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한국] ‘진화와 퇴화’ 사이에 낀 미디어
[2025년 한국] ‘진화와 퇴화’ 사이에 낀 미디어
  • 한정석 편집위원
  • 승인 2015.06.17 10:0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00호 특집] 10년 후의 언론과 뉴미디어
▲ 한정석 미래한국 편집위원

“신문산업이 위기라지만 결코 신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선을 싸려면 신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전통 신문산업의 위기를 그렇게 농담했던 비평가가 있었다. 오늘날 신문산업의 위기는 단지 신문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통적 미디어 전반과 저널리즘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5000개가 넘는 뉴스 제공 사업자들이 활동하는 대한민국에서 이제는 ‘화장실에서 읽는 뉴스’를 표방하며 뉴스 큐레이션 장르를 열었던 피키캐스트라는 신종 뉴스 사업자가 서비스 2년 만에 조중동을 비롯, 모든 메이저 뉴스사를 제치고 2015년 모바일 뉴스계에 최강자로 떠오른 시점이다.

미디어(Media)라는 말은 라틴어로 중간자(中間者)라는 뜻이다. 중간의 의미는 신(神)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로서 신의 계시를 인간에게 전달하는 메신저를 말했다.

일종의 주술적 샤먼의 기능을 가졌던 것이 미디어의 시작이었다. 그런 미디어는 인쇄술의 등장과 함께 서적과 신문이라는 활자 매체로 변화했다.

미디어에 시장이 형성되면서 미디어는 콘텐츠를 사고파는 거래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과정에서 ‘저널리즘’이라는 영역도 시작됐다. 
저널리즘이 정치성을 띠면서 근대 사회는 요동쳤다.

미디어는 더 이상 과거처럼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탐색자이자 갈등의 제공자가 되기 시작했다. 


선동과 음모로 대중을 현혹한 마라 저널리즘 

18세기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저널리즘은 정치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1789년 9월에 탄생한 ‘인민의 벗(Ami-du peuple)’은 프랑스 혁명기에 대중선동 매체로서 위상이 대단했다.

이 신문을 발간한 장 폴 마라(1743~1793)는 유명한 의사였다. 그는 귀족들이 혁명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군주정은 철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라는 국민공회의원이 되면서 유력한 인물로 떠올랐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았다. 마라와 ‘인민의 벗’은 프랑스 혁명에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출세시키기도 하고 매장시키기도 하는’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권력에 따른 것이 아니라 여론을 불러 일으키는 ‘바람’ 때문이었다.

마라는 누구든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특히 그는 왕당파를 모두 붙잡아 단두대로 보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마라는 입버릇처럼 “우리는 음모에 휩싸여 있다”고 부르짖었다.

프랑스의 과격한 시민들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대신 ‘마라의 이름’으로 기도했다. 마라는 급진적인 한 여성의 칼을 맞고 욕실에서 살해됐다.마라에게 의심받은 인물은 더는 조용히 살 수가 없었다. 그의 ‘인민의 벗’에 이름이 거론되는 사람은 죽은 목숨이었다.

‘인민의 벗’은 흔히 ‘마라 저널리즘’이라고 명명된다. 팩트의 추구가 아니라, 선동과 음모로 대중들을 현혹시키는 마라 저널리즘은 한국의 좌파진영에서 즐겨 쓰는 저널리즘의 한 형태다.

미디어가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전달자가 되면서 미디어는 무엇보다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이념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공산주의 혁명 이념을 창시한 칼 마르크스의 처음 직업은 ‘편집장’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라인신문’을 발간하며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마르크스는 집에서 등사기로 ‘라인신문’을 찍어 내면서 지식인 독자들을 규합했다.

비록 독일 국민들 가운데 0.1%도 읽지 않았던 신문이지만, 그 구독층이었던 지식인들과 학생들의 대중적 영향력은 막대했다

사회주의 소련은 미디어의 영향력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이스베스티야’와 ‘프라우다’라는 두 개의 국영 신문을 통해 언론을 통제했다. 러시아어로 ‘소식’이라는 뜻의 이스베스티야와 ‘진실’이라는 뜻의 프라우다를 두고 러시아인들은 ‘이스베스티야(소식)에는 프라우다(진실)가 없고, 프라우다(진실)에는 이스베스티야(소식)가 없다’는 농담을 했다. 소련이 무너지는 그 순간에 조차 이들 매체는 진실과 뉴스를 보도하지 않았다.

미디어가 권력을 감시하는 기능을 잃을 때, 한 나라의 운명은 가늠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점은 자유를 중시한 미국인들이 잘 깨달았다. “신문 없는 정부를 갖느니, 차라리 정부 없는 신문을 갖겠다”고 말한 사람은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미디어와 저널리즘의 위기 

1972년 지방의 한 작은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월남전의 상황에서 미 대통령 닉슨의 선거 불법 도청 사실을 기획보도로 폭로했다. 일명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닉슨은 사임했다. 

미디어가 살아 있는 권력을 저격했던 이 사건은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언론의 자유와 국익(國益)에 대한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결국 언론의 자유로 기울어졌다. 이때부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탐사보도라는 영역이 등장했다.

언론의 자유는 정의의 문제와 결부되면서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 이어 ‘언론부’라는 ‘제4의 권력’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만한 권력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느냐에 대한 비판이 설득력을 얻게 되면서 저널리즘은 ‘진실과 책임’ 사이에서 방황하는 신세가 됐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인터넷과 디지털 IT혁명이 불어오면서 미디어와 저널리즘에 위기가 닥쳐왔다.

‘바티칸 교황청의 홈페이지와 플레이보이의 홈페이지는 동등하다’라는 말은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 콘텐츠의 권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다.

‘네티즌’이라 불리는 사이버 공간의 활동가들은 더 이상 종이 매체나 TV브라운관을 시청하지 않게 됐다.

인터넷에 이어 소셜 미디어로 등장한 SNS에서 이제 뉴스는 콘텐츠의 한 형태로 소비되고 유통된다.

‘일방적 미디어’에서 ‘쌍방향 미디어’를 넘어 ‘관계형 미디어’로 진화되는 현실 속에서 저널리즘은 ‘재미’와 ‘감각’이 선택의 가장 중요한 동기로 등장했다.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짧고 흥미로운 정보, 동영상과 사진만을 골라 ‘뉴스 큐레이션’이라는 타이틀로 편집해 보도하는 국내 ‘피키 캐스트’는 ‘우주의 얕은 재미’라는 타이틀로 2013년 서비스 이후 2년 만에 모바일 뉴스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스스로 ‘화장실에서 읽는 뉴스’를 표방한 피키 캐스트는 뉴스와 정보, 그리고 저널리즘과 스토리텔링을 구분하지 않는다.

동시에 남의 저작권이든 내 저작권이든 상관하지 않고 사용한다. 넘쳐나는 뉴스 가운데 흥미로운 것만 추려 재미있게 재편집해 상품으로 전달하는 이 방식은 ‘뉴스 큐레이션’이라는 보도 형태가 미래 저널리즘의 대세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진실과 사실은 이제 나와 관련된 것 아니면 관심이 없는 시대에 접어들면서 미디어는 더 이상 ‘신의 메신저’의 역할을 하지 않게 됐다. 말초적 감각과 재미를 선사하는, 그리고 어디에 어떤 맛집이 있는지, 예쁜 옷을 어디서 파는지가 중요하고 그 사용 후기가 뉴스가 되는 시대에는 광고와 뉴스, 정보와 보도의 경계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포스트 미디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통적 개념의 미디어와 저널리즘은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널리즘다운 저널리즘 복원해야 

오늘날 미디어와 저널리즘의 위기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2008년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신문 위기 대토론회’를 주창해서 열었던 2년 후인 2010년 한국에서도 같은 토론회가 열렸다.

방송처럼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신문 저널리즘 영역에서 디지털과 IT, SNS의 영향력 확대는 종이 매체에 근본적인 지형 변화를 초래했다.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전통적 미디어가 살아남으려면 ‘저널리즘의 복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워싱턴포스트의 전직 편집국장이던 레오나드 다우니와 언론학자 마이클 셧슨이 2009년 컬럼비아대 저널리즘 스쿨에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그런 내용이 지적되어 있다.

뉴스 산업의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저널리즘이 고유한 사회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근원적인 처방은 ‘저널리즘의 복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시민의 삶에 필수적인 활기차고 독립적이며 ‘책무를 다하는 저널리즘(accountability journalism)’을 구현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이런 목표를 위하여 언론사들의 혁신에 요구되는 몇 가지 사회적 의제를 제기한다. 디지털 환경에서 지속 가능한 뉴스 비즈니스 모델의 확립, 디지털 저널리즘의 사회적 책무성, 그리고 이를 위한 사회적 투자의 필요성이 보고서에서 주창됐다.

이들은 불확실한 경제적 환경 속에서 언론의 품위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 미디어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전문적 소양을 갖춘 싱크 탱크가 저널리즘의 영역을 개척해 대중들에게 깊이 있는 분석을 제시하고 올바른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내용은 언론사가 형편이 어렵다고 ‘딴 짓’에 몰두하면 그것 때문에 더 큰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독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저널리즘의 ‘지속 가능성(durability)’을 토대로 스마트 미디어 등의 플랫폼 변화에 접근하는 태도라는 문제 인식이 핵심 포인트였다.

다시 말해 ‘저널리즘다운 저널리즘’을 추구해야 전통적 미디어들의 활로가 열린다는 의미는 피키 캐스트와 같은 매체가 ‘우주의 얕은 재미’를 추구할 때 ‘우주의 깊은 재미’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기존 미디어 사업자들에게는 뛰어난 저널리스트들을 얼마나 확보하며, 또 그런 교육에 얼마나 투자하느냐가 미래의 운명을 가름 짓는 경영 마인드라고 할 수 있다.

인적 캐피털 투자에 소홀한 미디어들은 저널리즘 콘텐츠의 부실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아마추어 저널리즘을 넘어 싱크 탱크형 저널리즘이 필요한 시기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싱크 탱크형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진짜 세계란 너무도 거대하고 복잡하고 순식간에 변하기 때문에, 단번에 그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

언론은 마치 깜깜한 어둠 속을 쉴 새 없이 이리저리 비추고 지나가는 서치라이트의 불빛과 같다.

서치라이트의 불빛에 사물들이 잠깐 그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듯 언론이란 이런저런 에피소드의 조각들을 엮어낼 뿐이다.”-여론(Public Opinion), 월터 리프만.

미국의 전설적인 저널리스트였던 리프만은 대중의 여론이 ‘합리적 무지’로 인해 공공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는 언론사조차 자신들의 시간적, 경제적 한계로 인해 공공의 문제에 얽힌 사실들을 모두 취재하지 못하며, 결국 진실이 기자의 이념과 가치관이라는 필터를 통해 왜곡되는 현실을 개탄한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대중매체’ 즉 매스 미디어의 한계다. 리프만은 그런 한계에 대해 “대중 여론에 의한 민주주의란 과거에도 불가능했고, 현재도 불가능하며, 미래에도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리프만의 이런 지적은 대한민국 여론을 지배했던 세월호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화의 비밀 

그렇다면 이러한 대중 미디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리프만은 전문적 소양을 갖춘 싱크 탱크가 저널리즘의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어떤 사안과 현상에 대해 전문적 분석과 해설을 할 수 있는 전문가들이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대중들에게 설명하고 올바른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프만의 주장에 따라 미국에서는 헤리티지 재단을 비롯해 전문성을 갖춘 싱크 탱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싱크 탱크들은 언론인들이 참고할 만한 현안 분석을 내놓고 이를 정책 아이디어로 개진한다.

이러한 싱크 탱크 수가 늘어나면서 미국은 정치권과 학계 간에 ‘이념이 거래되는’ 정책 시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물론 국내에도 이런 싱크 탱크들이 활동하며 언론에 보도자료들과 정책 아이디어들을 제공하기는 한다. 

하지만 대체로 국내 싱크 탱크들은 국책 연구소가 중심이며, 이들의 아이디어와 정책 방향은 정부와 정치권의 입맛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관료집단들의 정책에 대한 변호인으로서 정책 정당성 부여에 동원되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면을 극복하려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시로 하는 대한민국에 올바른 민간 싱크 탱크의 존재가 요청된다.

그러한 싱크 탱크로부터 구축된 탄탄한 이념과 가치의 금맥을 언론사들이 각자의 기술로 녹여 대중들이 이해하기 쉬운 저널리즘으로 제공하는 협력적 모델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는 전문성이 부족한 한국 저널리즘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공부 안하는 저널리스트들도 문제지만, 편향되고 생산성 없는 학파의 이론으로 무장한 저널리스트들이 넘쳐나봐야 사회에 득이 될 리도 만무하다.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능력과 재정 능력을 갖춘 한국형 헤리티지, 그리고 시장경제 전문 KATO와 같은 민간 싱크 탱크들이 출현하고 이들과 협력관계를 가진 미디어들이 지식의 원천을 길어 올리고, 그것을 다시 가공해서 유익하고 심원한 저널리즘으로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시스템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문제는 한국 언론사들이 이런 아이디어보다는 국가의 재정지원과 광고지원 같은 것에 천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소비자인 독자들이 외면하는 언론에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고 광고를 나눠준들 그런 매체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언론도 시장 원리에 의해 자신의 운명을 타개하려 할 때 성장과 번영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진화의 비밀이다. 그리고 진화는 가장 가혹한 환경 속에서 일어난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