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을 파멸로 몰고간 승려 틱쾅둑(釋廣德) 분신 사건(1963년 6월 11일)
베트남을 파멸로 몰고간 승려 틱쾅둑(釋廣德) 분신 사건(1963년 6월 11일)
  • 김용삼 기자
  • 승인 2015.06.11 13:2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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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6월 11일 오전. 사이공 시내에 위치한 주(駐) 베트남 미국대사관 부근의 교차로에 수십 명의 불교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안쾅 사원의 고승(高僧) 틱쾅둑(釋廣德) 스님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제자 승려가 스승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주위를 돌며 가솔린을 흠뻑 부었다. 틱쾅둑 스님은 준비했던 라이터를 꺼내 자신의 가사에 점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라이터가 가솔린에 젖어 불이 붙지 않자 주위에 있던 누군가가 성냥갑을 건네주었다.

▲ 틱쾅둑 스님의 실제 분신 장면. 화염에 휩싸여있으면서도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다.

스님이 성냥을 그어 가사에 점화하는 순간, 화염이 치솟았다. 불길에 휩싸인 틱쾅둑 스님은 자세 하나 흩뜨리지 않고 불길에 온몸을 맡겼다. 주위에 있던 비구니들은 화염에 휩싸인 스님을 향해 절을 올렸고, 일부 비구니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시위 진압을 막기 위해 주변에 출동했던 베트남군의 일부 병사들은 ‘받들어 총’ 자세로 예를 표하기도 했다.

틱쾅둑 스님은 그 전날 제자들에게 “만약 내가 소신공양 중 앞으로 넘어지면 나라가 흉하게 될 것이니 그때는 해외로 망명하라. 내가 뒤로 쓰러지면 우리들의 투쟁은 승리하고 평화를 맞게 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불길이 거세지자 틱쾅둑 스님의 상반신이 잠시 앞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허리를 곧추세워 가부좌를 했고, 마지막 순간 뒤로 조용히 넘어졌다. AP통신의 베트남 특파원 말콤 브라운 기자는 틱쾅둑 스님의 분신 전 과정을 사진촬영하는 데 성공, 1964년 퓰리처상(국제보도부문 공동수상)을 수상했다.

말콤 브라운 기자가 틱쾅둑 스님의 분신(불교에서는 소신공양이라고 표현) 장면을 촬영한 사진은 미국의 극좌 성향 하드 코어 밴드인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RATM·Rage Against The Machine)’의 데뷔 앨범 자켓으로 사용되어 더욱 유명세를 탔다. 미국의 지배계층에 대한 분노,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냉소적으로 노래하여 젊은이들의 사회의식을 눈 뜨게 한 이 앨범은 중독성 강한 음색과 박력 넘치는 사운드로 빌보드 차트 45위에 올랐고, 록 관련 잡지 ‘롤링스톤즈’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 앨범’ 중의 하나로 선정했다.

사람 살 타는 냄새 진동

뉴욕타임스의 베트남 특파원으로 현장에 있었던 데이비드 핼버스탬(그는 후에 미국이 베트남전에 본격 참전하자 베트남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베트남전의 진실을 알리는 기사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은 당시 틱쾅둑 스님의 분신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나는 그 광경을 다시 볼 수도 있었지만 한 번으로 족했다. 불꽃이 솟구치더니 몸이 서서히 오그라들면서 머리는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사람 살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몸은 빨리 탔다. 내 뒤에 모여든 베트남 사람들은 흐느끼며 울기 시작했다.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는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극도로 혼란스러워 메모를 작성하거나 질문을 던질 수도 없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가면서도 틱쾅둑은 미동은커녕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울부짖는 주위 사람들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었다.”

이것이 베트남을 파멸로 몰아넣은 틱쾅둑 스님의 분신 사건이다. 당초 이 사건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 딘 디엠(吳廷琰) 대통령의 불교 탄압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것이었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고 딘 디엠은 어린 시절 가톨릭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성장한 후에도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며 독신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잠은 후 자신의 동생을 정보부장관에 임명하는 등 일가친척과 가톨릭 신자들에게 권력을 배분하는 등 사려 깊지 못한 정치를 남발했다.

가톨릭 지주 세력의 지지 얻기 위해 토지개혁 중단

고 딘 디엠은 집권 과정에서 토지개혁을 약속했으나, 대부분이 지주층이었던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결집하기 위해 토지개혁을 중단했다. 그 결과 전통적인 대승불교 국가로서 국민의 80%가 불교 신자인 나라에서 소수의 가톨릭 신자들이 권력과 부(富)의 기반인 토지를 장악함으로써 계급갈등 구조가 심화되었다.

고 딘 디엠은 베트콩을 몰아낸다는 구실로 불교 마을과 사찰들을 폭파시키고 철거시켰다. 또 많은 불교도들과 승려들을 베트콩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고 처형했다. 특히 1963년 5월, 고 딘 디엠은 자신의 형을 쿠양빈 지역의 가톨릭 대주교로 임명했는데, 그가 석가탄신일에 봉축행사를 금지시키면서 큰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고 딘 디엠은 불교를 탄압함으로써 광범위한 국민을 반정부 세력으로 몰아넣는 멍청한 짓을 한 것이다.

틱쾅둑 스님의 분신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남베트남 사회에도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 및 게릴라 투쟁이 격화되면서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여러 승려들이 뒤를 이어 분신을 했고, 대학생과 시민들은 고 딘 디엠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격렬한 반정부 투쟁을 전개했다. 이러한 반정부 투쟁을 부추긴 것이 고 딘 디엠의 제수로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했던 쩐레수언(陳麗春)이다. ‘마담 누’, 혹은 ‘드레건 레이디(Dragon Lady)’로 불렸던 쩐레수언은 1945년 공산주의자에 의해 친정 오빠 두 명이 살해당하면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마담 누는 틱쾅둑 승려의 소신공양에 대해 “그것은 땡중의 바베큐 쇼다. 바베큐에 쓴 휘발유가 미제라서 완전한 국산이 아니다” “다른 승려가 분신을 하겠다면 자기가 휘발유를 공급하겠다”는 등 독설을 퍼부어 상황을 극단적으로 악화시켰다. 반정부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 학생들이 대거 체포되었고, 대학들이 폐교되었다.1963년 8월, 또 다른 승려가 분신 자살하면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발생하자 정부 기관원과 경찰, 군인들이 사이공의 싸로이 사찰을 습격했다. 이 과정에서 30여 명의 불교 신도가 사망하고 시민과 승려 15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마담 누의 발언과 연이어 벌어지는 불교 탄압에 큰 충격을 받은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자신들의 지원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던 고 딘 디엠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미 정보당국은 “고 딘 디엠이 하야하더라도 미국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고, 원조를 줄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에 고무된 남베트남 군부는 은밀히 쿠데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63년 11월 1일, 고 딘 디엠이 총애하던 두옹반민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은 대통령궁을 공격해 11월 2일 새벽 고 딘 디엠과 동생 고 딘 누(呉廷柔)를 체포했다. 장갑 차량에 의해 호송되던 고 딘 디엠은 동생 고 딘 누와 함께 살해되어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고 딘 디엠 제거는 베트남 비극의 서막

고 딘 디엠의 실각은 베트남 비극의 서막이었다. 남베트남에서는 1년 동안 6차례나 쿠데타가 반복되어 정치 사회적 혼란은 극에 달했다. 결국 미국은 통킹 만 사건을 일으켜 전면적인 군사 개입을 하면서 베트남전은 미국-월남 대 북베트남-베트콩의 전쟁으로 양상이 바뀌었다. 미군은 어마어마한 예산과 각종 최신 무기, 미국 최고의 엘리트 지휘관과 전투병들을 투입하여 매일매일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듭했으나 전쟁에서는 비참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 베트남전에서 패한 결정적인 이유는 군사력이 취약해서가 아니라 베트남 사람들의 민심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밴 플리트 장군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으로 한국전을 지휘했던 맥스웰 테일러 장군은 후에 주 베트남 미국 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에 공수 투하된 제101 공수부대를 지휘했던 명장(名將), 1951년까지 베를린에서 연합군 총사령관을 지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육군 참모총장, 케네디 행정부에서는 합참의장에 이어 1965년까지 주 베트남 대사를 지냈던 미국 내의 베트남 전문가다. 그런 테일러가 왜 이승만을 높이 평가한 것일까.

그것은 남베트남이 이승만처럼 농지개혁을 성공시켰다면 끔찍한 전쟁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공산당에게 패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란 점을 강조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이승만은 1948년 건국 직후부터 농지개혁 관련법안을 만들어 지주계급의 강력한 저항을 무릅쓰고 1950년 4월 중순, 농민들에게 농지를 분배했다.

이승만은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했기 때문에 지주들에게는 지가증권을 주었고, 농민들에게는 농지 대금을 받았다. 그런데 분배 구조가 농민들에게 월등히 유리했다. 농지 대금은 1년 수확량의 150%를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하도록 되어 있었다. 당시 소작인들은 땅을 빌리는 대가로 지주들에게 1년 수확량의 50~60%를 소작료로 바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1년 수확량의 150%를 5년에 걸쳐 나눠 내는 것은 농민들에게는 거저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농지개혁으로 인해 그 동안 자기 땅이 없어 온갖 설움을 다 당하고, 뼈 빠지게 농사 지어 수확량의 50~60%를 소작료로 지주들에게 수탈당하던 농민들은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제부터 나만 열심히 노력하면 당대에 신분상승이 가능한 사회, 부자와 빈자, 양반과 상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 갈등이 하루아침에 소멸됨으로써 농민들이 공산주의에 동조할 수 있는 뿌리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반면 남베트남은 가톨릭 지주세력들의 압력,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고 딘 디엠의 토지개혁 방기로 인해 계급갈등을 청산하지 못했다. 게다가 고 딘 디엠이 전 국민의 80%가 믿는 불교를 탄압하면서 민심 이반을 야기했다. 가톨릭 신자들과 고 딘 디엠의 친인척들이 권력의 중심을 장악한 가운데 온갖 부정부패와 종교 갈등이 벌어지면서 숱한 민족의식을 보유한 사람들이 반정부 인사로, 베트콩으로 돌변하여 패망의 길로 질주한 것이다.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자 두 딸과 함께 베트남을 탈출한 ‘드레건 레이디’ 쩐 레 수언은 쿠데타 정권에 의해 전 재산을 몰수 당하고 영구 귀국 불가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미국 입국도 거부당하자 유럽 각지를 떠돌다 이탈리아에 정치적 망명을 했다. 그녀는 2011년 4월 24일 로마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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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2015-06-14 19:50:02
저 쩐레쑤언은 정작 자신 임종이 다가오니까 베트남 정부(물론 당연히 공산베트남의 후신)에다가 고향에 묻힐 수 있냐고 물어봤다죠. 물론 돌아온 답은 "널 묻어줄 땅은 베트남 어디에도 없다."였다고 였다네요.
자기 국민들에게는 이말저말 다하던 인간이 정작 자신이 싫어했던 공산주의자들 앞에선...

김지혜 2015-06-12 20:18:44
흥미롭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