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속셈 “미국만 없다면 한국 손 봐야”
일본의 속셈 “미국만 없다면 한국 손 봐야”
  • 미래한국
  • 승인 2015.05.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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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어두운 韓日관계의 미래

일본은 지난 70년간 한국에 마음을 연 적이 없다. ‘가장된 우호(友好)’였을 뿐

▲ 홍 형 前 駐日 공사

한일 국교정상화(1965년) 50주년이 되는 올해는 한일(韓日)관계가 다소나마 호전될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이 많았다.

정경(政經) 분리의 냉각기라도 가지는 방향으로 상황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냉정한 주문도 있었지만, 현실은 반대로 진행되고 있다.

최근에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급속히 줄어들고, 심지어 친중반일(親中反日)의 한국은 손을 봐야 한다는 주장이 표면화 되기에 이르렀다.

흔히 한일관계 어려움의 근원을 20세기 일본의 한반도 식민통치와 그로 인한 한국인의 반일(反日)감정에서 찾는다. 

이런 주장은 역사적 경위로서 당연한 지적이기는 하나, 그런 인식에 언제까지나 매달려 있어서는 미래를 향해 현상 타개 방도가 나오지 않는다. 

우선 인간의 감정과 기억력은 마치 자연계에서 강한 방사선을 내뿜는 방사능 물질에 반감기(半減期)가 있듯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희석되고 잊혀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식민지가 끝나고 70년이 지나서 그 감정과 기억이 더 격해진다면 이것은 결코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즉 한일 갈등의 원인을 ‘감정(感情)의 문제’로 파악하는 것은 한일관계를 진단하는 과학적 태도로 볼 수 없다. 

그리고 한일관계를 규정하는 요인이 한일 간의 현안 외에도, 북한 변수와 중국 변수가 더 중요해지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분단 70년을 맞아 한일관계를 객관적으로 총괄하고 전략적 관점에서 되돌아 봐야 하겠다. 


한일관계 마찰의 근원 

한국과 일본은 식민통치가 끝났다고 해서 단시일 내에 평온한 관계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양국은 국교(國交) 정상화 이전부터 평화선(대한민국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 선포(1952년 1월)와 재일교포 북송(北送)사업(1959년 12월)으로 국민적 감정 충돌을 경험했다. 

국교 정상화 후에도 김대중 사건, 문세광 사건 등에서 양국은 자신의 입장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스타일이 너무 달랐다. 대국(大局)을 보지 못하는 일본인들이 한국을 분노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김대중 사건은 정치적으로는 결착(決着)을 보았지만, 이후 15년간 동서(東西)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된 막바지 시기에 한일 간의 안보 협력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5공화국 때 전두환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정상(頂上) 간 양호한 관계를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 측의 안보 경협(經協) 요구(최종적으로 40억 달러)에 대해 일본 측이 반발하여 큰 불신을 남겼다. 

무엇보다 미국을 공동의 동맹국으로 하는 일본은 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남북 등거리 유지 자세를 견지하여 우리를 불편하게 했다.

예를 들면, 일본은 국교 정상화 때 체결한 ‘재일(在日) 한국인에 대한 법적지위 협정’과 동일한 지위를 조총련에게도 부여하고 이후 여타 국적자들에게도 적용했다. 이런 것이 일본이 주장하는 법치(法治)다. 

김대중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해 왔던 일본 외교당국은 김대중 납치사건에 격분하여 한국에 대해 두고두고 뼈아픈 보복을 가한다. 이는 외무성 등 관계자들이 저술한 회고록이나 강연 등에서 확인된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반(反)정부 세력과 접촉한 적이 없는데,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뿐 아니라 반정부 세력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다.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든 최대의 후원기지는 일본이었다. 


한반도 냉전의 主戰場이었던 일본 

분단 70년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다. 너무나 긴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우리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남북간의 이 이념 전쟁 이전에 한반도에서 가장 길었던 전쟁은 13세기에 고려와 몽골간의 39년 간의 전쟁이었다. 

일본이 패전(敗戰)하면서 전범(戰犯)국가인 일본 대신 그 식민지였던 한반도가 분단되고, 분단 후 남북간의 열전(熱戰, 6·25 전쟁) 3년 1개월을 제외한 약 67년은 냉전 중이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약 31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한반도에서는 70년 간의 분단으로 인한 희생자가 전범국가 일본의 인적(人的) 손실의 두 배가 훨씬 넘는 700여만 명이다(김정일의 의도적 식량 공급 중단으로 인한 대량 아사자 포함). 

흔히 냉전을 부부 싸움 후의 냉랭한 대치 상태를 연상하지만, 20세기의 냉전은 총력전이었다. 총력전이란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적(敵)의 의지와 능력을 말살하는 전쟁이다. 

20세기의 세계대전이 총력전이며, 20세기 후반의 동서 냉전이 인류가 처음으로 겪은 포화를 주고 받지 않은 총력전이다. 미소(美蘇)간의 패권전쟁이 냉전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핵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냉전에서 패배한 소련은 해체되었다. 남북한의 대결이 냉전으로 지속되어 온 것도 각각 핵무기 대국(大國)과 동맹을 맺은 남북한의 전면 대결은 핵(核) 대국 간의 핵전쟁으로 발전되기 때문이었다. 머지않아 드러날 남북한 냉전의 결과도 미소 간 냉전의 결과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안보 전문가들 중에도 일본이 한반도 냉전의 주전장(主戰場)이었음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일본에는 주한(駐韓) 유엔군사령부의 후방사령부가 있다. 도쿄의 요코다(橫田) 기지 내에 자그마한 사무실이 있고, 미군 대령이 사령관이라고 한다. 

한편 일본에는 북한노동당의 전방 사령부, 즉 적지(敵地)의 전선 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노동당의 재일지부(在日支部)가 존재한다. 조총련이다. 유엔군사령부의 후방사령부는 한반도에서 열전이 재개될 때 기능하는 조직인 데 비해, 북한 노동당의 전선사령부(조총련)는 냉전을 위한 조직이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냉전화하면서 전장이 한반도 밖으로 확대되었는데, 한반도 밖의 냉전의 전장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이 일본이었다. 

유엔군 후방사령부가 냉전 중에는 사실상 동면(冬眠) 상태로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데 비해, 조총련은 오랫동안 일본 당국으로부터 사실상 치외법권을 인정받은 상태에서 한국의 측면을 철저히 공략했다. 조총련이야말로 종북(從北)의 원조이며, 오늘날 한국 내에 종북을 양성, 지도한 결정적 기지였다. 

오늘날 국가보안법 상 반(反)국가단체로 판시된 단체가 3개인데, 평양의 조선노동당 외에 조총련과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 일본에 있다. 

일본 사회는 오랫동안 이들 북한노동당의 전선사령부를 비호해 왔다. 일본 사회가 한미동맹보다 북한에 호의적이었던 상황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왔다. 


동서 냉전 종식과 한일 간 갈등의 표면화 

우리는 일본을 민주주의 선진국으로 생각하고, 일본인들도 스스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자처하지만, 실은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혁명을 거친 적이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리고 노력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일본이 언제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는 말인가? 

태평양전쟁 패전 후 6년 8개월 동안 미국에 의한 점령 하에서 자유민주주의 개혁(혁명)이 이뤄졌다는 것인가? 일본인들은 이를 인정하고 있는가? 

최근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이 한국과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고 나섰는데, 참으로 민망스런 이야기다. 

일본은 도대체 아시아의 어느 나라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면 서구의 어느 나라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는 말인가? 요컨대 일본은 동서 냉전 체제에서 미국의 보호국으로서 서방 진영에 속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일 관계와 독일·프랑스 관계는 매우 대조적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한일 국교 정상화 2년 전인 1963년에 화해조약을 체결했다. 

▲ 한국을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남북 등거리 오교를 했던 일본은 국내 종북세력의 원조 격인 조총련에 대해 사실상 치외법권을 인정해 왔다. 한미동맹보다 북한에 호의적이었던 일본, 만약 미국이 없다면 그들의 선택은 무엇일까. 사진은 일본의 최신예 잠수함 진수식 장면.

피로 피를 씻던 숙적(宿敵)이었던 독일과 프랑스가 동서 냉전 40년 후에 통화(通貨)와 군대를 통합하는 관계로 발전된 반면, 한일 양국은 동서 냉전 때 억제 봉합되었던 갈등이 동서 냉전이 종식되면서 표면화되어 증폭되고 있다. 이 차이를 초래한 결정적 요인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다. 

이는 미국이 동맹국 관리를 느슨하게 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독일과 프랑스는 양국의 화해와 관계 발전을 방해하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반면, 한국과 일본은 양국의 관계 발전을 한사코 방해 저지해온 거대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미일의 동맹화를 총력을 기울여 저지해야 할 입장에 있는 세력(베이징, 평양, 모스크바)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한일 양국은, 양국의 지도자들은 이 거대한 방해 적대세력에 대한 대응을 진지하게 협의한 적이 없다. 

협의를 했어도 극복하기 쉽지 않은 난제에 대해 구체적인 대책을 협의조차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일 양국의 미래를 쉽게 낙관할 수 없는 이유다. 

군(軍) 위안부 문제, 교과서 문제, 영토 문제, 역사 인식 문제까지도 예상되고 상정 가능한 문제들이었다. 양국의 지도층이 한일관계의 발전을 한사코 저지하는 거대한 진영이 존재한다는 너무나도 명확한 장애물을 인정했다면 오늘의 한일관계는 다른 국면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물론 한국 사회의 좌경화와 일본의 우경화가 초래한 전략적 충돌 측면도 있다. 특히 한국의 북방정책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좌경화를 초래했다. 

최근의 한일 마찰은 직접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와 재교섭하도록 헌법재판소가 내린 판결에 구속되어 일본에 대해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강하게 요구함으로써 악화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그 이후의 전개 양상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전에는 순전히 한일 양국 간의 갈등과 마찰이 원인이었는데, 지금은 한일 간 현안 마찰에 더하여 박근혜 정부의 친중반일 자세에 대해 일본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대북(對北) 제재는 동서 냉전 시대 이래 단계적으로 확대 강화되어 왔다. 남북한 등거리를 구사하던 일본은 사회주의권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비로소 전두환 대통령의 목숨을 노렸던 미얀마의 아웅산묘 폭탄테러(1983년), 서울올림픽 방해를 겨냥했던 대한항공기 폭파 테러(1987년)에 대한 국제적 제재에 참가했다. 

그 후 북한의 핵 개발, 미사일 개발, 납치문제로 제재 조치를 확대 강화한다.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제재와 보복 

동서 냉전 당시에 미국(한미동맹)이 주도한 대북 제재에 수동적으로 참가했던 일본은 동서 냉전 종식 후에는 유엔의 대북 제재를 주도하고, 특히 일본인 납치 문제에서는 미국의 견제를 뿌리치면서까지 대북 제재를 강행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북한의 위협을 일본이 재무장 명분으로 최대한 이용해오고 있다. 
최근 아베 정권은 한국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김정은 정권과 접촉을 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국제사회(유엔)가 설사 대북 제재에 소극적이어도 일본은 독자적 제재를 가한다는 자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는 어떠했는가? 많은 사람들은 일본이 역사적 경위 때문에 한일 관계를 특수관계로 다뤄 온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리고 일본인들 자신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한일 특수관계’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자세는 미국의 의향을 존중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과 그 후의 일본의 행보는 그것을 증명한다. 

한일관계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 온 이들은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일본 조야에서 한일관계를 ‘특수 관계’로 다루지 말고 일반적인 국제관계로 다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 지는 한참 되었다.

일본 사회는 어떤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일단 어떤 주장이 동시에 터져 나오면,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이해와 합의가 이뤄진 상황임을 의미한다.

아베 정권이 한국을 중국의 동맹인 것처럼 공격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한일관계는 이미 특수 관계로 설명하지 않겠다는 내부적 이해와 합의가 있는 것이다. 상대가 그렇다면 이쪽도 그에 맞춰 대응해야 한다. 

사실 일본은 지난 70년간 한국에 대해 마음을 연 적이 없다. ‘가장된 우호(友好)’였을 뿐이다. 국가 간에 마음을 연다는 표현 자체가 우습고, 가장된 우호도 우호라고 말할 수 있지만, 개인의 경우에도 타인에게 마음을 연다는 것은 일단은 상대를 인정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분단 70년 중에서 일본이 한국을 인정할 준비를 했었던 순간이 있었다고 한다면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되었을 때였다. 

그런데 역사는 한국과 일본의 이 상호 인정의 기회를 허용치 않았다. 6공(共)의 한국이 북방정책에 매진하면서 일본과 전략적으로 화해하는 기회를 흘려 보내고 말았다. 

나는 6공의 북방정책은 당초의 착상은 좋았으나 전략적으로 실패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북방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분단 종식, 북한 해방이며, 이를 위해 북한의 배후를 차단하여 소위 ‘북방 3각 동맹’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북방정책은 북한 해방이라는 절대 명제를 잊고 북한의 전략적 배후세력과 수교에 만족했다. 당시 평양은 우리의 입성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기미를 알아차리고 포위망 구축에서 곧바로 평양 입성으로 방향을 바꿨어야 했다. 

북한을 해방하면 그 배후를 차단할 필요도 없는 것인데, 최초 계획에 집착하여 궁극적 목표를 잊은 경우다. 

이 북방정책의 교훈은 지금 일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대륙세력에 대항하는 대치 구조상 일본의 위치는 소위 ‘남방 3각 해양동맹’도 우리에겐 결국 북한을 해방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적 구도일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가 목숨 걸고 북한을 해방한다면 남방 3각 동맹 대 북방 3각 동맹이니 하는 관념의 유희는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이미 “미국만 없다면 한국을 손 보겠다”고 표명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핵무기를 실전 배치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핵무장한 북한과, 미국으로부터 한국을 떼어 놓으려고 시도하는 중국과 일본 사이에 놓여 있는 대한민국은 이미 소위 예전의 진영 구축을 지향할 때가 아니다. 

70년 동안 되풀이해 온 한국인들의 관념적인 평화공존과 평화통일 전략은 이미 주변국과 적들에게 간파되었다. 국가의 독립 자존을 지키는 데 공짜는 없다. 

중국과 일본이 가볍게 볼 수 없는 각오와 힘을 갖춰야 한다. 가장 현실적인 대일(對日)정책은 복지예산을 줄이고 국방비를 획기적으로 늘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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