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
남침 이후 3일간(72시간),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
  • 미래한국
  • 승인 2015.06.1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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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이 기사는 지난 6월 18일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에서 건국이념보급회가 주최한 제 52회 이승만 포럼에서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발표한 논문을 옮긴 것이다. 그는 “남침 이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은 국군 통수권자로서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승만의 전시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논문은 한국 사회에 6‧25 당시의 이승만 전(前)대통령의 행보에 대해 오해가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지대한 가치가 있다는 판단하에 그의 연구 내용을 옮긴다.


Ⅰ. 머리말

▲ 남정옥(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6·25전쟁은 소련의 스탈린(Joseph V. Stalin)과 마오쩌둥(毛澤東), 그리고 미국에 대항한 ‘이승만의 전쟁’이었다.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3년 1개월간의 전쟁동안 김일성으로 하여금 전쟁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북진통일을 가로막은 워싱턴과 대립하며, 대한민국의 운명과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놓고 싸우고 또 싸웠다. 이른바 ‘벼랑 끝 전략’을 구사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엔군에서 국군철수와 국군단독의 북진통일, 그리고 반공포로석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승만의 뛰어난 지도력에 의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극적으로 살려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튼튼한 안보적 토대와 경제적 기틀을 마련했다.

이른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따른 한미동맹, 국군 20개 사단의 증강과 해·공군의 현대화, 그리고 전후복구 및 경제부흥을 위한 토대 마련이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이승만의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를 옹호하는 학자들은 이승만을, 외교의 신, 대한민국의 국부·아시아의 지도자·20세기의 영웅, 조지 워싱턴·토머스 제퍼슨·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 한국의 조지 워싱턴, 6·25동란을 수습한 절대공로자로 격찬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 사회 및 학계 일각에서는 전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기 그지없다. 그들은 오로지 이승만의 정치적 흠집 내지는 결점만을 찾아내는데 혈안(血眼)이 되어 있다.

이승만의 전시 업적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거나 이를 무시한다. 그들에게는 이승만의 과오만 필요했다. 오랜 노력 끝에 그들이 얻어낸 ‘성과’가 바로, 이승만 때리기에 ‘유용한 것’들이다.

이른바 이승만을, 전쟁에 대비하지 못한 무능한 대통령, 남침이후 별로 하는 것 없이 서울시민을 내팽개치고 피란을 간 무책임한 지도자, 한강교를 조기에 폭파하여 서울시민을 공산치하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은 무정한 대통령, 전쟁 중에는 장기집권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권력욕의 화신(化身) 등으로 보고 있다.

그 중에서도 남침직후 3일간(72시간), 이승만의 과오 및 잘못된 행적에 대부분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승만은 이들 ‘비난세력’이 말한 것처럼 용렬하고 무능한 인물이었던가? 정말로 그는 남침직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일신(一身)의 안위를 위해 피란을 갔던 대통령이었는가? 그것은 신뢰성이 있는 것인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가?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이자 동기이다.

그럼에도 논란이 되고 있는 남침직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기록도 거의 없고,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도 희박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도 종합되지 않고, 단편적으로 떨어져 있다.

더욱이 있는 것조차도 서로 내용이 틀리다. 출처가 불명확하니 어떤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이는 당시의 국가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는데다,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기록도 온존이 보존되지 않는데도 기인하고 있다.

몇 안 되는 이에 대한 기록들도 당시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이제까지 이들 자료가 남침이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을 더듬는 중요한 자료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러하다보니 역사가 오도(誤導)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자료로는 6·25전쟁 당시 이승만 주변을 맴돌던 인사들의 증언이나, 그들이 쓴 회고록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이들 증언들의 대부분은 당시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지 못한데다, 사실과 다른 단편적인 오류들이 많이 뒤섞여 있다는 단점이 있다.

특히 이를 담고 있는 증언록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작성된 탓으로, 기억의 한계 탓인지 내용과 시간이 뒤바뀌어져 있거나, 사실이 다르게 잘못 기록된 부분들이 많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승만은 남침직후 별로 할 일 없이 경무대에 있다가 서울시민을 버리고 도망간 지도자, 한강교를 폭파한 지도자로 인식하기에 좋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들 자료로는 그렇게 밖에 이승만을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접하고 있는 6·25전쟁 직후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역사의 나상(裸像)’이다.

그렇다고 자료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제까지 이승만의 72시간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는 않았지만 있었다. 다만 늦게 공개되었거나, 여기 저기 파편처럼 산재되어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맞추지 못했을 뿐이다.

이들 몇 개 되지 않는 자료로는, 무초 대사와 미 국무부간의 전문자료 21건(6.25.10:00∼6.27.08:00)이 1976년에 발간된 미 국무부의 대외자료(FRUS: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전쟁초기 이승만의 행적을 알게 하는데 매우 귀중한 기초 사료이다.

또한 전쟁 초기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의 동정을 알 수 있는 자료가 1977년 국방부에서 발행한 6·25전쟁사 공간사와 기록물이 있다.

또 단편적이긴 하나 당시 주미대사관의 한표육(韓豹頊) 참사관이 1984년에 쓴 회고록 성격의 책인 『한미외교 요람기』가 있는데, 이는 이승만과 주미대사관의 전화통화기록이 시간과 장소 그리고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어 당시 이승만의 대미외교의 일면을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최근 발간된 남시욱 교수의 『6·25전쟁과 미국』(청미디어, 2015)도 이 이 시기의 이승만의 행적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남침직후 이승만의 3일, 즉 72시간의 행적을 고찰하는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침직후 이승만의 행적에 대해 과거에 잘못 알려진 것을 바로잡고, 묻혀 있는 것을 새로 발굴하는 ‘이승만 역사’의 복원 작업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역사에서 이승만이 제대로 된 역사인물로 자리를 잡기를 기대해 본다. 나아가 이승만이 미국 명문대학(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을 나온 당대의 뛰어난 국제정치학자로서 국제정세를 꿰뚫고 있는 위대한 지도자인지, 아닌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Ⅱ. 군과 경찰의 남침상황 보고 및 조치

1. 북한군의 남침과 전선 상황, 6.25.04:00∽6.26.13:00 (의정부 함락)

김일성(金日成)과 스탈린이 마오쩌둥(毛澤東)과 협의하여 수립한 북한의 남침공격계획의 기본개념은 전쟁 개시 2일 만에 서울을 신속히 점령하고 한강 이남을 우회, 차단하여 전선에 배치된 국군의 주력을 격멸한 다음 남한 내 20만 명 이상의 공산당원에 의한 ‘인민봉기’를 유발하여 1개월 만에 전쟁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군은 신속히 남해안까지 진출하여 미 증원군의 한반도 상륙을 저지하고, 전쟁을 종결함으로써 8월 15일 광복5주년 기념일에 서울에서 성대한 행사를 통해 ‘통일인민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북한군은 1개월 전쟁을 가능케 할 남침공격계획과 국군에게는 단 한 대도 없는 전차(242대)와 전투기(226대) 등 막강한 전력을 앞세워, 1950년 6월 25일 04:00시(워싱턴 시각, 6.24. 15:00)를 기해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했고, 동해안에서는 특수훈련을 받은 게릴라 부대를 강릉일대와 부산지역으로 기습적으로 상륙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부산으로 상륙하려는 수송선은 우리 해군의 백두산함에 의해 격침됐고, 북한군 전차들은 국군장병들의 육탄공격 등 선전(善戰)으로 곳곳에서 저지됐다.

그렇지만 북한공군은 달랐다. 북한전투기들은 전쟁당일부터 서울상공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공격했다. 연습기와 연락기뿐인 우리 공군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북한전투기들은 6월 25일 10:00시부터 김포와 여의도 공군기지에 출현했고, 정오경에는 야크(YAK) 전투기 4대가 서울상공에 출현하여 용산역과 통신소 등 서울시내 주요 시설에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투하했다.

17:00시경에는 2대의 야크기가 김포비행장의 관제탑과 유류저장시설을 공격하여 큰 화재가 났고, 계류장에 있던 미 공군의 C-54수송기 1대와 한국공군의 T-6건국기 1대가 손상을 입었다. 이때 다른 야크기 4대는 여의도비행장을 공격하여 한국공군 연락기 7대에 손상을 입혔다.

19:00시경에는 6대의 북한전투기들이 김포비행장을 다시 공격하여 미 공군의 C-54수송기 1대를 파괴했다. 다음날인 6월 26일에는 북한전투기들이 용산 일대의 군 시설과 여의도 및 김포비행장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를 비롯하여 중앙청 일대에 기총소사를 하며,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까지 살포했다.

무초 대사도 25일 19:00시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북한공군의 크게 우려하면서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관리들이 미국의 공군지원을 바라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면서 무초는 향후 전쟁의 향배는 미국 공군의 지원에 달려 있다고 했다.

6월 26일 13:00시경(워싱턴 시각, 6월 25일 자정), 북한군은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를 함락시키고, 서울 시내에서 불과 8km 떨어진 창동까지 진출하며, 서울 진입을 시도했다. 서울이 적의 야포 사정거리에 들어갔다.

또 북한군 전차의 시속 약 60km의 속도를 고려하면, 채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다. 이때가 26일 야간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미국과 유엔으로부터는 아직 대한민국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이 없었다. 이승만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려고 했을까?

 

2. 육군본부 상황실, 채병덕 총장에게 남침상황보고, 6.25.05:00

북한군의 기습남침을 받은 육군본부 상황실은 전선의 예하부대로부터 적의 공격 상황을 접수하고 육군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에게 이를 보고했다. 채총장은 지난 토요일 밤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하고, 이날 새벽 02:00시경 총장공관으로 돌아와 취침 중 05:00시경 당직사령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은 뒤,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육본상황장교 김종필 중위를 총장공관으로 불러 이를 확인한 다음, “전군에 비상을 발령하고 각 국장을 비상소집하라.”고 명령했다.

채 총장으로부터 비상발령의 명령을 수령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은 25일 06:00에, 〈작전명령 제83호〉(1950.6.25.06:00)에 의거 ‘전군(全軍)비상령’을 하달하고, 동시에 육군 장병들의 비상소집을 실시했다. 전날 육군회관 낙성식에 참석한 고급장교와 지휘관들은 밤늦은 회식에도 불구하고 비상소집이 발령되자 곧바로 출근하여 전쟁에 임했다. 그중 작전국장 장창국(張昌國) 대령이 몇 일전에 서대문 쪽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직통전화가 가설되지 않아 09:00시쯤 가두방송을 듣고 들어왔다. 그리고 14:00시 넘어서는 외출외박 장병의 80∽90%가 부대로 복귀했다.

 

3. 채병덕 육군총장,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남침상황보고, 6.25, 07:00

채병덕 총장은 남침상황을 보고허기 위해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자, 장관비서인 신동우(申東雨) 중령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신 중령과 함께 지프차를 타고 장관공관인 마포장으로 갔다. 자고 있던 신성모 장관은 채병덕 총장의 방문을 받자 가운만 입은 채, 채 총장이 휴대하고 간 상황판을 보고 남침사실을 보고 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국방장관비서였던 신동우 중령은, “장관은 응접실 탁자위에 지도를 펴놓고, 채 총장으로부터 전방에서 일어난 상황에 대하여 보고를 받았다. 이때 장관의 표정은 자못 놀라고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짐작은 하였겠지만, 북괴(北傀)가 일요일 새벽에 기습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이때가 07:00시경이었다.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국무총리서리를 겸하고 있었다.

채 총장은 장관에게 보고즉시 육군본부로 들어오자마자 국방부 정훈국장(육군본부 정훈감 겸무) 이선근(李瑄根) 대령을 불러, “전군에 비상을 알리고 신속히 이들의 소집이 실현되도록 모든 방법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김백일(金白一) 행정참모부장과 협의하여 후방 3개 사단 출동과 수도경비사 예하 3개 연대의 출동대기를 명령했다. 이때가 08:00시경이었다.

그리고 수색의 1사단 사령부를 불시방문하고, 이어 의정부의 7사단 사령부를 방문했다. 이때가 10:00경이었다. 7사단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야 그는 북한군의 전면남침을 확인했다. 그리고 육군본부로 복귀하여 14:00시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참석했다.

 

4. 치안국장, 내무부장관에게 남침상황 보고, 6.25, 05:00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상황을 경찰로부터 먼저 보고받았다. 당시 38도선 일대에는 경찰들도 배치되어 있었다. 6월 25일 04:00시, 북한이 38선 일대에 대해 전면남침을 개시하자, 일선 경찰들은 남침상황을 치안국상황실로 신속히 보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치안국장이 내무부장관에게 보고한 시간이 25일 05:00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전쟁 발발 1시간 뒤였다. 거의 육군본부 상황실에 보고된 것과 비슷하다. 채병덕 육군총장도 05:00시경 보고를 받았다. 군에서는 이보다 앞선 06:00시에 전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보고들 받은 내무부장관은 06:30분에 전국경찰에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전투태세로 들어가도록 조치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백성욱(白性郁) 내무부장관은, “6월 25일 아침에 장석윤(張錫潤) 치안국장으로부터 북괴의 전면남침으로 38선 일대의 지서(支署)와 경찰초소(哨所)가 유린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비상경계령을 하달하여 군과 협조해서 질서 있는 작전을 수행토록 했다.”고 회고했다.

치안국 상황실에서는 북한의 남침 사실을 경무대에 최초로 보고한 것으로 보이나, 정확히 몇 시에 누가 했는지에 대한 기록을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경무대비서인 황규면(黃圭冕)이 집에 있다가 당직비서인 고재봉(高在鳳)으로부터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은 시각이 09:30분이었다고 한다, 그가 신당동 자택에서 경무대에 서둘러 들어가자, 경무대 분위기는 어수선한 것으로 당시를 회고했다.

황규면 비서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신성모 장관의 전황보고와 백성욱 내무장관의 경찰보고가 달랐고, 미 대사관과 맥아더의 주일연합군사령부(SCAP)의 보고가 서로 차이가 있어,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 경무대 비서실에서선 상황을 분석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Ⅲ. 군과 경찰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남침상황 보고

1. 김장흥 경무대경찰서장, 대통령에게 남침상황 최초 보고, 6.25.10:00

1950년 6월 25일, 이승만 대통령은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아침식사를 마치고 09:30분쯤 창덕궁 비원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 이승만은 10:00시경 비원의 반도지에서 낚시를 하다가 경무대경찰서장 김장흥(金長興) 총경으로부터 ‘북한의 대거남침’ 상황을 보고받고 경무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승만이 남침을 보고받은 시간과 무초대사가 전면공격을 알리는 전문을 위싱턴에 보낸 시간은 모두 10:00시였다. 의정부 전선으로 현장지도를 나갔던 채병덕 육군총장도 의정부 전선을 둘러보고 10:00시에 북한의 전면공격임을 알았다.

 

2. 신성모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 대통령에게 남침상황 보고, 6.25.10:30

프란체스카의 증언에 의하면, 10시쯤 신성모 국방부장관(국무총리 서리겸임)이 허겁지겁 경무대로 들어와, “각하께 보고드릴 긴급사항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이 집무실에 마주앉은 게 오전 10시30분.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개성이 오전 9시에, 그러니까 프란체스카 여사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간(09:00시)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당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라며 입속말을 했고, 얼굴엔 어떤 위험을 느낄 때 나타난 불안한 빛이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신 장관을 포함하여 경무대에서는 북한의 남침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프란체스카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경무대 안 분위기는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경무대의 비서들은,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두겠지!”라는 식이었다. 여기에 신성모 장관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신성모 장관이 이렇게 낙관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대통령을 안심시키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경무대에 오기 전에 무초 대사를 만나 현재의 상황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왔음이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역력하다.

무초 대사도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기 전에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북한군의 전면공격에 대해 “한국군은 북한침략자를 저지하기 위해 준비된 진지로 투입되었고, 한국관리와 국군은 침착하고 능숙하게 사태를 잘 처리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것을 보면 무초는 한국군이 잘 싸우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듯한 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모 장관은 경무대에 오기 전에 무초가 보는 한국군의 능력을 믿었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한 믿음 하에 대통령에게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했을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경찰정보는 신성모의 보고나 무초의 보고와는 달리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를 불러 정보보고를 다시 확인시켰다.

고재봉 비서는,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고 보고했다. 향후 이 대통령의 발언과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이때쯤 이 대통령은 남침상황을 북한군의 전면공격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마치 준비된 매뉴얼을 보고 하듯, 하나씩 처리해 나가는 인상을 주었다.

한편 신성모 장관은 채 총장으로부터 07:00시에 보고를 받았는데, 왜 대통령에는 10:00시가 넘어서야 보고를 했을까? 이에 대한 기록이 없으니, 이 문제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다음과 같이 이를 추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07:00시에 육군총장으로부터 남침을 보고받은 후 경무대에 들어간 시간이 09:30분경이니 약 2시간 30분 정도가 빈다. 그 중에서 채 총장에게 보고받은 시간(30분)과 경무대에 들어갈 준비(30분), 그리고 경무대까지 이동시간(30분)을 고려해도 1시간 정도가 빈다.

그러면 경무대로 오는 길에 당시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의 무초 숙소에 들렀을 가능성이 크다. 신성모는 미 군사고문단으로부터 들어온 상황과 미국의 대책을 알아보기 위해 장관공관에서 경무대의 중간에 위치한 반도호텔에 들려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초 대사도 경무대를 방문하기 전에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한국 관리들(Korean officials)’을 만났다고 했는데, 그 관리들 중 한 사람이 신성모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채병덕 육군총장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시간 이후부터 경무대에 오기 전까지 신성모의 동선(動線)이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성모의 정확한 행적에 대해 이제까지 알려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미 군사고문단도 09:00시에 북한의 전면남침을 확인하고, 무초 대사가 10:00시에 이를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한 점을 고려하면, 신성모는 경무대에 들어가기 전에 미국측의 정보 즉, 무초 대사가 알고 있는 남침내용에 대한 미국의 정보를 알아보려고 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이를 확인한 후 경무대로 들어와 대통령에게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이 신성모와 무초와의 친분관계다. 무초와 신성모는 남침 이후 자주 만났다. 25일 야간에 이 대통령이 무초에게 경무대로 오라고 전화했을 때도 신성모는 무초대사와 있다가 함께 경무대로 들어갔고, 27일에 아침에도 신성모는 무초 대사를 찾아가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났다고 알려줬다.

그래서인지 이 대통령이 대전에 있을 때, 장택상과 신익희가 국방장관을 이범석으로 바꾸라고 건의하자, 옆에 있던 무초 대사가 나서며, “지금 국방장관을 바꾸면 큰 혼란이 일어난다.”며 반대했다. 그런 점으로 볼 때 남침직후 신성모는 무초에게 의지했을 개연성이 있고, 무초는 언어 소통이 쉽고 붙임성있게 대하는 신성모가 싫지는 않았을 것이다.

 

Ⅳ. 남침 보고 이후 이승만의 전시활동

1. 이 대통령, 국무회의 소집, 무초 대사 연락, 손원일 제독 귀국지시, 남침보고 후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申性模) 국무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전황을 보고 받은 다음, 국무회의의 소집을 지시했다. 황규면(黃圭冕) 비서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 대통령은 신성모의 미지근한 전황보고와 대책에 화가 나자 이범석(李範奭) 전 총리와 허정(許政) 전 장관을 경무대에 들어오라고 했고, 이어 자신을 불러 “장관들에게 연락하여 빨리 경무대에 모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 후 이 대통령은 무초(John J. Muccio) 주한미국대사로 하여금 경무대로 들어오도록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무초에 대해서는 누가 연락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무초는 애치슨(Dean G. Acheson)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대통령과의 ‘약속에 따라(by appointment)’ 경무대를 방문했다고 했다. 실제로 무초대사는 경무대에 들어와 11:35분에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하고 전쟁 상황을 논의했다.

또한 이승만은 호놀룰루 총영사인 김용식(金溶植)에게, 미 본토에서 군함(patrol craft)을 구입해 하와이에 머물고 있는 손원일(孫元一) 해군총장에게 하와이에서 예정으로 체류할 군함(3척)들을 끌고 빨리 귀국하라고 지시했다.

손원일 해군총장은 미국에서 전투함을 구입하기 위해 해군장병과 국민들이 모든 성금 15,000달러와 이승만 대통령이 준 45,000달러를 가지고 미국에서 전투함을 구입했다.

이것을 알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남침보고를 받자마자, 당장 군함이 필요할 것을 생각하고 하와이에 1주일 예정으로 머무를 예정이던 군함을 빨리 출발시키라고 했던 것이다. 이때 호놀룰루에 있던 손원일 제독은, “군함과 함께 해로로 귀국하라.”는 훈령을 받고 무기를 장착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렇게 해서 7월 16일 진해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들 군함들은 대한해협 해전과 통영상륙작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한국 해군의 위신을 살렸다.

한편 11:00에 개최된 국무회의는 신성모 국무총리서리가 주재했다. 국무회의 회의참석자는 임병직 외무부장관, 백성욱 내무부장관, 김유택 재무부차관(최순주 재무부장관 출장), 이우익 법무부장관, 백낙준 문교부장관, 윤영선 농림부장관, 이병호 상공부차관(김훈 상공부장관 출장), 구영숙 보건부장관, 이윤영 사회부장관, 김석관 교통부장관, 장기영 체신부장관이었다. 이 회의에서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12:00시에 산회했다. 다음 국무회의는 대통령 주재로 경무대에서 14:00시에 다시 개최됐다.

 

2. 이 대통령, 무초 대사와의 회담 위한 준비, 신성모로부터 남침보고 받은 후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에 의해 국무회의가 열릴 때, 이 대통령은 무초 대사와의 회동을 위한 구상을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승만이 남침보고를 받은 후 11:35분에 있을 무초 대사와의 회동을 앞두고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3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그는 이 짧은 틈을 이용해 앞으로의 어떻게 대처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방안을 구상했다. 이승만의 구상은 무초와의 회담을 통해 밝혀졌고, 이는 향후 이승만이 수행할 전쟁지도의 틀 내지는 전쟁수행방식으로 나타났다.

이승만은 무초와의 회담을 앞둔 그 짧은 시간에 향후 대한민국 정부기 지향해야 될 전쟁지도 원칙을 세웠던 것이다. 아울러 지금 당장 전쟁에 필요한 시급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될 내용도 함께 구상했다.

이승만은 이를 위해 메모를 작성하여 무초와의 회담에 임했던 것 같다. 이승만의 능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어떤 참모의 조언도 없이 전쟁을 수행해 나갈 구상을 스스로 했던 지도자였다.

이때 이승만이 정리했던 내용은 회담 후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서울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전쟁 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한국군에게 부족한 탄약과 무기를 요청하고, 필요할 경우 모든 국민들이 참여하는 총력전을 전개하고, 전쟁목표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통일까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른바 이승만은 무초대사와의 회동을 통해 한국정부가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해야 될 일을 알려주고, 필요한 군사지원 등을 미국에 요청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3. 이승만, 주한미국대사 무초와 회담과 성과, 1950.6.25. 11:35

이승만은 경무대에서 무초(John J. Muccio) 미국대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때가 북한의 남침으로부터 약 7시간이 지난 뒤인 1950년 6월 25일 11:35분경이었다. 무초는 이승만과의 회담 결과를 이날 14:00시에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 하지만 회담이 언제 끝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회담내용을 정리하고, 경무대에서 미 대사관으로 복귀하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대략 30분에서 1시간 정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무초 대사는 경무대를 방문하기 전에 미 군사고문단(KMAG)과 한국 관리들을 만나 상황에 대해 협의하고 난후, 10:00시에 미 국무장관에게 “공격의 성격과 시작된 방식으로 보아 ‘대한민국에 대한 전면공격(all out offensive against ROK)’으로 판단된다.”라는 전문을 이미 보낸 다음이었다.

경무대에서 이승만과 무초의 대화는 대체로 두 가지로 대별됐다. 무초를 통해 미국의 지원을 요청하는 것과 대통령 자신과 한국정부가 앞으로 해야 될 일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대통령은 본인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를 무초 대사와의 회동 후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일단 14:00시에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본인이 주재하는 국무회의를 14시에 정확히 개최했다.

둘째, 이승만은 한국군에게 ‘더 많은 무기와 탄약(more arms and ammunitions)’이 필요한데, 그 중에서 소총이 더 필요하다면서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무초 대사는 이승만과의 회담이 끝난 후인 15:00시에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미 군사고문단은 도쿄의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한국군을 위한 특정탄약 10일분을 즉시 부산으로 보내 달라(to ship ten day supply of certain items of ammunition at once Pusan for Korean Army).”는 전문을 보냈다.

이때 요청한 긴급탄약은 105밀리 곡사포 90문, 60밀리 박격포 700문, 카빈소총 40,000정이었다. 이승만은 국군에게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무초대사나 맥아더 장군 그리고 미8군사령관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이승만의 이런 행보는 전쟁기간 내내 지속됐다.

셋째, 이승만은 서울에 계엄령(martial law) 선포를 고려하고 있고, 국민들에게 사실(남침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전쟁 당일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수행에 필요한 긴급조치들을 실시했다.

이승만은 일의 효율성을 따져 처리했다. 당시 정부 각 부처별로 전시에 필요한 긴급조치들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에게 부담을 주게 될 계엄령은 미군이 참전한 후 실시했다. 이는 일의 완급(緩急)과 일의 중요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계엄령을 선포하면 육군본부와 육군총장이 주체가 되어 계엄업무를 시행하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당시 전선의 급박한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하기에도 벅찬 상황에서 계엄령 선포에 따른 계엄업무는 전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7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되자, 7월 9일 육군본부는 계엄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예하부서로 민사부(民事部)를 설치했다.

이에 따라 헌병과 방첩대, 범죄수사대를 계엄사령부에 배속시켰고, 육군의 각 사단과 해군의 진해통제부 사령부에 민사과(民事課)를 두어 계엄업무를 수행했다. 그만큼 계엄업무에는 많은 인원과 노력 그리고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 이승만은 국민들에게 전쟁에 대한 사실과 이와 관련된 진행사실을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남침이후 정부에서는 국민들에게 전황보도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 예로, 전쟁당일 07:00시에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장이 중앙방송(KBS)을 통해 북한의 남침을 보도했고, 12:00시에 국방부 담화를 발표했다. 다음날인 26일 06:00시에는 무초 대사가 방송을 한데이어, 08:00시에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방송을 했다.

이들 방송내용은 대부분 북한이 남침을 했는데, 우리 국군이 선전을 하고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국군 제17연대 해주돌입’ 오보 방송과 ‘국군의정부 탈환 북진 중’이라는 방송을 하게 됐다. 그러다 27일 06:00시에는 정부수원이동을 발표했다가 시민들이 당황하자, 이후 다시 서울사수 방송을 하게 됐다.

이승만도 전황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신념하에 미국의 지원사실을 충남 대전에서 알게 되자, 곧바로 녹음방송을 통해 27일 22:00-23:00까지 3차례에 걸쳐 국민들에게 ‘미국의 지원이 있으니 안심하라.’는 요지의 라디오방송을 하게 됐다.

이때 이승만은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공중수송으로 군기(軍器)와 물자를 날라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라고 방송했다.

그러나 그때의 상황은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으로 당시 상황은 현실과 맞지 않았고, 그로부터 얼마 후 한강교가 폭파됨으로써 이승만에 대한 비난은 극치를 이루게 됐다.

하지만 이승만의 이런 행위는 국민들을 기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내용을 빨리 알려주어야겠다는 국민을 위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때도 이승만은 동포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을 통해 전황을 알려 동포들에게 희망을 줬던 적이 있다.

넷째. 이승만은 국가가 어려울 때 전 국민들이 나와 싸운다는 총력전을 피력했다. 즉 필요하다면 모든 남녀와 어린이끼지 막대기와 돌을 가지고라도 나와서 싸우라고 호소하겠다고 했다.

이승만은 이때부터 이미 총력전을 구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전쟁기간 우리는 군과 경찰뿐만 아니라 여군, 학도의용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소년병, 유격대, 노무자 등 전 국민들이 북한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다. 특히 대한민국이 가장 위기를 맞은 낙동강 전선에서 더욱 그랬다.

다섯째, 이승만은 그동안 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배경이 됐던 제2의 사라예보(Sarajevo)가 되지 않도록 노력해 왔다고 말하면서, 이 위기를 이용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한국의 통일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시 말해서 이승만은 이때 이미 확고한 전쟁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이승만은 지금의 위기가 한반도 문제를 항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best opportunity)'가 될 것으로 여겼다. 전쟁이 어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한반도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의 이런 신념과 목표는 전쟁초기 상황이 불리한 시점부터 시작하여 전쟁기간 내내 이어지면서, 38선 무용론, 38선 돌파명령, 국군의 단독의 북진통일을 외치며 한국을 도와주고 있는 미국을 압박했다. 이는 향후 이승만의 전쟁목표인 북진통일로 이어졌다.

이는 이승만이 전쟁을 가볍게 본 것이 아니라 이미 38선을 김일성이가 먼저 파기했으니 이 참에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그 출발점이 바로 전쟁 당일이었다.

회동이 끝날 무렵 무초대사는 이 대통령에게, “언제든지 불러 달라(available all day).”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그날 저녁 22:00시에 무초 대사를 경무대로 다시 불러 회동을 가졌고, 그 다음날 새벽 04:00시에는 전화를 걸어 미국의 지원을 촉구했다.

 

4. 대통령, 주미한국대사관에 전화(국무회의 직전), 6.25. 13:00경(미국 시각, 6.24, 24:00경)

이승만 대통령은 무초 미국대사와 회담을 마치고 나서 곧바로 국제전화로 주미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던 것 같다. 그때가 6월 25일, 13:00시쯤(워싱턴 시각, 6.24, 24시)이었다. 그렇게 보면 무초대사와의 회담은 약 13:00경에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1시간 30분 정도의 회담이었다. 무초의 전문내용으로 볼 때 그 정도의 회담시간이었다.

전화는 대사관의 한표욱 참사관이 받았다. 한표욱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이승만 대통령 목소리에 섞여 시끄러운 목소리가 함께 들려왔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한표욱 참사관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경무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는 것으로 알았다고 했다.

사실 그때는 경무대에서 긴급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이었다. 이승만은 무초와의 회동이 끝나고 국무회의가 열리기 전에, 미국의 지원을 위해 주미대사관에 급히 전화를 건 것이다.

이 대통령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표욱 참사관에게, “필립(한표욱 참사관의 별칭), 어떠냐. 저놈들이 쳐들어 왔어. 우리 국군은 용맹스럽게 싸우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격퇴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하든 미국의 원조가 시급히 도착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장(張) 대사 있느냐?”고 했다.

장면(張勉) 대사가 전화를 받자, 이 대통령은 한표욱 참사관에게 했던 것과 같은 요지의 지시를 다시 했다. 그리고서 이승만은 통화 말미에, “정일권(丁一權) 장군과 손원일(孫元一) 제독에게 빨리 귀국하도록 하라고 그래.”라고 당부했다. 그때 정일권과 손원일은 귀국하기 위해 하와이에 머물고 있었다.

이를 통보받은 정일권 준장은 6월 30일 일본을 거쳐 귀국해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에 임명됐고, 손원일 제독은 미국에서 구입한 구축함 3척을 인수하여 7월 중순에 귀국했다.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장면 대사는 25일 15:00시(워싱턴 시각 25일 01시)에 미 국무부를 방문하고 한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 때 미국은 “이 문제를 유엔에 제기하기 위해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했다”고 알려줬다.

 

5. 이 대통령, 경무대에서 첫 비상 국무회의 주재, 6.25.14:00~15:30

이승만 대통령은 장면 주미대사와 통화를 끝낸 후인 14:00시에 경무대에서 비상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이날 비상국무회의는 15:30분에 산회했다.

국무회의가 시작되자, 먼저 의정부전선의 전황을 살피고 돌아온 채병덕 총장이 전황을 보고했다. 채 총장은, “38선 전역에 걸쳐 40,000∽50,000명의 북괴군(北傀軍)이 94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불법남침을 개시하였으나, 각 지구의 국군부대는 적 전차를 격퇴하면서 적절하게 작전을 전개 중에 있다. 이러한 북괴의 침공은 그 간에 그들이 벌여 온 위장평화공세가 별다른 반응이 없음으로 조급하게 자행한 그들의 상투적인 수단으로 보며, 후방사단을 출동시켜 반격을 감행하면 능히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보고했다.

채 총장이 이렇게 보고한 데에는 13:35분에 평양의 라디오방송을 통해 발표된 김일성의 연설을 고려한 듯하다. 김일성은 “지금까지 남한은 평화통일을 위한 우리의 모든 제안을 거부해 왔으며, 옹진반도 해주의 북한군을 공격해 왔으므로, 그 결과 반격을 하게 됐다.”며 그들의 남침의도를 은폐했다. 이 문맥을 보면 김일성은 그들의 위장평화공세가 남한에 먹혀들지 않아 전쟁을 한 것처럼 위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채 총장의 보고에 대해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백낙준 문교부장관과 민복기 경무대 비서는 후일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즉 두 사람은 당시 채 총장이, “적의 남침은 전면남침이 아니라 공비두목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 같으며, 곧 남쪽 사단을 집중하여 적을 공격할 것이다.”라고 보고하였다며 상반한 주장을 내세우고 하고 있다.

남침 직후 3일간 신성모와 채병덕이 행한 발언과 참석자들의 증언과는 매번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이의 진위 여부에 따라 6·25전쟁에 대한 연구와 평가도 달라 질 것으로 보인다.

보고가 끝난 후 이 대통령은 〈비상사태하의 법령공포의 특례에 관한 건〉(대통령령 제377호)를 공포하여 라디오, 신문, 기타 적당한 방법으로 법령을 공포할 수 있도록 조치했고,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단에 관한 특별조치령〉(긴급명령 제1호)을 하달하여 반민족적이고 비인도적인 범죄자를 엄중 처단키로 하였다.

또한 적기의 공습에 대비하여 〈치안명령 제26호〉를 각 시도에 긴급 하달하여 통행금지시간 연장과 등화관제를 실시하도록 하고, 주요기관과 산업시설의 경비를 강화하도록 했다. 또 정부에서는 치안안정을 위해 각종 범죄를 자행할 경우 사형에서 20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는 발표를 했고, 교통부에서는 전시철도의 운행을 총괄하기 위해 전시수송본부를 설치하여 국방부에 중앙청에 연락관을 파견하여 군의 수송요청에 즉각 대응하도록 했고, 한국은행은 예금인출을 1인당 10만원으로 제한했다.

사회부는 피란민 수용소를 서울시에 지시해 6곳에 설치하도록 했고, 보건부는 서울시내 개업의와 간호사들에게 비상대기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점은 왜 헌법 제57조에 나와 있는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발동하면서도 헌법 제64조에 나와 있는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고 있다가 7월 8일에 계엄령을 선포했는가하는 점이다. 계엄법 제1조 및 제4조에 의하면 대통령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한 사변에 있어서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의 공식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때 이승만 대통령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 이유 밖에 없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 육군참모총장이 비상계엄령사령관이 되고 육군본부가 계엄령 실시의 주체가 비상계엄사령부를 운영해야 되는데, 당시 채 총장이나 육군본부의 능력으로는 전쟁을 지도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에서, 비상계엄령에 따른 편성이나 운영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6. 이 대통령 요청에 따라, 미 극동군사령부 막대한 양의 탄약 요청, 6.25.15:00

이승만 대통령과 회담 후 무초 대사는 25일 15:00시에 국무장관에게 다시 전문을 보냈다. 내용은 미 극동군사령관(CINCFE)에게 긴급전문을 보내서 한국군을 위한 특정 탄약 10일분을 즉시 부산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이다. 무초와의 회담에서 이승만은 “한국군이 가지고 있는 ‘탄약은 10일 이내에 떨어질 것(beout of ammunition within ten days)’”이라고 말했다. 무초는 이 말을 귀담아 들었다가 미 극동군사령부에 요청했다.

무초 대사는 한국군이 이 탄약을 조기에 수령하지 못하면 현재 수준의 전투가 계속될 경우 한국군의 얼마 안 되는 탄약은 10일 안에 소모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용감한 한국군이 탄약부족으로 붕괴되면 미국에게 큰 재난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실제로 무초 대사는 이 대통령과 회담 후 미 군사고문단의 우드(Walter G. Wood, Jr) 중령에게 지시하여 미 극동군사령부에 105밀리 포탄을 비롯한 박격포탄 그리고 소총실탄을 긴급요청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그날 즉시 맥아더 장군은 워커 장군에게 요코하마에 있던 군 수송선인 키드레이(Keathley)호에 105밀리포탄 105,000발, 81밀리 박격포탄 265,000발, 60밀리 박격포탄 89,000발, 소총실탄 2,480,000발을 적재하여 7월 1일까지 부산항에 도착하도록 지시했다. 이들 탄약은 국군이 7월 이후 지연작전을 수행하는데 매우 긴요하게 사용됐다.

 

7. 이승만 대통령, 미 극동군사령부에 F-51전투기 요청, 1950년 6월 25일 오후

6·25이전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전투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특히 미국은 전투기는 공격용무기라며 지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남침 다음날 미국은 한국공군에 10대의 F-51전투기 지원을 약속하고 한국공군의 조종사 10명을 일본의 미군기지로 데려가 훈련시킨 다음, 7월 2일 F-51전투기 10대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공중작전에 투입됐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미국은 한국에 전투기를 지원하게 됐을까?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단순히 그것은 아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요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승만의 노력으로 대한민국 공군은 전쟁 초기 F-51전투기 10대를 미군으로부터 인수받아 실전에 운용하게 됐다.

이러한 내용은 무초 대사의 전문과 국방부 및 공군본부에서 발행한 6·25전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무초 대사는 전쟁 당일인 이날 19:00시에 미 국무장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공군지원을 바라고 있다는 요지의 내용을 보고했다.

둘째, 국방부에서 1977년에 편찬한 『韓國戰爭史: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제1권(개정판)에 의하면, 6월 25일 오후에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은 전황이 위급하게 돌아가자 신성모 국방부장관에게,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미군으로부터 전투기를 지원받는 것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에 신성모 장관은 즉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황이 위급하다는 사실과 함께 전투기의 지원을 건의했다. 셋째, 공군본부에서 2002년에 발행한 『6·25전쟁 항공전사』를 보면, 이 대통령이 김정렬 총장의 보고를 받고, 무초 대사를 통해 미 극동군사령부에 전투기를 요청하자, 이를 수락하고 26일 오전에 전투기지원에 대한 협의를 하기 위해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담당참모가 수원기지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넷째, 1951년 국방부에서 발행한 『한국전란1년지』에는 맥아더 원수가 6월 26일에, “한국에 무스탕(F-51) 전투기 10대의 인도(引導)를 발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온 미군 참모는 김정렬 공군총장에게, “한국공군 조종사 가운데 F-51전투기를 훈련 없이 전투할 수 있는 조종사가 몇 명이 되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김 총장은 여러 가지를 고려한 후, “10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자 미군 참모가 즉석에서, “그러면 10대를 지원해 줄 테니 10명을 수원기지에 대기해 달라. 그러면 일본으로 가서 수송기를 보내겠다.”고 했다.

김정렬 공군총장은 여의도 기지로 돌아와 비행단장 이근석(李根晳, 전사, 공군준장 추서) 대령과 이에 대해 협의한 후, 비행경험이 많고 T-6기를 타던 이근석 단장을 비롯하여 김영환(金英煥, 공군준장 추서) 중령, 장성환(張盛煥, 공군총장역임) 중령, 김신(金信, 공군총장 역임) 대위, 박희동(朴熙東) 대위, 강호륜(姜鎬倫) 대위, 장동출(張東出) 중위, 정영진(丁永鎭) 중위, 김성룡(金成龍, 공군총장 역임) 중위, 이상수(李相垂) 중위 등 10명을 선발했다.

이들 10명의 조종사들은 26일 19:00시에 수원기지에서 미 C-47수송기에 탑승하여 21:00시에 일본 큐슈(九州)에 있는 이타즈케(板付, 현재 후쿠오카 공항)미군기지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F-51전투기 비행훈련을 받았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 조종사들은 개인당 30∼60분 정도의 훈련만 받고, 조국의 전선 상황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7월 2일 오전에 F-51전투기 10대를 각각 비행하여 대구비행장으로 돌아왔다.

이때 비행단장 이근석 대령은 “전황이 불리한 이 때에 우리가 전투기를 가지고 하루빨리 귀국하여 적을 공격하여야겠다. 우리가 좋은 전투기를 가지고 이곳에서 훈련만 받고 있으면 뭐하겠느냐?”라며 미군기지사령관에게 귀국을 요청함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때 우리 공군에서는 F-51전투기를 정비할 수 있는 수준이 못되었음으로 미 극동공군사령부에서는 딘 헤스(Dean E. Hess), 공군대령 예편) 소령을 비롯한 조종사 4명과 정비사 10여명을 함께 보냈다.

‘한국고아들의 아버지’로 유명한 전송가(戰頌歌, Battle Hymn)의 주인공 딘 헤스 소령은 남침 후 한국에 온 최초의 미군 조종사이자 한국공군의 고문관 역할을 했다. 한국공군조종사들이 조종하는 F-51전투기들은 도착한 다음날인 7월 3일부터 안양-시흥지역에 대한 공중지원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8. 이 대통령, 무초 대사에게 전화 및 2차 회동, 6.25.22:00∼미정

이승만은 6월 25일 22:00시에 무초 미국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경무대에 들어오라고 했다. 이때 무초대사는 대사관에 와 있던 신성모 총리서리와 함께 들어갔는데, 들어가보니 경무대에슨 이범석 전 국무총리가 있어 자리를 함께 했다.

이른바 이승만·신성모·이범석·무초의 4자회담이 열린 것이다. 하지만 발언은 주로 이승만과 무초가 했다. 무초는 그날 밤 있었던 이승만과의 회담 결과를 6월 25일 24:00시에 미 국무장관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

이승만은 왜 이때 무초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경무대로 오라고 했을까? 여기에 이승만 특유의 압박 외교술인 ‘밀고 당기는 전법’이라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이승만은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워싱턴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이른바 ‘충격요법’을 쓴 것이다. 마음에도 없는 서울천도를 내비친 것이다.

미국이 과연 한국을 도울 마음이 있는지, 도우려고 하면 빨리 도우라는 메시지가 담긴 고도의 이승만식의 ‘압박전술’이었다. 이승만은 전쟁기간 또는 재임기간 내내 이러한 압박전술 내지는 ‘벼랑끝 전술’을 자주 상용했다. 겉으로는 무모하게 보이지만 내심으로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전략이었다.

이날 이승만은 무초를 불러 ‘서울 천도’를 내세웠다. 당시 전황이 밀리고 있기는 했지만 정부를 옮길 정도로 급박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승만은 무초와의 회담 서두에, “내각(Cabinet) 은 오늘밤 정부를 대전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고 하면서, 그것이 개인적인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부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면 나라의 장래에 큰 타격이 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되풀이 말했다.” 무초는 이를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급히 타전했다.

이승만의 전략에 무초가 넘어간 것을 알 수 있다. 무초는 이런 이승만에게, “정부가 서울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고, 그래야만 무기와 군대를 얻을 수 있고, 바주카와 대전차포, 지뢰 같은 것으로 탱크를 저지해야 한다.”했다. 또 무초는 “정부가 서울을 떠나면 전투는 대부분 패배할 것이고, 한국의 상황이 와해되면 다시 통합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때 이승만은 동석했던 신성모 국무총리서리에게조차 이를 귀띔해 주지 않았다. 적을 속이려거든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을 적용했음이다. 실제로 신성모는 이 대통령의 서울천도에 놀랐던지, 경무대 밖으로 무초를 끌고나가 다음, 서울천도는 “대통령이 자기와 협의하지 않고 정부를 이전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승만의 전략은 맞아 떨어졌다. 이승만은 미국이 이제까지 한국지원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자 이를 압박하기 위한 이승만 특유의 심리전략이었다. 실제로 이승만은 25일 밤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미국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떠보기 위한 이승만 특유의 행동이었다.

이에 대해 온창일 교수는, 당시 이승만의 이런 발언은 ‘서울 천도’를 내세워 미국의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 위한 외교적 제스처로 여겨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승만은 무초와의 대화 중간에 갑자기 박흥식(화신산업 소유주)의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이승만은 무초에게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무기구입에 1,000만 달러 정도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고, 부유한 박흥식이 무기구입비로 100만 달러를 내겠다고 제의했지만 이제는 너무 늦었다.”고 말하면서, 미국의 더딘 군사지원을 책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살펴 볼 때 이승만의 서울천도는 처음부터 미국의 한국지원에 대한 행동을 떠보기 위한 고도의 책략이었음을 알 수 있다.

 

9.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로 대포 및 전투기 지원 요청, 6.26.03:00

무초와의 회담이 끝난 후, 이승만은 25일 밤을 앉은 채로 꼬박 세웠다. 경무대 비서들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북한 야크기는 이날 밤에도 서울 상공을 선회했고, 그때마다 공습경보가 요란하게 울렸다.

프란체스카 여사도 일기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대통령은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승만은 26일 03:00시에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에서의 전쟁 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전화를 했다. 프란체스카는 당시의 상황을 자신의 영문일기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26일 새벽 3시, 대통령은 동경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며 고함을 쳤다.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 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란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맥아더 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전화를 바꾸자 대통령은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 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바로 동경 극동군사령부의 무기담당 히키(Hicky) 장군에게 명해 무스탕전투기 10대, 105밀리 곡사포 36문, 155밀리 곡사포 36문, 그리고 바주카포를 긴급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대통령은 조종사 10명을 보내 단기훈련을 받고 나서 무스탕 기를 몰고 오게 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10. 무초 대사에게 전화로 대포와 전투기 지원 요청, 6.26.04:30

무초 대사에 의하면, 이승만은 26일 04:30분에 자신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전화에서 이승만은, “극동군사령관(맥아더)과 참모장(알먼드)에게 한국군에게 필요한 전투기와 탄약 등을 요청하려고 전화했는데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무초 대사는 이승만과의 전화통화 내용을 정리하여 6월 26일 05:00시에 애치슨 미 국무장관과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알리고 신속한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무초 대사는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전문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아직 서울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방금 전화를 걸어 맥아더 장군이나 그의 참모장과 통화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맥아더나 알먼드에게 폭탄을 실은 F-51전투기 10대와 바주카를 한국군 조종사들이 이륙준비를 하고 있는 대구로 보내 달라는 긴급요청을 하려고 했다.”고 했는데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승만은 무초에게, “그들[한국조종사들]이 새벽 전에 이곳에 도착해야 되며, 그 항공기가 새벽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북한군의 공격에 대항하기가 극히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이승만은 무초에게, “105밀리 야포 36문과 75밀리 대전차포 36문, 155밀리 야포 36문을 원한다.”고 했다.”

여기서 프란체스카의 일기와 무초 대사의 전문 사이에는 내용이 약간 상이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통화를 했는가하는 문제이다. 프란체스카는 맥아더와 통화를 했다고 했고, 무초 대사는 이 대통령이 자신에게 전화를 해서 맥아더와 그의 참모장이 전화를 받지 않아, 자신에게 전화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 중 누군가의 착각일 수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승만이 그 시간(새벽 3시)에 맥아더사령부에 전화를 했고, 맥아더사령부터 대포, 바주카포, 전투기 10대를 지원받았으니 말이다. 무기지원 사실에 대해서는 프란체스카의 일기와 무초 대사의 전문 내용이 무기종류와 수량까지 정학하게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전화했던 목적이 모두 이루어졌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전화통화 내용은 맥아더에게 정확히 전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11. 이 대통령, 내무부 치안국 방문, 6.26일 아침

이승만은 6월 26일 아침, 내무부 치안국(治安局)을 방문해 경찰계통으로 들어온 전선 상황을 알아보고 돌아갔다. 당시 전선 상황은 더욱 복잡해지고 피난민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은 그러한 내용을 인지해서인지 전선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리고 앞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대책을 세우기 위해 경무대에서 가까운 치안국을 방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12. 이 대통령 특명(特命)으로 군사경력자 회의와 한강방어선 논의, 6.26, 10:00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부장관에게, “군사경력자들의 자문을 받아 난국을 타개하라.”는 특명을 받고 26일 10:00시에 국방부로 긴급히 현역 및 재야 원로급 군사경력자들 초청했다. 이 대통령의 군사경력자 자문 지시는 25일 22:00시 이후에 시작된 무초와의 회담이 끝날 무렵, 신성모 총리서리에게, “‘군에 관한 지식을 가진 유능한 사람 몇 명(several capable men with military knowledge)’을 모아 상황을 토의하고 적절한 조치를 결정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참석자들로는, 신성모 장관을 비롯하여 채병덕(蔡秉德) 육군총장, 김정렬(金貞烈) 공군총장, 김영철(金永哲) 해군총장 대리(손원일 해군 구축함 도입 후 하와이 체류 중), 김홍일(金弘壹) 소장, 송호성(宋虎聲) 준장, 전 통위부장 유동열(柳東悅), 전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전 광복군사령관 지청천(池靑天), 전 1사단장 김석원(金錫源) 예비역 준장 등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신성모 장관과 채병덕 육군총장은, “현재 군은 의정부에서 북괴군을 반격하고 있으며, 전황은 유리하게 진전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김홍일 소장은 작전지도 방침의 확립을 강조하는 한편, 의정부 정면에서의 공세이전을 위험시하고 한강 이남에서의 결정을 주장했다.

김홍일 소장은, “작전지도 방침을 확립하는 것이 급무(急務)이며, 결전을 기도한다면 어느 선에서 어느 병력을 집중하느냐, 지연작전을 취한다면 어디까지 철수하느냘ㄹ 조급(早急)히 결정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때 이범석 전 총리와 김석원 장군이 김홍일 장군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현 현강선 방어 이외에는 승산이 없음을 강력히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 장관이나 채 총장의 주장을 꺾지 못하고 짧은 시간 내에 회의는 폐회됐다.

결국 서울이 6월 28일 함락되자, 채병덕 총장은 지체없이 한강방어선에서 북한군을 막기로 하고, 이를 위해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한 후 사령관에 김홍일 육군소장을 임명함으로써 성공적인 한강방어를 치를 수 있게 됐다.

당시 미 군사고문단은 3일만 버티어주면 된다고 했으나, 김홍일 장군은 7월 3일까지, 그 두 배가 되는 6일간을 버텨냄으로써 미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의 한강선 시찰과 이로 인한 미 지상군 및 유엔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됐다.

따라서 이승만의 지시로 긴급히 이루어진 군사경력자회의는 차후 한강선 방어작전을 수행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됐다.

 

13. 이 대통령, 제6차 국회본회의 참석, 6.26.11:00∽13:00

전쟁 당일에 개최되지 못한 국회가 26일 11:00시에 신익희 의장의 사회로 제6차 본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전 국무위원을 출석시켜 사태수습을 위한 방책을 논의했으나, 정부 당국조차 사태의 진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여 구체적인 논의도 하지 못하고 산회했다.

하지만 국회가 아무일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제6차 본회의에서는 국방장관과 내무장관 그리고 육군총장으로부터 전황을 설명 듣고, 〈비상시국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산에 구애됨이 없이 군사비지출을 위한 권한을 정부에 위임한다. 둘째, 유엔과 미 의회 그리고 미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셋째, 38선 지역에서 전투중인 군경과 주민을 격려하기 위해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위문단을 파견한다. 넷째, 대미 무기대책위원회를 국회에 구성한다. 다섯째, 물심양면으로 행정부에 호응하는 동시에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여 국가의 안정을 기한다.

이와 같이 결의한 국회는 13:00시에 정회했다가, 14:00시에 장택상 부의장의 사회로 비밀회의를 열어 유엔과 미 의회 그리고 미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대미 무기구입대책위원회 조직안을 채택하여 가결한 다음 16:00시에 산회했다.

 

14.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 6.26, 14:00∼미정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에 출석한 다음, 26일 14:00시에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하고, 전황을 보고 들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프란체스카의 일기에도 14:00시에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 대통령의 육군본부 방문에 대해 당시 연합신문의 이지웅(李志雄) 기자는 자신이 그날 날이 어두워질 무렵 육군본부에 들렀더니, “이 대통령이 격려를 하고 가셨다며, [장병들의] 사기가 올라있는 것 같았고,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한편 대통령이 육군본부에 들러 전황보고를 받고 경무대로 돌아올 때 서울 상공에는 적의 야크기가 맴돌고 있었다고 했다. 적기가 나타날 때 마다 이승만과 프란체스카는 방공호로 피신해야 했다.

 

15. 대통령 피난 문제 1차 제기, 6.26. 16:00

6월 26일 13:00시경 서울의 관문인 의정부가 함락된 이후 대통령의 피난문제가 나왔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이는 전황 보고가 뒤죽박죽인데다 신 장관의 “계속 걱정하실 것 없다”는 말로 사태를 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6:00시경 프란체스카 여사는 비서들에게 기밀서류를 챙기게 한 뒤 자신이 교통부장관에게 특별열차를 대기하도록 했다.

그런데 신성모 장관이 경무대로 들어와서 “각하 별 일 없습니다. 사태는 호전돼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프란체스카는 피난준비를 취소시켰다. 이승만도 내일 아침(27일) 국무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자 비서들이 피난열차를 대기하도록 교통부장관에게 연락했다.

 

16. 김태선 서울시경국장, 대통령에게 피란 건의, 6.26.21:00

6월 26일 21:00시에 김태선 서울시경국장이 경무대에 들어와 “서대문형무소에 수 천 명의 공산분자들이 갇혀 있습니다. 그들이 탈옥한다면 인왕산(仁旺山)을 넘어 제일 먼저 여기로 옵니다. 각하께서 일시 피난하셔서 이 전쟁의 전반을 지도하셔야 합니다.”라고 보고했다.

무초 대사도 26일 23:00에 국무장관에게, “모든 징후로 보아 상황이 너무 급속히 악화되고 있고, 특히 애스콤(ASCOM)과 김포지역의 전투상황으로 보아 우리가 탈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긴급전문을 보냈다.

 

17. 이 대통령, 장면 대사에게 트루먼 만날 것을 지시, 6.27,01:00(워싱턴 시각 6.26.12:00)

이승만은 6월 27일 01:00시경에 주미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이때는 경무대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한표욱 참사관이 전화를 받았다. 한표욱 참사관은 “이때 대통령의 목소리는 지난번과는 달리 확연히 떨리는 기색이었고, 흥분을 감추려고 노력하는 듯 했다.”고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한 참사관에게, “필립, 일이 맹랑하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 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긴 하나 모자라는 게 너무 많다. 즉각 장(張) 대사를 모시고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군사원조의 시급함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대통령은 장 대사와 통화를 했다. 장 대사에게도, “우리 국민들은 잘 싸우고 있지만 무기가 없어서 큰 걱정이다. 제일 필요한 것이 탱크다. 그러니 빨리 탱크를 보내도록 주선하라.”고 지시했다.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한표욱 참사관은 국무부의 한국담당 나일스 본드(Niles Bond)에게 전화를 걸어 트루먼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그날 27일 04:00시(워싱턴 시각 26일 15:00시)에 백악관에서 장면 대사는 트루먼과 회동했다.

장 대사는 먼저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내용을 전달했다. 이때 트루먼은 자신만만한 태도로, “한국정부, 국민, 국군이 용감하게 싸우고 있으며, 국민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미국 독립전쟁 때 독립군이 무기, 식량난에 어려움이 겪고 낙담하고 있을 때, 프랑스의 라파예트 장군이 우리를 도와준 적이 있다. 또 1917년 유럽 제국이 독일의 침공을 받아 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을 때, 미국은 그 지원에 나선 적이 있다.”고 했다.

이어 트루먼은 장 대사에게, “대한민국에 상당한 무기와 탄약을 수송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이 장비는 곧 [한국의] 군사상황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알려줬다. 이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지원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을 의미했다.

 

18. 이 대통령,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 6.27,01:00 이후

주미대사관을 전화를 걸고 난 후 이승만은 다시 맥아더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민복기 비서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전화를 받은 맥아더 보좌관이 원수는 지금 자고 있다고 대답하자, “우리는 지금 잘 싸우고 있으나 무기가 없다. 그러니 탱크를 빨리 보내라. 만일에 당신들이 아니 도와줄 것 같으면 여기 미국사람들도 완전치 못할 것이라고 흥분된 어조로 말씀하시자,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통령의 입을 막으시는 것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런 후 이승만 대통령은 03:00시에 경무대를 떠났다고 했다.


19. 비상국무회의 개최와 신성모·조병옥·이기붕, 대통령에게 피란건의, 6.27.02:00

이승만이 비상 국무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경무대 대기실에서 주미대사관과 맥아더 원수에게 전화를 걸고 나자, 국무회의에 참석했던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 겸 국방장관과 이기붕 서울시장 그리고 조병옥 박사가 들어와서, “각하, 사태가 여간 급박하지 않습니다. 빨리 피하셔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이승만은 “날보고 서울을 버리고 떠나란 말인가? 서울시민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고 말했다.

조병옥은 프란체스카 여사와 비서들에게 “각하의 고집을 꺾어야 합니다. 빨리 서둘러 피난을 보내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안 돼! 서울을 사수해! 나는 떠날 수 없어!”아며 요지부동이었다.

이때 프란체스카가 “지금 같은 형편에서는 국가원수에게 불행한 일이 생기면 더 큰 혼란이 일어날 거라고 염려들 합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민국의 존속이 어렵게 된답니다. 일단 수원까지만 내려갔다가 올라 오는게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에 이승만은 “뭐야! 누가 마미한테 그런 소릴 하던가? 캡틴 신(신성모)이야, 아니면 치프 조(조병옥)야, 장(장택상)이야, 아니면 만송(이기붕)이야, 나는 안 떠나.”리며 역정을 냈다. 그러다 대통령은 전선 상황이 위급하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돌리게 됐다.


20. 이승만 대통령, 북한군 전차 서울진입 보고에 경무대 출발, 6.27.03:00

북한군 전차가 청량리까지 들어왔다는 경찰보고와 서대문형무소가 무너지면 경무대가 위험하다는 김태선 치안국장의 말에 이승만도 할 수 없이 03:00시 경무대를 출발하여 서울역으로 가게 됐다.

당시 청량리에서 경무대까지는 4km도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다. 또 창동까지 진출한 적의 포병사거리(11km)로는 경무대를 충분히 타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북한군이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을 생포할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거리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여기에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북한의 공습이었다. 북한군 전투기들은 6월 26일부터 용산 일대의 군 시설과 여의도 및 김포비행장은 물론이고, 대통령이 있는 경무대를 비롯하여 중앙청 일대에까지 기총소사를 하며, 항복을 권유하는 전단까지 살포했다. 이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도 방공호로 피신했다.

더구나 당시 서대문형무소에는 좌익사범을 포함한 7,000여명의 죄수가 수감되어 있었고, 마포구 공덕동에 있는 마포형무소에도 3,500여명의 죄수가 있었고, 그곳에서 가까운 영등포구 양평동에 위치한 영등포형무소에도 많은 재소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이 탈옥하여 경무대로 몰려든다면 상황은 대통령의 신변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할 때 이 대통령의 피란결정은 적절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역에 도착한 대통령 일행은 타고 갈 기차의 기관사를 찾느라 지체하다가 04:00시에야 비로소 서울역을 출발했다.

이때 황규면 비서는 대통령이, “내가 서울 시민들하고 같이 죽더라도 남아서 싸워야 할 텐데…, 그러나 내가 잡힐 것 같으면 다 되는 거야.”라며 혼자말로 자문자답하는 것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남침 이후 이승만의 길고 3일간의 여정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동안의 한 숨도 못자고 긴요한 일들을 처리했다. 기차를 타자 긴장이 풀린 대통령은 그동안의 피로가 겹쳐 잠시 눈을 붙이게 됐다.

그리고 대구까지 내려갔다가 기차를 다시 돌려 대전으로 올라와 그곳에서 전쟁을 지도하게 됐다. 대구역에 도착하자, 이 대통령은 “내 평생 처음으로 판단을 잘못 했어.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라며 침통해 했다.

그런 후 대통령은 바로 열차를 돌리게 한 다음, 조재천(曺在千) 경북지사와 유승렬(劉升烈) 제3사단장을 불러, “국민들을 격려해서 한 뭉치가 되어 공산당을 물리치게. 나는 올라갈 테니 그쯤 알고 잘들 하게.”하고 말하고 대전으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가려다가 대전에 머무르게 된 것은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E. F. Drumright) 참사관이 이 대통령에게, 유엔안보리에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한 경위와 그 결과로 얻어진 유엔안보리의 결의, 그리고 미국의 공식적인 태도를 밝히면서, 이제는 각하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들의 전쟁이다(This is not your war but ours)."라고 말하자, 생기를 되찾고 충남지사 관사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무초 대사는 이 대통령의 피란사실을 두 차례에 걸쳐 미 국무장관에게 보고했다. 첫 번째 전문은 6월 27일 06:00에 서울에서 발송한 것으로, “대통령과 대부분의 각료가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갔다.”는 내용이고, 두 번째 전문은 2시간 후인 08:00에 발송한 것으로, “07:00시에 신성모 총리서리가 자신(무초)을 찾아와 대통령이 03:00시에 진해로 떠났고, 각료들은07:00시에 남쪽으로 출발했으며, 모두 특별열차로 이동했다.”는 내용이었다.

 

Ⅴ. 맺음말

남침 이후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은 가히 드라마틱하면서 대통령으로서 국가원수로서 통수권자로서 해야 될 일을 정확히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남침이후 3일간은 75세의 노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누구도 도움도 없이 짜여 진 이승만의 3일(72시간)의 행적은 완벽, 그 자체였다.

최고의 참모진도 그와 같은 매뉴얼을 작성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런 매뉴얼이 작성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벅찬 업무였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그것을 완벽하게 해냈다. 국가지도자로서 그의 위대성이 덧보이는 대목이다.

6월 25일 10:00시, 남침상황을 보고받은 직후, 이승만은 곧바로 하와이에 머물던 구축함 3척에 대한 신속한 귀국지시(11:00시경)를 시작으로 무초대사와의 회동(11:35), 주미대사관 전화(미국지원 요청, 13:00), 긴급국무회의(14:00), 미국에게 무기와 탄약지원 요청(오후), 미 극동군사령부에 전투기지원 요청(오후), 무초대사와의 회동(22:00이후), 신성모에게 군사경력자회의 지시(22:00시 이후) 등이다.

그의 행보에는 계속된다. 전쟁 다음날인 6월 26일에는 새벽부터 맥아더장군에게 전화(03:00), 무초대사에게 전화(04:30), 내무부 치안국 방문(아침), 대통령 지시로 군사경력자회의 개최(10:00), 국회본회의 참석(11;00-13:00),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 방문(14:00), 서울 시경국장 피란건의(21:00), 주미대사관 전화(27일, 01:00이후), 맥아더에게 전화(주미대사관 전화이후), 신성모와 조병옥 등 피란건의(02:00), 경찰의 청량리 적 전차 진입보고에 따른 경무대 출발(03:00), 서울역 출발(04:00) 등이다.

남침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국가위기 해결을 위한 국가안보시스템이나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당시 미국의 대통령처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나 중앙정보국 그리고 미 국방부 및 합동참본보부로부터 전쟁 상황을 보고받고, 이에 대한 대책을 건의 받아 전쟁을 지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지식과 경험 그리고 오로지 자신의 판단력에 의존해 전쟁을 지도해 나갔다.

당시 대한민국에는 전쟁 상황을 논의하고 대책을 협의할 국가안전보장회의도 없었고, 정보를 수집하고 정책판단에 도움을 줄 중앙정보국도 없었으며, 작전을 직접 지도하고 수행할 군사지휘본부 역할을 수행할 합동참모본부(JCS)도 없었다.

그렇다고 북한군의 전차와 전투기에 맞설, 전투력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는 건국한지 2년도 채 안되었고, 미국의 소극적인 대한정책과 국군에 대한 방어용 군대 육성전략에 따른 미국의 전략적 이해로 인해 생긴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상황을 보고 받은 후 침착하게 전쟁에 도움이 될 일들을 찾아 우선순위에 입각하여 전시 국사(國事)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이승만 자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전시 국사를 처리하는데 있어 이승만은 두 가지 원칙하에 행동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우선 대통령과 자신과 정부 그리고 군이 해야 될 일을 정하고, 그것부터 처리해 나갔다.

그 다음에는 전쟁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미국에게 알리고, 그 다음부터는 미국으로부터 그것을 얻어내는데 주력했다. 대신 순수한 군사작전에 관한 사항은 군부에 일임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밀고 당기는 압박전술을 구사했다. 대신 도움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철저히 수행했다.

이승만은 남침보고를 받고, 북한의 전면공격임을 인식했고, 이에 따라 먼저 하와이에 있는 해군 구축함(3척)을 빨리 귀국하도록 지시했고(호놀룰루총영사, 장면대사), 대한민국의 전쟁지도방침(전황보도·계엄령선포·총력전·통일기회)과 미국의 지원(무기·탄약·전투기)을 얻기 위해 무초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알렸고, 이후에는 이러한 지도방침 하에 전쟁을 지도해 나갔다.

이승만은 미국의 지원이 시원치 않자, 서울천도를 내세워 압박해 미국으로부터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신속히 얻어냈고, 또 전투에 절대 필요한 전투기(F-51)를 요청해 이를 획득했다. 이는 모두 남침직후 3일 만에 이루어낸 성과였다.

또한 이승만은 그 바쁜 와중에도 육군본부와 치안국 상황실을 방문하여 전황을 점검하고 이에 따른 대책마련과 조치를 취해 나가는 전시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군사작전의 방침을 위해 군사경력자회의를 지시하여 군사적 해결을 위한 지혜를 모으도록 조치했다.

그 결과 서울함락 이후 신속한 한강선방어작전이 실행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순수한 군사작전에 대해서는 국방부장관과 각 군 총장에게 일임하여 군사작전에 혼선이 오지 않도록 스스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수행해 나갈 전쟁목표로서 한반도의 문제의 항구적인 해결을 위한 절호의 기회, 즉 한반도 통일을 결심했다. 이승만은 전쟁수행을 위한 방안으로서 한국국민들은 돌멩이라도 들고 나와 싸운다는 총력전 태세를 이미 결심하고 이를 실천할 의지를 내보였다.

이는 6·25전쟁이 전쟁기간 어린이와 노인만 제외한 총력전이었다는 것이 입증하고 있다. 전쟁에는 학도의용군, 여군, 경찰, 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노무자 등으로 참전하여 공산주의와 싸웠다.

나아가 미국의 지원에 대해서는 전 국민들에게 신속히 알리겠다고 하면서 미국의 신속한 지원을 압박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무초 대사를 먼저 불러 대한민국의 입장을 알리고,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고, 주미 한국대사를 통해 백악관과 국무부를 통해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이 이루어지도록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이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의 특유의 대미 압박전술과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며 한국이 필요한 것을 얻어냈다. 이른바 한미상호방위조약, 국군전력증강, 경제지원 등이 그것이다.

이승만은 긴급국무회의를 통해 긴급조치령을 발령하여 보도통제와 전시 범죄자 처단에 대한 조치를 취하여 전시치안에 힘썼다. 그 때문인지 이승만은 무초 대사에게 언급했던 계엄령은 실시하지 않았다, 이는 당시 긴박한 전황을 고려하여 계엄의 주체가 될 육군본부의 업무부담을 줄이기 위한 고려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는 계엄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데다 대통령의 긴급조치령으로 비상계엄이 그렇게 시급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는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군에게 부담만 줄 뿐이었다. 이승만은 격식을 따지지 않고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했다.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이승만의 3일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크게 4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첫째, 대미외교를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무기지원과 미국의 참전을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먼저 무초 주한미국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미국의 의중을 떠 본 후 대통령 자신의 전쟁에 대한 인식과 향후 대한민국이 어떻게 이 전쟁을 수행해야 할 것인지를 명확히 밝혔다.

또한 주미 한국대사관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얻도록 확실한 지침을 내려 이를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결국 미국은 장면 대사를 유엔안보리에서 한국의 입장을 밝힐 연설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고,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을 넌지시 시사했다.

둘째, 국무회의를 통해 전황을 파악하고 정부가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를 강구했다. 아울러 군사경력자들로부터 현재 난국을 타개할 것을 지시함으로써 서울함락이후 한강방어선을 수행할 수 있는 지혜를 모을 수 있었다.

셋째, 해군의 전투함이 빨리 귀국할 수 있도록 신속히 조치했고,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를 조기에 지원받아 대한민국 공군을 확보해 지상전투를 지원할 수 있게 했다.

넷째, 국군에게 부족한 탄약과 장비 그리고 무기를 조기에 요청하여 지연작전시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다섯째, 육군본부와 치안국을 방문하여 전황을 점검한 후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결정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남침 직후 대통령으로서 국가원수로서 그리고 국군통수권자로서의 활동은 매우 적절했으며, 반드시 해야 될 일을 정확히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미국의 명문대학을 나온 석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국가지도로서의 품위를 잃지 않은 역량 있는 전시 국가지도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3일간의 전시활동은 대한민국이 향후 전쟁을 수행하는 전시 국정지침이 됐고, 이 틀 안에서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은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3일간의 행적에 대한 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니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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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다수 2015-07-06 19:47:53
대단한 분량의 리서치 입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웃기네 2015-06-25 19:08:11
ㅋㅋㅋ 내가 이걸 왜 읽고 있지?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