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해임되다
맥아더 해임되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4.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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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51년 4월 11일 역사 속의 오늘

한국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자 맥아더 사령관은 만주 폭격과 중국 연안 봉쇄, 대만 국부군(國府軍) 참전 등을 주장했다.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압록강 다리 폭파를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제안했지만 트루먼은 중국을 자극하지 않기를 원해 이를 거부했다.

맥아더 장군은 휴전 논의를 자살적 유화정책이라고 보고 공산 음모자들에 맞서는 전면전쟁을 요구하는 편지를 미국 상원위원회에 보냈다. 

이에 맞서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미국 시간으로는 4월 10일)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 직에서 해임하고 리지웨이 장군을 그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리지웨이 장군이 맡고 있던 주한미군 사령관은 제임스 밴 플리트가 후임으로 부임했다. 

맥아더의 해임은 본인에게 정식 루트를 통해 통보된 것이 아니라 언론에 미리 새나가는 바람에 새벽 1시에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열어 해임 성명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맥아더는 도쿄에서 라디오 방송을 들은 부관을 통해 자신의 해임 소식을 들었다. 후에 맥아더는 “하인도 이런 식으로 해고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불쾌해 했다.

맥아더가 추구한 승리는 한반도에 있는 적군의 섬멸과 한국을 민주정부로 통일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의 구상은 공산주의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붉은 사조의 역사적인 퇴조를 기록할 타격을 가하고, 공산주의의 세계적인 패배를 꾀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3차 세계대전을 각오한 전면전을 벌여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를 말살해야 한다는 굳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은 초지일관 6·25를 제한전으로 규정하고 있어 두 사람 간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트루먼은 한반도보다 유럽이 훨씬 중요한데, 병력을 동아시아에 쏟아 넣고 있을 때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면 유럽을 지키기 힘들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트루먼이 내린 맥아더의 소환명령서에는 한국에서 공산주의 침략을 저지하되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고 3차 대전을 예방하는 ‘제한전’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소환명령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정책을 어떻게 하면 전면전 없이 저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와 또 유엔에서 우리와 함께 협력한 다른 나라가 전면전 없이 공산주의와 계략을 저지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바로 한국에서 적의 공격에 대항하여 적을 쳐부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것이 우리가 해오고 있는 것으로, 그 일은 힘들고 고된 임무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훌륭하게 성공적으로 해 오고 있으며,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 왔다.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한국전쟁이야말로 제한전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군인들의 귀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와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들의 안보가 무모한 행동으로 인하여 위험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3차 대전을 방지하기 위하여, 나는 맥아더 장군이 이러한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사건을 통해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키는 것이 당연하며, 그 결과 우리 정책의 목적에는 아무런 의심과 혼동이 없게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왔다….’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해임에 대해 앤 코울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인은 맥아더의 해임에 대해 분노했다. 트루먼의 패배적 정책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전국에서 트루먼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국제부두노조는 맥아더의 해임에 항의하여 조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50만 인파가 공항에서 도심까지 도열해서 조국으로 돌아오는 영웅을 열렬히 환영했다. 뉴욕에서는 7백만의 시민들이 맥아더를 위해 종이 꽃가루를 뿌렸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귀국하던 아이젠하워를 환영했던 시민보다 배가 많은 숫자였다. 

전국의 여론조사는 국민의 66%가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화당은 맥아더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도록 초청했다. 많은 사람들은 트루먼을 탄핵하라고 요구했다. 매카시 상원의원은 맥아더의 과시적 태도를 싫어했지만 트루먼이 전쟁을 이기는 장군을 해임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더욱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는 트루먼이 “한밤중에 달콤한 술에 취해서 그런 결정을 했다”고 비난했다.’

귀국한 맥아더는 1951년 4월 19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고별 연설을 했다.

▲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퇴임한 맥아더 장군.

“한국만이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 국민들이 보여준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 상태를 택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내게 한 마지막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투 중인 여러분의 아들들을 한국에 두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든 시련을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정말 훌륭하다고 주저 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이 야만적인 분쟁을 명예롭게, 그리고 시간 손실과 인명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끝내고자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점차 심각해지는 유혈참사는 저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 용감한 젊은이들은 저의 마음속에, 그리고 항상 저의 기도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군에 입대할 때, 20세기가 시작되기도 전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제 소년 시절의 모든 희망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포인트 연병장에서 임관하던 그 날 이후로 세상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저의 희망과 꿈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그 시절 가장 즐겨 부르던 어느 군가의 후렴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 속의 노병처럼 이제 저는 제 군 생활을 마감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께서 의무에 대한 깨달음을 주신 바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고 애쓴 한 노병으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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