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악마 히틀러 사망하다
희대의 악마 히틀러 사망하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4.29 14: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45년 4월 30일 역사 속의 오늘

1945년 4월 24일 독일 제3제국의 수도 베를린은 노도처럼 밀려든 소련군에 의해 완전 포위됐다. 

4월 29일, 괴링 원수를 포함한 90만 명의 독일군이 미6군에게 포로가 되어 독일 패망은 이제 운명처럼 다가왔다. 

이날 아침, 히틀러는 자신과 최후를 함께하기로 한 23세 연하의 연인 에바 브라운과 지역 판사 주관 하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개인 비서 트라우들 융에에게 유언을 구술했다. 다음은 히틀러가 구술한 마지막 유언장이다.

‘나는 지난 수년에 걸친 투쟁기간 동안에는 결혼이라는 책임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기에 앞서, 나는 오랫동안 내게 충실한 우정을 보여주었으며 순수하게 자발적인 의지로 이 포위된 도시에 들어와 나와 운명을 함께 하려는 여인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나의 아내로서 나와 함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두 사람에게 내가 우리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보상해줄 것이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은, 가치를 지닌 것은 그 무엇이든 당에게 귀속된다. 만일 당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국가에 귀속된다. 국가도 파괴된 경우라면, 더 이상 나의 결정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내가 지난 수년간 사들인 나의 그림들은 나의 사적인 목적으로 사들인 것이 결코 아니며 도나우에 있는 내 고향 린츠의 갤러리를 확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유산이 나의 의도대로 충실하게 처리되는 것이 나의 진실된 바램이다.

나는 내 유언의 집행자로 나의 충실한 당 동료인 마틴 보르만을 임명한다. 그에게는 모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완전한 법적 권한이 부여된다. 그는 내 형제나 자매들과, 또한 다른 누구보다도 내 아내의 어머니와 마틴이 잘 알고 있는 충실한 협조자들, 예를 들어 수년간 나를 도와온 늙은 비서 프라우 빈터 같은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가치를 지니거나 생계 유지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양도해줄 권한이 허용된다.

나 자신과 내 아내는 항복과 축출의 불명예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내가 국민들에게 봉사한 12년간의 여정에서 나의 가장 중요한 일상 업무가 될 이 일을 실행한 후, 나의 시신이 그 자리에서 즉시 불태워지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베를린에서 1945년 4월 29일, 새벽 4시 아돌프 히틀러

다음날인 4월 30일 오후 3시 30분, 히틀러와 그의 부인이 된 에바 브라운은 총통관저 지하 방공호에서 청산가리가 든 앰플을 입에 넣고 깨물었다. 

히틀러는 그와 동시에 권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다. 그의 부관이었던 오토 귄쉐(Otto Gunsche)는 히틀러의 피 묻은 시신과 에바 브라운의 시신을 담요에 싸서 총통관저 정원으로 옮긴 후 두 사람의 시신 위에 가솔린을 끼얹은 후 바로 불태웠다. 

▲ 희대의 악마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희대의 선동가였던 그는 역사의 고비마다 명연설로 군중들을 사로잡은 언변가이기도 했다.

권쉐는 히틀러의 벙커에 남아 있다가 몇 시간 후 소련군에게 체포됐다.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로서 그의 유서를 타이핑했던 트라우들 융에는 히틀러가 채식주의자였으며 친절하고 아버지 같은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히틀러는 죽기 얼마 전부터는 맑은 수프와 으깬 감자요리만을 먹었다고 한다. 트라우들 융에는 ‘최후의 순간까지(Bis zur letzten Stunde)’라는 자서전을 펴냈는데, 이 책에는 대다수의 나치 지도자들의 최후의 순간을 기록해 놓았다.

히틀러가 자살한 지 일주일 후인 5월 7일 새벽 2시 41분, 독일 제3제국은 연합국 측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히틀러의 광기로 시작된 유럽에서의 대전쟁은 5년 8개월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인 285만 명, 민간인 50만 명 등 인명피해와 막대한 재산상의 피해, 그리고 독일 전역이 연합군의 폭격과 포격으로 초토화되는 피해를 당했다.

희대의 선동가인 히틀러는 역사의 고비마다 명연설로 군중들을 사로잡았는데, 그의 어록(語錄) 중 일부를 소개한다.

“나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 그렇다고 내가 범죄인은 아니다. 나는 오늘 혁명주의자로서 이 자리에 서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혁명에 반대하는 혁명주의자로서이다. 1918년의 반역자들을 상대로 할 때, 반역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1924년 2월~3월, 맥주홀 폭동 사건에 대한 재판 당시 자기 변론

“독재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자는 강요에 의해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질질 끌려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끌고 가는 것이다. 국민을 통치하도록 부름을 받고 있다고 느껴지는 인간에게는 ‘여러분이 나를 원하고 나를 불러준다면 나는 협력하겠다’고 할 권리는 없다. 전진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의무이다”
- 1924년 2월~3월, 맥주홀 폭동 사건에 대한 재판 당시 자기 변론

“독일이 유럽에서 토지를 손에 넣으려고 한다면 러시아를 희생시켜야만 얻을 수 있고, 또한 커다란 토지를 지닐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독일이 옛날 게르만 기사들이 밟은 길을 다시 진격하여 독일이 경작할 땅과 독일 국민의 삶을 위한 빵을 칼로 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중에서

“아리안 민족은 인류의 프로메테우스이며, 그 눈부시게 빛나는 이마에서 모든 시대를 통해 거룩한 천재의 불꽃이 튀어나와, 영원히 지식의 불을 새로 타오르게 하고, 침묵의 신비스러운 어둠 속을 비춰주며 인간으로 하여금 이 땅 위의 다른 모든 생물을 압도하여 지배자로서의 길을 가게 한 것이다”
-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중에서

“다수결로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책임감이 있는 인물이 있을 뿐이다”
-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 중에서

“승리자는 뒤에 가서 진실을 말했느냐 어쨌느냐는 질문을 받는 일이 없다. 전쟁을 시작하고 수행하는데 있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승리뿐이다. 연민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두어라. 강자가 정의다”
- 1939년 8월 22일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군 수뇌부 회의에서

“나는 나에게 있어서 가장 신성하고 귀중한 이 군복을 또다시 입는다. 그리고 승리하거나 혹은 죽을 때까지 이것을 벗는 일은 없을 것이다”
-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에 즈음한 국회 연설에서

“항복은 금지한다. 제6군은 최후의 1인까지 그 위치를 사수하고, 영웅적 인내심을 가지고, 전선의 유지와 서방세계의 수호를 위해 불멸의 기여를 하기 바란다”
- 1943년 1월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에게 포위된 독일 제6군에게 보낸 전문

“독일에서, 나나 다른 누군가가 1939년의 전쟁을 원했다고 하는 것은 완전히 허위이다. 전쟁은 오로지 유태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국제 정치꾼들이 원했고, 또 도발한 것이다”
- 1945년 4월 29일, ‘정치적 유언서’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나는 정부에게, 민족에 관한 여러 법령을 최후까지 유지하여 모든 민족의 해독자인 유태 민족에게 철저히 저항할 것을 명한다”
- 1945년 4월 29일, ‘정치적 유언서’에서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