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패망(敗亡)과 대한민국의 생존
베트남 패망(敗亡)과 대한민국의 생존
  • 미래한국
  • 승인 2015.05.12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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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정신무장이 해제된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
 

지금부터 40년 전인 1975년 4월 30일은 월남(남베트남)이 패망하여 공산화된 날이다.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협정으로 휴전(休戰)이 성립되면서 한 때 50만에 달했던 주월(駐越) 미군을 비롯하여 한국군 등 연합군 전투부대가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미군은 자신들이 사용하던 최신예 전투기를 비롯하여 10억 달러에 달하는 각종 신형 무기를 월남군에게 넘겨주고 떠났다.

1974년 10월, 남베트남 앞바다에서 석유가 발견되어 월남은 축제 무드에 젖었고, 1975년 9월에 월남의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각 정파들은 대선을 앞두고 온갖 흑색선전을 뿌려댔고 시민단체, 학생회, 종교단체로 위장한 공산 프락치들의 유혈 폭력 ‘민주화’ 시위로 베트남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군과 연합군이 철군하자 베트남 곳곳에 침투한 공산 간첩들은 민주화 인사,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로 위장하고 조직적으로 폭력시위를 벌이고 우익 지도자들을 암사하여 혼란과 분열을 조장했다.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월맹에서 침투시킨 인민혁명당원 4만 명 등 전체 인구의 0.5% 정도의 공산분자와 베트콩들이 사회 곳곳에 침투하여 암약하고 있었다.

이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하고 시민단체와 종교단체, 대학가, 언론계를 장악하여 조직적인 반미(反美)운동, 미군 철수, 남남(南南) 갈등, 우익 지도자 암살 등 폭력 시위를 배후조종하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고 혼란을 부추겼다.

월맹이 남침 전쟁을 위한 군사 행동을 개시한 것은 1975년 1월 8일이다. 월맹은 반띠엔둥 육군참모총장을 남침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공산군 18개 사단을 분계선인 북위 17도선을 넘어 중부월남 지역으로 극비리에 이동했다.

반 띠엔 둥은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17도선을 넘어 중부월남의 전략적 요충지인 반 메뚤의 밀림지대로 잠입했다. 


월맹군 남침을 “민중봉기”라고 선동한 천주교 신부

3월 10일 새벽 2시, 중부 고원의 밀림지대를 뚫고 나온 월맹 공산군은 평화무드에 젖어 무방비 상태에 있던 월남군을 기습 공격했다.

혼비백산한 월남군은 패주(敗走)하여 반 메뚤을 빼앗기고 병력이 뿔뿔이 흩어졌다. 티우 대통령은 “정치 지도자들은 정쟁(政爭)을 중지하고 일치단결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구국(救國)평화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 짠후탄 신부는 “중부월남 고원지대에 월맹군은 없다.

그것은 월맹군의 침략이 아니라 반(反)민주, 반(反)독재에 항거하는 민중봉기다. 민중봉기를 공산 침략이라고 매도하는 티우는 사퇴하라”고 외쳤다.

민중들에게 존경 받는 종교 지도자이자 민주화 운동의 대부(代父)로 알려진 천주교의 유명 신부가 “월맹군의 침략이 아니라 민중봉기”라고 외치고, 야당의 유력 대선(大選) 주자들도 이에 동조하고 나서자 전의(戰意)를 상실한 월남군은 멘붕 상태에 빠져 허둥대다 반격의 기회를 놓쳤다.

3월 26일, 전략적 요충지인 다낭이 함락되어 중부월남 전 지역에 월맹군이 노도(怒濤)처럼 밀려들었다.

월남군 장성들은 살길을 찾아 조국을 등지고 떠났고, 전투 때마다 지휘관과 장교, 사병들이 도주하는 바람에 월남군은 50%의 병력이 눈 녹듯 사라졌다.

4월 8일, 월맹군 지도부는 월맹의 혁명 지도자 호치민의 생일인 5월 19일까지 월남 전역을 점령키로 하고 전 월맹군에게 사이공을 공격하라는 ‘호치민 원정’ 작전명령을 내렸다. 
4월 9일 월맹군 선두부대가 사이공의 관문인 쑤안록에 나타났다.

보급이 형편없었던 월맹군은 각지에서 월남군이 내팽개친 무기와 식량으로 무장하고 배를 채우면서 쑤안록을 공격했다.

배수의 진을 친 월남군은 처절한 사투로 쑤안록을 12일간 지켜냈으나 결국 4월 21일 쑤안록마저 월맹군에게 내주고 말았다.

티우 대통령은 쑤안록이 함락 당하자 사임하고 트란반후옹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월맹군 부대가 사이공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트란반후옹도 사임하고 4월 28일 예비역 대장인 두옹반민이 새 대통령에 취임했다. 하야한 티우 대통령, 결사항전을 외쳤던 응웬카우끼 부통령은 망명을 떠났다.

사이공을 포위한 월맹군의 대공세가 벌어지던 4월 28일, 월남 공군 조종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공산군을 공격하기 위해 이륙한 F-5 전투기는 기수를 돌려 사이공 시내의 대통령궁에 폭탄 두 발을 투하하여 이날 취임한 두옹반민 대통령을 살해하고자 했다.

옥상에 떨어진 폭탄은 지붕을 뚫고 대통령궁 중앙계단에 떨어지는 바람에 두옹반민 대통령은 무사했다. 다른 두 대의 A-37 공격기는 탄손누트 공항과 탄약고를 폭격했다.

대통령궁에 폭탄을 투하한 조종사는 공산군 진영으로 날아가 투항하고 전투기를 헌납했다. 그는 공산통일이 된 후 항공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4월 30일, 아침 월맹 공산군이 사이공 시내로 진입하자 두옹반민 대통령은 오전 10시 20분 라디오를 통해 “전(全) 남베트남군은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현 위치에서 정지하라.

본인은 베트남인끼리 더 이상의 불필요한 유혈을 방지하고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남베트남군에게 현 위치에서 정지할 것을 요청한다”는 항복 선언을 발표했다.

거의 모든 군 지휘관들이 도주하고 참모본부에 남아 있던 유일한 장성은 구엔후한 준장뿐이었다.

그는 오전 10시 30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 예하부대는 무기를 버리고 최초로 접촉하는 북베트남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후에 구엔후한은 월맹의 첩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전 11시, 소련제 T-54 전차가 대통령궁의 철제문을 박차고 들어와 대통령궁을 점령하고 두옹반민 대통령을 체포했다.

정오가 조금 지난 12시 45분, 월맹군 병사와 여성 베트콩 게릴라가 국기 게양대에서 월남 국기를 끌어내리고 임시혁명정부 기를 게양했다. 사이공 거리에서는 베트콩들이 메가폰을 잡고 “사이공은 해방됐다”고 목청껏 외쳐댔다.

그 시각 미국으로의 망명을 거부하고 끝까지 조국을 위해 싸우던 베트남군 제2군단장 반푸 소장, 제4군단장 웬꼬아남 중장, 특별부대장 반또 소장, 제5사단장 레웬비 준장, 제7사단장 웬반하이 준장 등 5명은 권총 자결했다.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 집무실에 홀로 앉아 TV 화면을 통해 월남의 최후를 지켜봤다.

그는 퇴임 후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월맹에 패해 쫓겨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그 날은 내 생애 가장 슬픈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월맹군의 기습 직전에 월남군은 정규군 58만 명, 지방군 52만 명, 전투경찰 15만 명 등 125만 대군이었다. 이들은 미군이 철수하면서 물려준 각종 항공기와 최신 무기로 무장했다.

덕분에 미군 정보기관은 ‘월맹군의 춘계공세는 월남군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할 정도로 월남군의 무장 상태는 양호했다. 


거지 군대에 패한 월남 군대 

반면에 월맹은 10여 년 이상 전쟁과 미군의 북폭(北爆)으로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 있었다. 월맹은 매년 100만 톤 이상 식량이 모자라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사이공 함락 당시 교민 철수를 위해 끝까지 남았다가 월맹군에게 체포되어 5년 간 수감생활을 했던 이대용 당시 주월(駐越) 공사는 “사이공을 점령한 월맹 공산군들은 하루 두 끼 식사에 부식은 소금뿐이었고, 속옷은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다.

월맹군은 전차부대를 제외하고는 군화도 없어 타이어를 잘라 끈으로 묶은 샌들을 질질 끌고 다니며 전투를 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세계 4위의 공군력과 미군의 고성능 무기로 무장한 125만 월남 군대는 ‘거지 군대’나 다름없는 월맹군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지 불과 51일 만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참혹한 패배를 당했다.

경제력, 군사력, 군사장비 면에서 월등히 우세했던 월남이 허망하게 패망한 이유는 우선 사회 각계각층에 침투한 월맹 간첩들 때문이었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법무부 장관,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프락치였음이 드러난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內)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 정부의 각 부처,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진행된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만 지나면 통째로 입수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에 공산 간첩들이 대대적으로 침투해 있었다.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서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2위 득표를 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張廷裕)는 선거 유세에서 민족 감정을 자극하며 반미(反美), 반전(反戰)을 선동했다.

변호사 출신인 쭝딘주는 용공(容共)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자 “나는 용공주의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이며 진실한 불교도”라고 주장했다.

▲ 월남 대선에서 2위를 했던 야당 지도자 쭝딘주. 그는 대선에 출마하여 유세 때마다 민족감정을 부추기고 반전 여론을 자극했다. 훗날 그가 공산 간첩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유세 때마다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가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 조상들이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라면서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개표 결과 그는 17.3%의 지지를 얻어 2위를 했는데, 그가 비밀 공산 프락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베트남 패망 후인 1978년이다.

미국 FBI는 쭝딘주를 간첩혐의로 미국에서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 법정에서 징역형을 선고했다.

좌익 종교인들은 월남 군인들을 향해 “동족인 월맹군을 향해 총을 쏘지 말고, 미군을 향해 쏘라”고 선동했다.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지꽝 승려 등 종교인들은 ‘구국(救國) 평화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이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공산화 후 900만 명 살해 당해
  
1973년 1월 월맹과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위장 애국단체, 통일단체들이 수 십 개의 언론사를 설립하고 월남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반전운동가 등 민주화 세력으로 위장한 좌익 단체들은 틈만 나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1975년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공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개 좌익 단체의 선전전(戰)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더 심각했던 것은 군(軍) 지도부가 걷잡을 수 없이 부패했다는 점이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장교나 병사로 입대한 후 뇌물을 주고 장기 휴가를 받아 해외 유학을 떠나거나 대학 입학, 취업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장군들이 운영하는 개인기업체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도 입대하자마자 장기 휴가를 받아 외국 유학을 떠났다.

이대용 공사는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고 불렀는데,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유령 군인, 꽃 군인이었다고 한다.

군과 국가 지도층의 파렴치한 부패와 부정축재, 천민(賤民)자본주의 행태는 공산 세력들의 훌륭한 공격 목표가 되었다.

지도층의 적나라한 부패에 분노하던 일선 장병들은 공산군이 쳐내려오자 장비고 뭐고 다 버리고 도주하기에 바쁜 장군들과 장교들을 보면서 썩어빠진 체제에 절망하여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과 사명감을 상실했다.

이것이 강력한 무장을 보유한 월남군이 눈사태처럼 붕괴한 진짜 이유다. 이대용 공사는 “정신무장이 해제된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고 질타했다.

월남 패망 후 수도 사이공은 호치민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산군이 사이공에 입성하자 친북 좌파 시민들이 월맹기를 들고 나와 열렬하게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던 공산 통일이 이뤄지자마자 반체제 운동을 벌였던 종교인, 학생 등 속칭 민주 인사들 거의 대부분이 월맹군에게 체포되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반(反)정부 활동을 하던 인간들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똑 같은 짓을 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즉결 처형되거나 참혹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적화통일 된 후 거의 9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해 당했다.

공산체제에서 써먹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장교나 엔지니어, 의사, 교사 등 100만 명은 인간 개조 학습소에 수감되어 사상 개조 학습을 받았다.

이들을 수용할 형무소가 모자라자 공산정권은 과거 월남군 부대 시설을 형무소로 개조해 그곳에 죄수들을 수감했다.

학정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뗏목이나 소형 어선을 이용해 목숨 건 탈출을 감행했는데, 보트 피플의 숫자는 약 106만 명. 이 중 배가 전복돼 익사하거나 해적에게 살해 당하거나 망망대해의 뙤약볕 아래에서 굶어죽은 사람이 11만 명, 살아서 해외로 이주한 사람이 95만 명이었다.


10월 유신을 단행한 이유는? 

베트남 패망의 전주곡은 1969년 7월 25일 발표된 닉슨 독트린이었다. 월남전으로 인해 미국 전역에서 반전(反戰) 시위가 격화되자 닉슨 대통령은 이날 “베트남을 비롯한 아시아 대륙에 미군을 투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닉슨 독트린은 미국의 거대한 세계전략의 변화로 인한 파생상품이었다.

미국은 1965년 9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가 쿠데타를 일으켜 소련 편향의 수카르노 정권을 제거한 후 민족주의로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월남전을 근본에서부터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만약 미군이 철수하면 베트남은 공산 통일 될 가능성이 높은데, 통일 베트남이 중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중국과 맞서 싸우는 민족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 무렵 공산주의 진영은 중국과 소련이 내분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분열시키는 전략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중국의 안보 불안을 해소시켜 중국의 국력을 소련과의 싸움에 집중토록 해야 했다. 

미국은 서둘러 월남전을 종식시키고, 타이완해협에서 중국을 감시하던 미 해군을 태평양으로 빼냈다. 그리고 중국 주변에 포진하고 있던 주한미군을 철수했다.

닉슨 독트린은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인들이 담당하라”는 내용으로 포장되었지만 그 본뜻은 “중국 주변의 미군을 다 빼 줄 테니 중공은 소련과의 대결에 집중하라”는 뜻이 숨어 있었다.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미국은 월맹과 파리 평화회담을 성사시켜 월남에서 싸우다 말고 철수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남쪽 지역에 배치해 놓았던 병력을 빼내 소련과의 국경지역인 북만주에 55개 사단을 집중 배치했다.

중국이 만주에 대병력을 집결하자 소련도 유럽 지역에 배치됐던 44개 사단을 시베리아로 보내 중국과 맞섰다.

1970년 7월 5일 닉슨 행정부는 한국과 사전 협의 없이 6만2000명의 주한미군 중 2만 명의 철수를 발표했다.

이미 미국은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6개월 전부터 주한미군을 빼내가고 있었다. 한국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친 닉슨은 애그뉴 부통령을 서울로 보내 박정희를 설득했다.

1970년 8월 25일 박정희와 회담한 애그뉴는 “주한미군 2만 명 이상의 감군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애그뉴는 한국을 떠나 타이완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앞으로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은 완전 철수할 것”이라고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다.

1971년 2월 닉슨은 중국과의 수교를 발표했고, 3월 27일에는 주한미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미 7사단 병력 2만 명이 철수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 타이완이 유엔에서 축출되고 중공이 유엔 의석을 차지했다.

극심한 안보 위기 상황에 처한 박정희는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비롯하여 중화학공업 육성을 통한 자주국방을 실현한다는 신념을 굳히게 되었다.

닉슨 독트린 발표 직후인 1969년 9월 박정희는 김학렬 경제부총리에게 방위산업 육성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에 의해 1970년 6월에 4대 핵공장 계획이 수립됐으나 차관 도입 실패로 지지부진했다. 

박정희는 1971년 11월 10일 오원철을 방위산업을 총괄하는 청와대 경제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고 국산 병기 개발에 돌입했다. 

오원철 팀은 시제품 개발에 성공한 후 방위산업을 본궤도에 올리기 위해서는 선진국 수준의 특수 철강 소재와 초정밀 가공기술, 비철금속, 전자 등 중화학공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중화학공업 육성에는 10년 이상의 세월과 100억 달러 이상의 투자, 그리고 국가 총동원 체제가 요구됐다. 


평화조약은 휴지조각이다 

1971년 12월 5일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고, 1972년 10월 17일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유신체제 출범은 박정희의 권력욕과 종신 집권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었다.

그러나 당시 국가 지도부에서 일했던 인사들은 10월 유신은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일부를 희생시키는 조건으로 초강력 정부를 구성하여 단기간 내에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자주국방을 달성하기 위한 지책이었다고 주장한다.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위한 국산 무기 제작을 위해 중화학공업 육성에 돌입했다. 결국 닉슨 독트린은 베트남 패망을 가져왔고, 한국에는 자주국방을 위한 중화학공업의 출발을 가져왔다.

이처럼 피맺힌 출발을 한 방위산업이 오늘날엔 국가지도부와 군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북한보다 수 십 배 예산을 투입하고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재래식 전력에서마저 형편없이 밀리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아무리 평화조약이 훌륭해도 우리의 힘이 적에 미치지 못하면 그것은 종이 쪽지에 불과하다.

아무리 강대국의 안전보장 후원 약속이 완벽해도, 그 강대국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조건이 변하면 그것도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는 역사적 교훈이 베트남 패망이다.

우리는 지금 북한의 핵무기와 탄도미사일, 막강한 지상군의 위협을 주한미군의 동맹에 의지한 채 근근이 전략적 균형을 이루면서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다.

안보의 일부분을 주한미군에 의지한 채 정신무장은 해이해지고, 내부에서는 민주 시민단체로 위장한 좌익들의 대공세가 펼쳐지고 있다.

정계·종교계·학계·언론계 등 사회 곳곳에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인사들이 때만 되면 남남(南南) 갈등, 계층 갈등, 이념 갈등, 국론 분열을 부추기는 모습은 베트남 패망 전야의 모습과 완벽하게 닮은꼴이다.

▲ 철수하는 마지막 미군 헬기를 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베트남 사람들. 정신무장이 해제된 부패한 군대, 분열된 사회는 최신 무기를 고철로 만든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더 이상 방치했다가는 제2의 베트남 꼴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국방과 안보는 국가 지도자들의 정신무장과 결단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동안 박정희 이후 등장한 역대 지도자들은 거의 모두가 국방과 안보상 치명적인 실수들을 저질렀다. 

전두환 대통령은 국방과학연구소의 전략무기 과학자 800여 명을 해고하고 율곡비리를 저질러 자위적 방위 역량의 핵심인 국방 R&D와 방위산업의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노태우 대통령은 동서간의 냉전 해체를 동북아의 냉전구조 해체로 인식하여,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일방적으로 감행함으로써 북핵 억제에 치명적인 손상을 초래했다.

김영삼 정부는 탈냉전 시기 북한의 대남(對南) 군사전략 변화에 대한 어떤 대책도 수립하지 않아 북한의 핵개발 및 신(新)대남 군사전략의 추진을 수수방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지원과 햇볕정책을 강행하여 북한의 핵개발을 가속화하는 역할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의 핵개발을 정당화시키는 동시에 대북 억제의 핵심인 국민개병제와 연합방위체제를 약화시켰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적 관점으로 안보를 무시하여 천안함 연평도 도발, 핵실험, ICBM 도발 등의  위기를 자초했다.

누가 대권을 잡든 안보는 국가운영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한다. 미래한국과 안보정책네트웍스(대표 홍성민)는 공동으로 앞으로 10회에 걸쳐 ‘대권과 국방’을 주제로 우리 안보와 방위산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내놓는 특집을 진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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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성 2017-01-17 07:14:33
좋은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