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임시정부 수립하다(19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 수립하다(1919년 4월 13일)
  • 김용삼 편집장
  • 승인 2015.04.1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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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4월 13일은 우리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지금부터 96년 전인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선포된 날이기 때문이다.

임시정부 수립 움직임은 그로부터 한 달 전 전국을 뒤흔든 3·1 만세운동의 여파로 시작되었다. 무저항 비폭력 만세운동을 총칼로 탄압하여 전 세계에 충격파를 던진 3·1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민족 지도자들은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서울, 상해, 러시아령 연해주 등 곳곳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비밀 모임을 진행했다.

그 첫 시도가 상해 임시정부였다. 1919년 3월 12일 밤 10시가 조금 지나 상해 프랑스 조계 내의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위치한 한 허술한 주택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본국에서는 손정도, 최창식, 현순 등이 왔고 일본에서는 최근우와 이광수가 도착했다.

북중국과 극동 러시아 지역에서는 이동녕, 이시영, 김동삼, 신채호, 조소앙 등이 참석했으며 상해에 머물던 김철, 신석우, 여운형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회의가 소집된 것이다.

4월 10일 상해 금신부로에서 열린 회의에서 임시의정원(국회)을 구성하여 의장과 부의장을 선출했고, 11일 속개된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정부기구는 국무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국무원(내각) 안에 내무‧외무‧재무‧법무‧군무‧교통 등 6부를 두고 국무총리를 위시하여 각부 총장을 투표로 선출했다.

▲ 임시정부 수립일 기념 사진(출처 : 호국보훈처 출처)

투표 결과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재무총장에 최재형, 교통총장에 신석우, 군무총장에 이동휘, 법무총장에 이시영이 선출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919년 4월 13일, 내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3월 17일는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선포되었고, 이보다 하루 전인 3월 16일에는 서울 내수동 64번지 현직 검사 한성오의 집으로 임시정부 수립 준비위원들이 비밀리에 모였다.

이날 참석자들은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정부 이름을 ‘한성정부’라고 정했으며, 각료 선출에 나서 집정관 총재(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총장 및 내무부 총장 이동휘, 외무부 총장 박용만, 군무부 총장 노백린, 재무부 총장 이시영, 법무부 총장 신규식, 학무부 총장 김규식, 교통부 총장 문창범, 노동국 총판 안창호, 참모부 총장 유동열 등을 선출했다. 그리고 4월 23일 한성정부를 선포했다.

서울과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비슷한 시기에 임시정부가 선포되자 상해에 와 있던 민족 대표자들은 국내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진행하여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1. 상해와 노령(露領)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체 해산하고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서울정부(한성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임을 인정한다.

2.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 둔다.

3. 상해에서 설립한 정부가 실시한 행정은 유효임을 인정한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9월 11일 서울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임시정부를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임시정부는 민주와 민본(民本), 민권을 추구하는 민주공화제를 기본이념으로 삼았고, 임시의정원이라는 대의기관을 설치하는 등 삼권분립 원칙에 의거한 민주공화제 정부가 출범했다.

이승만이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에 이어 통합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한성감옥 옥중에서 이승만의 전도로 기독교로 개종한 이상재, 신흥우, 유성준, 김정식 등 국내의 친(親)이승만 기독교 세력의 영향력 덕분이다. 한성정부는 이유갑, 홍면희 등이 전면에서 활동했으나 그들의 배후에는 이상재, 신흥우, 오기선 등 YMCA의 리더 그룹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성정부를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은 이상재였다.

또 이승만이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미국에 있는 본인에게 알린 사람은 이승만의 절친한 친구이자 후배였던 신흥우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1912년 한국인 최초로 배재학당 당장(교장)에 오른 신흥우는 미국 유학 경험과 뛰어난 영어 구사력 등으로 감리교 내에서 대표적인 국제통이 되었다.

특히 국제 감리교회와 관련된 행사에서 한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활약하게 된다. 덕분에 신흥우는 일제 치하에서도 1년에 한두 차례 이상 자유롭게 해외에 나갈 기회가 있었다.

한성정부가 선포된 직후 신흥우는 미국에서 열리는 감리교 백주년 기념대회 참석 차 미국 선교사 벡(S. A. Beck)의 가족과 함께 출국했는데, 벡 선교사의 딸 인형 속에 한성정부 문건을 숨겨가지고 나와 이승만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일부 정당, 광복회 등 독립운동 단체, 민족사관을 신봉하는 지식인들은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주장하며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한다. 1919년 건국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948년 건국을 인정하는 것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세력을 무시하는 반(反)민족적 책동이라고 비난한다.

그들이 1948년 건국을 부정하는 것은 이승만 등이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해온 민족사관과 직결된다. 그들은 한국 현대사를 반민족 친일세력이 미국과 결탁하여 민족의 분단을 초래하고 독재와 장기집권 등으로 점철된 부끄러운 역사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1919년 건국을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로 1987년 6공화국 헌법 전문(前文)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구절을 제시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선언적 의미가 있을 뿐 실질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직후 “문민정부는 상하이 임시 정부의 법통을 바로 이어받았다”고 선언함으로써 이승만 정부를 위시한 전임 정부들의 정통성을 사실상 모두 부정했다. 1948년 제헌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3·1운동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옳았다고 본다.

상해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실효성 있게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 형태를 갖추고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애국지사들의 단체였을 뿐이며, 정부로서 필수적인 요소와 실체를 갖추지는 못했다. 때문에 그 정신을 이어받을 수는 있으나 법통을 이어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독립투쟁 정신과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하고 그 민족정기와 민족의 얼은 이어받아야 하지만 국가로서의 실체가 없던 그것이 건국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상해 임시정부는 영토, 국민, 정부, 주권 등 국가의 4개 요소를 모두 결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라는 영토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보호하고 통제하며 대내외적으로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어느 나라도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으며, 해방 후 남북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개최된 미소 협상 등 국제회의에서도, 상해 임시정부 대표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표권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국가 구성에 필수적인 4개 요소가 모두 갖추어진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면서도 국가 구성의 4개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구비하지 못한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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