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포퓰리즘으로 자멸한 영국 노동당
복지 포퓰리즘으로 자멸한 영국 노동당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6.09 14: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분석] 영국 총선의 교훈

영국 유권자들은 야당의 선심성 左클릭 용납하지 않아 

“좋은 일자리를 강조하면서도 우리는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들에 적대적이었다”

지난 5월 10일, 전(前) 영국 노동당 당수이자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는 이번 영국 노동당의 총선 참패의 원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제3의 길’을 내세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모순된 체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영국 국민은 이론보다 현실을 택했다. 지난 5월 7일 하원 총선거에서 집권 보수당은 총 650석 중 305석이었던 의석을 331석으로 늘려 단독 과반을 차지했다.

반면, 노동당은 전보다 25석을 잃어 의석수가 232석으로 줄어들었다.

‘초박빙’ 승부를 예상한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정부 구성 계획까지 세웠던 노동당은 에드 밀리밴드 대표의 사퇴로 ‘선장 잃은 배’가 되어 표류하게 됐다.

노동당의 패배에 대한 분석은 분분하다.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스코틀랜드에서 SNP(스코틀랜드 독립당)의 약진으로 100년 간 터줏대감이었던 노동당 의석이 깨져나간 이유를 드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노동당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지난 100년 동안 영연방내에서 가장 후진적이고 소외된 지역으로 남아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서 ‘노동당이 스코틀랜드에 무엇을 했는가?’라고 묻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의 노동당은 정당한 노력으로 재산을 늘리려는 사람들을 지지하지 못하고 단순히 지켜보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

토니 블레어 전 노동당 당수는 영국 ‘가디언’ 지의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노동당은 지난 총선에서 15만 파운드(약 2억5276만 원) 이상 소득자에 대해 45%인 최고 세율을 50%로 인상하는 증세(增稅) 정책과 함께 200만 파운드 이상 고가 주택에 보유세를 신설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반면 보수당은 ‘경제 살리기’를 내세워 기업의 법인세 감면으로 대응했다).

▲ 영국 노동당은 이번 총선에서 고소득자에 대한 세금 인상, 고가 주택 소유자에 대한 보유세 신설 등 증세를 통한 복지 강화를 공약했으나 유권자들에게 외면당해 참패했다. 사진은 선거에 참패한 후 사퇴한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밴드.

노동당은 또 2017년까지 에너지 요금을 동결하고 현재 6.7파운드인 시간당 최저임금을 2019년까지 8파운드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자영업자들과 기업들의 반발을 사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표적 투자은행(IB)인 골드만삭스는 “노동당이 정권을 잡으면 (영국 투자기업들은) 영국을 떠나야 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문제는 영국 노동당의 이러한 ‘복지’와 ‘증세’가 영국 국민들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그런 정책으로는 영국 경제가 살아날 수 없다는 뼈아픈 학습효과를 했다는 점이다.

영국 국민들은 40여 년 전 복지 포퓰리즘으로 경제가 망가져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아야 했다.

1960~1970년대 이른바 ‘영국병’이라 불렸던 복지 포퓰리즘과 노조들의 파업은 영국 경제에 깊은 골병을 선사했다.

1970년대 들어 영국의 사회복지 지출은 연간 정부 예산의 40%를 넘어섰고, 공공부문 파업과 제1차 오일쇼크는 비틀거리는 영국 경제에 치명타를 안겼다.

그 결과 1976년 대영제국의 후손들은 IMF의 구제금융을 받기에 이르렀다.
 

대처 총리의 당찬 개혁으로 기사회생 

1979년 구원투수로 나섰던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개혁 드라이브를 걸자 영국 노동당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처는 재정지출 삭감, 공기업 민영화, 규제완화 등 경쟁을 촉진하는 정책을 내세웠고, 경제는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영국 노동당은 개혁에 협조하기보다는 이념에 경도되어 좌파노선을 더 공고히 하기에 이른다.

1983년 총선에서 당시 보수당의 마거릿 대처 총리는 ‘유럽의 환자’라고 불리던 과잉복지와 재정파탄, 파업의 영국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과감한 구조조정, 보조금 삭감, 민영화 등의 개혁을 추진했다. 수술과정에서 환자의 썩은 살점과 고름은 ‘실업자 급증’으로 등장했다.

정부 지지도는 18%, 총리 지지도는 25%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대처는 “이 길밖에 없다(TINA·There is no alternative)”고 단호하게 밀고 나갔다.

반대로 4년 전 정권을 내줬던 노동당은 더 왼쪽으로 움직였다.

노동조합 특혜 부활, 민영화 공기업의 재(再)국유화, 일방적 핵무기 포기, 유럽공동체와 나토(NATO) 탈퇴, 상원 폐지 등을 공약했다.

사회주의적 포퓰리즘이라며 이에 반대하던 온건파 의원 29명이 탈당, 사회민주당을 결성했다.

당시 노동당 의원이던 제럴드 카우프먼은 그런 노동당의 강령에 대해 “역사상 가장 긴 자살 유서(the longest suiside note in history)”라고 비판했다.

영국 국민들은 냉정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예언대로 노동당은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역설적으로 노동당의 ‘정치적 자살’은 부활의 전환점이 됐다.

더 많은 자유시장경제 정책을 수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특히 노동당 정체성의 상징인 당헌(黨憲) 4조에 대한 수정 운동이 시작됐다.

생산수단 공공소유, 산업에 대한 인민의 관리·통제를 규정한 이 조항은 결국 1995년 토니 블레어가 ‘제3의 길’을 주창하면서 폐기되고, 야당 생활 18년만인 1997년 정권을 되찾아오게 된다.
 
영국 노동당은 이로써 ‘신(新)노동당’(New Labour)으로 탈바꿈했다.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은 블레어노믹스라고 불렸다.

블레어노믹스의 핵심은 복지보다는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것으로, 대처리즘과 거의 흡사하다는 이유로 일부에서는 블레어를 ‘대처의 아들’이라는 조롱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국유화 정책 포기 ▲노동조합의 정치적 영향력 축소 ▲복지국가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세금 대폭 인하 ▲정부의 재정지출과 차입 축소 ▲고소득층에 대한 조세감면으로 전통적인 소득재분배 정책 포기 ▲인플레이션 억제 등이었다.

이런 중도우파적 노선으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은 대처의 경제 개혁 효과를 누리면서 무난한 성적표를 얻었다.

하지만 블레어의 바통을 이어받은 노동당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이전 구닥다리 사회주의 노동당의 이념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브라운 총리는 영국의 구식 사회주의자란 사실을 드러냈다.

미국의 여성 칼럼니스트 헬리 데일은 2008년 “고든 브라운은 노조가 파업과 폭동으로 영국 정부를 굴복시켰던 1970년대 이후에는 보기 어려워진 유형의 사회주의자”라고 혹평했다.

그녀는 “브라운은 블레어 정부에서 막강한 요직인 재무 장관으로 일하면서 지난 10년 동안 영국이 누린 금융 호황을 실현했지만, 노동당 당수로 자립하자 전과 매우 다른 측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브라운의 공약 가운데는 2년생 유아의 무료 주간 보호, 공립학교 학생 수십만 명의 과학·수학 1대1 학습, 18년 무료교육이 있었다. 18년 무료교육 속에는 직업학교 과정과 극빈자의 대학 수업료 지급이 들어 있었다.

그 밖에도 국민의료보험제도 개선, 10대 음주 통제, 지방 경찰서의 컴퓨터 보급 확대 및 각종 시시콜콜한 정부 지원 사업도 약속했다.


경제 위기 때는 左클릭 안 통해 

문제는 2008년이 글로벌 경제위기가 깊어가던 중이었다는 점이다. 고든 브라운은 좌클릭을 선거의 전략으로 삼았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고든의 노동당이 과거 사회주의 이념으로 되돌아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경제가 호황일 때 영국 국민들은 노동당의 좌클릭 정책을 용인했지만, 불황에서는 노동당의 좌클릭을 용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은 잊었다는 평가를 들었다.

이런 현상은 일본 총선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지난 2009년 일본 총선에서 54년 만에 정권 교체에 성공한 하토야마 총리의 민주당은 승리를 지켜내지 못하고 아베의 보수 자민당에 패배해 몰락했다.

당시 민주당 공약집에는 선심성 정책이 빼곡했다. 아동수당 지급과 고속도로 무료화, 공립고교 전면 무상화 등 ‘3대 무상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처음에는 민주당의 무상 공약에 국민은 환호했다. 하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민주당이 공약 실천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실패하여 두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3년 4개월 만에 정권은 다시 자민당으로 넘어갔다.

이후 민주당은 단 한 번의 반전 기회도 못 잡고 있다. 민주당의 현재 지지율은 7%로, 거의 당 해체 수준이다.

영국 노동당의 참패와 일본 민주당의 몰락은 우리 정치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깊어가는 불황의 늪에서 ‘한국경제의 자살’을 권유하는 공짜 포퓰리즘에 여전히 매몰되어 있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도 거의 비슷하다.

지난 대선에서 ‘좌클릭 치킨 게임’으로 재미를 본 새누리당은 경제 불황이라고 해서 시장경제의 자유를 확대하는 정책을 내놓을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음 총선에서도 복지 포퓰리즘 경쟁이 재발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몰락이 급격히 오느냐, 천천히 오느냐의 문제만 남아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망해도 ‘더럽게 망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