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공원 내에 있어서는 안 될 4.3 폭동 주모자들의 위패
제주 4.3 공원 내에 있어서는 안 될 4.3 폭동 주모자들의 위패
  • 미래한국
  • 승인 2015.04.0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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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평화공원의 대표 불량위패 104기 명단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에서 104명의 문제가 있는 위패를 추적하여 문제의 이유를 밝혀낸 것을 발췌한 것이다. 각종 자료와 증언을 통해 드러난 바로는 제주4.3평화공원의 불량위패는 최대 수 천여 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에서 자료조사와 채증을 통하여 수집한 불량위패 명단은 9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1) 남로당제주도당 경리부장(회계부장) 현복유

-제주자유수호협의회의 ‘제주도 4월3일은’ 3집 20쪽

“조천면 신흥리 현보규(34)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4권. 429쪽, ‘이제사 말햄수다’ ①, 255쪽

“1949년 2월1일….희생자는 노약자와 어린이였습니다. 이날 희생자 중 신흥리민은 현복유(玄福裕)의 모친(80대), 문윤현(여.61), 이윤문(여 60대)….

아들이, 남편이, 혹은 아버지가 입산했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대신 희생된 것이었다. 80대 노인인 현복유의 모친도 조천중학원 교사였던 현복유가 입산한 때문이었다.”

“현복유(조천면 신흥리)

• 일제 때 일본대학 수학, 8․15 후 들어옴
• 1946년 3월 이후 조천중학원장, 사회 가르침
• 1948년 도당 경리부장

※ 1949. 6.29.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143 (9-72)

“이 마을에는 무장대의 재정을 총괄하던 남로당의 거물 현복유(玄福裕 . 일명 보규‧寶奎)가 있었다. 그는 변호사시험에 합격, 서울 대법원에서 그를 불렀으나 남로당 관계자들이 고장을 위하고 대의를 위한다며 그를 붙잡았다. 그래서 그는 폭도들을 양성하다 시피 한 조천중학원의 교장이었고, 후일 폭도사령관 이덕구(李德九)는 부교장이었다. 현복유의 영향으로 많은 청년들은 좌익으로 휩쓸리고 말았다.”

-2011. 3.24. 신흥리 이용국 증언, 제주자유수호협의회의 ‘제주도의 4월3일은 ' 3집 366쪽-

 

2)남로당 제주도당 선전부장 현호경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45쪽

“성산면 성산리 현호경(38) 행방불명; ‘이제사 말햄수다’ 256쪽, 162쪽

• 현두길 부친으로 학교 직원이었음
• 1946년 쌀 사건으로 체포된 유일한 사람(* 제주도 건준, 성산면 대표 집 행위원,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선전부장)
• 주정공장을 운영하였음

“ 쌀사건으로 체포된 현호경 씨는 당시 향교 직원이었지. 그 분은 일제시대 무근성에 있던 주정공장을 운영했었어. 그때 그냥 잡혀가서 암살되고 시체도 없지. 그 분 아들이네 일본에 살았었지. 그분 아들이 현두길인데, 그 당시 당간부였지(주: 현두길은 1946. 9. 당 간부부장이었음)

- ‘이제사 말햄수다’ 162쪽 -

※ 현호경; 1949. 6.30.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212(10-09)

‘제주도의 4월3일은?’ 2집 37~39쪽에는

“ 독립운동가. 일본공산당 당원으로서 항일운동. 본관은 연주(延州)이며 사업가 현승오(玄承五)의 손자이며 현길홍(玄吉弘)의 차남, 성산읍 성산리 태생이다.

그의 형 현호진(玄好珍)도 일본에서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약칭 전협) 토건노조의 노동운동과 항일활동에 참여, 특히 김문준(金文準: 조천)의 영향을 받아 투쟁의 수위를 높였다. 또 누이 현호옥(玄好玉)도 전협 오사카(대판, 大阪)화학노조 부인부장으로 투쟁하던 중 체포되어 2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현호경은 가명으로 전태련(全泰連), 일본식 성씨로 마츠모도(송본․松本), 오오다니(대곡․大谷), 야마다(산전․山田) 등 다양하게 사용하며 지하운동에 임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오사카에서 토목공사의 노동자로 1932년 9월 일본공산당에 입당. 1933년 공산당 오사카시 동(東)지구 오르그로 시위원회(市委員會)의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4년 4월에 일경에 검거, 이때 ‘적기(赤旗’ 및 그 밖의 문서의 살포에 종사하면서 3월경 ‘적기’ 독자그룹을 조직하여 그 회원을 확대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따라서 1935년 1월 21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주거지는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동성구․東成區) 대금리정(大今里町)에 있었다. 당시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는 제주인은 약 4만 명에 이르고 매년 제주를 왕복하는 자가 3만 명이어서 생활이 안정하지 못하고 노동현장에서 방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도항자(渡航者)들은 대부분 오사카에 살았고, 항일 운동․노동운동에 관련되었다.

공산주의 운동으로는 김문준, 무정부주의 운동으로는 고순흠(高順欽)이 최고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으며 다음으로 조몽구(趙夢九), 김석송(金石松), 송성철(宋性徹), 김달준(金達俊), 강주호(姜周鎬), 현호경 등을 들 수 있다.

간사이(관서․關西)지방에서 사상 운동에 종사하는 제주인은 약 4백 명에 달하고 이들이 교포에 주는 영향은 대단히 컸다. 일제 당국에 의해 요시찰(要視察)․요주의(要注意) 인물로 분류되었다. 항상 미행과 감시를 받고 있던 제주 사람으로 산북(山北) 지방 사람은 80여 명이고 산남 사람은 25․6명 정도였다. 1933년에 현호경은 일본공산당 오사카위원회 책임자가 되었고 강주호 등도 간부가 되어 그 활동력은 일본인을 능가할 정도로 돋보였다. 그들이 투옥당하고 또 당국의 탄압이 심해져 1935년 이후의 공산당 활동은 차츰 궤멸되어 갔다.

그는 일제 말기 경방단(警防團)에 접근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은 바 있었으며 해방 후 귀향하여 한때 좌경활동을 하였고 이후 남로당 목포시당 책임자로 활동한 바 있다. 1949년 갑자기 암살당하였다.

- 김찬흡의 ‘20세기 제주인명사전’ 420~421쪽 -

 

3)남로당제주도당 부위원장 간부부장 이신호(일명이신우)
-‘제주도의 4월3일은?’ 5집 220~222쪽

"대정면 하모리 이신호(47) 사망;‘이제사 말햄수다 1’ 251쪽, ‘제주도의 4월3일은? 2집’ 33~34쪽

“이신호(李辛祜, 이신우‧ 李信祐로도 불림)

• 1931년 ‘농민테제사건’에 연루됨
• 1932년 ‘세화리 해녀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2년 구형 언도
• 대정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하다가 위원장으로 천거됨
• 1947년 3․1대회 후 검거되어 6개월형 언도
• 출옥 후 활동은 안 했으나 48년 10~11월경에 집 문앞에서 피살 됨

- ‘이제사 말햄수다’ 251쪽 -

“ • 이신우 씨도 모슬포 출신이지요? 그 지역 어느 분의 애기로는 국회의원에 출마만 했더라면 틀림없이 당선되었을 분이라고 하던데요.

그렇지. 그 외에 오대진, 강문석, 김달삼도 다 그 지역 출신이었지.”

- ‘이제사 말햄수다’ 161쪽 -

“ 난 제주도에 미군정이 온 뒷날 떠났어. 대정면에서도 죽어버린 이신우 선생하고 내가 갔어. 도청에서 미군정이 뭘 한다기에. 그럼 둘이서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을 모아가자고 서삼리에 들었어. 거긴가도 농번기라서 사람이 없어. 한림에 가보니 회의하고 있는데… 한 9명은 되어. 그래서 동촌인민위원회 책임자들허고 다 모이난 21인이 되어.

도청에 가니까 군정 그 사람덜 설명 듣고, 우리쪽 요건을 들어달라고 협력을 요청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우리쪽 요건들 들어주면 협력을 하겠다더군. 그 당시 이념은 그 사람덜은 명목뿐이지.” (해방직전 해안 감시대장)

-‘이제사 말햄수다’ 175쪽 -

* 남로당전남도당 제주도위원회 부위원장, 간부부장 등

- ‘4․3은 말한다 ①’ 535쪽 -

* ‘4․3은 말한다’에서는 이신호(李辛祜)로 불림.

• 대정면 건준(위원장 우영하‧禹寧夏) 부위원장, 행정부장 -위의 책 68쪽-
• 8‧15 이전 옥고를 치른 명단

이신호(李辛祜, 하모, 대정면 인민위부위원장)=징역 2년-위의 책 83쪽- • (이운방옹의 증언에 의하면 처음엔 입법의원으로 문도배와 제주읍의 김 택수가 선출됐으나 결격사유 문제가 생겨 김택수는 차점의 김시탁으로 교체됐다고 한다. 또 어떤 연유에서인지 남제주군에서도 각 면 대표 2명 씩 14명이 모여 모슬포의 이신호 등 2명을 입법의원으로 선출했으나 그 들은 곧 사퇴했다고 전한다.) -위의 책 189쪽 -

• 대정면의 3․1절 집회는 대정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운 6,000 명의 군중들로 대성황을 이룬 가운데 진행되었다. 가파도에서도 100 여명의 주민들이 어선을 타고 나와서 행사에 참여할 정도였다. 기념식은 이운방 의 사회로 대정중 교장 이도일과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벌 여 온 이신호 등의 연설로 진행되었다.

- 위의 책 289쪽-

“강일용은 1947년 3‧ 1시위 때 해방 후 대정면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주도하고 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을 맡았던 이신호(李辛祜, 이신우‧ 李信祐로도 불림)가 상모리 출신이어서 또래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신호가 연설하는 도중 미군에 의해 체포돼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이신호는 곧 풀려났다. 그러나 파업 등이 이어지면서 이 사건으로 6월 징역형으로 육지 형무소에서 복역했고 48년 11월 총살됐다.”

-2012. 9. 25. 강일용(22년생,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2리) 증언 -


4)남로당제주도당 인민해방군사령관 김의봉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0쪽

“조천면 와흘리 김의봉(28) 사망; ‘4·3은 말한다’ 4권. 424쪽

“무장은 군사부만 갖고 있었습니다. 군사부는 모두 4개 지대로 나뉘었는데 제1지대(조천면 관할)는 이덕구(신촌리 출신), 제2지대(구좌면)는 김대진(신촌리 출신), 제3지대(남원면)는 김의봉(金義奉. 와흘리 출신), 제4지대(대정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오아무개(대정면 출신)가 각각 맡았습니다. 이중 1지대만 1백 명 안팎이고, 나머지는 50 명 가량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김의봉 북제주군 와흘 출신. 인민유격대. 이덕구가 사살된 뒤 유격대원을 통솔하였고 각종 투쟁으로 인민군 진격에 호응하자는 정치사업 진행(인민유격대는 56년까지 활약).”

▲ 남로당제주도당 인민해방군사령관 김의봉의 위패. 제주4.3평화공원에는 이처럼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려했던 세력들의 위패가 버젓이 새겨져있다.

-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무장투쟁 ’ 인명목록 471쪽Ⅰ

‘이제사 말햄수다’ 1, 243쪽

“• 삼양 간이학교 졸업(4년제) • 일제 때 와흘리 청년회 단장으로 마을에서 신임을 쌓고 8․15 이후 와흘리장, 인민위원장을 겸함 • 입산 후 1949년 6.7. 이덕구가 체포되고 나서 이어 사령관이 됨.”

“동태운 총경 휘하 박원협 경위가 직접 지휘하는 사찰유격중대가 15일 하오 11시 30분경 조천면 와흘리 부근 산록에서 적의 군사총책 김의봉(金義奉)이가 지휘하는 약 20명의 무장공비를 포착, 약 40분간에 걸쳐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의 수괴 김의봉(조천면 와흘리 출신, 당 32년)과 중요 간부 강봉오(姜奉吾, 별명 강□수, 조천면 와흘리 출신, 28)외 여비 1명을 사살하고…”

-제주신보 1953년 4월 17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35쪽 -

 

5)남로당제주도당 인민해방군 참모장 김완식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1~22쪽

“조천면 북촌리 김완식(23)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4집. 94쪽

“1948년 6월16일 북촌리….하필 그 날에는 입산했던 청년 7~8명이 그들 표현대로라면 ‘휴가차’ 마을에 들어와 있었다. 그들의 리더는 무장대 참모장격인 김완식(金完植)이었다.(김완식은 무장대 핵심 간부로 훗날 유명한 ‘관음사’전투를 지휘했으며, 끝내 산에서 자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제사 말햄수다’ 1, 242쪽

“• 입산하여 무장군 참모장 역할 • ‘관음사 전투’ 책임자로 투장 중에 죽음
• 일제 때 해군 준위로 늘 포켓에 권총을 넣고 다녔다 함”

 

6) 북한 인민군 사단장 이원옥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41쪽

“조천면 북촌리 이원옥(29) 행방불명; ‘이제사 말햄수다 ①’ 252쪽

“ 이원옥(북촌리)

• 1947년 가을, 입산하여 연락임무를 띄고 1948년 10월 이북으로 감
• 한때 선장의 경험을 살려서 20일간 서쪽 경로로 배를 저어 20일만에 해주에 도착했다 함
• 이북에 있다가 6‧25 인민군 남하 때 사단장으로 내려옴
• 7천 명을 거느리고 낙동강 전투에서 사망.”
 

7)남로당제주도당 위원장 김달삼 비서실장 박태전
‘제주도의 4월3일은?’ 75~77쪽

“제주읍 영평리 박태전(23) 행방불명; 2011.3.22., 4.27. 이기형(李琪亨, 24년생,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백록회를 함께 하였던 박태전은 1947년 12월, 이기형의 집을 찾아와 그의 어머니에게 일본으로 간다며 인사했다. 이기형에게는 “내년 봄에 시끄러우니 삼촌(그의 어머니)을 모시고 육지로 피하라. 너는 실력이 있으니 취직도 손쉬울 것이다”라며 4‧3을 예상하여 제주를 떠나도록 간곡하게 권유했던 친구이다.

그런데 2연대 선무공작대 담당 김동근(金東根)소위가 밤중에 와선 “연대장이 찾는다”고 하여 함께 짚차에 올랐다. “박태전을 아느냐”고 김 소위가 묻자 “친구이고 일본에 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소위는 “친구”라는 답에 놀라며 “산에서 체포됐다”고 말했다.

함병선(咸炳善) 연대장은 “폭도들이 다량의 무기들을 은익했는데, 소재지를 알고 있는 것은 박태전 뿐”이라며 그를 설득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이기형은 “친구를 배반할 수 없다. 조건은 목숨을 살려달라”고 요청했다. 함 연대장은 “자백하면 살려준다”는 약속을 했다. 박태전이 있는 제주농고 수용소 천막에 들어서니 그는 혼자 수감되어 있었다. 머리와 수염이 마구 자라 봉두난발이었다. 다만 눈만은 동그랗게 뜨고 반짝반짝 빛났다.

“오래간만이다.” 박태전이 먼저 말을 걸었다. “귀순 삐라 잘 읽었다. 문장보고 너가 쓴 줄 알았다. 특히 달력 밑에다 귀순을 종용하는 글을 쓰는 아이디어는 너 아니면 누구도 흉내도 못 낸다”는 정겨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달력, 폭도들에게는 음력이 함께 적힌 달력이 정말 필요했고 선뜻 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일본에만 있는 줄 알았던 그를 보았을 때 이기형은 만감이 교차했다. 박태전은 이덕구가 사살된 후 폭도들의 모든 뒤처리를 혼자서 하고는 잡아가라는 듯 토벌대 앞에 나타나 체포된 때였다.

이기형은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박태전이가 일본에 가지 않고 산에 올라갔고 체포됐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쇠고기 불고기, 계란부침, 옥도미 생선구이 등 정성스런 도시락을 만들어 줬다.

이튿날 점심시간, 박태전은 한 숟가락을 뜨고는 눈물을 흘리며 “삼촌님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기형은 어렵게 운을 땠다. “무기류 묻은 곳을 알리면 너의 생명은 보장을 약속받았다” 고 말했다. 박은 눈을 치켜뜨며 도시락을 그에게 내던지며 “너도 친구냐, 개새끼 가라”고 처절한 고함을 질러댔다.

이기형은 “너의 신념이 늘 옳다고 생각하느냐. 그까짓 총은 미국에서는 몇 시간, 몇분 이면 만든다. 네가 살아온 22년을 생각하라. 22년이면 총 수백만정을 만들고도 남는다. 네가 묻어둔 총 몇 년이나 가겠느냐. 살아있어야 신념대로 사는 것 아니냐” 등으로 간절한 설득이 이어졌다.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3일 후 김동근 소위로부터 박이 “곰곰 생각해보니, 생명을 보증해 주겠다면 배반치 않겠다”며 무기류 숨긴 곳을 가리키겠다고 마음을 돌렸다는 것이다. 남제주군 쪽 3곳, 북제주군 쪽 2곳 등에서 찾아낸 무기류는 남국민학교에 쌓았는데 무려 2개 교실분이었다.

그로부터 3개월쯤 후 교원양성소 직원실에 새 군복으로 말쑥하게 입은 박태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연대장과 함께 간다”고 말했다.

몇 년 후 김동근 소령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 친구 대단한 놈입니다. 튀었습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2연대와 함께 청진까지 북진하다 중공군이 몰려오자 어느 틈에 도망친 것이다.

10여년이 지난 오현고 재직시절, 북교 교사로 함께 있었던 고봉식 오현고 교장이 오현고 동창회 초청으로 일본을 다녀오고서는 그에게 “박태전이 살아있다”고 말했다. 형형한 눈빛 때문에 박을 기억해 내는 친지들에게 “너 박아있다”고 말했다. 형형한 눈빛 때문에 박을 기억해 내는 친지들에게 “너 박태전 아니냐 ”하면 유창한 일본어로 “나는 일본인”이라고 신분을 감춘다는 것이다. 주로 북한에 있으나 일본에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친구사이에는 “너는 제2 6‧25가 있어도 박태전이 있으니 무사할 것”이란 농담을 자주 듣곤 했다.”

0. 키는 작고(158~160cm) 왜소한 체구. 머리가 비상함. 일제 때 일본에서 공부한 인테리. 북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0. 4·3 당시 26세 정도. 김달삼 비서장을 함. 후에 귀순, 전향하여 귀순공작대를 조직, 전 섬을 돌며 귀순 권고 삐라를 뿌림. 당시 제주 주둔 헌병대장과는 일본 유학시 같은 학교 동창이었다고 함 ”

-‘이제사 말햄수다’ 2집 284쪽 -

 

8) 남로당 서남부지역 인민유격대 총책 고두옥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19쪽

“중문면 중문리 고두옥(27)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4집. 248쪽

“1948년 11월5일…. 이중 강정생과 고산원은 각각 고두옥(高斗玉)의 어머니와 여동생이다. 9연대 군인이었던 고두옥이 부대를 탈영해 무장대 활동을 하는 바람에 그 가족이 대신 보복학살을 당한 것이었다. 한 주민은 ‘일본군 경력도 있는 고두옥은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데도 글씨를 잘 썼고, 대학 졸업자인 것처럼 행세해 서울의 동양방적에 취직할 정도로 당돌한 사람이었다’며 ‘입산한 후에는 애월면부터 서귀면까지의 무장대 책임자였다’고 말했다. 고두옥과, 아들을 따라 산으로 피신했던 그의 아버지 고갑부(高甲富)는 후에 산에서 토벌대에게 잡혀 총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


9)제주지검 프락치 이재만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17~18쪽

“애월면 신엄리 이재만(31) 사망; ‘4·3은 말한다’ 4권. 142쪽

“4․3취재반은 …. 그런 작업 끝에 이재만(李在萬.33)과 이창우(李昌佑.26) 형제를 찾아냈다. 신엄리 출신인 이재만은 제주지방검찰청 소속 검사보의 위치에 있다가 입산한 자였다. 또 그의 동생 이창우는 특별수사대 소속의 경찰관으로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검속된 후 행방불명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재만 검사의 입산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미뤄볼 때 프락치사건이 노출되면서 도주 입산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유추된다. 이재만은 일본 중앙대를 중퇴. 군산부청에 근무하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고향에 돌아와 애월초등학교 교사, 해방 후에는 제주도에서 미군정 장관 통역관, 제주도에서 처음 시행한 검사보 시험에 5명과 함께 합격했다. 셋째 형(이창우)과 8촌 손자 이성지는 둘 다 경찰관으로 재직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간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수장을 시켰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물론 두 분의 시신은 여태껏 찾지 못했습니다.”

“이재만은 애월국교 교사로 재직하기도 했고, 해방 후에는 제주에서 미군정관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제주도에서 처음 시행한 검사보 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검사보로 있다가 입산 활동 중 사망하였다.”

-4‧3교육피해조사보고서 87쪽. -

“ 여기서도 산에 올라간 사람이 몇 분 있었어. 우두머리는 신엄에 있었주게. 백창원, 이재만, 장남진 씨 이분들이 우두머리격인 사람들인데, 내려와서 우리 아버지에게 같이 올라가자고 설교하기도 하고 때리기도 했지. 또 박찬종 씨도 있구나. 뒤에 경찰에 사살당했지만, 이 사람도 큰 우두머리라. 이재만이는 44식 총 세워놩 위협하며 설교했다고. ”창인아, 내 말 안 들을라?“, ”자식아, 내말 들어라“ 허멍…”

- ‘이제사 말햄수다 2’ 160쪽 -


“ 1949년 12월 12일 법조계 인사들이 처형되었다. 이에 앞서 각 기관 적화음모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군 수사 당국은 법조계에도 의심을 품던 중 이재만(李在萬) 검찰관 대리가 잠적하자 최원순(崔元淳) 법원장, 김방순(金邦順) 검찰관 대리, 송두현(宋斗鉉) 법원서기장, 김진영, 양성두, 홍인표 등 법원직원을 농업학교 천막수용소로 끌고 가서 최원순 법원장만 석방하고 나머지는 모두 직결처분했다. 이 처형을 주도 지휘한 것은 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卓聖綠) 대위였다. 그는 경남 진주출신으로 마약중독자였다. 그리고 이재만 검찰관 대리는 금덕리 위 노꼬메 오름 굴속에서 잡혀 광령리 ‘왜왓’에서 군인들에 의해 총살되었다. <4‧ 3은 말한다 310, 311>”

-‘도제50년 제주실록’ 46쪽 -

“이와 관련 ‘제주도 피의 역사’에는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경찰관들이 48년 11월 7일을 기해 봉기하기로 하였는데, 그중 밀고자가 있어 사전에 50여명의 경찰관이 체포되어 중합(제주읍 산지항 부근)에서 한꺼번에 수장되었다.…’는 내용도 있는데, 세상에는 비밀이란게 때로 쉽게 노출되는 경우도 있다.

이 수장과 관련하여 1960년 6월에 국회 특별조사팀이 내려 왔을 때 ‘양민학살 진상규명신고서’를 낸 애월면 신엄리의 이경무(李敬武)씨는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이성지(李成枝), 22세, 학살직전 수감처는 제주경찰서, 제주경찰서 제주감찰청 통신과 무선계에 근무중인 1948년 10월 31일 검속되어 11월 5일 학살되었음. 죄과는 전무한 바 피해자의 친척에 폭도가 있어서 동지라는 혐의를 걸었음. 사체는 행방불명이녀 수장되었다는 소문이 있음. 사체행방을 조사해 주기 바람.

여기서 이경무 씨가 ‘죄는 전무하나 친척에 폭도가 있어서…’라는 주장은 상당히 포괄적이긴 하지만 아마도 이성지의 할아버지뻘 되는 이재만(33), 이창우(李昌佑, 26) 형제를 지칭하는 듯하다. 이재만은 현직 검사로써, 경찰과 서청이 잡아들이는 억울한 양민들을 무죄방면한 경우가 많아서, 경찰과 서청으로부터 ‘빨갱이 검사’라는 누명을 쓰고, 항상 복수하겠다는 협박에 시달렸는데, 얼마나 괴로웠으면 ‘검은 개놈들 다 죽이겠다’며 일본도를 들고 가출하여 입산(入山)했던 장본인이다. 그의 입산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이 프락지 사건 직후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직도 이름 밝히기를 꺼려하는 이재만 검사의 막내동생 이모(현 67세) 할아버지는 이렇게 증언하였다고 한다.

‘큰 형은 일제 때 일본 중앙대학교를 중퇴하고 군산부청에 근무하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고향에 내려와 애월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당시 나는 군산에 살았는데, 큰형(이재만)이 산에 올랐다가 죽었다는 애기를 들었다. 시신은 일가 어른들이 찾아와 매장했다. 셋째형(이창우)와 8촌 손자뻘 되는 이성지 둘 다 경찰관이었는데, 경찰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수장시켰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두 분이 시신은 여태껏 찾지 못했지요.’

-오종규의 ‘제주도 4‧3사건 봉기인가 폭동인가 그 진상은 이렇다’ 201쪽-

 

10) 경찰 프락치 송창염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19쪽

“제주읍 오라리 송창염(26) 사망; ‘4·3은 말한다’ 4집. 142~143쪽

“경찰 프락치사건에 연루된 특별수사대원 가운데는 제주읍 오라리 출신 송창염(宋昌琰) 형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송 형사는 프락치 사건이 발각된 직후 자신의 99식 장총을 갖고 입산했다가 뒤늦게 경찰 토벌작전에 걸려 생포됐다.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특별수사대에 끌려와 어제의 동료 형사로부터 취조를 받는 비운을 겪었다.”

 

11)끝까지 항거한 인민유격대원 변창희
-‘제주도의 4월3일은?’ 4집 165~166쪽

“제주읍 이호리 변창희(18) 사망; 제주신보 1956년 4월 5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82~283쪽

“3일 하오 잔비를 포착하고 전과를 거두었다는 보고에 접한 신(辛相黙) 경찰국장은 즉시 경찰국을 비롯한 관하 각서에 비상소집을 명령, 전 경찰관을 도원하고 광범위에 걸친 색비전을 개시하였으며 신 국장은 연(延) 사찰과장을 대동, 교전지구로 출동하였다.

만 2년만에 올린 토비(討匪) 전과는 전 경찰관의 신경에 예민하게 자극을 주고 있다. 4일 아침 김녕지서에 있는 신 국장은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자못 쾌활한 어조로 전과 내용을 밝히면서 전과를 거둔 7명의 소대원에게 부두목 정권수(鄭權洙)에 현상금으로 걸었던 35만환을 지출하고 용감히 정(鄭)을 사살한 고태흥(高泰興) 순경을 특진시키겠다고 말하였다.

경찰은 색비전을 강행하는 한편 귀순하면 생명을 보장한다는 약속에 변동은 없다.

전화인터뷰 가운데 신 국장은 대항하지 말고 손을 들었으면 살아서 하산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부언하였다.

3일 잔비와의 교전에서 경찰의 피해는 전혀 없다. 4명으로 줄어든 잔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두목=김성규(金成奎, 중문면 색달리, 36세)
△오원권(吳元權, 구좌면 송당리, 39세)
△변창희(邊昌熙, 제주시 이호동, 22세)
△한순애(韓順愛, 여, 조천면 와산리, 23세) ”

“한달 후인 1954년 2월 13일에 조화옥(여, 당 19세)이 귀순함으로써 무장대 세력은 5명(남 4, 여 1)과 무기 3정이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귀순한 조화옥은 “1개월 전부터 식량이 완전 두절되어 소채‧ 감저‧ 마필육 등으로 연명하고 있다. 부락은 경비망이 무서워 접근을 못하였으며, 자신이 포함된 4명의 무장대는 굴속도 불안하여 가시덤불 속에 돌담을 쌓고 1매의 모포를 덮고 취침하였다. 잔비는 5명이고 무장은 소총 3정인데, 부상단한 김성규가 소총 1정을 갖고 한순애와 같이 행동하고 있고 정권수, 오원권, 변창희 등 3명이 소총 2정을 갖고 별도로 행동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간의 어려웠던 생활상과 내부실정을 실토하였다.”

-‘제주도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53쪽 -

“…지난 21일 식량을 구하려고 제주시 월포동(* 월평동의 오기) 모처에 잠복 중이던 소위 한라산 인민군 사령관의 처 한순애(韓順愛, 22)를 생포한 현지 경찰에서는 한(韓)의 진술에 의하여 27일 오후 5시 50분경 전기 사령관 김성규(金成奎 , 39)와 전투대 책임자 현창희(玄昌熙, 22, 변창희의 오기) 양 명을 한라산 산록에서 교전 끝에 사살하고 나머지 한 명에 대한 포착작전을 방금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

-조선일보 1957년 3월 29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93쪽 -


12) 북한 인민군(소대장급) 김기추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51쪽

“애월면 납읍리 김기추(19) 행방불명; 2006. 2. 10. 진희백(31년생, 제주시 애월읍 납읍리 2398) 증언

“1951년 겨울, 부산시 서면 포로수용소.…

그 포로가 다름 아닌 우리고향 출신이며 본인보다 한 살 위이고 초등학교 1년 선배인 김기추였습니다.

의외였지만 고향사람을 타향에서 만나서 한편 반갑기고 하고 ‘너 김기추 아니냐” 라고 물었는데 그도 나를 알아보고 ‘그렇다’고 대답하여 서로 신원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는 포로 중에서도 똑똑해서 소대장급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낙동강 전투까지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었다’는 말을 했고,…김기추의 친형인 김기전도 같은 포로로 이곳에 수용돼 있음을 알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김기전은 반공포로가 되고, 김기추는 친형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상전향을 하지 않아 공산포로로 남게되자, 김기전은 고향출신 군인(12명)들을 만날 적마다 “내 동생을 반공포로가 되도록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에 따라 몇 번 설득을 했으나 김기추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접촉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후 형은 석방되어 귀향했고, 김기추의 행방은 불명… 공산포로와 함께 북한으로 갔다고 생각합니다.”

 

13)북한 인민군 김태봉
-‘북조선에서 사라진 친구와 나의 이야기’ 하기와라 료, 1998. 일본문예춘추사
-일본에서 김봉현과 ‘제주도인민들들의 유격투쟁사’를 공저한 김민주임.
-김태봉은 여러개의 가명을 사용했으며 김민주는 그중 하나.
-제일교포로 4.3위령제 60주년에서 생존자로 나타나 위패 자진 철거.

 

14)남로당제주도당 지도부 백창원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48쪽

애월면 ″ 강수헌(28) 행방불명; 위의 책. ″

“애월면 고성리는 …. 이 마을 출신 중에는 구엄국교 교사를 지냈던 문기호(文基好)가 4‧3 초기부터 입산해 무장대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에 항의해 사표를 제출했던 중문지서 순경 강수헌(姜樹憲, 이명 강려생‧姜呂生)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그는 곧 입산해 무장대원이 됐다.”

애월면 신엄리 백창원(41) 행방불명; 2008.5.26. 김여만(19년생. 제주시 719-1. 전 신엄리 의용소방대장, 대한청년단 애월면 단장, 신엄리 단장, 신엄지서 후원회장) 증언

“우리동네 출신이며 나와 신우사립보통학교 동창이고 나보다 3세 위인 이재만(제주검찰 검사보, 남로당 신엄리책)이 제주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면회해달라는 요청이 와 만났다. 그는 “그 날 일은 남로당 애월면책인 신엄리 출신 백창원이가 18명을 인솔하고 가서 저지른 일이며 나는 그날 살인하지 않았다. 다만 이순일 집에 방화하는 데는 내가 참여했다. 여러 가지로 미안하다”고 사정했다.”

“한라산의 무장대 60여 명은 전쟁발발 소식을 듣고 7월 어느날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고승옥, 백창원, 송원병 등 지도부에 있던 3명은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으니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에 나가야 한다고’고 주장했으나 젊은이들은 ‘4.3을 일으킨 영웅적 전통을 소극저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42쪽


15) 인민재판 주재자 이보택
-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수정의견 접수내용’ <1> 47~48, 52~55쪽 2003. 9.

 

16)박진경 대령 암살범 강자규 중사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59쪽

“ 애월면 상귀리 강자규(28)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③’ 205쪽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의 혐의자들이 속속 체포됐다. M-1 소총으로 직접 박 대령을 쏜 범인은 부산 5연대에서 파견됐던 손선호(孫善鎬, 당시 22세) 하사로 밝혀졌다. 이밖에도 암살 동조자들로 양회천(梁會千, 25) 이등상사, 신상우(申尙雨, 20) 일등중사, 강자규(姜子奎, 22) 중사, 배경용(裵敬用, 19) 하사 등이 체포됐다.”

‘제주4.3사건의 진상’ 375쪽 2012.9. 10. 현대사포럼에도 관련 자료 있음

-‘제주4.3사건의진상’을 저술한 이선교 목사는 강자규를 동명이인이라 주장.
-사실 확인시까지 강자규는 불량위패 명단에서 보류함.


17) 과도 입법의원, 제주건준 집행위원 김시택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55쪽,

“조천면 조천리 김시택(46) 사망; 2011.1.7. 김응삼(29년생, 제주시 이도2동) 증언
“김시택과 김시탁은 동일인으로 일본으로 밀항했다.

1945년 9월10일 결성된 제주건국준비위원회 조천면 대표로 집행위원이 됐을 때의 이름을 김시택이었다.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장으로 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으로 문도배와 함께 선출됐으나 12월 12일 개원식에 참석치 않고 사퇴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79쪽)

그는 1949년에 일본으로 밀항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딸 세민은 북한에서 아나운서로 활약했고 세철, 세종 두 아들도 북한에 있고 이 중 한명은 동구권 북한 대사를 지냈다.”


18) 3·1 파업 경찰관, 입산 무장대원 강수헌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17쪽

애월면 고성리 강수헌(28) 행방불명;‘4·3은 말한다’④ 81쪽

“애월면 고성리는 …. 이 마을 출신 중에는 구엄국교 교사를 지냈던 문기호(文基好)가 4‧3 초기부터 입산해 무장대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에 항의해 사표를 제출했던 중문지서 순경 강수헌(姜樹憲, 이명 강려생‧姜呂生)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그는 곧 입산해 무장대원이 됐다.”


19) 41명 탈영 주도 강정호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2쪽

“성산면 오조리 강정호(22) 행방불명;‘4·3은 말한다’ ③ 114쪽

“입산자 가운데는 이밖에 대정면 안성리 출신의 강기창(姜基昌, 3기생), 성산면 오조리 출신의 강정호(4기생), 남원 출신의 김태흥(金泰興)도 포함됐다.

9연대에서 탈영한 41명의 병사들이 대정지서에 나타난 것은 5월 20일 밤 11시 30분께 였다.”

“김달삼은 문상길에게 즉시 탈영을 시키라고 지령하였다. 11연대 1대대 3중대장 문상길에게서 지령을 받은 통신대 최 상사도 즉시 행동에 옮겼다.

[5월 20일 저녁을 먹고 특수야간훈련으로 위장하여 소대원 전원 입산한다. 입산 루트는 부대 밖을 나갈 때 안내원이 있을 것이다. 1차 작전은 대정지서와 서귀포경찰서를 기습한 후 입산한다. 즉시 행동에 옮기기 바란다.]

최상사는 대정 출신 강기창과 성산면의 강정호, 남원면의 김태홍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 이선교의 ‘제주4‧3사건의 진상’ 164쪽 -

 

20)다랑쉬굴 아지트 폭도 대장 오달용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4쪽

구좌면 상도리 오달용(21) 사망;‘4·3은 말한다 ⑤’ 56쪽

“입산자 오달용(吳達用)의 형 오달인(吳達仁)은 제주경찰서 수사계장이었다. 결국 오달인은 경찰을 떠나게 됐고 고향에 있던 아버지 오종현(吳宗炫, 60), 어머니 고두복(高斗福, 62), 형 오달중(吳達中, 43) 아내(22)는 토벌대에게 희생됐다.”

“1948년 11월8일 밤 종달리 김호준 등 5명을 납치 입산시키고 당일 김호준은 공비들로부터 살해됐고 정권수의 지시로 재산자 10여 명을 지위했다.”

-북한이 쓴 ‘제주4‧3사건-3’ , 지만원 ‘제주 4‧3’ -

“오달용은 구좌면 일대 폭도사령관 정권수 밑에서 구좌면의 동부지구를 지휘하던 폭도대장. 도망쳤기에 당연히 숙청 대상이었으나 동창 오달용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다짐을 받고 그를 용서해줘 살아났다. 은월봉 근처에서 20일간 전전하다 다랑쉬굴로 가 10여일 머물렀다. 다랑쉬굴 속에는 정권수와 오달용의 지시를 받고 있던 종달리 출신 강태용(33), 고태원(25), 박봉관(31), 함명립(19), 고순환(26) 고순경(20) 형제, 고두만(20) 등과 하도리의 여자 3명이 있었다. 여자 중 이성란(19)은 구좌읍인민위원회(위원장 문도배)의 부위원장이었던 오문규의 며느리. 오문규는 3․1 사건이후 경찰의 수배를 받자 일본으로 밀항했다. 강태용의 경우 그의 형 강태관이 해방 전부터 이북에서 살아 그곳 인민위원회에서 요직을 맡고 있어 경찰의 주목을 받자 입산했다. 고태원은 당초 우익이었다. 대동청년단 단장직을 놓고 알력이 있다 오지봉이 단장이 되자 입산했다. 종달리 출신 입산자는 다랑쉬굴에서 대부분 숨졌다. 오원홍도 입산자였다.”

-2011. 9. 7. 채정옥(26년생, 구좌읍 종달리) 증언, ‘제주도의 4월3일은? 4집 173쪽 -


21)인민위 간부였던 폭도 대장 유신출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9쪽

“대정면 인성리 류신출(36) 행방불명;‘4·3은 말한다 ⑤’ 305쪽

“인민위 간부라 해서 꼭 무장대가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정고을에서는 비교적 일치했다. 인민위 간부 출신 무장대로는 유신출(柳辛出, 인성리, 37)이 유명하다. 그 역시 일제 때 일본 대판에서 노동운동을 하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사람이다. 유신출은 1948년 5월 10일 무릉지서 습격에 가담했다가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5월 10일 저녁, 대정면당 소속 무장대원들에 의해 무릉지서가 불에 타고경찰관 3명이 죽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무장대원이었던 유신출이 폭약(오린당이란 사제 폭탄의 일종)을 잘못 터뜨려 죽는다.”

-‘4·3 장정 6’ 47~48쪽

“그 때 내 손으로 오린당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다이나마이트보다 더 위력이 강한거라. 오린당이 어떤 거냐면 왜정시대에 일본놈들이 지뢰(*기뢰)를 바다에 띄우면 배가 지나가다가 터지게 되는 거라. 이것을 구해다가 폭탄을 만들었는데, 노랑한 오린당이라고 한 그 약을 솜을 넣은 깡토에 넣고 쇠조각을 넣고, 솜을 깔고 또 그 위에 오린당을 놓아서 다진 다음에 그 끝에 심지를 박는 거지. 심지는 일정허지 않거든, 왜냐하면 폭발하기 전에 시간 여유를 두어야 할 때는 길게 하는 것이고, 붙이면서 바로 던질 것이면 짧게 하는 것이지.”

-‘4·3 장정 6’ 75쪽


22)인민해방군 지도부 송원병
-‘제주도의 4월3일은?’ 4집 158쪽

“대정면 보성리 송원병(35) 행방불명;‘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42 쪽

“한라산의 무장대 60여명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어느 날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한다. 이 때 고승옥, 백창원, 송원병 등 지도부에 있던 3명은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으니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젊은이들은 ‘4․3을 일으킨 영웅적 전통을 소극적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날 밤에 허영삼, 김성규 등이 주동이 되어 고승옥 등 세 사람을 포박했고, 이튿날에는 인민재판에 부쳐 살해하였다.”

“1920년대 후반기 이후 야학이 사상성, 정치성을 띠게 됨에 따라 일제의 탄압도 거세어 졌다. 위의 두 번째 노래는 20년대 말~30년대에 걸쳐 불리워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성리의 송원병, 김두옥, 보성리의 조석두 등 각 부락 단위로 있었던 야학의 교사들 중에는 4·3 항쟁이 발발하자 입산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역시 부락민들에게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4·3장정 6’ 24쪽 -

 

23)총파업 투쟁위원, 유격대 전투 지휘자 김상훈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61쪽

“제주읍 이호리 김상훈(20) 사망; 이선교의 ‘제주4‧ 3사건의 진상’ 357쪽

“제주시 이호동 김상훈은 제주민전 명예의장으로 총살된 자인데 희생자 명단 367쪽에 있다.”

“ 김상훈(金相訓) 제주도 총파업 투쟁위원. 유격대 전투 지휘자. 53년 3월 11일 동료 4명과 함께 사살당함.”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민중항쟁 Ⅰ’ 인명목록 469쪽 -


24) 경북 예천 경찰관 제주 파견, 입산 경찰 윤상근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67~168쪽

타지방 경북 윤상근(26) 행방불명; 한라일보 2003년 8월 13일자 김 창후 한라일보 칼럼

“인사발령부에는 윤씨의 부친 윤모 순경을 1947년 5월 6일자로 제주경찰감찰청에 다른 동료 몇 명과 근무를 명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윤씨는 덧붙였다. “… 어머님이 늘상 애기했던, 아버님이 제주도로 내려간 몇 달 후인 8월경(제주도) 조천지서에서 (경상북고) 예천경찰서 개포지서로 전화해 아버님이 조천지서 경찰관 12명과 함께 행방불명됐다고 알려줬다는 것과 이웃 면 출신으로 제주도에서 군 복무를 하던 박모씨가 우리 집을 찾아와 윤순경은 다른 수명의 경찰과 근무지를 이탈했다 6일만에 체포돼 9월 1일 총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고 말해줬다는 사실 외에 말이지요”…

그때 나는 애기를 듣고 소위 ‘4‧ 3 수형인명부’를 확인한 결과, 부친은 1949년 6월 30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10월 2일 다른 2백48명과 함께 당시 제주공항 바닷가에서 총살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반드시 희생자 신고를 하도록 당부했었다.”

※윤상근; 1949. 6. 30.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209(10-06)


25)무장대 지대장 김만옥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28쪽

“애월면 하귀리 김만옥(20) 사망; 2012. 6. 26. 장갑순(30년생,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증언

“장갑순은 그의 부친이 워낙 엄격해 동창은 물론 또래들과 놀지를 못했다. 그가 놀기를 좋아해 또래들과 함께 놀았다면 좌익 활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옆집에 살던 1살 아래 김만옥(20)은 폭도의 작전 참모 역할을 했다. 김만옥의 형 김만두는 월북해 생사를 모른다. 그와 동갑인 양명원의 아버지는 양군옥으로 애월면 인민위원장을 한 골수 좌파이다. 양명원의 형인 양진원(19)은 부친의 영향으로 좌익 활동을 하였다.

장갑순의 오촌 숙부 장재선(32)은 경찰관 시험에 합격했다는 이유로 폭도로부터 살해됐다.”

※ 김만옥 : 제1지대장

“1951년 3월의 무장대 조직은 사령관 허영삼(남로당 제주도 당책 겸임, 안덕 출신), 유격대 부대책 김태길(가명 문호철), 작전 참모 유모씨(이름 미상, 대구 출신), 훈련관 모씨(성명 미상) 등과 제11지대(김영찬, 14명으로 3개조), 제50지대(고인수, 가명은 소형삼, 18명으로 3개조), 제1지대(김만옥, 14명으로 3개조), 제7지대(문도공, 14명으로 3개조) 등 총 64명으로 지휘부와 4개지대로 편성되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43쪽 -


26) 4·3 때 동료경관 납치한 경관 장두백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31쪽

“제주읍 도두리 장두백(21)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②’ 40쪽, ‘4‧3진상조사보고서’ 173쪽

“함덕지서에서는 이날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습격은 없었고 다만 장모 순경 등 경찰관 2명이 집에서 나간 뒤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던졌다. 이에 대해서는 무장대에 의해 납치됐다는 설과 경찰관 스스로 ‘입산’했다는 2가지 설이 있다. 많은 증언자들은 후자 쪽에 비중을 두어 이야기 하였다. 그날 행방을 감춘 경찰관 가운데 장 순경의 겨우 나중에 산쪽에 가담해서 활약하는 모습을 봤다는 증언도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장 순경이 동료 경찰관을 설득시켜 같이 산으로 올라갔거나, 혹은 동료를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함덕지서에는 이날 무장대에 의한 직접적인 공격이 없었지만 경찰관 2명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관해서는 무장대와 연계된 경찰관 1명이 다른 경찰관 1명을 납치해 무장대 합류했다는 설이 있는데, 무장대 측 자료에도 그렇게 표현되어 있다.”

“함덕지서- 아부대 약 40명이 99식 총 2정으로 포위 습격. 먼저 서내(署內) 1명 프락치에게 연락하여 탈출케 한 후 그 소개로 개집을 습격하여 개 1명을 포로했든바 그 처가 지서로 달려가면석 고함을 지름으로 인하여 사전 발각되어 퇴각.

귀도(歸途)에 대청원(大靑員) 3명을 포로로 하고(아지트에 귀환한 후 개전시킨 후 석방) 뒤이어 서청(西靑) 숙사를 습격, 서청 5명을 포로한 후 포로 경관 1명과 서청 5명 중 4명을 총살하고 서청에 취사해 주든 1명은 송당리민이었음으로 개전시킨 후 인민군(人民軍) 취사번(炊事番)으로 채용”

-‘한라산은 알고 있다’ 62~63쪽, ‘제주도의 4월3일은? 1집’ 358~359쪽

“4‧ 3 기간 동안 측후소에 다니는 3살 위 큰 형 강경택이 무사했고 9촌숙인 강응지(28)만이 정월 명절 부근 폭도 습격 이튿날, 도두국교 박원일 교장 등 10여 명이 토벌대에 의해 총살될 때 희생됐다. 다만 작은 처남 장두백(21)이 함덕지서 경찰관으로 있다가 선흘리 지경에서 죽었다. 이 장두백이 4‧ 3 당일 폭도들이 함덕지서 습격 때 입산한 장 순경이다.”

-2013. 4. 10. 강경하(27년생, 제주시 도두리) 증언


27) 폭도로 있다, 인민군과 해주경찰서장된 현만호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55~156쪽

“제주읍 노형리 현만호(20) 행방불명; 2013. 5. 28. 강원배(37년생,

제주시 노형동) 증언

“ 48년 11월 29일 광령 일대에서 토벌하러 갔던 군인들이 노형국교 쪽에서부터 차례차례로 불을 질렀다. 당초 노형은 소개 대상지역에서 제외돼 불을 질러 소개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노형을 지나는 길은 토벌대의 차량이 지나지 못하도록 땅을 파고 돌을 굴려 차량통행을 막아 폭도의 소굴임을 내보였기에 군인들은 소개토록 불을 지른 것이다. 이때 굴묵이(느티나무)로 집이 지어져 마루는 얼굴이 거울처럼 내비칠 정도의 6칸 집이 불탔다. 불탄 집에서는 사흘간이나 연기가 피어올랐다. 비극은 강원배의 할아버지가 불을 끄려다 군인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떴다. 강원배는 4‧3 희생자로 신고하지 않았다. 희생자에 폭도들이 있는 한 신고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노형 월랑은 양상집과 현만호가 좌파의 핵심 인물이다. 양상집은 수배령을 피해 육지로 나갔고 한 짓이 두려워 고향에도 오지 못하고 이호에서 살다 죽었다. 현만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감형이 된 듯, 6‧25 때 인민군과 함께 하다 해주경찰서장까지 했다는 것이 조총련계 재일동포의 입에서 전해졌다. 현만호를 포함 노형 출신 12명이 북한에 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만호;1949. 6. 28.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901(7-30)


28) 고성리 폭도 문기호

강병옥은 이때 형과 아버지를 잃고 그의 슬픔은 날로 커졌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것은 구엄초교 교사였던 문기호(24, 고성출신)라는 정보를 갖고 있었다. 강병옥의 슬픈 모습 눈여겨 보던 이집 고태영의 할머니가 군인에게 부탁했다. 문기호가 잡히거든 꼭 연락을 해주도록 했다. 문기호가 잡혔다.

49년 5~6월쯤 강병옥이 문기호에게 다그치자 ‘나는 죽이지 않았다. 대장(영락)에게 유수암(금덕)으로 양자를 온 양00(30)이가 죽였다’고 말했다. 그의 부친 시신은 형제봉(노꼬메 오름) 자락 국유지인 속칭 ‘덩어리’밭 남쪽 밭에 암매장됐다고 하여 약도를 그렸다. 신엄지서에 가 그간의 사정을 말하자 지서에서는 강병옥에게 다시 한번 약도를 그려 오도록 했다. 문기호에게 또 한번 약도를 그리도록 하자 처음 약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엄지서가 나서 경찰과 의용 경찰, 마을 어른과 청년 등이 수색에 나섰다. 그려진 약도에 따라 찾던 중 풀이 무성한 곳이 나왔다. 그 풀을 뽑자 풀과 함께 손톱이 묻어 나왔다. 땅을 파들어 가자 신고 갔던 신발인 나왔다. 이윽고 강위조 시신이 드러났다. 총베(말꼬리로 만든 끈)로 강위조의 목을 일곱 번이나 감아 목졸라 죽인 것으로 확인됐다.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형과 아버지를 잃었다

- 강 병 옥 ( 31년생, 제주시 애월읍 용흥리)

-2012. 7. 24. 증언


28) 북촌리 인민위 위원장, 남로당 책임자 이용선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41쪽

“조천면 북촌리 이용선(40) 행방불명; ‘이제사 말햄수다 ①’ 251쪽

“이용선(북촌리)

• 일제 때 일본에서 한때 메리야스공장에서 일함
• 외항선 선장으로 제주와 일본을 자주 왕래함
• 8․15이후 북촌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세포위원장 겸임
• 북촌리 당 책임자
• 1947년 가을 입산함
• 1949년 봄, 체포됨
• 1949년 7.21일 공판에서 ‘무기’로 마포형무소에 있다가 전향하여 광주 형무소로 이감되던 중 6․25전쟁이 나서 학살됨.”

※이용선; 1949. 6.29.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077(9-06)


29) 북촌포구에서 우도지서장 살해한 김진태
-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63~64쪽

“조천면 북촌리 김진태(20) 사망; ‘이제사 말햄수다 ①’ 245쪽

“김진태(당시 20세, 북촌)

• 49년 5월 체포 후 ‘민보단’에 의해 대창으로 갈갈이 찢겨 죽음
• 입산 후 군사부에서 활동
• 조천중학원 학생. ”

“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1948년 6월15일(음 5월 9일, * ‘4․3은 말한다’ 등은 6월16일) 북촌 포구사건이, 몸서리치게 악몽에 시달렸던 그날의 일들이 그의 뇌리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기 때문이다. 김진태 그는 그의 앞에서 우도지서주임이었던 양태수 경사를 죽였던 인물이다. 그를 발길로 얼굴을 차 바다로 빠뜨린 자이고, 생을 포기하게 이르도록 한 자이다.…

3명 중 2명이 임검하겠다고 배에 올라 양 경사가 있는 선실로 내려갔다. 이어 그들 중 김진태가 양 경사의 총구를 붙잡고 칼빈총을 뺏으려 들었다. 다른 한 명은 진 순경의 4-4식 소총을 뺏으려 했다. 양 경사는 다툼 속에 이미 장전된 총을 쏘았으나 그 총알은 배 바닥을 뚫었다. 김진태는 칼빈총의 탄창을 빼버렸다. 총소리를 듣고 선창에 있던 폭도가 양 경사를 권총으로 즉사시키고는 선실로 내려와 진 순경을 향해 발사했다. 진 순경도 쓰러졌다. 그들은 경찰관의 총기를 뺏아 들고 김진태는 김덕선의 얼굴을 발길로 내리 차 배 밖 바다로 떨어뜨렸다. 승객을 모두 배에서 내리도록 했다. 20여명의 청년들이 그들을 에워싸 양손을 묶어 포박하고 주먹질을 했다.”

- 2011. 6.30. 김덕선 (28년생, 우도면 출신, 서귀포시 서귀동) -


30) 애월면 일대 남로당 및 인민해방군 전파자 문두희 교사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43쪽

“애월면 고성리 문두희(44) 사망; 4․3사건 교육계피해조사보고서 77쪽, 97쪽

“고성리 출신 교사 문기호(구엄교 교사), 문두희(단국중 교사) 등이 입산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하귀‧ 단국중학원(현재 폐교) 교사 문두희와 그의 동생은 입산하여 활동 중 희생당하였다.”

“ 문두희라고 고성사람인디, 그 사람이 한문 가르쳐나서. 이분도 산에 올라가니까 죽어서…”

- ‘이제사 말햄수다 2’ 124~125쪽 -


※ 문두희; 1948. 12.29.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866(6-34)


31)남원2리 인민위원장, 남로당 당책 김원부-‘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52~53쪽

“남원면 남원리 김원부(25) 행방불명; 2002.9.13. 시민연대(15. 오동수)

2011.1.11. 김순보(26년생 남원읍 남원리 상동 1013) 증언

“집은 불타고 있었고 가족들은 우왕좌왕 하고 있었는데, 조금 전에 애기한 형님 친구인 남로당 남원2리 위원장 김모라는 자가 칼을 들고 폭도들 몇놈과 함께 아버지를 뒤쫓아 왔습니다. 그래서 김모라는 자가 제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칼로 찔러 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부락 인민위원장 김모라는 그 사람 실명을 밝힐 수 없는 무슨 사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밝히겠습니다. 김원부입니다.”

“남원을 망친 빨갱이는 서귀포농업실수학교(서귀중 전신)출신 현00라고 단언하고 남원 2리책은 김원부, 김00과 송00 등도 함께 빨갱이라고 밝혔다.”

※ 김원부; 1949. 7.1. 무기형(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306)


32) 남원읍 일대 인민재판 부위원장, 태흥리 총책 양창운
33) 〃 검사 고운학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60~61쪽

“남원면 태흥리 양창운(29) 사망; 2011. 1.11. 김경만(金京萬, 32년생. 서귀포시 남원읍 태흥리 1774-5) 증언″ ″ 고운학(23) 사망; 〃

“1948년 11월10일 무장대가 태흥1구를 습격해 송인혁 등 4명을 살해했다.… 인민재판 재판장이 김계원, 검사는 고운학, 정성선으로 확인됐다. 인민재판 부위원장은 양창운(29)으로 태흥리 총책을 맡고 그의 동생 양00이 형을 뒷받침했다. 정00의 동생인 정00(21), 정00(19) 등 3형제 모두 폭도였다. 고운학의 동생 고00(14)도 폭도로 나섰다 토벌대에 잡혀 총살됐다. 고00(20), 문00(19), 송당 출신 허00도 폭도였다.”


34)함덕리 마을폭도의 원흉 김원근

35) 〃 살인부대장 김평남

36) 제주도지하조직 최고위원회 제주읍특위 학생부장 한국섭

37) 경찰 프락치 이기두 경관

38) 50년 10월까지 저항했던 폭도 김이등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62~63쪽

“조천면 함덕리 김원근(41) 사망; 2010. 10.4. 한재원(韓在源.87. 제주시 건입동 현대아파트) 증언

“함덕리 4․3희생자는 265명(2008년판 화해와 상생, 396~399쪽)이다.

그러나 이 중 함덕리 마을 길에 효수됐던 2명이 명단에 그대로 있다 폭도 중의 폭도인데도. 마을 폭도의 원흉 김원근 외 1명이다.

이어 살인부대장으로 악명을 떨친 김평남(28)과, 김00(36) 형제. 김00은 군 취조 과정에서 자기 동네, 무고한 사람 10여명을 폭도 또는 협력자로 불어대 함덕해수욕장에서 집단 총살당하도록 했다.(* ‘1월1일 함덕유지사건’을 일컬음. ‘이제사 말햄수다’에서는 김평남이 고문에 못 이겨 자백한 것으로 엇갈린 진술)

또 효수된 폭도 김원근의 동생 김00(37), 한 단장을 납치 기도한 김00(49), 경찰에 4‧3 마지막 폭도로 체포됐던 김이등(28)도 있다.

또 경찰 프락치로 이기두(25) 경관도 있다. 그는 아프지 않았는데도 제주읍내 후생의원에 칭병 입원해 우익의 동태를 폭도들에게 보고하고 우익계열 지도자를 암살하고자 하다 적발돼 체포됐다. 죽창으로 중상을 입은 김태혁 교육감 부친도 이기두 등에 의해 지혈이 안되는 주사를 놓아 죽이려는 것을 경찰의 제지로 살아났다. 참으로 구사일생이다.

또한 간부급 김한추(27), 농고 학생회장이던 한국섭(19, 제주도 지하조직의 최고위원회 제주읍특별위원회 학생부장), 김00(58), 남00(36) 등이 폭도로 분류된다.”

“<조천지국 발> 지난 13일 조천지서 사찰계장 지휘 하에 조천지서, 함덕지서 및 자위대 합동으로 산폭도를 토벌하였는데 조천면 대흘2구(속칭 고븐다리)에서 재산 잔비 2명-함덕리 출신 김이등(金二等), 와산리 출신 고용진(高龍珍을 생포하였다 하는데 이 용감무쌍한 경찰 공적 이면에는 잔비 소탕에 경민 일치 협력한 가화(佳話)가 숨어 있다. 즉 전기 김이등, 고용진을 포생(捕生)하는데 앞서 김이등의 이모부 함덕리 출신 송규남(宋奎南, 55)씨의 활약이 컸다하는데 이와 같이 대의멸친(大義滅親)하고 경찰에 협력하여 준다면 산폭도의 소멸은 쉬운 일이며 불원 장래에 평화경이 실현될 것이라 한다.”

-제주신보 1950년 10월 17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159쪽 -

※ 김한추; 1949. 6.28. 사형(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064)


39) 4·3 이전 총을 가지고 입산한 무릉지서 김원경 경관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84쪽

“한림면 조수리 김원경(24) 행방불명; 2011. 7. 13. 김택림(25년생, 한 경면 조수리), 강공남(28년생, 〃)

“그러나 꿈을 펴고 싶었다. 1944년 9월 비행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일본공군 양성소에 시험을 치르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 두 살 위인 김원경과 함께였다. 허지만 전쟁의 막바지이어서 그 양성소는 문을 닫고 말아 시험도 치르지 못했다. 김원경은 경찰관이 되었다. 그는 무릉지서에 있다 총을 들고 4·3이 있기 전 입산했다. 그리고 월북했다. 그가 군대에서 군기과에 있을 때 들은 소식은 김원경이 내무서원으로 있고 계급은 우리의 경위급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었다.”

40) 좌익활동하다 월북해 아들을 간첩으로 보낸 오종흠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94~95쪽

“중문면 상예리 오종흠(55) 행방불명; 2011. 8. 17. 강원규(35년생, 서귀포시 상예리) 증언

“이 마을 입구 속칭 자스름(잣오름) 동네는 입산자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지를 잘 모른다. 다만 좌익활동을 했던 오종흠(55)의 큰 아들 오경지가 20여년전 이북에서 간첩으로 내려와 동생 경대를 대동 월북했었고 나중 경대는 나타났다 붙잡혀 1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후 인천에서 살고 있다. 김00(37)은 자수를 권유받았으나 뿌리쳐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고 좌익활동을 했던 문00(30), 문00(23), 임00(27)도 입산했다.”


41)오라동 좌익활동의 주동자 강병일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59~160쪽

“제주읍 오라리 강병일(39)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②’ 158쪽, 160쪽

“1948년 5월 1일 일단의 청년들이 처음 불지른 곳은 오라리 연미마을 ‘서동네’ 허두경의 집이었다. 곧이어 허두경과 이웃에 있었던 강병일(康炳一, 39)의 집에도 불을 놓았다. 허두경이나 강병일은 집에 없었는데, 두 사람은 당시 마을에서 좌익활동을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무장대의 손에 살해된 대청단원 부인(강공부)을 마을 인근인 ‘제기물동산’에서 장례를 치른 대청․ 서청 단원들이 경찰의 묵계 속에 마을에 들어와 허두경→ 강병일→ 박태형→ 강윤희→ 박전형 집을 차례로 방화한 것으로 드러났다. 마을사람들은 이들 집이 지목을 당한 것은 아마도 ‘민오름’에 납치당했다가 도망쳐 나온 대청단원 부인의 진술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 강병일; 1949. 6. 28.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954(7-83)


42) 53년 4월까지 특별대책(特別隊責)을 활동한 김호현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63쪽

“조천면 조천리 김호현(16) 행방불명; 제주신보 1953년 4월 28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36쪽

“작보(昨報)한 경찰전투대 주작(朱雀)중대의 전과가 작 27일 전방 전투사령부로부터 보고되어 왔는데 사살 4명, 생포 1명, 총기 노획 2정 등의 커다란 전과를 거두고 있는데 사기충천한 이 전투대는 계속 □□전을 전개하고 있다. 사살된 잔비는 특별대책(特別隊責) 김호현(金鎬鉉, 조천면 조천리 출신 당 21년, 구비(舊匪)과 김형봉(金亨奉, 조천면 조천리 출신, 당 22년, 구비), 강석종(姜錫鐘, 제주읍 봉개리 출신, 당 21년 구비), 최봉근(崔奉根, 한림면 귀덕리 출신, 당 29년 구비)의 4명이고 생포된 것은 여비라는데 작전상 관계로 신원이 발표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사살을 확인하기 위하여 4명의 잔비의 두부(頭部)는 전투현지에서 전방사령부에 보내지고 있으며 아방 피해는 없다. 노획품은 다음과 같다. △44식 총 1정 △M2 카빈총 1정 △실탄 55발 △30발 탄창 1개 △한국제 경찰관 동복 상의 1매 △불온문서 다량 ”


43) 조천면 초대 여맹위원장 김동완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69쪽

“조천면 조천리 김동환; ‘이제사 말햄수다’ 237쪽

“김동환(조천리)①

• 8․15이후 조천면 초대 부녀회장
• 조천면 초대 여맹위원장
• 바느질 솜씨가 좋아 그 일로 생계를 꾸렸고, 연설을 잘하여 대중집회 때 의 일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함

*2011. 1. 26 희생자로 추가결정


44) 보성, 인성, 안성 3개리 합동 인민위원장 고문수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70쪽

“대정면 인성리 고문수(41) 행방불명;2011. 8. 31. 이인배(22년생,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증언

“대정골 안성리는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해방 후 남로당 중앙당의 선전부장 등을 거쳐 1948년 월북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강문석의 고향이다. 그는 해방 직후 잠시 고향에서 인민위원회를 지도했고 보성초등학교 설립도 주도했다. 폭도 총사령관 김달삼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일 수 있다. 인민위 간부 류신출(柳辛出, 인성리)이 바로 폭도 두목이됐다. 류신출의 조카 류상구(25)도 입산했다. 한학자로 글씨를 잘 썼던 고문수(인성리)는 인민위 간부(*보성, 안성, 인성 3개 리 합동 인민위원장, ‘4·3장정 6’ 27쪽)가 됐다가 경찰의 추적으로 입산, 그의 입산으로 아버지와 딸이 총살되었다.


45) 일제시대부터 사회주의 운동가 강창하
-‘제주도의 4월3일은? 4집’ 181~182쪽

애월면 어도리 강창하(35) 행방불명; 2011. 9. 28. 강순호(30년생, 제주시 애월읍 어도리) 증언

“ 강창하(35)는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똑똑했고 일본에서 살다 해방이 되어 귀국했다. 강윤하(33)는 똑똑하여 일제시대 청년회장을 했다. 강00(24)은 폭도로 한림지서를 습격했다 죽었다. 일본에서 학교를 나온 강00(21), 강00(29), 강00(24), 배00(20), 현00(23), 강00(28) 등은 모두 요망져(똑똑하여) 좌익활동을 하였거나 입산했다. 강00(19)은 똑똑하지는 않았으나 휩쓸려 따라다니다 그의 아버지와 동생이 그의 때문에 총살됐다.”

“하여튼 우두머리랐주. 그리고 어도에 가민 강창하, 양군보가 있주. 양군보는 일본 싰단(있다가) 곧 오란 일변도 없어서 경 활동을 허기 시작헌디. 신엄 백창원이네 다 그런 사람들이지. 어음에서야 그자(그저) 그 밑에서 지시받는 정도지 강창하는 일본 강 일본에서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헌 사람이주게. 아마 김성수네나 꼭 같은 사람이주게. 말을 참 잘 허여.”

- ‘이제사 말햄수다 2’ 173쪽 -

※ 강창하; 1949. 7. 1. 무기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447(12-131)


46) 일제 사회주의(신인회) 소년회 출신 한림면 부녀동맹위원장 오매춘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20쪽

“한림면 명월리 오매춘(32) 사망; ‘4‧3 장정(長征) 5’. 18쪽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인회에서 활동을 했던 김택수는 8‧ 15 후 도민청위원장을 지냈으며, 대정면 문교부장 문달진, 제주읍 경제부장 박우현, 인민위에서 활동한 부병훈, 차두옥도 이 시기에 활동을 했던 인물들이다. 이들은 신인회 활동 당시 대정, 애월, 제주, 조천, 성산, 서귀에 있는 청년회를 연합하여 제주청년 연합회를 결성하였으며, 각처에 소년회를 조직하여 민족의식과 계급의식을 불어 넣었는데 이때 교육을 받은 소년들이 8‧ 15 이후 장성하여 해방된 국가 건설에 큰 몫을 하게 된다. 한림면 부녀동맹위원장 오매춘, 대정에서 여맹활동을 한 이경선, 애월면 인민위에서 활동한 이영필, 가파도 청년동맹위원장 강군섭 등은 신인회의 소년회 활동에 의해 자라난 대표적 인물이다.”

“당시 자위대, 청년단체 등의 자생적 대중단체들은 인민위원회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고 있지는 않았지만 인민위원회와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은 대중단체로는 청년, 부녀자, 농민들을 각기 대상으로 했던 청년동맹(위원장 김행돈), 부녀동맹(위원장 오매춘), 농민위원회(위원장 박성선) 등을 들 수 있다.”

- 제주4‧3연구소 ‘제주항쟁 1991 창간호’ 229쪽 -


47) 5.10 선거관리위원장을 살해한 정대홍

48) 9연대 탈영병 강일영

49) 9연대 탈영병 김인벽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42~243쪽

“대정면 동일리 정대홍(26) 사망;2012. 10. 23. 곽영호(30년생,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1리) 증언 

“동일1리의 첫 비극은 일제시대에 오랫동안 이장을 한 5‧10선거 동일리 투표구 선거관리위원장 강왈침(姜曰沈, 49, *강경주 전 제주시장, 제주도행정부지사 부친)이 폭도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48년 4월 20일이다. 선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폭도들은 이튿날 대정면사무소도 습격, 숙직하던 직원 2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곽영호는 이날은 강왈침 집 제삿날이었고 이 마을 정대홍(26 *1947년 7월 4일자 제주신보에 ‘포고령 위반자’로 실형, ‘4·3 장정 6’ 40쪽, 47년 3·1절 사건으로 제주경찰서에 수감되어 6개월형 복역, ‘4·3 장정 6’ 44쪽)이 변소에 숨었다가 강왈침을 살해한 것으로 알고 있다. 100여 가구의 동일 1리에 대정면 신평리 주민 30여 가구가 소개하여 왔다. 신평리는 ‘웃 날래’, 동일리는 ‘알 날래’로 옛적부터 불리며 서로 친척들도 많았다. 해안마을이어서 강왈침의 피습 이래 폭도들의 습격은 없었다. 다만 동일1리에는 9연대에 입대했던 강일영(19), 김인벽(21)이 탈영하여 입산, 폭도가 됐다.”


50) 명월리 자위대장, 입산하여 인민해방군 정갑생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28쪽

“한림면 명월리 정갑생(34) 사망; 제주4‧3연구소 ‘제주항쟁 1991 창간호’ 실천문학사(1991. 4. 25) 226쪽

“한림면 명월리에서는 일군 패잔병들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정갑생, 오희규를 중심으로 자위대를 결성했다. 당시 명월대 자위대 부위원장 오희규(73세, 명월리)는 당시의 자위대 활동을 이렇게 전한다.

‘해방 후에 마을 치안유지와 혼란스러운 상황을 평정하기 위하여 자위대라고 있었어, 위원장은 나중에 한라산에 들어가서 산군이 된 정갑생이가 했어. 해방이 되니까 북해도, 남양군도로 징용, 징병 갔던 사람들이 돌아와서 일제 말기 강제 징용, 징병, 공출에 앞장섰던 이장 양창희, 연맹이사장 오경후를 죽인다고 난리를 치는 거라. 그러자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폭행은 야만적인 행사이므로 적극 방지해야 한다고 평화를 유지하였지.’”


51) 김달삼 비서였던 강창희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47쪽

“제주읍 오라리 강창희(19) 행방불명; 2013. 6. 11. 양진현(29년생, 제주시 오라2동 사평마을) 증언

“ 오라마을은 일제 때 사회주의 계열로 항일운동을 하던 지사들이 많았다. 허두경은 일본도 큰 칼을 차고 이따금 마을에 나타나곤 했다. 대표적 좌익인사 송삼백은 “정부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는 없다”는 온건파였다. 그는 일본에 있다 귀국하여 좌익활동을 하다 연미 책임자로 강병일에게 인계하고 수배령이 내려지기 전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송00은 좌익활동을 하다 죽었다. 그의 외조카 김00(金00, 28)은 골수 주동자이다. 양진현의 앞집에 사는 김00은 그에게 민애청 소년선전부장을 맡기는 바람에 양진현은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겨야 했다. 김00은 4월 23일 자기 집에서 경찰에 잡혀 연행 도중 마을 인근 ‘동산물’ 밭에 이르렀을 때 차에서 뛰어내려 도망치다 경찰에 사살됐다. 양진현은 도망치라고 한 후 도망치자 사살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양진현은 어느 날 밤중에 송중평, 송00, 강창희 등과 함께 제주경찰서로 끌려갔다. 전기취조만 받지 않고 온갖 고문을 받은 끝에 일주일 만에 풀려났다. 송중평은 이후 경찰이 됐으나 강창희(19)는 입산, 김달삼 비서가 됐다. 김달삼을 따라 해주로 간다고 제주를 떠나 행방을 모르더니 서울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다. 북한에 갔을 것으로 본다.”

52) 봉개동 인민위원장 김승교

53) 봉개동 청년대장 임태종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51~152쪽

“제주읍 봉개리 김승교(28) 행방불명; 2013. 7. 25. 김승추(22년생, 제주시 오라3동 월구마을) 증언

“봉개는 남로당의 거물 김영관과 그의 누이, 오누이가 좌익 활동의 본거지로 만들었다. 봉개리는 큰동네는 김해 김씨, 천안가름은 고씨, 서동네는 성 강씨, 동동네는 수산 강씨, 중간동네 장성밭은 임씨 등의 집성촌이었다.

봉개 청년 모두가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폭도 역할을 안 한 사람은 없다. 봉개 인민위원장은 김승교(28), 승교 동생 김00(26)도 폭도 간부를 맡았고 8촌 형제 김00(29)도 폭도로 활약했다. 임00의 아들 임태종(24)은 청년대장을 맡았다. 김00(22), 김00(21) 형제도 폭도였다. 폭도 역할을 한 청년은 많으나 총을 들었던 폭도를 중심으로 이름을 든다. 도련 출신인데 작은 아버지 밑으로 양자를 온 소학교를 나와 똑똑했던 고00(28) 등 고씨도 많다. 고00(25), 고00(28), 고00(25), 고00(22) 등이 폭도였다.”

※고00;1949. 7. 1. 무기형, 제주지검 수형인 명부 번호 1373(12-57)

※고00;1949. 6. 28.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 명부 번호 969(7-98)


54) 문기호 구엄초교 교사로 애월면 무장대 중책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17쪽

‣ 애월면 고성리 문기호(24)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④’ . 81쪽

“애월면 고성리는 …. 이 마을 출신 중에는 구엄국교 교사를 지냈던 문기호(文基好)가 4‧3 초기부터 입산해 무장대의 중책을 맡고 있었다. 1947년 ‘3‧1절 발포 사건’에 항의해 사표를 제출했던 중문지서 순경 강수헌(姜樹憲, 이명 강려생‧姜呂生)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그는 곧 입산해 무장대원이 됐다.”

* 문기호는 자유시민연대(25.강병옥, 72, 애월읍 용흥리, 2002. 10.15. 증언) 

또 문기호는 4․3사건 교육계피해조사보고서 77쪽에 “고성리 출신 교사 문기호(구엄교 교사), 문두희(단국중 교사) 등이 입산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 문기호; 1949. 6. 28.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018 (8-47)


55) 김병익 남로당 영평리 마을책
-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50쪽

‣ 제주읍 영평리 김병익 사망;2008. 6. 5. 오춘보(24년생. 제주시 노형동 2588-10), 아들 전용택(61년생) 증언

“1948년 음력 10월 16일.… 그날 밤 내가 본 폭도들은 모두 세 패인데 우리 아버지를 끌고 가는 패에 10여명, 나를 끌고 가는 패가 5~6명 정도 되었으며 얼굴에 검댕이를 칠해서 잘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그 중 몇 놈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돌리는 동네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때 내가 확실히 본 사람은 우리 집과 울타리 담 하나를 경계로 둔 이웃집 김원희와 남로당 마을책을 맡은 김병익이었으며 이들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버지 위패 옆에 아버지를 강제 납치해 죽인, 같은 마을 출신 폭도 김원희와 김병익의 위패가 버젓이 있고, 봉개동 희생자 명단을 보니, 내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할 때 “저런 놈은 아사 부러야 (없애버려야) 좋다’ 면서 아버지를 죽이는데 직접 가담한, 아버지의 외4촌 동생 임보기 위패가 당당히 있었습니다.”

“영평 상동에는 일제 때 목포고를 나와 똑똑하고 인물도 출중한 김병익(27)이 좌익 활동의 주동이 되고 폭도사령관 격이었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나주 김씨로 그의 지휘아래 김병국(22)과, 김00(29), 김00(25), 김00(22) 3형제가 폭도활동을 주도 했다. 하천 동쪽의 영평 하동은 상동보다 마을 규모는 작으나 청년 대부분이 좌익활동을 하였다고 밝힌다.”

- 2013. 8. 28. 오진현(27년생, 제주시 영평 상동) 증언, ‘4‧3의 진정한 희 생자는! 2집 363쪽


56) 채홍훈 경찰 프락치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16쪽

‣ 제주읍 아리리 채홍훈(23) 사망; ‘4‧3은 말한다 ④’. 40쪽

“1948년 10월경에는 아라리 출신으로 삼양국교 교사이던 현명하(玄明河.25)가 경찰에 끌려갔다. 북제주군청 직원이던 양경원(梁京遠)은 자신이 지목받는 느낌이 들자 마을로 도피했다가 입산했다.

심지어 아라리 출신으로 당시 순경이던 현보하(玄普河, 24)와 채홍훈(蔡洪訓)마저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구금됐다는 소식은 주민들에게 충격을 더했다.”

※채홍훈; 1948. 12.09. 무기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35 (1-35)


57) 현보하 경찰 프락치
-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18쪽

‣ 제주읍 아라리 현보하(22) 행방불명;‘4‧3은 말한다 ④’ 143쪽

“특별수사대에서 맨처음 연행했던 ‘현 모 순경’은 제주읍 아라리 출신 현보하(玄普河) 순경이 아닌가 추정된다. 현보하도 현직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중 경찰에 붙잡혀 간 뒤 소식이 끊겼다는 마을 주민들의 증언이 있다.”

※현보하; 1948.12.09. 무기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33 (1-33)


58) 현봉희 중산간 서부지역 폭도대장, 현씨 일가 집단 폭도로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1쪽

‣ 한림면 저지리 현봉희(24)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③’. 30쪽

“1948년 4월7일…. 수배된 청년 중 일부는 저지마을에서 5km 가량 떨어진 밀림지대인 ‘한수기’ 숲에 들어가 무장훈련을 받았다는 소문도 전해졌다. 이때 경찰에서는 특별히 저지2구의 자연마을인 ‘명이동’(明理洞) 청년들을 좌익 가담혐의자로 지목, 수색을 강화했다. 특히 지목받던 인물은 서귀포 실수학교 출신의 현봉희(玄奉熙, 27)였다.

저지지서에서는 4월5일 현봉희가 집에 돌아왔다는 첩보를 입수, 경찰특공대와 함께 명이동을 덮쳤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집을 떠난 뒤였다.”

“서귀포실수학교를 나온 현봉희는 일제 때 제주읍 삼양에 있는 청년훈련소장을 지낸 좌익의 두목이었다. 특히 현봉희는 현씨 가문 일가를 통째로 입산시킨 장본인이다.

현봉희의 영향으로 고00의 동생 고00(28), 고00(20)도 산사람이 됐다. 폭도인 고00(28)은 문원숙이 경찰관이 돼 토벌대인 100사령부 G2에 근무할 때 사살된 것을 확인했다. 고00(17), 박0(29), 박00(23), 변00(32)은 현봉희의 영향을 받아 폭도가 됐다. 현봉0(25)은 현봉희의 동생이고 현00(28)도 현봉희와 더불어 주동이 됐던 현인하의 막내 동생이다. 현00(25), 현00(31), 현00(25), 현00(34), 현00(21), 현00(27), 현00(36), 현00(30), 현00(27) 등은 현봉희로 말미암아 모두 폭도가 됐다가 희생됐다.”

-문원숙(文元淑, 27년생,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2012. 12. 4. 증언(‘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347쪽)

59) 김중봉 안덕 서광리 폭도대장, 경비대 복장으로 토벌대 습격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2쪽

‣ 안덕면 서광리 김중봉(22) 사망; ‘4‧3은 말한다 ③’ 249~250쪽

“1948년 8월2일 한밤중 안덕면 서광리에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백지 서명을 받던 청년 2명이 경찰 토벌대의 기습을 받고 현장 사살됐다.… 어느날 밤 어머님께서 밖에 나갔다 들어오시더니 ‘산사람들이 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도장을 받고 있는데 뭣에 쓸 건지 걱정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숨진 마을 청년은 김중봉(金仲峰.22)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귀실수학교 출신인 그는 마을의 리더급 청년이었다. 또 경비대 복장을 한 사람도 죽었다.”

“동년 12월에 들어서면서 무장대는 분산된 전투태세를 정비 강화해서 강대한 전투력을 갖고 서광리 건곤동 주재의 토벌대를 기습하여 적들에게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였으며 ‘김중봉’을 포함한 수 많은 애국자의 학살에 가담한 반역의 무리들을 선렬의 이름으로 단죄했다. 후속 유격대는 안덕, 화순, 덕수 등 일대를 습격하여 토벌대와 반동들의 준동을 물리치면서 ‘축성’ 전에 매장되였던 식량들을 탈환하는 등 도처에서 거대한 전과를 올리였다.”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197쪽-


60) 김석종 9연대 탈영병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3쪽

‣ 구좌면 세화리 김석종(20)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③’ 51쪽

“곧이어 세화리 출신 입산자의 가족들도 처형되기 시작했다. 입산자는 김석종(9연대 탈영병)과 부 아무개 등 3명 가량이 거론된다. 이들의 가족 중 김인배가 12월 6일 토벌대에게 총살됐다. 감금돼 있던 나머지 가족들도 1949년 2월10일 하도리와 경계에 있는 속칭 ‘연두굴’에서 집단 학살됐다. 이때 부태일의 처(56), 부태일(55) 김석종의 처(30) 부남준(23) 김인배의 자(12) 김석종의 자(3) 등이 총살됐다. 이때 세화리 주민 외에 하도리, 상도리 주민들도 함께 총살됐다.”

“9연대 탈영병으로 폭도가 된 김석종과 함께 입산한 또 한 사람은 부목수의 아들 부00(18)이다. 학벌도 없는데 4‧3초기 입산하고 말았다. 그의 입산으로 그의 부(부00, 55)모와 형 부00(23)이 1949년 2월 10일 속칭 ‘연두굴’에서 총살됐다. 이때 김석종의 아버지 김00(50)와 처(30), 동생(12)과 아들(3) 등도 총살되었다.”

-2011. 4.20. 부대유(26년생, 구좌읍 세화리) 증언,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57쪽


61) 오명언 경찰이었다 47년 3․1파업 후 퇴직, 입산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4쪽

‣ 성산면 난산리 오명언(25)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⑤’ 76쪽

“무장대는 또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애써 입산시켰다. 한 증언자는 ‘ 산사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장 김기련(金基鍊)과 똑똑하고 힘센 청년 오명언(吳明彦) 등을 강제로 입산시켜 마을의 주동자로 네세웠다.’면서 ‘아무개도 산에 올랐다’하면 주민들의 영향을 받을 만한 인물들이었다.’고 말했다. 아무튼 이들의 입산은 이후 집단 학살극의 빌미가 됐다.”

“난산리 청년들을 집단으로 입산토록 한 것은 경찰관이었다가 47년 3월 총파업사건으로 그만둔 오명언, 김창생을 든다.”

- 김두황(金斗璜, 28년생, 서귀포시 성산읍 신난로 전 난산리장, 노인회장) 2011. 5. 12. 증언,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302쪽

※ 오명언; 1949. 6.29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197 (9-126)

“1948년 11월 15일 경 면 보급책 오용호(吳容浩)로부터 지시를 받고 인민해방군 12명 및 특행대원 12명(대장 오명언․吳明彦 27세, 대원 난산리 김00․金00 김00․金00 26세, 김00․金00 22세, 김00․金00 26세, 수산2구 오00․吳00 29세, 고00․高00 26세, 고00․高00 25세, 오조리 강00․康00 25세, 오00․吳00 28세, 고00․高00 등과 같이 난산리를 습격, 가옥 일체에 방화하고 식량을 탈취 운반한 사실이 있다”

- 강재훈의 ‘제주4․3의 실상’ 306쪽


62) 오근옥 성산면 폭도 대장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5쪽

‣성산면 신풍리 오근옥(32) 사망; ‘4‧3은 말한다 ⑤’ 84쪽

“11월25일 토벌대는 입산자 오근옥(吳斤玉의, 32) 어머니인 현갑춘(玄甲春, 50)을 붙잡았다. 아들이 입산하는 바람에 신변에 위험을 느낀 현갑춘은 다른 마을로 시집을 간 딸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날 모처럼 신풍리로 오다가 붙잡힌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중산간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오근옥도 이즈음 토벌대에게 잡혔다. 토벌대는 두 모자를 함께 총살했다.”

신풍리는 성산면을 뒤흔든 폭도 오근옥(吳斤玉, 32)과 오용필(21)의 고향이다. 그들은 머리가 좋고 똑똑해 일류청년으로 기대되는 마을의 기둥이었다. 오근옥은 그의 고모가 사는 난산리의 똑똑하고 힘센 청년 오명언(吳明彦, 25)을 움직여 ‘난산리의 청년을 다 잡아먹었다’고 이야기 된다.

난산 출신 부인 김00은 광산 김씨. 그녀의 아버지는 힘이 장사로 폭도와 맞닥뜨리었을 때 폭도가 휘두른 칼로 팔이 다쳤음에도 동백나무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자 폭도가 도망쳤을 정도다. 그녀의 사촌 김일봉 등 광산 김씨 일가는 오근옥 때문에 늘 불안했다. 오근옥의 고모가 광산 김씨 집안에 시집을 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근옥이 난산에 왔을 때 김씨들은 두 번이나 신산지서에 신고했었으나 경찰이 출동했을 때는 오근옥이 행방을 감춘 뒤였다. 1948년 11월 세 번째로 오근옥이 왔을 때 닭을 잡는 등 푸짐한 안주로 오근옥이를 대취하게 만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출동했을 때 오근옥은 김일봉의 둘째 아들 김문숙 단장 집에서 술에 취해 잠자고 있었다. 체포했을 때 오근옥의 허리춤에는 쌀 등 식량을 준 협조자 명단 등이 모두 적혀있었다. 그러나 그 명단은 가나다라의 기묘한 암호문으로 기록됐다. 누구도 그 암호문을 해독치 못했다. 그래서 난산리 주민이 피해를 덜었다. 또한 그의 체포로 난산리는 소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김두현(金斗現, 32년생. 서귀포시 성산읍 신풍리) 2011. 12. 14. 증언, ‘제주도의 4월3일은? 4집’ 280~281쪽

 

63) 정석봉 위미초교 교사, 인민군 지원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6쪽

‣남원면 신례리 정석봉(30)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⑤’ 148쪽

“양춘생의 시동생 정기성(鄭基星)은 12월 12일 새벽 학련에게 끌려갔던 사람이다. 총살 직전 탈출한 정기성은 피신하자마자 형수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정기성씨의 가족사에는 4․3의 뼈아픈 상처들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정 씨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두 살 위인 형 정석봉(鄭錫封)은 위미국교 교사였는데 언제부턴가 경찰에게 쫓기기 시작했습니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형이 피신하자 경찰이 우리집을 불 질렀습니다. 그러자 형은 형수와 어린 조카까지 데리고 이승이 오름 부근으로 피신했습니다. 형은 내게도 ‘여기 있으면 나 때문에 죽는다.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함께 피신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는 형제뿐인데 함께 행동하다간 대(代)가 끊길지 모른다. 누가 죽든 한 명은 살아야 할 것 아니냐’며 오르지 않았습니다.”

“또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위미, 신례국교 교사이던 정석봉(鄭石奉, 30), 양00(梁00, 22), 양00(梁00, 24)가 이 마을 남로당의 중심인물이다. 위미국교 2회 졸업의 양00은 학교에서 급장을 맡는 등 똑똑했다. 양00가 입산하는 바람에 남원면서기를 하던 그의 형 양00는 마을이 소개할 때 마을사람들 앞에서 토벌대에 의해 곤욕을 치렀다.”

- 2011. 7. 21. 김양하(28년생, 남원읍 신례리) 증언, ‘제주도의 4월3일 은? 3집’ 263쪽

※ 정석봉; 1949. 7.1. 무기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314 (11-98)

 

64) 이만흥 중문 도순리 폭도대장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27쪽

‣중문면 도순리 이만흥(24)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⑤’ 209쪽

“일주도로변에 위치한, 약 180가호의 작은 마을이었던 도순리에서 입산자로는 이만흥(李晩興, 23)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만흥은 서인부(徐仁富, 40)와 함께 마을에서 단 두 사람뿐인 민족청년단 멤버였다(제주에서 민족청년단의 의미는 연구 대상이다. ‘민족지상, 국가지상’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던 민족청년단은 단순히 ‘우익단체’라고 하기에는 다양한 성격으로 나타난다. 미국은 민족청년단을 좌익시 하기도 했다. 서북청년단이나 대동청년단과 갈등을 빚어 탄압을 받았고, 민족청년단이란 이유만으로 총살되기도 했다.). 이들 중 서인부는 행방이 묘연했고, 이만흥은 입산해 무장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무튼 11월15일 총살사건이 벌어지자, 일부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만흥을 원망하는 여론이 급속히 형성됐다. 이만흥 때문에 마을이 경찰의 주목을 받아 희생자가 생겨났다는 논리가 퍼진 것이다. 급기야 주민들은 이만흥을 잡아 경찰에 넘겼다. 그러자 11월17일 즉각 무장대가 마을에 내려와 임대성(任大成, 26)을 살해했다.”

“동년 10월 1일 유격대는 인민들의 강력한 원호 하에 도순토벌대를 불의의 습격전을 감행하여 악독한 개떼들 5명을 처단하고 수십명의 애국자들을 구출하였으며 놈들의 무장을 탈취하고 관사들을 소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자위대원 ‘이만흥’(도순리)은 적들에게 잡히여 사형 순간 총을 멘 놈들 앞에서 태연자약한 태도로써 보느냐 살인귀들아! 내 말을 들어봐라 하고 “조국과 인민을 위한 싸움에서 오늘 내가 너희들에게 죽지만 우리 인민은 승리하리라. 반드시 조국과 민족은 해방되고야 만다.” 고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를 쳤다. 이 슬기로운 량심과 조국과 인민을 사랑하는 고결한 애국사상 앞에서 원쑤들은 완전히 넋을 잃고 그때에는 감히 그에게 총을 쏘지 못하여 조국 전쟁 직전 역도들의 후방을 강화키 위한 대량학살 시기에 살해되였다고 한다.”

- ‘제주도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166~167쪽


65) 이양호 48년 2.9사건 주동자. 경관 2명 죽음직전까지 폭행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30쪽

‣안덕면 사계리 이양호(23) 행방불명; ‘4‧3은 말한다 ①’ 543~545쪽

“사계리 청년들이 두 경찰관이 머물고 있던 송죽마을 ‘고망술집’을 덮친 것은 2월 9일 오전 9시께였다. 마을 청년들은 이날 향사에 모여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집회를 가질 예정 아래 새벽부터 집집마다 사발통문을 돌리다가 경찰관 2명이 마을 안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급습하게 된 것이었다. 이양호(李洋鎬, 당시 25세)․ 임창범(任昌範, 28) 등의 주동으로 경찰관을 덮친 청년들은 오 순경이 갖고 있던 카빈총을 빼앗는 한편 이들 경찰관들을 향사로 끌고 가 구타하면서 마을에 머물게 된 경위와 밀고자들을 대라고 추궁하였다. 좌익 청년들은 3․1사건 이래 마을집회가 있을 때마다 지서에 정보가 노출되는 사례가 잦아지면서 경찰과의 내통자를 찾는데 눈을 밝히고 있었다. 향사에서의 사형(私刑)은 여러 시간 계속되었다.…

이런 와중에 주동자의 한 사람인 임창범의 집에서 마을주민 100여명의 명단이 있는 남로당 문서가 발견되면서 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결국 이양호‧임창범 등 주모자 6~7명이 제 발로 나타나면서 경찰의 수사도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주동자 이양호‧임창범은 이 사건으로 대구형무소(* 주민증언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6‧25가 터지면서 감옥 안에서 총살을 당했다.”

“이 마을 남로당 행동대장 이양호(李洋鎬, 25)의 지휘 아래 임창범(任昌範, 28), 이00, 구00, 윤00, 허00 등이 방에 세워둔 칼빈 총을 먼저 빼앗고 술 취한 두 경관을 결박하여 향사로 끌고 갔다. 이들은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 청년들의 활동을 보고하는 밀고자를 불도록 고문하다 사계리경 ‘행여물’로 끌고 가 특히 지서주임을 돌로 때리며 심문을 계속했다. 이때 강기득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 그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때마침 제주경찰학교생들이 졸업여행 차 2대의 트럭에 실려 안덕을 지나 중문으로 향하고 있었던 때였다. 안덕지서에서는 중문지서에 연락, 경관을 구출해주도록 긴급 요청한 것이 받아들여져 사계 마을로 차를 돌렸다.

출동이 늦었다면 최 주임과 오순경은 돌에 맞아 죽고 생매장 당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이양호 등은 두 경관을 소나무에 묶고 달아났다.”

- 김용택(金龍澤, 29년생. 안덕면 사계리 2808) 2011. 1.25. 증언(‘제주도의 4월 3일은? 1집 310~311쪽)


66) 고윤하 구좌면 송당리 인민위원장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31쪽

‣ 구좌면 송당리 고윤하(51) 사망; ‘4‧3은 말한다 ③’ 53쪽, 56쪽

“송당마을에서도 해방 직후에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인민위원장은 50대의 한문 선생인 고윤하(高倫河)가 맡았다.…”

“어머니 장례가 있기 전 아버지는 술마시고 회의하는데 가서 ‘죄 없는 사람 왜 죽였느냐’고 따져 들었더니 고윤하가 ‘화 내지 말라. 우리는 총과 칼을 가졌다’고 대꾸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더욱 흥분, ‘총 칼 무섭지 않다’고 대드니 고윤하가 누굴 불러 워라고 하더랍니다. 철모를 썼던 그 남자는 철모를 벗어 아버지께 ‘잘못했습니다’고 사과했답니다.”


67) 김정화 한림 귀덕4구 선거 위원장, 입산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31~32쪽

‣한림면 수원리 김정화(39) 사망;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109쪽

“심지어는 일부의 민족적 량심을 가진 면‧리‧동의 선거위원장 및 선거위원들도 ‘선거’를 포기하고 자각적 또는 유격대에 납치되였다는 구실을 꾸며, 그의 임무를 보이코트했다. 수원(洙源, 김정화) 귀덕(歸德, 4구) 선거 위원장들의 입산은 그의 좋은 실례다. 이와 같이 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투쟁 전술은 실로 다종다양한 것이였다.”

“1934년 5월 하순에는 … 김경봉은 구우면 수원리 김정화에게 농민조합(*적색농민조합) 결성 준비로서 독서회 결성 방법을 지시하고 그로 하여금 임문옥, 고충선을 획득하게 하여 독서회를 결성하게 하였다.”

-‘제주항일독립운동사’ 247쪽 -


68) 이화택 애월면 세포책
-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32쪽

‣애월면 애월리 이화택(41) 사망; ‘제주도인민들의<4‧3>무장투쟁사’ 146쪽

“또한 애월 ‘리 두일’은 ‘리 화택’(면세책)을 남로당원이라고 토벌대에 고발해서 그와 가족, 심지어는 4촌 동생까지 학살케 한 다음 그의 가족들에 3만원만 내주면 석방시켜 준다해서 사취했다. 이에 의탁한 가족은 성내로 가서 그를 방문하니 벌써 피살되였다고 하면서 시체는 ‘정뜨르’ 비행장에 방치되여 있으므로 도다시 3만원을 내주면 시체를 찾아 준다는 말에, 그의 피살장에 이를러 가리킨 것은 당사자의 시체가 아니라 외딴 사람의 시체였던 것이다.…”

※ 이화택; 1948. 12.29.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841(6-09)

“이00(31)은 낮에는 이발사이나 그의 형 이화택(41)과 위 아랫집에서 살며 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세포책인 이화택과 이웃집에 살았던 이00(22) 역시 보통학교를 나와 똑똑했기에 이화택의 영향으로 좌익 활동을 하게 됐다. 장00(34)은 인민위 부위원장 김승휴와 또래로 함께 좌익 활동을 하였다.”

-김권철(金權哲, 30년생,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2012. 8. 1. 증언,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337쪽


69) 김정풍 유격대 선전부장
-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33쪽

‣제주읍 이호리 김정풍(46) 사망; ‘제주도인민들의<4‧3>무장투쟁사’ 188쪽

“11월 12일 이호리를 포위 강습하고 부락민을 닥치는 대로 체포해서는 전율할 집단적 테로를 가한 다음 거기에서 애국적인 활동가 ‘김여수’를 비롯한 300 여명의 민주주의적인 근로인민들을 ‘산부대’에 협력하였다는 리유로 ‘정드르’ 비행장에 끌어다가 그들에게 구덩이를 파게하고 , 그 앞에 일체 몰아 세워서는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집단 사살 또는 생매장하였다. 또한 이들의 패덕한들은 ‘김정풍’에게는 나는 ”유격대의 선전 부장임니다“고 쓰어진 큰 ‘포패’를 목에 달아매고, 일반 군중들에게 공포와 위협을 주기 위하여 제주시내의 모든 주민들에게 끌고 다니면서 보인 다음 쥐도 새도 모르는 거처 없는 사형장에서 살해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에게는 남편에 협력하고 빨지산의 가족이라는 죄명 하에 귀축같은 야수들은 천인이 공노할 야만적 테로를 가한 다음… 죽이였다.”

 

70) 고중호 서귀포 습격 폭도 지휘자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41~42쪽

‣서귀면 서홍리 고중호(21) 행방불명; ‘대하실록 제주백년’ 651~652쪽

“당시 남제주군청 서기로 있던 김영옥(金榮玉, 뒤에 경찰에 투신)은 그날 아침 일찍 출근한 후 하루의 일과를 준비하고 있었다. 군청이 습격을 받은 것은 9시가 약간 지나서였다. 별일 없으려니 하여 미처 피신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김영옥은 일단의 공비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산속으로 끌려가던 김영옥은 공비의 지휘자가 서귀초등학교 동창인 고중호(高仲好)임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사지로 끌려가는 김영옥에게는 오직 살아야 하겠다는 일념이 용솟음칠 뿐이었다. 무조건 고중호에게 매달렸다.

“이 사람, 자네와 나와는 동창이 아닌가. 서로 길이 달라도 옛정을 생각해서 날 놔 주게” 6척 장신의 고중호는 냉소를 던질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에게 사정을 해좌야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김영옥은 체념한 듯 끌려다니다가 날이 어두워진 후 기회를 틈타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 고중호; 1949. 6.29.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147(9-76)


71) 오윤표 수산초교 교사, 입산

72) 고태권 수산초교 교사, 입산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44쪽

‣성산면 수산리 오윤표(25) 행방불명; 4․3교육계피해조사보고서 136쪽
‣성산면 수산리 고태권(22) ″ ″

“1948년 4‧3 당시 수산교 강사인 오윤표‧ 고태권이 차례로 입산했는데,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오윤표; 1949. 6.28.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019(8-48)

※고태권; 1949. 7.1. 무기,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388(12-72)

 

73) 김봉환 남로당 특공대원, 형이 인민군 중좌로 6.25때 종로경찰서장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55쪽

‣조천면 조천리 김봉환(20) 행방불명; 2011. 1.7. 김응삼(金應三, 29년생, 제주시 이도2동) 증언

“특공대원은 학급 대표로 A반은 황00, B반은 김용철(*1948년 3월6일 경찰 고문으로 사망), C반은 김봉환이다. 황00, 김봉환은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 출소 후 북한으로 간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봉환의 형 김성환은 일본 밀항 후 북한에 가 인민군 중좌로 6․25때 종로경찰서장을 지낼 정도이다. 김봉환은 살아있고, 황00은 3년 전에 죽었다.”

 

74) 허기룡 대정면 이교동 남로당 총책
-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57쪽

‣대정면 상모리 허기룡(35) 사망; 2011.1.25. 강필봉(姜弼奉, 21년생, 대정읍 상모리) 증언

“상모리의 비극은 허기룡이 상모 이교동(伊橋洞) 총책을 맡고 그의 형제를 끌어들이면서 비롯된다. 그의 동생 허기봉, 보성국교 교사이던 허00 , 허00 등으로 5형제 중 4형제가 죽었다. 그의 사촌 허00도 제주도웅변대회에서 입상하는 등 인재였으나 폭도들에 가담, 4․3후 일본으로 밀항했고 월북하여 이북방송에서 ”잘 살고 있다“고 방송하는 바람에 동생인 허00(농협 모습포조합장 3기 연임)가 군에서 곤욕을 치렀다.”


75) 이윤환 동광간이학교 교사, 사계리 폭도대장. 48년 2.9사건 지시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58쪽

‣ 안덕면 사계리 이윤환(31) 사망; 김용택(金龍澤, 29년생. 안덕면 사계리) 증언

“김용택 씨는 사계리의 불행은 모슬포 허씨 사위인 이양호가 모슬포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았지만 이 마을에서 한학에 조예가 깊고 동광간이학교 교사이던 이윤환이가 사계리 폭도대장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9사건도 이윤환이가 이양호에게 지령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더욱이 사계리 희생자비가 산방산 앞 항만부대 쪽에 세워졌는데 이 속에 이윤환이 버젓이 적혀 있다는 것. 해병대 3기로 군에서 7년여를 근무, 해군 일등병조(중사)로 제대한 그는 “공산화가 됐다면 우리 모두를 죽였을 사람이 비 명단에 있는 것은 정말 나쁘다”며 “그 비 명단에서 이윤환이는 반드시 지워져야 한다”고 밝혔다.”


76) 한석순 지휘관급 폭도, 부친을 친일파로 폭행하며 인민재판
-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67쪽

‣조천면 신흥리 한석순(24) 사망; 2011. 3. 24. 이용국(李用國, 31년생. 제주시 일도2동) 증언

“해방이 되던 1945년 늦가을 신흥리 중동 보명사숙이 있던 동산 밭에서 신흥리 청장년이 모였다. 일종의 인민재판이 벌어졌다. 친일분자, 협조자를 가려내는 재판이다. 이때 징병 갔던 일본에서 귀국한 한석순(24)이 일본군복을 입고서 친일분자를 문책하다 일제 때 구장(리장)이었던 그의 아버지 한00(일명 한00)을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때 마을주민들이 멸치를 잡아오면 저울대에 납을 붙여 저울눈을 속이고는 반값인 헐값으로 멸치를 사들여 젖을 만들어 팔면서 돈을 벌었다는 죄목이었다. 한석순은 분을 이기지 못해 마을에 세워진 그의 아버지의 송덕비마저 부숴 버렸다.

이용국과 야간학습을 한 6명 가운데 한00(19), 현00(17)은 벌써 좌익이 되어 있었다. 한00은 45년에 아버지를 친일분자로 몰아세우며 폭행한 한석순의 동생. 한석순은 당시 지휘관급 폭도가 됐고 형의 영향과 형을 배경으로 한00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식량을 약탈하는데 앞장섰다. 현00은 현복유와 8촌 이내의 가까운 친척인데다 한00과 이웃집.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어 목포형무소로 갔다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7) 이용능 조천면 남로당 청년단장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68쪽

‣조천면 신흥리 이용능(23) 사망; 2011. 3. 24. 이용국(李用國, 31년생. 제주시 일도2동) 증언

“한석순, 현완식의 또래 친구들인 김00(26), 권00(25), 이00(26)와 이용능(23) 등이 입산하여 폭도활동을 하였다. 이용능의 경우 조천면내 남로당 청년단장 역할을 했다. 특히 이00는 주민들의 식량을 많이 뺏어갔다.”


78) 김문홍 최대 비극의 마을 남로당 토산리 총책, 조몽구 직계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68~69쪽

‣표선면 토산리 김문홍(24) 행방불명; 2011.3.31.김창문(金昌文, 34년생, 표선면 토산중앙로) 증언

“이 마을에서 남로당 활동과 폭도 관련자는 7명이라고 김창문씨는 운을 땠다. 그러나 4명만을 말했다. 김문홍(24), 김00(27), 김00(22), 김00(21). 토산리를 흔든 중심에는 일본 징병이 나와 마을 잔치까지 벌였으나 해방되는 바람에 가지 않은 김문홍(24)이 있다. 그는 키가 컸고 인물도 좋고 말도 잘해 리더급 청년이었다.

49년 2월쯤 알 토산에 있을 때 손목에 부상을 입고 붕대를 감은 체 체포돼 왔다. 하룻밤을 지내고 군인들에게 폭도들의 아지트를 안내토록 추궁받았으나 거부한 듯 총살됐다. 나중 잡혀 총살된 김00은 김문홍 동생에게 느닷없이(갑짜기) 찾아와서는 “문홍이가 잡혔다”고 잛게 말하곤 사라졌었다. 김문홍과 김00 부모 모두 토벌대에 의해 총살됐다.

“토산리는 성읍리와 이웃마을이다. 성읍리에 남로당의 거물 조몽구가 있어 토산의 김문홍(24)을 우두머리로 삼아 좌익 활동을 편 것이 토산리 청년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으로 본다.”

-2011. 11. 23. 정의숙(27년생,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 증언,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341쪽


79) 오관형 성산면 투쟁위원장, 청년 리더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80쪽

‣성산읍 수산리 오관형(29) 행방불명; 2011. 5.12. 고영규(30년생,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증언

“수산1리 오관형(29)은 되양져(똑똑해) 청년 간 리더이었고 서귀포 실수학교 출신 오윤표(25), 일본 중학교를 나와 수산초등학교 교사이던 고00(23), 고00(24), 김00(21) 등은 소개 이전에 입산했다. 고00(25), 오00(33. 수산리투위 위원장) 등은 마을이 소개되면서 입산, 폭도가 되었다.”

※ 오관형; 1949. 6. 29.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080)


“당시 면 당책 오관형(吳官衡, 32) 면 당부책 오용필(吳容弼, 26), 선전부책 김00(金00, 24) 선전부원 고00(高00, 23), 보급책 오00(吳00, 33) 등이 성산면 및 구좌면 일대 중산간 자연부락 등을 상대로 살인, 방화, 약탈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강재훈의 ‘제주4․3의 실상’ 306쪽


80) 임원전 한림 대림리 폭도대장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81쪽

‣한림면 대림리 임원전(29) 행방불명; 2011. 5. 26. 신찬주‧강화선(36년 생) 증언

“5․10선거 때 상당수 주민들이 선거 반대를 위해 상대에서 1km 쯤 떨어진 광산에 있는 절(*현재는 폐 사찰)로 갔다. 대부분 불교신자들이었다. 1~2일 사이 모두 마을로 왔다. 마을의 청년 리더는 임원전(29)이었다. 매우 똑똑했다. 그의 손자는 박사학위를 따 미국 IBM에 근무하고 있다.”

“200여 가구의 대림리에는 농업학교 출신 임원전(29)이 일찍이 좌익 운동을 하여 대림리 폭도대장이 됐다. 또 대림초등학교 교사 신00(40)도 좌익운동을 하다 폭도가 됐다. 이들과 함께 뒷집에 사는 김00(27)이 박남호에게 밤마다 “앞으로 좋은 세상이 온다. 우리나라는 공산국가가 된다”며 승리를 장담하며 좌익운동을 같이 할 것을 권유하며 괴롭혔다. 또 같은 동네로 독자였던 임병원(25)도 4‧ 3이후 자취를 감췄고 지금까지 행방을 모른다. 고00(22)은 1949년 7월 군사재판에서 무기형을 받았지만 삐라를 뿌리고 폭도들의 잔심부름을 할 정도였다.”

- 박남호(朴南湖, 21년생, 제주시 한림읍 대림리) 2012. 3. 14. 증언(‘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352쪽)

※ 임원전; 1949. 6. 29. 사형(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140)


81) 김두석 입산과 하산을 자유롭게 한 우두머리급 폭도

82) 김두병 
-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83쪽

‣제주읍 삼양리 김두석(26) 행방불명;2011. 6.23. 강봉순(28년생, 제주시 ‣제주읍 삼양리 김두병(20)행방불명; 삼양3동) 증언

“삼양동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해방 이듬해인 46년 제주농중, 오현중, 제주중, 제주여중 등 중학생이 40~50여명에 이르렀다. 이 마을에 학생모임이 조직됐다. 조직되면서 3개월 정도 지나면서 모임에 정치색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에게 마을 3년 선배인 제주농중 5학년 김00, 장00, 전00 등 3명이 그의 집을 찾았다. 애국청년 조직이라며 민애청(民愛靑)에 가입을 권유하기 위해 왔던 것. “우리 모두 잘 먹고 잘 살아 봐야 될 것 아니냐.”며 모두 3차례나 거듭 강권했다. 당시 회장인 김00는 가입하면 부회장을 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그는 전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거절했다. 그는 당시 좌우이념을 떠나 오직 공부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의 마을에서 김두석(26)과 김두병(20)은 사촌지간으로 입산과 하산을 자유자재로 한 우두머리급 폭도이다. 특히 제주농업중 2학년인 강00(18)는 학생시위 때 앞장서는 학생들의 리더이고 삐라 부착을 주동했다.

이00(20)은 국교 동창으로 앞장서지는 못했으나 폭도들의 협력자로 그들의 시키는 일을 잘했다. 김00(22)과 김00(20)는 무학이나 마을에선 말발이 셌고 활발한 참여로 협조했다.

전00(21) 밑의 임00(19), 임00(16) 등은 폭도들과 부화뇌동, 마을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렸다.”

※ 김두석; 1949. 7. 1. 무기,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365(12-49)

※ 김두병; 1949. 7. 1. 무기,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273(11-57)


83) 김대웅 남로당 남원면 지도부 조직책, 김경만 형 살해자
-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85쪽

‣ 남원면 신례리 김대웅(27) 사망; 2011. 7. 21. 김양하(金亮河, 28년생,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 증언

이 마을에는 남로당 남원면 지도부와 조직책에 있던 김대웅(金大雄, 27)이 있었다. 그의 동생 김00(金00, 23), 김00(18) 등 3형제가 모두 조직활동을 했다. 김대웅은 나이가 많고 초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위미·하예·신예리 일대 학생들을 가르키던 위미국교의 부설 1년 과정 영송소(* 양성소) 교관이었다. 이 양성소를 마쳐 바로 일본 지원병으로 끌려갔다. 김대웅은 제주도내에서 열리는 육상대회 때 늘 1등을 차지했다고 한다.

또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위미, 신례국교 교사이던 정석봉(鄭石奉, 30), 양00(梁00 , 22), 양00(梁00, 24)가 이 마을 남로당의 중심인물이다. 위미국교 2회 졸업의 양00은 학교에서 급장을 맡는 등 똑똑했다. 양00가 입산하는 바람에 남원면서기를 하던 그의 형 양00는 마을이 소개할 때 마을사람들 앞에서 토벌대에 의해 곤욕을 치렀다.

김대웅(27); 신례리 출신, 남로당 남원읍 핵심. 태흥리 거주 김경만의 부친과 형을 살해한자.

“김경만의 형을 습격 살해하고 그의 옷을 벗겨 김대웅이 입고 재습격 시 체포되었는데 당시 김경만은 17세로 경비 보조원으로 근무할 때. 김대웅을 직접 목견함.”

-2014. 3. 6. 김영중 증언록


84) 현수석 서귀포 서호동 인민위원장
-‘제주도의 4월 3일은? 3집’ 87쪽

‣서귀면 호근리 현수석(38) 행방불명; 2011. 7. 21. 김석규(30년생, 서귀포시 서호동) 증언

“그는 할머니와 단둘이 마을에서 100여m 떨어진 곳에서 살았기에 늘 외로웠다. 그런데 일제 때 마을청년단장을 하고, 무학이나 패기와 추진력이 있어 해방후 마을인민위원장이 된 현수석(玄壽石, 38)이 그를 아꼈다. 그는 외로워 ‘사람이 되겠다’며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해 더욱 사랑을 받았다. 어느 날 현수석이 삐라 초안을 들고 그에게 쓰도록 지시했다.”

“현수석 인민위원장 밑에서 입산한 사람은 여00(23)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무학인데다 절름발이 장애인이었다. 그러나 현수석과 함께 조직 활동을 한 서호국교 교사 송00(24), 군청 서기였던 현00(27), 청년회장 박0024), 열렬한 좌익 지지자로 서귀중 1년생의 오00(21) 등의 영향으로 호근리의 주민 피해가 많았다.”

 

85) 백발백중의 폭도 김성원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2집’ 147~148쪽

‣대정면 안성리 김성원(29) 행방불명; ‘4·3 장정 6’ 70~71쪽, 87쪽

“4월 3일 새벽 - 지서습격

♦4월 3일 지서 습격 전에는 군사훈련 경험이 없었습니까?

아무 훈련도 없었지. 총도 단 두 자루뿐인데 왜놈들이 나갈 적에 파묻어 둔 거였어. 이걸 파 가지고 꿩 쏘으러 다녔던 총들이야. 내가 가진 총은 꺾어진 총이라. 연발식도 아니고 구구식. 그건 반동이 아주 심해서 한번 쏘면 사람이 뒤로 넘어질 정도라. 다른 총 하나는 반듯한 거였는데, 이 총 가진 사람은 총질에는 아주 도가 튼 사람이라. 김성원이라고. 안성리 사람. 그 사람 별명이 꿩 대가리(머리) 동무라. 꿩을 쏘면 몸뚱아리가 다 달아나서 먹을 게 없으니까, 이 사람은 꿩 대가리만 맞추거든. 그러니 꿩 대가리 동무라는 별명이 생겼지. 4·3나기 전에 경찰이 총을 다 반납하라고 했어. 우리 집에도 조사 왔는데 꿩 쏘러 다닐려고 숨겨뒀었지.

그래서 처음 행동개시를 할 때 그 사람은 반듯한 총, 나는 꺾어진 총 이렇게 두 자루였지. 그리고 니뽄도(일본도) 몇 개 있고, 그 외에 쇠창도 몇 개 있고. 그 때 내 꺾어진 총이 4월 3일날 지서 습격 때 경찰 붕알(불알)에 맞았기 때문에 그 후부터 ‘붕알총’이라 불렸어. 그러니까 내 총만 붕알총이 아니고 산에 있는 꺾어진 총은 모두 ‘붕알총, 붕알총’이라 했어. 그 후에 내 총은 보초서는 데만 사용했지.”

“우리가 산방산에 피신간 때가 도당 책임자 세 명(송원병, 백창원, 고승옥)이 죽기 전인데, 그 때 산방산에는 송원병, 나, 고승옥, 꿩대가리 동무가 같이 있었을 때라.”

※김성원;1951.1.15 현재 군사부원, 강재훈의 ‘제주4․3의 실상’ 273쪽, 재산 잔비 명부 번호 11, 1948. 4월 입산


86) 고용진 1950년까지 잔비로 폭도였다, 토벌대에 생포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61~162쪽

‣조천면 와산리 고용진(20) 행방불명; 제주신보 10월 17일, ‘제주4․3사건 자료집 3’ 159쪽

“<조천지국 발> 지난 13일 조천지서 사찰계장 지휘 하에 조천지서, 함덕지서 및 자위대 합동으로 산폭도를 토벌하였는데 조천면 대흘2구(속칭 고븐다리)에서 재산 잔비 2명-함덕리 출신 김이등(金二等), 와산리 출신 고용진(高龍珍)을 생포하였다 하는데 이 용감무쌍한 경찰 공적 이면에는 잔비 소탕에 경민 일치 협력한 가화(佳話)가 숨어 있다. 즉 전기 김이등, 고용진을 포생(捕生)하는데 앞서 김이등의 이모부 함덕리 출신 송규남(宋奎南, 55)씨의 활약이 컸다하는데 이와 같이 대의멸친(大義滅親)하고 경찰에 협력하여 준다면 산폭도의 소멸은 쉬운 일이며 불원 장래에 평화경이 실현될 것이라 한다.”


87) 이양도 북촌리 남로당 조직책, 경찰후원회장과 이장 살해 때 지휘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68쪽

‣ 조천면 북촌리 이양도(생존, 추가희생자); ‘이제사 말햄수다 ①’ 251쪽

“이양도(북촌리)

• 북촌리 당 조직부 책임자
• 1947년 가을, 입산하여 활동. 북촌리 투쟁위원회 조직부 책임
• 1949년 5.5. 체포됨
• 전기고문 후유증으로 오줌을 누지 못했음 ”

“북촌리의 남로당 조직책 이양도는 48년 12월 18일 경찰후원회장 홍성도와 김성규 이장 등 3명을 살해할 때 폭도를 인솔하고 지휘했다는 것이다. 마산과 거제도에 살던 이양도가 고향을 찾았을 때 홍 회장과 김 이장 가족 청년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큰 봉변을 당했다. 이후 고향을 찾지 못했다.”

- 2014. 3. 12. 이기원(조천읍 북촌리) 증언,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2집 380쪽


88) 김두옥 남제주군 폭도대장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70쪽

‣ 대정면 안성리 김두옥(34) 행방불명;2011. 8. 31. 이인배(22년생, 서귀포 대정읍 인성리) 증언

“대정골 안성리는 일본에서 노동운동을 했고 해방 후 남로당 중앙당의 선전부장 등을 거쳐 1948년 월북 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낸 강문석의 고향이다. 그는 해방 직후 잠시 고향에서 인민위원회를 지도했고 보성초등학교 설립도 주도했다. 폭도 총사령관 김달삼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일 수 있다. 인민위 간부 류신출(柳辛出, 인성리)이 바로 폭도 두목이됐다. 류신출의 조카 류00(25)도 입산했다. 한학자로 글씨를 잘 썼던 고문수(인성리)는 인민위 간부(*보성, 안성, 인성 3개 리 합동 인민위원장, ‘4·3장정 6’ 27쪽)가 됐다가 경찰의 추적으로 입산, 그의 입산으로 아버지와 딸이 총살되었다.

경비대 9연대의 남로당 세포책인 고승옥(高升玉)도 대정골 보성리 출신이다. 일본 오사카 상업학교를 다니다 일본군 지원병으로 전투기 조종사가 되기도 했던 그는 해방 후 인민위 활동으로 경찰에 쫓기자 경비대 1기생으로 입대했다. 그는 9연대의 남로당 조직책 문상길 중위 등과 1948년 5월 20일 사병 41명의 탈영을 주도했고 박진경 11연대장 암살사건에 관여했다 발각될 기미를 보이자 탈영했다. 그는 폭도 지도부에 있었고 1950년 7월, 6․25 후의 진로를 놓고 토론하다 노선 차이로 허영삼, 김성규 등에 의해 인민재판에 부쳐져 내분으로 살해되었다.(* 4․3 진상조사보고서 342쪽). 그의 입산으로 그의 부모 고00, 장00, 아내 전00(全00, 20)이 각각 총살됐다. 안성리의 고00(22)은 9연대 탈영병으로 입산했고 강00(31), 김두옥(34), 김00(24) 등도 강문석의 영향으로 입산했다.”


※김두옥;‘4‧3장정 6호(1993. 9.15. 제주4‧3연구소) 98쪽

“인민유격대 남군 대장, 월북자”

※고군현; 위의 책 78쪽

“9연대 탈영병”

*고문수;'4·3 장정 6‘ 76쪽

“대정면 기관(면당 사령부)은 당 책임자 즉 케(캡틴), 조직부, 자위부(군사부), 총무부, 선전부가 있어. 대정면 케는 대정골 김두옥 씨이고 조직책은 고문수 씨라. 이 사람은 산에서 죽었어. 자위부책은 대정면 사람이 아니고 제주시 오라동 사람일거라. 가명인지는 모르겠는데 성도 모르고 그저 ‘정관 동무, 정관 동무’이렇게 불렀어. 그 때는 가명을 사용하기 때문에 이름을 알려고도 않했어. 도당에서 파견시킨 거지. 지동원이라고 해서 한 명이 오는데, 고정적으로 그 사람만 오는 게 아니라 면당에서 인선을 시켰어. 이 사람이 자위부책이 되는 거라.

기관에는 투위가 있어서 케, 조직책, 자위부책 세 사람이 결정하는 거지. 그리고 총무부는 식량 같은 거나 보급을 담당하고, 선전부는 삐라를 만들고, 산간부락이나 민주부락에 가서 사람들을 모아 연설하고, 결국 선전부는 학생패라 났지.”

“안성리의 폭도 두목은 김두옥(34)이고 강기창(23 *5월 20일 탈영자 핵심요원, ‘제주4‧3사건의 진상’ 164쪽)은 9연대 탈영병으로, 그의 형을 살해한 일행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임군철(林君哲, 33년생,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 2012. 10. 30. 증언(‘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66쪽)


89) 이행언 대정 신평리 남로당 총책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71쪽

‣ 대정면 신평리 이행언(37) 행방불명; 2011. 8. 31. 고달순(34년생,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증언

“이 마을은 이웃마을인 안성의 강문석 영향도 컸었다는 분석이다. 마을 지도급 인사 이행언(37)은 학식이 높아 신망이 있었고 왓샤 시위를 주도했다. 대정중 2학년생인 임00(18)는 청년들 가운데 앞장섰다. 또한 마지막까지 폭도였다가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임유길과 그의 동생 임00(임00, 29)도 폭도였다. 임유길, 임00의 부친 임00(65)과 임00 부친 임00(53)은 5촌 지간. 임00과 임00은 폭도가족이란 이유로 소개할 곳에 방을 빌릴 수가 없었다. 때문에 소개하지 못하고 굴을 파서 살다가 붙잡혀 총살됐다. 강00(19)은 폭도였다가 월북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평리의 좌익은 이행언(37)이 중심이 됐다. 지식이 상당하다고 마을에서 정평이 났고 대정중학 수학선생이던 동생 이00(28)도 형의 영향으로 폭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임00(27)는 중간급 무장폭도였고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 손재주가 좋았던 김00(18)과 요망지다고 소문 난 조00(27)이 남로당 활동을 했다.”

-고기언(高基彦, 32년생, 서귀포시 대정읍 신평리) 2012. 10. 30. 증언(‘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62쪽)


90) 송병무 무릉 인향동 총책, 대정무장대 소대장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72~173쪽

‣ 대정면 무릉리 송병무(23) 행방불명; 2011. 8. 31. 양경팔(1918년생, 대정읍 무릉2리) 증언

인향동의 주동은 대정중을 졸업한 송병무(23)이고 국교를 졸업했으나 똑똑했던 송00(25)과 송00(20) 형제, 김00(22) 등이 폭도가 됐다.

좌기동 최고지도자는 중학교를 나온 이00(23)와 이00(20), 일본에서 살다 온 고00(29), 그의 사촌 고00(21), 일가이며 중학을 나와 똘똘했던 고00(31), 역시 대정중을 나온 고00(23) 등이 핵심으로 폭도활동을 했다.

*송병무와 송백모는 동일인!; ‘4·3 장정 6’ 79쪽

“그 때 인향동 출신 송백모란 사람이 소대장으로 있었어. 이 사람도 몇 사람을 책임을 졌어. 내가 그 사람한데 가서 ‘도대체 이 사람들을 어디 가서 숨기느냐’고 하니까, 송 소대장이 허는 애기가, ‘걱정맙서, 중대장님! 제가 알아서 안전한 지대로 모시겠습니다.

그 사람이 우릴 데리고 간 곳은 숲속이 아닌 밭인데 담배나 면화 등을 재배했던 곳이라. 밭과 밭 사이에는 잣(돌을 많이 쌓은 담)이었어... 뒷 날 들은 정보에 의하면 그 군대 인솔자가 우리쪽 사람이었어. 중문면 사람인데,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 사람이 우리 조직원이라는 애기는 들었지. 그 조직원이 아니었으면 우린 그 때 다 죽었지.”


91) 김이종 하도초교 교사, 수업 때 인민군가 가르침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74쪽

‣ 구좌면 하도리 김이종(27) 사망; 2011. 9. 7. 김화집(33년생, 구좌읍 하도리) 증언

“김화집은 하도국교 3학년 때 해방이 되었다. 얼마 안 돼 이 학교 김이종(27) 선생이 풍금 반주에 맞춰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의 적기가, “원수와 더불어”의 인민군가를 가르쳐 아침 조회 때 이 노래를 불렀다.”


92) 정태규 구좌면 민애청 위원장급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76쪽

‣ 구좌면 세화리 정태규(25) 행방불명; 2011. 9. 8. 오병삼(33년생, 구좌 읍 세화리) 증언

정태규(25)는 학생회장을 지냈고 인물 잘나고 머리가 좋아 똑똑했다. 주먹이 세어 민애청 간부중 간부로 모든 회의를 주관했다. 정00(22)도 제주농업학교 5, 6년생으로 똑똑했으나 공산주의자였다. 문00(22)도 머리가 좋아 영리했던 제주중학생이었으나 입산, 이북으로 간 것으로 알려진다.(문00의 형)”


93) 강문석 한림지서 습격하다 사망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81쪽

‣애월면 어도리 강문석(24) 사망; 2011. 9. 28. 강순호(30년생, 애월읍 어도리) 증언

“강창하(35)는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똑똑했고 일본에서 살다 해방이 되어 귀국했다. 강00(33)는 똑똑하여 일제시대 청년회장을 했다. 강문석(24)은 폭도로 한림지서를 습격했다 죽었다. 일본에서 학교를 나온 강00(21), 강00(29), 강00(24), 배00(20), 현00(23), 강00(28) 등은 모두 요망져(똑똑하여) 좌익활동을 하였거나 입산했다. 강00(19)은 똑똑하지는 않았으나 휩쓸려 따라다니다 그의 아버지와 동생이 그의 때문에 총살됐다.”


94) 오달중 구좌 상도리 폭도 간부, 부상으로 생포됐다 완치되자 재입산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82쪽

‣구좌면 상도리 오달중(42) 사망; 2011. 9. 28. 정시봉(35년생, 구좌읍 상도리) 증언

“상도리에서 입산자는 오달중(吳達中, 42), 정권수(鄭權洙), 오달용(吳達用, 21) 3명이다. 오달중이 제일 똑똑했다. 그는 입산했다가 체포되어 지서에 있다 풀려나 발 부상을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세화리 습격 후 없어져 재입산했다. 오달중에 대한 사살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의 동생 오달용은 일제 때 해군 장교였다는 설이 있다. 그는 다랑쉬굴을 아지트삼아 폭도활동을 벌였다. 정권수는 문도배(文道培) 구좌면 인민위원장, 과도정부 입법의원의 조카 사위로 구좌면 일대 폭도 사령관이었다.”

 

95) 채희관 성산면 민청간부, 교원, 우체국 직원 퇴직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12쪽

‣ 성산면 성산리 채희관(21) 행방불명;‘제주4‧3 구술총서03’. 169쪽

“지서에 옛날 그 일본 왜정 때 주재소라는 경찰관 주재소라는 간판 떼 불고 조선인민공화국 보안대. 그것이 결국 임시 그 치하를 담당한다 해서. 인민공화국 아니면은 민주청년이라고 해서. 그것이 소위 민청이야 민청. 같이 일정 때부터 같이 근무허단 채희관이란 사람이 있었어. 그 사람은 해방되니까 자기 출세해 볼라고 우체국 그만두고 민청간부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그 일제 때 친구들이 성산포 친구들이 전부 민청 쪽으로 자기네 세상 왔다고 헨에 민청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우리는, 나는 민청에 가입을 안 하니까 공무원은 어느 정당에도 가입할 수 없다고 상부의 지시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국장하고 나는 일절 그런데 가입을 안 했어요.…”

“‣ 제주신보 1947년 3월 16일

성산면 민청원 피검

지난 2월 27, 8일경 성산면 민청위원장 한순화(韓順和), 채희관(蔡熙琯)‧ 김경환(金敬還) 고성국민학교 교원 2명은 (삐라)를 첩부(貼付)한 바 있어 포고령 제2호와 제19호 위반으로 검찰청에서 방금 구류 취조중이라 한다.”

- ‘제주4‧3사건자료집(신문편) 1’. 111쪽 -


96) 김여수 이호동 좌익 주동자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13~214쪽

‣제주읍 이호리 김여수(19) 사망; ‘제주4‧3 구술자료 총서 01’ 223. 225쪽

“우리 큰 오라방 이름은 김여수. 한가지 기억나는 건, 우리 큰 오라방이 그때 요망져 나서(똑똑했었어). 하귀 중학교 나오고 농고 다녀실 거라. 우리 동네서 우리 오라방(오라비)하고 두 사람밖에 고등학교 한 사람이 없었어. 그때도 우리 오라방은 3‧ 1운동에 막 앞장서서 육지 형무소도 심어가서 막 고생했는데.…”

“그 동생(큰 동생 김여수) 때문에 우리집 식구들이 다 그렇게 됐지. 그때는 참, 멍청하게도….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잘난 사람은 몬딱(모두) 그때 죽었어. 우리 친족은 막 전멸당했어 정말.

우리 김씨 집안이 잘도 많이 죽었지. 궨당(친척)이 궨당 잡아먹고, 친구가 친구 잡아먹은 거라. 그러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만큼도(여수만큼도) 안 했던 사람들도 많이 죽었어. 친척하나만 게고제고(어쨌든) 하나만 잘못 만나도 죽는 집안이 많이 있었는데, 우리 오라비도 그렇게 하니까(산에서 주장하니까) 경(죽어야) 헤야 마땅하구나. 그런 생각도 들언게. 그 때 시절엔 하도 겁나고. 그냥 겁나서.”

“김여수 ; 진보적인 이호리 주민. 정뜨르 비행장에서 구덩이를 파게 한 뒤 몰아세워 기관총으로 집단 사살 후 생매장됨”

-‘제주민중항쟁 Ⅰ’ 470쪽 -

“11월 12일 이호리를 포위 강습하고 부락민을 닥치는 대로 체포해서는 전율할 집단적 테로를 가한 다음 거기에서 애국적인 활동가 ‘김여수’를 비롯한 300 여명의 민주주의적인 근로인민들을 ‘산부대’에 협력하였다는 리유로 ‘정드르’ 비행장에 끌어다가 그들에게 구덩이를 파게하고 , 그 앞에 일체 몰아 세워서는 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하여 집단 사살 또는 생매장하였다. 또한 이들의 패덕한들은 ‘김정풍’에게는 나는 ”유격대의 선전 부장임니다“고 쓰어진 큰 ‘포패’를 목에 달아매고, 일반 군중들에게 공포와 위협을 주기 위하여 제주시내의 모든 주민들에게 끌고 다니면서 보인 다음 쥐도 새도 모르는 거처 없는 사형장에서 살해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에게는 남편에 협력하고 빨지산의 가족이라는 죄명 하에 귀축같은 야수들은 천인이 공노할 야만적 테로를 가한 다음… 죽이였다.”

- ‘제주도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188쪽 -


97) 김민하 남로당 고칠종 조직부장보다 윗선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14~215쪽

‣ 제주읍 이호리 김민하(41) 행방불명; ‘제주4‧3 구술자료 총서01’ 256 . 259쪽

“큰 오라버니는 김민하, 족은 오라바님은 순하, 조켄 상훈이. 김순애. 여자. 큰 오라버니는 마흔하나에 돌아가셨수다. 족은 오라바님은 서른여섯?…”

“오도롱(이호1동)은 고칠종이 와 우리 오라바님은 위쪽에 사십주게. 칠종이보다. 칠종이도 소문난 사람이주만은 우리 오라방이 더 소문낫수다게. 오도롱을 죄고 펴고 헷수다(했다). 우리 오라방 말이랜 허면 아니 거세기 할 수가 엇어(겨역할 수가 없어). 그때 이듸서 초등학교만 헹은에 시에 초등학교 나오란 그냥 일본강 일본서 살앗수다. 일본서 그자 쭉… 죽젠 이듸 오랏주게. 마흔 나도록 일본에 그냥 살다가.

그때 시절에 어머니가 아들 보고파서 갔다가 한 달 살아서 오고, 어머니가 한 달 살다 오면 이제 또 아버지가 한 달 살다 오고. 오도롱서 우리 어머니님네 두 분 뿐 일본 뎅겼지(다녔지). 일본 뎅긴 어른이 엇수다.”

※ 김민하:남로당 조직부장

- 자유수호협의회 ‘제주4‧3사건 자료집’ 64쪽

※ 김민하; 1949. 6. 28.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932(7-61)


98) 부희순 구좌 덕천리 남로당 지도부, 추가희생자 결정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19쪽

‣ 구좌면 덕천리 부희순(추가 결정); ‘4‧3 장정(長征) 4’. 58쪽, 59쪽

“그러니까 사상이 먼저 들어 왔다는 거야. 우리는 그 때 박헌영, 김일성 밖에 몰랐어. 나중에야 김구, 이승만을 알았주(알았다). 여기서 인민위원회 결성 때 최고지도자는 박헌영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어. 4‧3 당시에도 이장보다 인민위가 더 세었주. 당시 인민위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사람은 조금 경제적으로 곤란한 사람, 남의 집에 사는 사람이었주. 인민위원회에서는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야학에서 가끔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부희순, 부순화, 고하석 씨가 사상이 있었주. 그 때 부희순이나 고하석의 말이라면 전부 따랐주. 둘 정도가 산에도 올라갔주. 나머지는 상덕천도 없고, 하덕천도 없어. 그들은 실제로 전봇대도 자르러 나갔던 것 같아. 가끔 통신이 끊어진 적이 있었거든. 내가 알기로는 하덕천에는 부순화가 조금했고, 상덕천에는 고하석이 했는데 당시에는 그것에 동조하는 경향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

“5‧ 10 선거가 제주도에서 실패로 돌아간 직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8월 15일을 기해서 무장대의 공세는 다시 재개된다. 무장대는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거리를 활보할 정도로 세력이 세었으나 고하석, 부순화, 부희순 씨 등이 잡혀서 타살당함으로써 점차적으로 토벌대의 세력이 커졌다.”

“47년 여름이 지나면서 상덕천에는 부희순, 고화석이 주동이 되어 밤에는 왓샤 부대 세상이었다. 이들 좌파들은 밤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가족사항을 파악하고 점검하기도 했다. 김녕지서장 조 경위가 덕천에 와 연설하다 좌익세력에 눌려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47년 가을쯤(10월 26일) 9연대 군속으로 있던 이동열(48, 일명 이열준)이 산에서 죽창으로 난도질당해 살해됐다. 9연대는 좌익 소행으로 보고 좌익지도자인 부희순을 찾았으나 그는 이때 입산하고 덕천에는 없었다. 남아 있던 고화석은 9연대에 붙잡혀 송당에서 총살됐다.”

-2014. 4. 16. 허양율(35년생) 증언(‘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246~247쪽)

※ 부희순; 1948. 12. 5. 무기형, 제주지검 수형인 명부 번호 22(1-22)


99) 김문석 남로당 및 폭도 한림 간부, 48년 5월 14일 한림습격 총 지휘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25쪽

‣ 한림면 한림리 김문석(32) 행방불명;2012. 5. 24. 조신옥(28년생, 제주시 한림읍 한림1리) 증언

“조신옥은 6‧ 25가 나자 앞장서 군 지원서를 쓰도록 했다. 그 군은 해병대였고 한림지역에서는 3기생이 31명이었다. 8월 2일 모슬포에서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8월 25일 면회 온 누님으로부터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지서 옆 이발관에서 일해 온 형님 조신돌이 1차 예비검속 때는 풀려났으나 2차 예비검속에 끌려가 모슬포 송악산 자락에서 총살됐다는 것이다.

후일 안 것은 형의 죽음은 서당을 15년간 함께 다닌 친구 김문석(32) 때문이었다. 김문석은 한림에 오면 형에게 50전, 1원을 꿔달라고 했고 그의 형은 마다하지 않고 돈을 줬다. 김문석은 남로당원이었다. 그는 자기의 공적을 염두에 두었는지, 그의 친구에게 사례할 뜻이 있었는지 돈 준 것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이 수첩이 드러난 것이었다. 친구에게 돈을 준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활동비를 댄 꼴이 되어 버렸다. 조신옥이 제대한 뒷 해 4월 일부 유족들과 함께 희생된 56명(이중 5구는 신원확인 불가)의 시신을 명월 상동 속칭 ‘개꺼리’ 오름 뒤쪽에 안장했다. 희생자 중에는 홍00 전 국회의원의 장인 김00도 있다.”

※ 김문석; 1949. 6. 28. 사형, 제주지검 수형인명부 번호 1062(8-91)

“48년 5월 14일 대낮에 한림지서가 폭도들의 습격을 받았다. 폭도들은 이날 새벽 면장 부인을 사살하고 가옥 6채를 방화하고 철수 했다가 다시 습격한 것이었다. 이때 한림지서장이 어선을 타고 비양도로 피신했다. 보초 서던 경찰관 1명이 죽고 폭도들 세상이 되었을 때 제주읍에서 응원경찰대가 도착, 교전을 벌이며 폭도들을 추격했다. 폭도들은 시신 4구(경찰 보고는 5구)를 남기고 퇴각했다. 이어 모슬포의 9연대도 도착했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됐을 때 9연대에서 이들 시신을 ‘면민장’으로 치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 9연대 장병은 5월 22일 41명이 입산키 위해 탈영했다. 이날 폭도들을 총지휘한 것은 한림3리 김문석(32)으로, 상대리에 사무실을 두고 한림 일대를 장악한 것으로 알고 있다.”

- 이영선(李玲璇, 30년생, 제주시 한림면 상대리) 2012. 6. 20. 증언


100) 김승휴 한림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29쪽

‣ 애월면 애월리 김승휴(32) 행방불명;2012. 7. 4. 김관진(26년생, 제주 시 애월읍 애월리) 증언

“애월면에서 좌익의 우두머리는 인민위원장이었던 장제형이고 부위원장은 김00, 김승휴(32)이었다. 양봉업을 하던 김승휴는 좌익 청년활동을 활발히 폈다. 그의 동생 김00(24)도 형의 영향으로 좌익 청년활동을 했다. 김두휴와 동창인 박00(24)도 패거리로 함께 활동을 하다 입산했었고 박의 사촌인 박00(22)도 입산했다가 잡혀 목포형무소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일제 때 애월면 서기를 오래한 이화택(41)도 좌익 활동을 열심히 한 운동가이다.

※ 김승휴;1949. 7. 1 무기형, 제주지검 수형인 명부 번호 1303(11-87)


101) 전사만 9연대 탈영병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31쪽

‣ 애월면 구엄리 전사만(21) 행방불명; 2012. 7. 4. 고원화(22년생, 제주시 애월읍 구엄리) 증언

“구엄리에서 폭도는 김00의 동생 김00(20)과 전사만(21)을 꼽는다. 김희경은 중등교육을 받아 똑똑했고 형의 영향을 받았다. 전사만은 김00과 같이 9연대 입대했다 탈영, 폭도가 됐다. 반면 그의 형 전00은 우익이었다.”


102) 양계석 애월 고성리 남로당 총책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33~234쪽

‣ 애월면 고성리 양계석(29) 행방불명; 2012. 8. 7. 강정(23년생,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 증언

“고성리에서 남로당 총책은 양계석(梁桂石, 29)이었다 주민들의 생과 사를 결정하는 생사여탈권을 가졌고 산에서 죽었다. 그의 동생 양00(25)도 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산 활동을 했다. 강00(姜00, 33)은 입산하여 폭도였다가 귀순, 예비검속 때 죽었다. 김00(金00, 20)도 열성분자로 입산하였다 대를 이을 아들 하나를 남기고 예비검속 때 죽었다.”


103) 이종성 폭도였다 월북, 지난 3월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에서 신청상봉
- ‘제주도의 4월 3일은? 5집’ 241쪽

‣ 애월면 금덕리 이종성(19) 행방불명; 2012. 8. 21. 이종해(29년생,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증언

“이 날 1학년에서 낙제 해 1학년을 두 번 다닌 그의 애월초교 동창 이종성이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발등을 밟혔다는 말을 훗날 들었다. 허나 이종해는 이종성이 다친 것은 돌담을 넘다가 담이 무너지며 그 돌이 발등에 떨어져 다친 것으로 본다. 이종성은 북한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이종성은 북한에 있었다.

2013년 9월 28일 남북이산가족 상봉 대상에 이종성이 있다. 
2013. 9. 13일자 제주신문을 옮긴다.

“65년 만에 북에 있는 형님을 만날 생각에 밤잠을 설쳤는데…”

오는 28일 이산가족 상봉을 앞두고 돌연 상봉행사가 연기됐다는 소식을 접한 이종신씨(71. 제주시 삼도1동)는 침통함에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상봉단 2진에 속한 이씨는 오는 27일 강원도 속초시에 있는 리조트에 간 후 다음날부터 2박3일 일정으로 금강산에서 북에 있는 큰형 리종성(83)을 만날 예정이었다.

이씨는 “형님과 그 가족들에게 주려고 점퍼와 겨울 내복 등을 선물로 마련했는데 상봉이 연기됐다는 뉴스를 접하게 됐다”며 허탈해 했다. 이씨는 “형님이 북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뤘을 것으로 보고 이번 상봉에 형수님과 조카들을 만날 생각이었다”며 “상봉이 연기되면서 형님의 안부가 더욱 걱정된다”고 말했다. 한편 3년 만에 재개된 이산가족 상봉에 제주지역 신청자는 576명이지만 최종 상봉 대상자는 이씨 1명 뿐이다”

※ 이종성;1948. 12. 7. 20년형, 제주지검 수형인 명부 번호 103(2-36)
※ 상봉이후 유족이 희생자에서 취소 신청.


104) 김부아 애월 곽지리 폭도, 월북. 애월 수산 충혼묘지에 그 형이 애국단 원으로 비를 세움
-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180~181쪽

‣ 애월면 곽지리 김부아(21) 행방불명; 2011. 9. 28. 신태익(38년생, 애월읍 곽지리) 증언

“곽지리 폭도 1호로 고중형을 꼽는다. 그는 힘은 별로이나 악바리로 통했다. 누구도 못 말리는 곽지리의 공포 대상자였다. 그러나 곽지리 청년들은 그를 그대로 나두면 큰 일이 날 것 같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어느날 대화하자며 그를 불러들였고 고구마를 먹으며 이야기하다 청년들이 떼몰이로 그를 돌로 쳐 죽였다는 것이다. 고중형은 곽지리의 소 물 먹이는 속칭 버들못 위에 있는 궤(적은 굴)를 폭도들의 아지트로 삼아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 마을에도 좌익활동은 있었다. 똑똑한 청년 장00(22)과 김부아(21)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경찰에 잡혀 서울 마포형무소로 갔다가 6․25 이후 행방불명됐다.”

곽지리 김부아(金富兒)는 월북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애월읍 수산봉에 있는 충혼묘지에는 애국단원으로 희생되었다는 묘비가 있음. 동 비석은 백정구 읍장 당시 김부아의 형 김창아와 공동 건립하였다.”

- 2014. 3. 6. 김00 증언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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