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군, 베를린 점령하다
소련군, 베를린 점령하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5.01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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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45년 5월 2일 역사 속의 오늘

소련군은 1945년 4월 26일 저녁 베를린 시가지 남쪽으로 진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알리는 정치적 선전물로 총통 관저 지하 벙커에서 400m 가량 떨어진 옛 독일 국회의사당 건물을 지목했다. 

이 건물은 1933년 2월 28일 공산주의자의 행위로 알려진 의문의 방화사건 이후 방치되어 왔었다.

소련군 제150 사단 756 연대 3대대 병력은 4월 30일 오전 10시 경 옛 국회의사당 건물로 진입했다. 

정오 경 연대장 신첸코 대령은 멜리톤 칸타리아, 미하일 예고로프에게 의사당 건물에 들어가 적기(赤旗)를 흔들고 오라고 지시했다. 멜리톤 칸타리아는 스탈린의 고향인 그루지야 출신이었다.

이들은 의사당 건물로 들어가 중앙 현관 위에서 적기를 힘차게 흔들었다. 그러나 의사당 전투는 저녁까지 계속 됐다.

의사당에서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던 오후 3시 30분 경, 제3제국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총통 관저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하루 전 그와 결혼식을 올렸던 에바 브라운은 음독자살했다. 

그들의 시신은 SS대원들에 의해 소각됐다. 무솔리니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소식이 자살을 결심하고 있던 히틀러 부부의 결심을 더욱 굳게 만들었다.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도 이튿날 처자식과 함께 음독 자살했다.

밤 9시 30분 경 치열한 방어망을 뚫고 의사당 둥근 지붕 위에 올라간 멜리톤 칸타리아 등은 다시 한번 적기를 흔들었다. 

▲ 소련군은 베를린을 점령하고 나치독일을 패망시켰다. 이는 머지않아 2차 세계대전이 종식 될 것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드디어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고 제3제국의 몰락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5월 1일 오전 7시 베를린 방위사령관 바이틀링 장군은 소련군 추이코프 장군에게 항복했다고, 5월 7일 오전 2시 41분 독일군 작전참모부장 알프레드 요들 대장과 해군사령관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제독은 프랑스 랭시(市)의 아이젠하워 사령부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승승장구하던 독일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암호명으로 시작된 독일군의 소련 침공이다. 파죽지세로 유럽 전역을 휩쓴 독일군은 공군력을 총동원하여 영국을 공격했지만 영국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이렇게 되자 히틀러는 눈을 동쪽으로 돌려 300만 대군을 투입, 소련을 침공했다. 히틀러와 스탈린은 폴란드 침공 직전, 절대로 한 편이 될 수 없을 것으로 믿었던 두 폭군이 거짓말처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말하자면 악(惡)과 거악(巨惡)이 친구가 되었으니 경악을 한 것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스스로의 약속을 깨버리고 잠자는 거악(巨惡)을 발길로 걷어찬 셈이 되었다.

독일 육군 사령부는 동서 지역에 두 개의 전선을 만들면 전쟁이 어려워 질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자칭 전쟁 천재 히틀러는 이러한 우려를 무시하고 독일 전차부대를 소련 영내로 진격시킨 것이다.

독일군의 소련 공격은 빌헬름 폰 레프 원수의 북부집단군, 페도르 폰 보크 원수의 중부집단군, 그리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남부집단군 등 세 방향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단기결전을 노렸던 히틀러와 독일군의 전략은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소모전 양상으로 변했고, 겨울이라는 결정적 변수를 만나면서 엉망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남부 자원지대 등으로 전력을 분산함으로써 주요 목표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병력, 장비 면에서 소련군보다 월등히 우세했던 독일 남부집단군은 스탈린그라드라는 암초에 걸려 참혹하게 패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지휘하는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포위하고 시가전을 벌였으나 주코프의 소련군에게 역포위되면서 보급선이 끊겼다. 히틀러는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에게 공중 보급을 지시했는데, 보급물자를 실은 독일 공군기들은 소련 대공포와 전투기들에 의해 격추되면서 10분의 1 정도만 보급에 성공한다.

히틀러는 파울루스에게 “항복은 금지한다. 제6군은 최후의 1인까지 그 위치를 사수하고, 영웅적 인내심을 가지고, 전선의 유지와 서방세계의 수호를 위해 불멸의 기여를 하기 바란다”면서 스탈릴그라드를 사수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그러나 견디다 못한 파울루스는 독일군 9만1000명을 살리기 위해 항복을 택한다. 구데리안, 만슈타인, 롬멜과 함께 히틀러가 애지중지했던 독일의 명장(名將) 파울루스는 그 후 소련 측에 가담하여 나치 독일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심리전을 벌이는 역할을 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참혹하게 패전한 독일은 이후 소련군에게 계속 밀려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을 잃었고, 쿠르스크에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고 결국 패전의 길로 내몰려 수도 베를린마저 내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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