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민족의 이름으로 폭탄 던지다
윤봉길 의사, 민족의 이름으로 폭탄 던지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4.28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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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32년 4월 29일 역사 속의 오늘

1932년 4월 29일 오전, 중국 상하이(上海)의 훙커우(虹口)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식과 전승기념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이날 상하이에서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식과 전승기념식이 열린 배경은 그 전 해인 1931년 9월 18일 본격적인 만주 침략이 개시된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본 관동군은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30분경 류타오거우(柳條溝)에서 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일본 관동군이 만주 침략을 개시한 이래 다음해인 1932년 1월 28일에는 상해사변을 일으켰다. 

만주 사변이니 상하이 사변이니 하는 용어는 일본인들의 중국 침략을 물타기 하기 위한 용어다. 정확한 용어를 사용한다면 일본군의 만주 침략, 상하이 침략이다.

일본 입장에서 만주가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는 청일전쟁 때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본 군부는 유럽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이 국가 총력전이라는 미증유의 방식으로 전개되는 전쟁 양상을 목격했다. 

일본 본토의 생산력만으로는 국가 총력전을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 광대한 토지와 막대한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만주가 절실히 요구된다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제기되었다.

만주사변은 내각의 통제를 벗어난 일본 군부의 드라이브에 의해 전개됐다. 일본 관동군 참모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등은 류타오거우에서 만주철도 선로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의 소행으로 몰아 1931년 9월 18일 북만주 일대에 군대를 투입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공황의 직격탄을 맞고 빈사상태에 빠져 일본의 만주침략을 저지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이 베이징에, 봉천 군벌의 주력은 만리장성 남쪽에 흩어져 있어 중국군도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일본 관동군은 단숨에 랴오둥(遼東)과 지린(吉林),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일대를 장악했다. 

일본은 1932년 3월 1일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부의(溥儀)를 왕으로 옹립하여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우고 “만주족이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해 독립했다”고 선언했다.

상하이는 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 후 맺은 난징조약에 따라 1843년 11월 개항했다. 이곳에 영국 미국 프랑스가 각각 통치하는 국제공동 조계지인 상하이에 조계(租界)‘가 만들어졌다. 치외법권 지대였던 상하이 조계에는 일본인도 거주지를 이루고 있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이 개시되자 중국 대륙에서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일본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중국인을 매수하여 일본 니치렌종(日蓮宗) 탁발승을 저격하도록 음모를 꾸몄다. 

이 사건으로 1932년 1월 28일 상해 조계(租界) 경비를 담당하던 일본군과 중국의 19로군(十九路軍)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 항공모함과 군함이 출동하여 상하이 외곽에서 격렬한 포화를 퍼붓고, 전투기들이 제공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2월 중순, 3개 사단을 파견하여 중국군을 상하이에서 격파하고 상하이를 점령했다.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기념하기 위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축하 기념식을 거행한 것이다. 

식이 시작되기 전 조선 청년 윤봉길은 어깨에 물통을 메고, 양손에는 일장기와 폭탄이 든 도시락을 든 채 삼엄한 경비를 뚫고 당당하게 식장에 들어갔다. 

축하식이 시작되자 윤봉길은 앞쪽 중앙 사열대를 향해 서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식이 끝나고 11시 40분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는 순간, 윤봉길은 중앙 사열대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 요란한 폭음 소리와 함께 식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 등이 현장에서 폭사했고, 중국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호송되었다가 사망했다. 

중상을 입은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키치사부로(野村吉三郞)는 시력을 잃고 시각장애인이 되었으며, 일본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 등이 중상을 입었고, 주중 일본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는 한쪽 다리를 잃었다. 

그는 후에 일본제국 외무장관에 올라 미주리 전함 함상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할 때 히로히토 일본 천황과 함께 일본 정부 대표 자격으로 목발을 짚고 참석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은 1932년 5월 25일 상하이 파견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해 11월 18일 일본 오사카로 호송되었다. 

▲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전승 축하 기념식에서 폭탄 의거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

그는 1932년 12월 19일 아침 7시 27분 가나자와 교외 미고우시 육군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25년의 짧은 생을 마쳤다. 처형 당시 참관한 검안의는 윤 의사의 최후 장면에 대해 “경멸하는 듯한 미소를 띠었으며, 태도가 극히 침착하고 의젓했다”고 기록했다.

조선일보 2002년 4월 27일자에 의하면 윤봉길의 중국 상하이 의거는 테러가 아니라 교전 중의 전투행위였다는 사실을 일본 측이 인정한 외무성 문서가 2002년 4월 26일 공개됐다. 

‘상하이의 천장절(天長節) 식 중 폭탄흉변사건’이란 제목의 이 보고서는 일본 육군성 인사국이 1932년 9월 외무성에 제출한 자료로서, “본 사건은 상하이 전투 과정에서 우리 군 수뇌자 살해를 목적으로 한 적국 암살단 활약 중에 발생한 사건”이라며 “하수인은 조선 불령인이지만, 그들은 중국군 및 항일 암살단과 일맥상통하고, 중국군 사복요원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혀 윤봉길 의사를 비정규전을 수행한 전투원으로 평가했다.

윤봉길 의거를 지휘한 인물은 김구였다. 김구는 1931년 말 독립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일본 요인들에 대한 암살작전을 개시했다. 

1932년 1월 8일에는 김구가 일본에 밀파한 이봉창 의사가 일황(日皇) 히로히토의 마차 행렬에 폭탄을 던졌으나 천황을 살해하는 데는 실패했다. 3개월 후인 4월 29일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단행된 것이다.

한인애국단원들의 눈부신 활약으로 그 동안 침체되었던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윤봉길 의거는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침체기에 빠질 뻔 했던 한국의 독립운동은 물론이고 만보산 사건, 만주사변, 상해사변으로 위축된 중국에도 용기를 불어넣었다.

중국 국민당 정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을 제공하고 독립군을 훈련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기 시작했다.

김구가 난징(南京)의 중국 중앙군사학교에서 장제스 총통을 만나 한국 청년들이 낙양(洛陽) 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낙양 군관학교에서 한인 청년들의 군사교육은 1940년 광복군 창건으로 이어져 윤봉길 의거의 파장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컸다.

그러나 반대급부도 만만치 않았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위치해 있던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게 된 것은 윤봉길 의거의 파장 때문이다. 

1919년 상하이의 김신부로(金神父路. 현재의 瑞金二路)에서 임시의정원 회의가 처음 열린 이래 상해에서만 12번이나 소재지를 옮겼으나 프랑스 조계 당국은 임시정부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 이후 프랑스 조계 당국은 일본 관헌이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단속하는 것을 용인하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임정은 상해를 빠져나와 인접 도시인 항저우(杭州)로 옮겨야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벌어지면서 임시정부는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藄江)을 거쳐 충칭(重慶‧충칭)으로 8년여를 떠돌이 생활하듯 계속 이동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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