권의 모순이 충돌한 것이므로 침략이 아니라 ‘통일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장비보(張碧波), 장보취엔(張博泉), 웨이춘청(魏存成) 등의 주장으로 가장 많은 동조를 받고 있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를 화이사해(華夷四海)의 개념으로 파악하여 중국 동북의 역사이거나, 적어도 양쪽의 역사(一史兩用)임을 주장하는 것이 대세다. 

반면에 우리 역사학자들이나 언론은 이런 논변을 제대로 깨지 못한 채 중국과 투쟁했다는 주장만을 되풀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주장으로는 중국 학자들과 감정싸움만 하게 된다. 


중국의 다민족 통일 국가 이론을 논리적으로 부숴야

우리 역사학자들이 깨야 할 중국 학자들의 논변은 다름 아닌 다민족 통일 국가라는 개념이다. 이를 가장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학자들은 러시아에 있다. 

러시아가 과거 구(舊)소련 연방을 구축했을 때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을 소련 역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미국도 인디언의 역사를 미 합중국 역사의 연속선으로 보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흥미로운 사건이 있다. ‘누란(樓欄)의 미녀’라고 불리는 3800년 전 신장 지역에서 발굴된 여성 미라의 DNA 분석 결과 이 주인공은 몽골리언의 유전자를 가지는 동시에 인도-유러피언, 즉 오늘날 백인종에 가까운 유전자를 갖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현재 이 미라는 소그드라 불리는 중앙아시아, 인도-이란 계통의 선조인 것으로 알려졌다. 

▲ 신장지역에서 발견된 3800년전 미라 '누란의 미녀'. 이 미라의 발견으로 중국의 '서북공정'이 타격을 받게 됐다.

중국의 다민족 통일 국가론에 따르면 이제 이 인도-유러피언의 금발 여성 미라가 살았던 시대의 나라도 사해일가(四海一家) 차원에서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가 만만치 않다. 이 여성 미라 부족의 후예로서 옛 흉노와 돌궐, 즉 투르크의 문화가 강한 위구르인들이 이 미라의 DNA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위구르인들은 환호작약했다. 중국으로부터 당당하게 분리 독립을 요구할 근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3800년 전이라면 당시의 중국 역사는 전설 속의 황제시대다. 역으로 신장 지역의 중국 역사가 위구르인들의 역사로 편입이 되어야 할 지경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렇기에 중국이 신장 위구르인들의 역사를 ‘중화(中華)’에 편입시키려는 서북공정(東北工程)이 노골화될수록 위구르인들의 분리 독립 요구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과는 달리 서북공정에는 대규모 개발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위구르인들이 자신들의 조국 동(東)투르키스탄 분리 독립 운동을 포기하기에는 그들과 중국 간에 너무나 큰 역사적, 문화적 괴리가 있다. 

무엇보다 중국이 내세우는 본족(本族)의 화하(華夏) 문명에 이 인도-이라니언 문화의 기여가 만만치 않다는 사실 때문이다. 

강력한 흉노와 돌궐 대제국을 건설했던 이들이 중앙아시아 투르크 역사를 중국에 편입시켜 줄 리 만무하다. 

그것은 위구르족만의 문제가 아니라 터키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러시아마저 받아들일 수 없는 역사, 문화 전쟁이 된다.  
한국의 역사학자들은 이러한 서북공정에 맞서려는 중앙아시아 학자들과 연대하여 중국의 역사침탈 봉쇄전선을 구축해야 한다. 


<동북공정은 지금도 진행 中> 

“만리장성 동쪽 기점은 압록강변이다”

고구려·발해 등 한반도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 압록강변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 발굴 결과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중국의 동북 지역에 위치한 랴오닝(遼寧)성의 문화재 당국인 문물고고연구소가 지난해 3월부터 10월까지 이 성에 있는 단둥(丹東)시 동쪽의 압록강 하류 하천변에서 요새 유적 1만8800㎡를 발굴했다고 지난 1월 지역 일간지가 보도했다. 

압록강 가까이 있는 명나라 시절의 이 요새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압록강변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앞서 2013년에는 같은 도시인 단둥시에서 벽돌로 쌓은 명나라 시대 요새 성벽 2개를 발견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중국이 2009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압록강변이라는 주장을 내놓은 뒤 이를 입증하기 위한 연구와 발굴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다. 2012년에는 만리장성의 길이가 2만㎞(기존 8851.8㎞)이고, 동쪽 끝이 옛 고구려와 발해 지역이던 지린(吉林)성과 헤이룽장(黑龍江)성까지 이른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동북3성에 속하는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은 랴오닝성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이전까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허베이(河北)성 '산하이관(山海關)'으로 보는 것이 중국 학계의 정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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