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폴리 전투
갈리폴리 전투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4.24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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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15년 4월 25일 역사 속의 오늘

1차 세계대전 당시 터키에서 벌어진 갈리폴리 전투는 지휘관들의 멍청하고 안이한 전술전략으로 인해 수십만의 인명이 살상된 역사상 최악의 전투였다.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진행된 제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을 당한 것이었다. 

이 사건 직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암살 사건 발생 한 달 후인 7월 28일 세르비아를 침공했다. 이어 러시아가 동원령을 내리자 독일은 중립국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를 침공하여 프랑스로 진격했다. 

이렇게 되자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삼국 협상을 맺은 대영제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여 전쟁은 세계대전으로 불길이 번졌다.

프랑스로 쳐들어간 독일군은 파리 앞에서 진격이 저지된 후 끝도 모를 참호전이 이어졌고, 동부전선은 러시아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로 진격했으나 독일군의 거센 반격을 받았다.

▲ 갈리폴리 전투는 지휘관들의 멍청하고 안이한 전술전략으로 인해 수십만의 인명이 살상된 역사상 가장 최악의 전투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를 잇는 연합국 경제 블록과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동맹국 경제 블록의 격렬한 충돌이었다. 

여기에 오스만 투르크가 동맹국에 가담하면서 전쟁이 코카서스, 메소포타미아, 시나이 반도로 확대되었고 1917년 미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처음엔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합국 입장에서는 흑해에서 지중해로 빠져나오는 전략적 요충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불안 요인이었다. 특히 오스만 제국이 독일 군사고문단의 지도를 받아 급격하게 근대화를 추진했다.

중립을 지켰던 오스만 제국이 독일-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여 흑해를 봉쇄하고 러시아를 공격하면 연합국인 러시아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판단한 영국과 프랑스는 선수를 쳐서 오스만 제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당시 영국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막강한 영국의 전함 십 수척과 순양함, 대규모 수송선으로 대함대를 편성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한 후 이스탄불을 포격하고 단숨에 병력을 상륙시켜 오스만 제국의 숨통을 끊는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오스만군의 사령관은 독일 장군 잔더스 대장이었으나 무스타파 케말 대령(후에 아타튀르크)이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독일의 지원을 받아 다르다넬스 해협을 요새화하고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했다.

처칠의 작전계획은 오스만 제국의 요새를 우습게 본 단순하고 비현실적이고 무모한 계획이었다. 현장 지휘관들은 처칠의 무모한 계획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했으나 해군을 통해 대영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던 처칠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1915년 3월 18일,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의 전함으로 알려진 퀸 엘리자베스호와 신형 전함 수십 척을 동원하여 투르크의 외곽 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갈리폴리 전투의 막이 올랐다.

3월 19일에도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투르크의 요새를 맹공격했지만, 이미 이곳을 요새화하고 있던 잔더스 대장과 무스타파 케말 대령이 지휘하는 오스만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아 큰 피해를 당했다. 

1주일간의 장엄한 포격전 끝에 영국은 전함 3척이 격침되었고, 다수의 순양함이 요새포에 얻어맞거나 기뢰에 부딪쳐 만신창이가 되었다.

▲ 영화 <갈리폴리>의 한 장면.

제2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도 16척의 함정 중 5척을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함대 총사령관인 피셔 제독은 처칠의 무모한 전술에 항의하여 사퇴했고, 처칠도 패전 책임을 지고 해군장관직에서 물러났다.

해군만으로는 역부족임을 절감한 영국 국방장관 키치너는 갈리폴리 반도에 대한 육해군 협동작전을 펴기로 결정하고 이언 해밀턴에게 작전 지휘를 맡겼다. 

4월 25일 영국군은 갈리폴리 반도 남단의 헬레스 곶에, 호주·뉴질랜드군으로 구성된 앤잭 부대(ANZAC, Australia and New Zealand Army Corps)는 북쪽으로 약 24㎞ 떨어진 아리부르누 등 두 곳에 7만5000명의 병력이 상륙했다.

그 동안 오스만제국은 10만 병력을 충원하고 참호를 파고 기관총을 설치하는 등 대대적으로 화력을 강화한 다음 무스타파 케말은 병사들 앞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는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죽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들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영국군이 상륙한 지역은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기에는 최악의 장소였다. 영국군과 앤잭부대는 상륙지에서 거의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고지대에서 아래를 향해 갈겨대는 오스만군의 대포와 기관총 세례에 병사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면서 8개월 동안 상륙지점에 고립되었다.

연합군은 상륙지점에서 단 1마일도 전진하지 못하고 해안에 발이 묶였다. 물도 구하지 못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선박 편으로 실어다 날라야 할 정도였다. 

영국군은 병력을 끊임없이 쏟아 부었고, 굳건하게 참호를 구축하고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무장한 투르크군은 거세게 저항하며 ‘참호전’의 진가를 여지없이 발휘했다.

투르크는 ‘갈리폴리의 구세주’라 불리는 무스타파 케말의 탁월한 지휘 아래 끈질긴 참호전으로 맞섰다. 8월에 수블라 만(灣)에 상륙한 다른 연합군 부대도 적진 돌파에 실패, 결국 12월 1일 전 부대를 철수하면서 갈리폴리 전투는 막을 내렸다. 

영국군과 앤잭부대는 8개월의 작전 기간 동안 25만 2000명, 투르크군은 15만 1000명의 전·사상자라는 큰 희생을 치름으로써 ‘갈리폴리의 비극’이란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보다 며칠 앞서 무너졌고, 연합국과 독자적인 휴전에 합의했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하에 있던 이라크 등 아랍 지역은 영국과 프랑스군이 점령했고, 수도 이스탄불에는 영국군이 진주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후원을 받는 그리스군은 1919년 5월 소아시아의 전략 요충인 스미르나를 점령했다.

국가 존망의 위기 상황에서 갈리폴리 전투 당시 용맹을 떨쳤던 무스타파 케말 파샤(퍄샤는 터키에서 장군, 사령관 등 용맹한 지휘관에게 주는 영예로운 칭호다)는 아나톨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1919년 9월 아나톨리아의 시바스에서 ‘동방제주(諸州)대표자회의’가 열려 케말 파샤를 집행위원장으로 선출했고 연합국과의 강화 조건 등을 포함하는 ‘국민헌장’을 채택했다.

이어 1920년 4월 앙카라에서 열린 ‘대국민회의’는 케말 파샤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영국군 지배하에 있는 술탄 정부는 기능을 상실했다고 선언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이자 이슬람교의 수장(首長)이던 메흐메트 6세는 케말 파샤를 포함한 ‘대국민회의’ 참가자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파문을 선고했다.

1920년 8월 연합국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세브르 조약’을 강요했다.

이 조약은 아랍 지역은 물론 투르크족의 본거지인 소아시아의 태반을 연합국에 할양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을 국제적으로 개방하며 군비 제한, 외국군 주둔 허용 등 가혹한 것이었다.

1921년 여름 소련의 원조로 전력을 강화한 케말 파샤의 군대는 앙카라 인근까지 진격한 그리스군을 사카리아강(江) 전투에서 격퇴했다. 1922년 8월 케말 파샤는 그리스군을 소아시아에서 축출하고 이스탄불로 진격했다. 

1923년 7월 케말 파샤의 앙카라 정부는 연합국과 소아시아에서 투르크의 생존을 보장하는 ‘로잔 조약’을 체결했다.

1923년 터키공화국 수립이 공포되고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케말 파샤는 코란에 근거한 샤리아법 대신 유럽의 법제 도입, 수도원 등 종교시설 폐쇄 및 재산 몰수, 종교 교육 폐지 등 정교(政敎) 분리를 추진했다.

또 아라비아 문자 대신 라틴 문자를 도입했고, 터키 전래의 페즈 모자를 폐지했으며 여권(女權) 신장 등 사회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케말 파샤는 본래 성씨(姓氏)를 사용하지 않던 터키에 성씨 제도를 도입했다. 

케말 파샤 자신은 ‘대국민회의’로부터 아타투르크(터키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아 ‘성’으로 삼았다. 케말 파샤는 1938년 사망했지만 ‘케말리즘’으로 알려진 그의 서구화·세속화 정책은 이후 터키의 국시(國是)가 됐다. 

헌법에 의해 ‘케말리즘의 수호자’로 규정된 군부는 이후 정부가 케말리즘으로부터 이탈하려 할 때마다 쿠데타를 일으켜 ‘케말리즘’을 옹호했다. 

후일 제3세계 지역에서 군사 쿠데타가 열병처럼 번져갈 때 쿠데타 지도자들은 케말 파샤의 ‘터키 근대화’ 모델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5·16의 지휘자 박정희도 케말 파샤의 근대화 혁명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시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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