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들어온 자본주의 세계관
교회에 들어온 자본주의 세계관
  • 미래한국
  • 승인 2015.03.30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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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계, 실용·성장주의에 너무 휘둘려와… 교회가 복음이란 상품을 파는 곳일 순 없어

자본주의는 유용한 것이 선하다는 공리주의를 수용하며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한다. 네덜란드의 경제사학자 하우즈바르트는 현대자본주의가 가진 진보의 우상성을 지적했다(‘자본주의와 진보사상’).

19세기 말 등장한 실용주의는 실용적인 결과에 의해서 가치가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행복 성공 즐거움의 기준이 실용성에 있다는 것이다.

실용주의는 교회 안으로도 파고들었다. 효용성이 있어야 진리라는 윌리엄 제임스의 주장을 교회는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실용주의는 교계에 확산돼 조엘 오스틴 등에 의해 번영신학으로 발전했다.

한국교회는 성장주의에도 영향을 받았다. 압축성장기의 ‘잘살아보세’ 이데올로기가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 재벌과 대형교회의 형성과정은 매우 흡사하다. 둘 다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독재적 리더십에 의해서 성장했다.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 지체, 즉 유기체이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유기체가 될 수 없다. 성도 간의 교제란 극히 형식적이어서 속사람이 드러나기 어렵다. 작은 공동체에서 희로애락을 나누고, 인격이 부딪히면서 변화가 일어나는데 대형교회에서는 쉽지 않다.

교회도 인간이 모인 곳이므로 조직(organization)은 필수적이다. 특히 대형화된 교회에서는 조직 규모도 커진다. 그러다보면 이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기업의 조직원리가 도입되기 때문에 교회가 기업과 비슷해진다.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의 열매 중 하나가 성직자와 평신도 간의 구분 철폐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직분에 대한 성경적 규정을 명확하게 하여 목사와 장로 및 집사로 한정했으며, 이는 계급적 차이가 아니라 기능적 구분일 뿐임을 천명했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대형교회에서 담임목사가 군림하고 집사, 장로 등 직제에 따른 위계가 형성되면서 교회의 순결성은 사라지고 있다.

대형교회 담임목사는 목양은 부목사에게 맡기고 자신은 설교목사로 자리매김을 하면서 CEO가 되어 목사·부목사 관계는 마치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하용조 목사도 생전에 “이것이 뭐 교회야? 재벌이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제 교회는 시장통이 되었다. 교인들은 종교 소비자가 되었다. 근사한 프로그램과 시설 등을 갖춘 큰 교회만 골라 다닌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숫자는 줄어도 대형교회는 늘어난다.

예배는 전문가들의 쇼가 되었다. 수천명이 동시에 드리고, 방송까지 되어야 하니 깔끔하고 세련된 예배를 위해서 아마추어들의 서투름은 용서가 안 된다. 이러니 인격의 변화 없이 교회 문지방을 밟는 명목적 신자만 늘어난다.

실용주의에 젖어 부와 성공을 복이라고 가르친다. 표적을 보았기 때문에 믿고 떡을 먹고 배불러 예수를 따랐던 예수님 당시의 무리와 같다(요 6:26). 그런 믿음은 타종교에도 있다. 불교신자 황우석 교수도 부처의 은공으로 죽을병에서 벗어났고, 부처의 뜻을 따라 연구에 매진했음을 밝혔다고 한다.

기독교의 소비주의적 경향은 19세기 복음전도사들이 기초를 놓았다. 찰스 피니는 “부흥은 기적이 아니며 그저 수단을 바르게 이용한 결과”라고 했다. 자신을 복음의 세일즈맨이라고 했던 구두 판매원 출신 무디가 복음전도에 판매 방식을 이용했다.

교회에 들어온 소비주의로 말미암아 교회가 복음을 파는 상점으로 바뀌었다. 박순용 목사는 복음이 상품이 되고, 죄인이 소비자가 되고, 복음전도자가 세일즈맨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이 생산되어 소비자 주권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설교자는 청중을 만족시키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소비자가 좋아하는 위로와 복에 관한 설교를 많이 하고, 소비자가 싫어하는 회개하라는 설교는 가능한 피한다.

서비스를 사듯 설교가 좋을수록 교인도 많이 오고, 헌금 액수도 늘어난다는 것을 교회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수십억원 횡령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돈을 추적해보니 그중 3억원이 교회헌금으로 쓰였다는 어느 검사의 얘기도 있다.

횡령한 이는 어떤 마음으로 헌금했을까. 소득이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교회가 강조한 결과가 아닐까. 성도의 더 중요한 사명은 깨끗하게 돈을 버는 것이다(살전4:11). 깨끗하게 벌어야 거룩한 헌금이 된다(신23:18).

교회가 기업화되고, 목사가 CEO가 되고, 복음이 상품이 되고, 성도가 소비자가 된 오늘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을까.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일부 교회에서 일어나는 교회 분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이런 몸부림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한국교회에 커다란 개혁운동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본 칼럼은 김승욱 편집위원이 <국민일보>에 기고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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