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공간’을 위해 커피를 마신다
‘나만의 공간’을 위해 커피를 마신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6.1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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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한국인들의 커피 사랑

인류는 이제껏 두 개의 ‘만들어진 물’을 탄생시켰다.
하나는 서양의 포도주, 하나는 ‘이슬람의 포도주’라 불리는 커피

▲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미래한국 편집위원

경제 활동 인구 2400만 명이 평균 하루 한 잔 반, 1년이면 500잔 이상을 마신다. 커피 이야기다.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커피를 많이 마실까. 추정되는 이유로는 몇 가지가 있다.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의 저자 강준만은 현재 한국의 커피 문화를 명품(名品) 보유 심리와 유사하다고 설명했다. 커피는 다른 음료와 달리 취향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수긍이 가는 주장이다.

반대 의견도 있다. 마케팅 효과론인데, 트렌드를 주도하는 젊은 여성들이 커피에 주목하면서 그게 유행으로 번지고, 여기에 남성들이 가세하면서 젊은 층을 커피숍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역시 타당하다.

가장 단순하게는 카페인 중독이다. 여기에는 육식 비중이 늘어난 식생활 문화도 한 몫을 한다. 풀만 뜯어먹고 마시기에 커피는 어딘지 부담스럽다. 뭐가 답일까. 

강준만과 마케팅 효과론은 일부 겹치고, 아무리 인위적으로 조작한다고 해도 중독 없는 지속은 없다. 물론 셋 다 타당한 설명이다. 그런데 어딘지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재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소설가 박완서가 젊은 후배들을 타박했다.

“요즘 젊은 작가들은 왜 이렇게 풀 이름을 모르는지 몰라. 풀이면 다 똑같은 풀이야. 그리고 어떻게 나무 이름도 그리 모르는지.” 

젊은 후배 하나가 이렇게 되받았다. 

“대신 선배님들은 커피 이름 잘 모르시잖아요. 커피도 다 같은 커피가 아니거든요. 카페 라테, 캬라멜 마키아토, 카푸치노, 카페 로얄 어쩌구저쩌구.” 


스타벅스의 스토리텔링

이것도 옛날 이야기다. 요즘 소설이라면 묘사가 이런 식이겠다. ‘그는 카페 라테 한 잔을 주문했다’가 아니라 ‘그는 그린 티 프라푸치노에 커피 에스프레소 샷을 섞고 초콜릿 시럽과 자바 칩 얹은 커피를 주문했다’.

주어인 ‘그’와 ‘주문했다’라는 동사 사이에 놓인 그 길고 장엄한 묘사가 다방 세대와 커피 전문점 세대의 크레바스적 간극을 말해준다. 

국내 최초의 외국 커피 전문점은 1999년 개장한 스타벅스다. 이화여대 근처에 열었는데 100석 규모였다. 스타벅스는 스타(별)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추위를 피해 남하하던 바이킹의 일족이 갈대가 무성한 개울을 보고 자기네들 말로 stor(갈대)+bek(개울)이라고 불렀다.

일부가 거기 정착했는데, 해서 붙여진 이름이 ‘갈대개울 가족’, 바로 스타벅스(starbucks)다.

스타벅 가족은 바다 건너 미국에서 고기잡이 배를 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에 긴 항해 끝에 보스턴에 상륙한다.

정말로 돈을 많이 벌었다. 바이킹 족의 후예라 배를 타는 것은 생계인 동시에 취미였다. 돈을 벌어 큰 배를 산 일부 스타벅은 태평양을 죄 훑고 다녔다. 이들이 발견한 무인도는 오늘 날 스타벅 아일랜드라고 불린다.

일반인들에게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떠나는 것은 짜릿한 모험이었다. 어느 날 보스턴의 부잣집 도련님이 편안한 삶이 지루하다며 배를 얻어 타고 바다로 나갔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이 사람이 허먼 멜빌이다. 그는 선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길고 지루한 소설 한 편을 썼다. ‘모비 딕’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항해사 이름이 스타벅이었다.

책은 몇 백 권 밖에 팔리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학교에서는 소설을 필독서로 지정했는데, 나라의 역사가 짧다 보니 후보에 오를 만한 소설이 몇 권 없었다.

그래서 모비 딕은 얼떨결에 국어 필독서로 채택되었고, 덕분에 미국 학생들은 고통을 호소하며 지금도 이 두꺼운 책을 읽는 중이다.

1970년대 시애틀에서 영어 교사로 일하던 제임스 볼드윈은 모비 딕을 진짜로 좋아했다.

학교를 그만 두고 친구 둘과 원두커피 판매회사를 차린 볼드윈은 상호에 그가 좋아했던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을 붙였다.

스타벅스는 이렇게 이름 자체에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이 들어 있다. 바이킹에서 멜빌의 모비 딕을 거쳐 온 1300년짜리 드라마틱한 상호다.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기꺼이 이 장구한 내레이션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커피와 이미지의 일부를 가격으로 지불하는 것이다. 해서 스타벅스에서 테이크 아웃(take out)을 한 고객들의 70%는 상표가 드러나게 앞으로 하여 들고 다닌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고객들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위험하지 않은 수준의 계층 의식을 공유한다(이는 이디아가 송출하는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메시지와 대비된다). 이 계층의 핵심은 오피스 레이디들과 고급 문화를 즐기는 대학생들이다.


‘공간’의 비밀 

스타벅스의 마케팅은 유명하다. 한 달에 하나 새 메뉴가 출시되는 것은 기본이다. 매장에서는 내가 원하는 스타일의 커피를 주문하여 마실 수 있다.

커스터마이즈(customize) 된 커피를 마신다는 것은 고객에게 금전으로 환산 불가한 만족을 느끼게 해 준다.

스타벅스 매대에 있는 직원의 호칭은 ‘파트너’다. 내가 원하는 취향의 커피를 만들어주는 동료로 그들은 포지셔닝이 격상되어 있다.

이 파트너가 커피빈에서는 알바로 전락한다. 주문을 받고 계산서를 돌려주는 정도가 이들이 하는 일이다. 커피빈은 커피 맛이 좋다. 그러나 마케팅은 거의 안한다.

맛으로 승부하는 것이 올바른 식음료 매장의 전략이긴 하지만 현대적이지는 않다. 커피빈 매장에서는 와이파이가 안 된다.

노트북을 연결할 콘센트도 없다. 스타벅스 실내가 거의 도서관 수준인 것을 생각하면 치명적인 방치다.

여기에 한국인의 커피 사랑의 중요한 비밀이 있다. 바로 공간이다.

커피는 단지 맛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다. 소비의 중심에는 마케팅, 그리고 공간이 있다.  몇 시간 동안 남의 눈치를 안 보고(오히려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일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한국 커피 사랑의 동력인 것이다. 이 공간은 자연스럽게 17세기 프랑스의 살롱(salon)과 카페를 떠올리게 한다.

살롱은 예술과 토론과 사교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커피를 마셨다. 프랑스 혁명 후 살롱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 카페다. 이 카페에서 예술가, 철학자, 학자들이 토론을 하며 커피를 마셨다.

살롱에는 자리를 주관하는 마담이 있었다. 카페에는 그것이 없고 당연히 대화의 단일성은 해체되었다. 현대의 커피숍은 그 카페를 이은 것이다.

대화는 더 여러 결로 쪼개졌으며, 중심이 없는 가운데 이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표상에 커피가 있다.

인류는 이제껏 두 개의 ‘만들어진 물’을 탄생시켰다. 하나는 서양의 포도주이고, 하나는 ‘이슬람의 포도주’라 불리는 커피다. 앞으로 제3의 음료가 등장하여 커피를 밀어낼 수도 있을까.

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커피는 근대 시민 사회와 역사를 공유한다. 당시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은 시고 쓴 검은 액체가 아니라, 공간의 매력과 그 안에서 오가는 정보였다.

커피가 없는 공간은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 공간이 있었고 그 다음에 커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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