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전의 왕자’ ‘神의 손’이라 불린 터키軍
‘백병전의 왕자’ ‘神의 손’이라 불린 터키軍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5.27 10: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포커스] 6·25 때 한국을 도운 무슬림들

중공군 지휘부, 용인 김량장 전투 이후 “터키군과의 정면 승부 자제하라” 지침 하달

6·25 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이어 10월 1일부터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했다.

그로부터 17일 후인 10월 17일, 멋진 콧수염을 기른 낯선 무슬림 군인들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여단장 타하신 야지즈 준장이 지휘하는 터키군 제1보병여단 1진이었다.

이틀 후에는 2진이 도착했다. 이들은 9월 25일 터키 남부의 이스켄데루 항을 출발, 지구를 반 바퀴 돌아 부산에 도착했다.

당시 터키 수상 아드난 맨데레스는 유엔 안보리로부터 한국전 지원 요청을 받자  즉각 파병을 결정했다.

터키의 종교부 장관 아흐메드 악세키는 “신앙심만이 공산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의 침략을 받은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하는 것은 성전(聖戰)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만약 전사(戰死)한다면 순교자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선언했다.

터키 정부가 신속하게, 많은 병력을 한국에 파병한 이유는 점증하는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을 원했기 때문이다.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터키는 독자적인 힘만으로는 소련을 감당하기 힘들어 나토 가입을 절실히 원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인 데다가, 대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가입이 거부되었다.

이 와중에 유엔으로부터 한국전 지원 요청을 받자 터키는 재빨리 파병을 결정했다. 미국은 이후 군사적, 경제적으로 터키를 대대적으로 원조했고, 1952년 터키를 나토 회원국에 참여시켰다.

터키 보병여단은 3개 보병대대와 105㎜ 곡사포 대대, 지원부대 등 총 병력 5455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국과 영국을 제외하고 여단급을 파병한 나라는 터키와 캐나다뿐이다. 터키군은 미 25사단에 배속되어 통역관도 없이 북진작전에 참가했다. 


군우리에서 美 2사단 구출 

터키군의 한국에서의 첫 전투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30일까지 전개된 군우리 전투였다. 

미 8군이 청천강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패하여 철수할 때 엄호부대로 군우리에 남아 있던 미 2사단이 마지막으로 철수하던 중, 군우리-순천 간의 협곡지대에서 중공군군에게 포위되었다

미 2사단은 계곡 사이에 난 길의 양편 고지를 점령한 중공군에게 집중 난타를 당하며 퇴각했다.

마치 그 모습이 인디언들이 양편으로 늘어서서 그 사이로 포로를 걷게 하며 집단 린치를 가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해서 전사(戰史)에는 ‘인디언 태형(苔刑)’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때 5배 이상 되는 적군에게 포위되어 자신들도 위기에 처해 있던 터키 1여단이 붕괴 위기에 처한 미 2사단을 구하기 위해 착검을 하고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를 외치며 중공군 진지로 돌격했다.

예상치 못한 터키군의 역습에 당황한 중공군은 혼란에 빠졌다. 등 뒤에서 백병전 공격을 해대는 터키군을 상대하느라 군우리 협곡에 갇혀 있던 미 2사단에 대한 공격이 느슨해지자, 그 틈을 타고 미 2사단은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터키군은 군우리에서 218명 전사, 455명 부상, 100여 명이 넘는 실종자(포로)가 발생했고, 장비의 70%를 잃는 등 전술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중공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입혀 미 2사단의 완전 붕괴를 막았다.

덕분에 아군은 12월 1일 평양으로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자신들의 희생을 무릅쓰고 미 2사단 구출에 앞장선 터키군은 참전 유엔군 최초로 트루먼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부대 표창을 받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동계작전으로 후퇴를 거듭하여 서울을 빼앗겼는데(1·4 후퇴), 서울 재탈환을 위해 국군 1사단 예하부대와 미 25사단, 터키 여단이 경기도 광주, 수원, 용인 일대에서 ‘선더볼트 작전’이라고 명명된 반격작전에 돌입했다.

터키 여단은 용인시 김량장동과 151고지 일대에 투입되어 중공군 제50군 예하 149사단 447연대, 150사단 448 연대와 격전을 벌였다.

밤낮 없이 계속된 3일간의 전투 결과는 경악 그 자체였다. 터키 여단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중공군 2개 연대를 일거에 궤멸시키며 김량장과 151고지를 점령했다.

▲ 6·25에 참전한 터키군은 전투마다 용맹을 떨쳐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두 차례나 부대 표창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도 터키군은 백병전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터키군은 12명 전사, 30명 부상을 당한 반면 중공군은 1735명이 사살되었다. 병력 수로 볼 때 터키군은 병사 1명 당 40명의 적을 무찌른 셈이다.

특히 전장(戰場)에서 발견된 474구의 중공군 시체는 터키군과의 백병전에서 개머리판에 의해 턱이 깨지고 총검에 찔려 사망한 것이었다. 이 용맹한 전투 장면이 UPI 종군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터키군은 ‘백병전의 왕자’ ‘신(神)의 손(God hand)’라는 별명을 얻었다.

터키군에게 대패한 중공군은 한강 지역까지 밀려났고, 이 전투로 불과 두 달 만에 터키군은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의 부대 표창을 받았다.

터키군의 용전에 감명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도 터키군에게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하여 ‘무적의 토이기(土耳其) 용사’로 불렸다. 


돌궐 戰士들과 정면 승부 피하라 

김량장 전투 이후 중공군 지휘부는 일선부대에 “가능하면 터키군과의 정면 승부는 자제하라”는 특별 지침을 하달했다.

1300년 전 북방 초원지대를 휩쓸며 중국을 위협하던 ‘돌궐의 전사(戰士)’들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했던 것이다.

이후 터키군은 장승천 전투, 고량포, 서부전선 임진강 북단의 네바다 전투 등에서 돌권 전사의 후예답게 용맹을 떨쳤다.

▲ 용감무쌍한 터키군에 충격을 받은 중공군은 "터키군과의 정면 승부를 자제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사진은 1951년 봄 중공군을 한강 쪽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터키 여단 병사들.

터키는 전쟁 기간 중 총 1만4936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그 중 765명이 전사(戰死)했고, 부상자는 2147명, 행방불명 175명, 포로 346명, 비전투 요원 손실 346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부산 유엔묘지에는 한국전 당시 전사한 터키군 462구가 모셔져 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터키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터키의 이름을 세계에 빛낸 영웅 대접을 받았고, 터키와 한국은 1957년 3월 8일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73년 두 나라가 상대방 명칭을 딴 기념공원을 조성키로 합의했다. 우리 정부는 1974년 9월 6일 터키군의 격전지였던 용인시 기흥구 마성IC 근처(영동고속도로 강릉 방면 마성터널 지난 지점)에 터키군 참전비를 건립했다.

터키도 수도인 앙카라 시내의 앙카라 역 길 건너편에 터키군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고 전사한 터키군을 기리기 위해 한국공원을 조성했다.

터키군은 1960년에 1개 중대를 제외한 본진이 철수했고, 완전 철군 직전까지 주한 터키군은 파주시 적성면에 주둔했다.

한국전에 참전했거나, 이후 주한 터키군에서 근무했던 인사들 중 터키 군부나 정·관계에서 요직에 오른 사람들이 많다.

1957년에 취임한 제7여단장 겸 주한 터키군 사령관 케난 에브렌 대령은 1978년 터키군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1980년 군사 쿠데타로 데미렐 수상과 정의당 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다음 1982년 개헌을 하여 7년 단임 대통령에 올랐다. 1982년 12월 전두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터키 제1보병여단을 지휘하여 한국전에서 용맹을 떨쳤던 타하신 야지즈 장군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앤잭군(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을 물리친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했고, 터키 독립전쟁 등에 참전한 역전의 명장(名將)이었다.

그는 한국전 참전을 위해 장군 계급을 스스로 강등시켜 준장으로 참전했다. 이것은 프랑스 대대 지휘관인 랄프 몽클레어 중령과 비슷한 사례다.

몽클레어의 본래 계급은 중장(군단장)이었는데, 한국전 참전을 위해 중령으로 계급을 강등하여 참전했다.

1952년 전역한 타하신 야지즈 장군은 정치가로 활동했고, 민주화 운동을 하다 1960년 체포되어 7년간 감옥 생활 후 석방되어 1971년 사망했다.

그의 손자인 알리 야지즈 중령이 2009년 우리나라 육군대학에 유학을 와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터키에는 ‘피를 흘리지 않은 땅은 조국이 될 수 없다’는 속담이 있다. 터키인들이 국교도 없던 낯선 지구 반대편 나라의 전쟁에 참전하여 3000여 명의 고귀한 인명을 희생 한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그저 듣기 좋은 언사가 아닌, 그들의 진심이 담긴 말이 아닌가 한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