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논리가 4·3을 왜곡하고 있다
정치 논리가 4·3을 왜곡하고 있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3.3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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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4·3과 제주와 대한민국

제주 출신 작가가 말하는 제주도의 , 그 아픔의 역사...

▲ 현길언 작가

제주는 역사 이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면서 중앙 정부에 소속된 부속 지방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정치적 성격은 섬이어서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심부를 지향하려는 이중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은 주변지역 사람들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삶의 지혜였다. 즉 중심부의 가치를 지향하면서,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비판적이며 창조적인 의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다원성은 사회 정치적인 상황에서 복잡한 행동 양식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은 제주 역사에 면면히 흘러내려온 주변부 문화의 특징이 되었다. 

제주도가 독립을 유지했던 탐라국 시대에서 고려의 지방 현으로 국가 권력이 변동되는 과정에서 제주 문화는 탐라국의 독자성과 중앙 정부를 지향하는 현실성이 혼류(混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다원성의 일단은 삼성 신화에서 오곡의 씨앗을 갖고 온 남방 여인들과의 혼인을 통해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갈등 없이 이뤄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반면에 송당리 마을 당신(堂神)의 내력담인 무속본풀이에서는 두 문화 수용 과정에서 나타난 불화를 숨기지 않고 표현하고 있다. 

한라산 기슭에서 사냥을 하며 살았던 소천국은 남쪽 나라에서 온 백주또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고 살아간다. 

그런데 식구가 늘어 사냥만 해서 살아갈 수 없자 부인 백주또가 남편에게 농사짓기를 권한다. 

이 과정에서 불화가 생겨 결국 이혼하게 된다. 이것은 토착문화가 외래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있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제주 사람들은 토박이 삼성(三姓) 외에 본토에서 도래(渡來)한 사람들로 이뤄졌다. 이들은 중심부 가치를 숭상하면서도 나름으로 현실 상황에 맞는 삶의 방법을 모색했다.

한 예로 양반문화에 대한 기대를 가지면서도 새로운 삶의 방법을 모색하는 실용성을 추구했다. 조선왕조 시대 제주의 목사 판관 현감은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관리였는데, 이들의 횡포가 도민의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들에 대한 도민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는데, 도민의 한스러운 삶을 저항의 양식으로 나타나지 않고 설화적 상상력을 통해 표현했다. 그것은 주변부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대응 양식이면서 생존을 위한 삶의 양식기도 했다.


힘을 믿고 힘에 맞섰던 사람들의 비극

18세기 말부터 사회 정치 상황에 대한 도민의 저항은 과격한 행동으로 나타났다. 이야기로 풀어냈던 한(恨)이 시대 조류에 따라 강력한 행동으로 표출된 것이다. 

그런 사건의 상징이 1901년에 일어난 ‘이재수의 난(천주교에서는 신축교란·辛丑敎亂)’이다. 사람들은 이재수의 난을 외세인 천주교 세력을 앞세운 국내 세력과 일부 천주교도들의 부정과 부도덕에 맞선 도민의 저항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대의 복잡한 갈등 구조와 이익집단이 얽혀 야기된 사건이다. 이를 외세에 대한 저항, 부정부패에 항거한 백성의 의로운 저항으로 단순화하여 미화할 수만은 없다. 당시 천주교도들 중에는 제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이 막강한 교회의 힘을 믿고 그 때까지 자신들을 억압해 왔던 지방 토호세력과 유림(儒林) 등 제주 사회의 지배층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로 나왔다. 

일부 지역에서 천주교도들의 횡포가 심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 중에는 종교적인 힘을 믿고 개인적인 원한을 풀려고 했다. 

마침 천주교 세력을 믿고 봉세관(捧稅官)의 횡포가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정현 유림들을 중심으로 천주교도들에 대한 싸움을 대정현 관노(官奴)인 이재수를 통해 감행하도록 한다.

이재수를 비롯한 몇몇이 민병(民兵)을 모집하여 싸움을 벌였다. 천주교 신부와 유림 조직인 상무사(商務社) 세력은 뒤로 물러앉았고, 한스럽게 살아온 제주 백성들끼리의 싸움이 되었다.  

이재수가 이끄는 민군(民軍)세력이 천주교도의 방어선을 뚫고 제주성에 입성하여 성내에 숨어 있는 천주교도들을 색출하여 관덕정 마당에 모아놓고 수 백 명을 참수한다.

이재수를 따르던 소위 자위민단(自衛民團)이나, 이에 맞선 천주교도들 모두가 고통스럽게 살아왔던 제주 사람들이었다. 

결국 외세인 천주교와 당시까지 제주의 기득권 세력이었던 계층 간의 싸움은 한을 품고 고통스럽게 살아온 사람들끼리의 대리전이 되었다. 한을 품은 사람들끼리의 싸움은 미친 사람들의 한풀이가 되어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주변부 사람들의 비극이었다.

그들은 힘을 믿고서 억울하게 살아온 한을 풀려 했으나,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원인 제공세력인 프랑스 신부 측이나, 싸움을 부추겼던 상무사의 주역들과 제주 토박이 유림 양반들은 구경만 했다. 


주변부 정치 논리와 4·3

왜 남로당은 제주에서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정치 투쟁을 무장 반란으로 감행했을까? 제주는 표면적으로 공산 혁명이 가능한 여건이 성숙된 지역도 아니었다.

토착 양반 세력이 없었고, 양반이라 해도 거의가 중인 급이어서 신분 갈등이 심하지도 않았다. 산업구조도 1년 내내 농사일을 해야 굶지 않을 정도여서 지주와 소작인 구분도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공장 노동을 하면서 사회주의에 대해 일정 부분 학습 받은 인적(人的) 자원이 있었지만 그들도 낭만적 수준의 이념주의자(?)들이었다. 

군정기에 좌익세력이 섬을 장악하게 된 이유도 이해하기 어렵다. 1947년 3·1절 기념식을 기점으로 좌익이 본격적으로 정치 세력화되었다. 

이 사건 후 좌익이 주도한 파업에서 공무원, 교원과 일부 경찰관들까지 참여했다. 좌파 정치세력이 섬을 장악한 것은 제주도 사람들의 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던 새 시대를 열망하는 꿈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좌익 정치세력이 어떻게 무장투쟁을 감행하게 되었을까? 여러 논의가 가능하겠지만, 그 투쟁이 ‘단선(單選)정부 수립 반대’라는 남로당의 한반도 사회주의 국가건설 전략과 일치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거대 정치 투쟁을 이 섬에서부터 시작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남로당 제주도당 상임위원회에서 결정한 사실이고, 반대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일부 논자들은 그 사건을 남로당 중앙당의 직접 지시가 없었음에도 제주도당 자체의 결의로 감행한 후 중앙당의 추인을 받았다고 한다. 

설사 그 과정에 선후(先後)가 있었다 해도 4·3사건은 남로당의 38선 이남의 공산화 전략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4·3의 발발에는 남로당이 있고, 김일성이 주도하는 북조선 공산정권, 그리고 동서 냉전체제의 패권국인 소비에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한반도 국내외 정세를 간과하고 4·3사건의 발발을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연합군의 승리로 얻어낸 해방 정국에서 동서 냉전을 주도하는 미소(美蘇) 양대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반도의 정치 상황에서 제주라는 주변지역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다. 

일부 세력들의 주장처럼 이 사건의 발발 동기는 단선정부 수립 반대, 미군정에 대한 반발, 부패 공직자들로 인한 사회 혼란 등 제주의 혼란스러운 상황에 저항하여 일어난 의로운 민중항쟁이라는 논리가 타당성을 얻기는 어렵다.

남한에 뿌리내린 거대한 남로당이 없었다면, 북한 공산정권이 없었다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정의로운 4·3 항쟁’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박헌영은 제주 4·3의 투쟁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의도하는 우익 정부 수립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기대했을 것이다. 

결과는 무고한 도민의 희생으로 끝났고, 그 후유증은 아직도 골이 깊게 남아 제주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동서 냉전체제의 부산물로, 2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이념주의자들의 정치세력화의 한 사건으로 일어났으나 모든 피해는 제주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그 사태에 어떤 명분을 붙인다 해도 그 피해가 탕감될 수 없다. 

오히려 이 사태를 이념화하여 사태의 진상을 호도한다고 해서 희생자들의 고통이 위무될 수 있을까? 


사태 해결도 중앙정치에 의지하는 주변부성 

제주 4·3의 또 다른 아픔은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힘 있는 정치세력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남로당의 힘을 믿고 투쟁을 선동한 주동자들은 섬을 빠져 나갔고, 그들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여 행동을 같이 했거나, 선택의 여지도 없이 ‘산사람’이 되어 희생당한 사람들의 아픔은 오로지 제주 사람 몫으로 남았다. 

해주 대회에서 남로당은 반란 주도자인 김달삼의 투쟁 보고를 듣고 열렬하게 환영과 격려를 하면서도, 정작 제주에 남아 죽음과 싸우고 있는 제주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고혼(孤魂)들을 위한 사건의 진상을 외면하고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4·3을 국가 추념일로 정했다고, 그 추념일에 대통령이 참석했다고 해서 희생자들이 정의로운 저항자가 되어 그 죽음의 격이 높아졌다고 위로받을 수 있을까? 

▲ 한라산은 알고 있다. 제주 4·3의 아픔을 치유하는 길은 사태의 진상을 정직하게 알리고, 그 아픔을 공유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추념일에 대통령의 참석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은, 희생자들을 제물로 어떤 집단의 정치력을 획득하려는 것은 4·3의 아픔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살아 있는 자들의 비정을 과시하는 일일 뿐이다. 

애초에 희생자 명예회복 문제는 그 사태에 죄 없이 희생된 자들이 소위 ‘폭도’로 몰려 그 자식과 근친들까지 연좌제에 묶여 불이익을 당했던 이들에게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그 명예회복이 거창한 훈장을 달아주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그 과정이 중앙정치 논리에 의해 이뤄졌기에 여전히 4·3은 주변부적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아픔을 같이했던 제주도민들 간의 갈등은 심화되고 있다. 더구나 그 사태에 국가의 명에 의해 진압 작전에 참여한 군경(軍警)과 우익단체 희생자들은 완전히 소외되어 있다. 

68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에 대한 인식은 극과 극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 4·3에 대한 제주 사람으로서의 진정성이 요구된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은 역사를 정치 논리로 이해하려는 위험한 발상에서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그 보고서는 사실의 복원을 외면하고 정치 권력으로 역사를 바꾸어놓은 반(反)역사적 문서라는 점에서 4·3의 아픔이 치유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평화공원의 거대하고 화려함으로 외롭게 죽어간 사람들의 아픔이 위로받기는커녕 정치 논리가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부정직한 오늘의 상황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진상을 정확하게 알려야

그것은 이념이나 가치의 문제가 아니다. 우선 형식 논리의 모순을 피할 수 없다. 만약 저항이라면, 4·3사건으로 고통당하고 죽은 사람들은 희생자가 아니며, 저항자로서 기억되어야 한다. 

단선정부 수립을 반대하기 위해 죽음으로 저항한 이들에게 어찌 희생자의 나약한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들은 단선정부인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사과와 위로 받기를 거부할 것이다. 더구나 막대한 돈을 들여 건립한 그 공원에 자신의 위패가 있는 것도 달갑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4·3의 발발 원인과 그 경과에서 빚어진 숱한 비극적 사태를 정직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정직하려면 명분주의와 감상적 인식, 그리고 이해관계를 떨쳐 버려야 한다. 정직은 어려운 양심의 결단에서만 가능하다. 

내가 당하지 않았다고, 지금 내 생각으로 내 가치와 이념으로 또는 작은 이해에 얽매어 정직을 외면하고 사태를 왜곡되게 인식하고 처리해서는 안 된다. 그 당시 사람들의 처지로 돌아가 사태를 이해해야 한다.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4·3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폐허가 되었던 중산간 부락이 재건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모두가 그 시국에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천운으로 생각하면서 아픔을 달랬고, 이웃을 위로했다. 

설사 산사람이 되었고, 다행히 해변마을로 내려가서 목숨을 부지했거나, 그 가족 중에 서로가 다른 세력에 의해 희생을 당했다 해도 모두들 시국 탓을 하면서 아픔을 공유했다. 왜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 사태의 진상을 다 알았기 때문이다. 

제주 4·3의 아픔을 치유하는 길은 사태의 진상을 정직하게 알고, 알게 하고, 그 아픔을 공유할 때에만 가능하다. 

지금의 잣대로 당시를 판단해서도 안 된다. 해방기에 한국인의 선택은 역사적인 자아로서의 몫이다. 공산주의자가 되었거나 반공주의자가 된 것을 비난하거나 찬탄할 수 있는 권한이 지금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반(反)인권적 사례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거부하려는 그 반란의 목적을 정당화할 수 없다. 이 사건이 반국가적 반란이라 하더라도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야기된 반인권적 사실 또한 정당화될 수 없다. 이것은 4·3사건의 실상을 밝히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대전제가 되어야 한다.” 


<현길언 작가>
- 제주 출생, 제주대 교수, 한양대 교수 역임.
- 현대문학상(1990), 대한민국문학상(1992),
- 한국기독교문학상(1998), 기독교문화대상(2000) 수상.
- 평화의문화연구소 소장, 학술교양지 <본질과 현상>의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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