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나폴레옹’,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박살내다
‘붉은 나폴레옹’,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박살내다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5.0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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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53년 5월 7일

1953년 5월 7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서쪽으로 300㎞ 지점, 라오스 국경과 16㎞ 정도 떨어진 산간 오지의 촌락에서 벌어진 디엔비엔푸 전투는 프랑스와 베트남의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의 굴욕적인 패배로 종지부를 찍은 결정적 전투다. 프랑스와 베트남의 치열한 전투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이 국경지역의 빈촌을 기억해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인도차이나 전쟁은 프랑스의 시대착오적인 식민정책이 빚은 참극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각국은 식민지 지배가 비효율적이고 시대적 흐름과는 맞지 않는 제도임을 깨달았다. 특히 통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 독일, 일본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제국주의 시절 유럽 열강들이 보유하고 있던 식민지를 독립시켜 국가를 수립하는 데 앞장섰다. 그 수혜국 중의 하나가 대한민국이다.

▲ 보 구엔 지압 장군 보잘 것 없는 무기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강의 미국, 프랑스, 중공 군대를 차례로 물리치고 승리를 거둬 ‘20세기 최고의 명장(名將)’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차 세계대전 초반, 프랑스는 마지노 요새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벨기에 북서쪽 아르덴느 숲 지대를 돌파하여 나온 독일 기갑부대에게 처절하게 짓밟혀 개전 6주 만에 항복을 했다. 프랑스 정부가 붕괴되고 나치의 괴뢰정부인 비시 정권이 들어서자 중일(中日)전쟁 중이던 일본은 비시 정권과 합의 하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을 진주시켰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결과 베트남 북쪽은 중국이, 남쪽은 영국이 점령하게 되지만, 프랑스는 밀실 협상을 통해 이전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군을 베트남에 진주시킨다. 베트남 사람들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운동 지도자 호치민(胡志明)을 지지하자, 프랑스는 1946년 11월 호치민군(軍)을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1949년 6월 해외에 망명 중이던 구엔(阮) 왕조의 바오다이(保大) 황제를 불러다 주석으로 앉혀 남베트남에 베트남국(월남)이라는 친(親)프랑스 정부를 수립했다. 이에 맞서 북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이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수립했다.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호치민은 프랑스에 맞섰으나 죽창과 칼 같은 조악한 무기뿐이었다. 초반에는 미국의 지원 하에 압도적인 무기와 정예 병력을 동원한 프랑스군의 공세에 눌려 하노이, 하이퐁 등 주요 도시를 점령당했다.

그러나 보 구엔 지압(武元甲)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 부대는 중공군의 도움을 받아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거점을 하나씩 탈환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울창한 밀림을 이용한 게릴라전에 고전하기 시작했다.

1953년 5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파견군 사령관으로 앙리 나바르 장군이 부임했다. 그는 “전쟁은 여자와 같아서 덮칠 줄 아는 사람에게 몸을 맡긴다”라면서 자신만만했다. 나바르 장군은 게릴라전에 휘말려 고전하기 보다는 공격적인 단기 결전을 구상했다. 즉 베트민의 주력부대를 한 곳으로 집결시킨 다음 단숨에 섬멸한다는 전략이었다.

그가 주목한 지역은 베트민이 라오스와 중국으로부터 물자와 무기를 공급받는 주요 보급로이자 수송로로 활용되던 베트남 북서부 라오스 국경지역에 위치한 작은 시골 분지 마을 디엔비엔푸였다. 디엔비엔푸는 라오스와 중국을 향해 열려 있는 베트민의 숨통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공수작전을 펼쳐 최정예 외인부대를 주축으로 한 1만 6000명의 병사들을 낙하산으로 투입하여 디엔비엔푸를 점령했다. 디엔비엔푸는 지름 3㎞ 정도의 분지를 200m 높이의 산들이 둘러싼 천혜의 방어 요새였다. 앙리 나바르 장군은 항공 보급을 위해 디엔비엔푸의 분지에 비행장 시설을 건설하고 미국에서 지원 받은 대포와 전차를 실어 날랐다.

프랑스 공수부대는 분지 주변의 산등성이에 동서남북으로 포병대를 배치하고, 3개 사단 정예 병력을 집결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를 건설했다. 디엔비엔푸 요새는 프랑스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해 당대의 최첨단 과학기술을 결집하여 만든 마지노 요새를 방불케 했다. 서방 언론들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걸작품’으로 추켜세우며 프랑스군의 압승을 예상했다.

앙리 나바르 장군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건설한 다음 스스로 베트남군에게 포위되도록 하여 베트민군을 요새 주변에 집결시킨 다음 항공기와 포병의 화력을 퍼부어 전멸시킨다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러나 베트민군의 지휘자 보 구엔 지압 장군은 나바르 장군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하고 프랑스군이 상상조차 하지 못하도록 땅굴을 파고 산등성이 아래에 수만 명의 대군을 집결시켜 요새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그리고 중공이 지원해 준 각종 야포를 정글지대를 이용하여 은밀하게 집중시켰고, 요새 주변에 지뢰와 부비 트랩, 참호와 철조망으로 이중 삼중의 포위망을 구성했다. 지압 장군은 1만6000여 명의 프랑스 정예 병력과 전투기, 전차, 야포로 중무장한 프랑스에 폐타이어를 잘라 엮은 샌들을 신고 구식 대포와 낡은 소총으로 맞서 싸워야 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1954년 3월 13일, 야음을 이용하여 베트남군은 요새를 총공격하기 시작했다. 정글 곳곳에 은폐된 베트민군의 포대에서 날아오는 강력한 포화가 요새에 작렬하면서 프랑스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수만 명의 베트민 군대는 동료들의 시체를 넘어 집요하게 공격했다. 동쪽 요새가 하룻밤 새 점령당하면서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고립 당했다. 게다가 항공 공격은 우기로 인해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수송기를 통한 공중 보급은 베트민의 집중 포화로 인해 끊겨버렸다.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프랑스군은 악전고투하며 55일 동안 버티다가 5월 7일, 모든 요새를 베트민군에게 점령당하자 항복했다. 탈출한 프랑스군은 불과 70여 명, 전사자는 5000명이었고, 1만 1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한 보 구엔 지압 장군은 이후 미국과의 전쟁, 1979년 베트남을 침공한 중국과의 전쟁에서도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거두었다. 지압 장군은 하찮은 국력, 보잘 것 없는 무기, ‘거지 군대’나 다름없는 비참한 보급 상황에도 불구하고 당대 최강의 미국, 프랑스, 중공 군대를 차례로 물리치고 승리를 거둬 ‘20세기 최고의 명장(名將)’ ‘붉은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군사지식이 전혀 없던 법학 전공 교사 출신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이 강대국들을 차례로 굴복시킨 비결은 이른바 ‘3불(不) 전략’, 즉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않고, 적이 좋아하는 장소에서 싸우지 않으며, 적이 생각하는 방법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장군들이 최첨단 무기를 총동원하여 공격을 할 때 지압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당신들 식으로 싸워라. 우리는 우리 식으로 싸운다.”

최첨단 고성능 신무기에 정신 나가 온갖 무기 도입 부패와 스캔들에 휩싸인 우리 군부 지도자들은 보 구엔 지압이라는 지휘관을 맹렬히 공부하여 각성과 교훈을 얻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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