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스탈린과의 전쟁 개시
히틀러, 스탈린과의 전쟁 개시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6.22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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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41년 6월 22일 역사 속의 오늘

1940년 6월 22일은 바로 1년 전, 프랑스가 기갑부대를 앞세운 독일군의 전격전(電擊戰)에 힘 한 번 못쓰고 붕괴되어 개전 6주 만에 항복한 날이다.

1년 후인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히틀러는 스탈린과 맺은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바르바로사 작전’이라 명명된 작전계획에 의해 소련을 침공했다. 

소련 침공에 동원된 병력은 보병 300만 명, 전차 3580대, 야포 7184문, 항공기 1830대, 말 75만 마리였다.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될 때 세계는 숨을 멈출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에 의하면 1941년 6월 22일 소련 침공을 시작하여 그 해 12월까지 소련군 주력을 섬멸하고 볼가강에서 아르한겔스크에 이르는 소비에트 연방의 유럽 부분을 정복한다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침공 작전을 구상하면서 각각의 전역(戰域)에 색깔 이름을 붙였는데, 예를 들어 폴란드 침공은 ‘백색 작전’, 프랑스 침공은 ‘황색 작전’ 등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히틀러는 소련 침공작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인 바르바로사(붉은 수염)라는 명칭을 붙였다.

일설에 의하면 ‘붉은 수염’은 스탈린을 암시하는 뜻이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바르바로사’라는 작전명에는 불길한 암시가 숨겨져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가 1190년 십자군 원정대를 이끌던 중 강에 빠져 익사했기 때문이다.

독일군이 소련 영토로 물밀 듯 침략해 오자 스탈린은 7월 3일 전쟁 준비를 촉구하며 다음과 같이 대국민연설을 했다.

▲ 히틀러는 소련을 섬멸하겠다는 야심찬 욕망을 가지고 나치군의 소련 침략을 결정했다. 사진은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파괴된 소련의 군용기의 모습.

“동무들! 인민여러분! 형제, 자매들이여! 육군, 해군 장병들이여! 동지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배신자 히틀러의 독일 군대가 6월 22일 우리의 조국을 침공한 이래 지금도 그들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독일 파시스트 군대는 허풍쟁이 파시스트 선동가들이 끊임없이 떠벌리는 말처럼 정말 무적의 군대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무적의 군대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히틀러의 독일 군대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은 잔인하고 무자비합니다. 적은 우리가 땀 흘려 이룩한 우리의 영토를 빼앗고, 우리의 노동으로 가꾼 곡식과 농토를 빼앗으러 왔습니다. 적은 지주 지배를 부활시키며, 우리 민족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왔습니다. 소비에트 연방의 국민들은 적에 대항하여 일어나 자신의 권리와 영토를 수호해야 합니다.

붉은 군대, 붉은 해군,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시민들은 소비에트 땅을 단 한 뼘도 빼앗기지 말고 지켜야 하며, 우리의 도시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말고 싸워야 하며 우리 민족이 대대로 물려받은 과감성과 지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붉은 군대가 불가피하게 퇴각하는 경우, 모든 철도 차량은 철거되어야 합니다. 적에게 단 한 대의 기관차도, 단 한 대의 화차도, 단 한 파운드의 곡식도 일 갤런의 연료도 남겨주어서는 안됩니다”

 

영국 작전 실패하자 동쪽으로 눈 돌려

절대로 한 편이 될 수 없을 것으로 믿었던 두 폭군 히틀러와 스탈린은 1939년 폴란드 침공 직전, 거짓말처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말하자면 악(惡)과 거악(巨惡)이 친구가 되었으니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게르만 민족과 아리아인을 위한 거주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소련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을 이미 밝힌 바 있다. 

자신의 야심을 숨김없이 드러낸 히틀러가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언제까지 준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파죽지세로 프랑스를 무너뜨린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영국을 굴복시켜 서유럽의 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영국 침공 작전인 ‘바다사자 작전’을 준비했으나 전초전인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의 장렬한 방어전에 막혀 바다사자 작전을 무기 연기했다. 자존심이 상한 히틀러는 눈을 동쪽으로 돌렸다.

그 때 히틀러가 전력을 동원해 영국을 계속 몰아붙였다면 영국은 독일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독일군의 유(U)보트 잠수함 공격으로 해상교통로가 마비되다시피 한 섬 나라 영국은 미국의 지원으로 간신히 숨만 깔딱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히틀러가 다른 곳에 한 눈 팔지 않고 조금만 더 밀어붙였다면 영국은 스스로 무너졌을 지도 모른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히틀러는 갑자기 영국을 향한 공세를 멈추고 총부리를 동쪽으로 돌리는 바람에 영국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소련을 굴복시켜 동쪽에서 승리하면 그의 서방세계의 지배를 강화시켜줄 것이라는 생각에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당시 독일은 지중해와 아프리카에서 영국과 전투를 수행 중이었는데, 이것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독일군 수뇌부는 아무리 막강한 독일군이라도 전력을 분산시켜 동서 지역에 두 개의 전선을 만들면 전쟁이 어려워 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당시 슐리펜 계획의 참상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슐리펜 계획은 독일 육군참모총장 알프레드 폰 슐리펜 장군이 고안한 것이다.

이 계획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독일군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하여 최단 기간 내에 프랑스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든 후, 서부전선에 배치된 주력을 동부전선으로 돌려 러시아군을 격퇴한다는 전략이었다. 

작전계획 자체는 훌륭했으나 인류 역사는 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진격은 참호전에 걸려 1917년까지 질질 끌었고, 미국의 참전으로 인해 독일은 패전의 수모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야망은 식을 줄 몰랐다. 소련의 풍부한 자원과 드넓은 영토에 눈이 멀어버린 히틀러의 소련에 대한 야망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일부 최고 지휘관들도 히틀러의 야망에 동조했다. 오직 기갑부대 지휘관 구데리안은 냉정한 평가를 잊지 않았다. 그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초기에 엄청난 속도로 거둔 성공 때문에 최고 지휘관들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도취되어서 ‘불가능’이라는 어휘를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자칭 ‘전쟁 천재’ 히틀러의 한계

불행하게도 소련은 잠자는 사자나 다름없었다. 잘못 건드리면 어떤 험한 꼴을 당하는지는 전쟁의 천재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실패에서 역사적 교훈을 충분히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전역에서 손쉽게 승리하자 자신감에 도취된 히틀러는 상황을 낙관했다. 

히틀러는 첫 서리가 내리기 전에 기갑부대의 전격전을 통해 소련군을 섬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방한복도 갖추지 않은 군대를 러시아 깊숙이 진군시켰다.

그는 러시아를 무너뜨리는 데 4개월이면 충분할 것으로 보고 알프레드 요들 장군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우리가 일단 문을 걷어차기만 하면 이미 썩을 대로 썩은 러시아 체제는 폭삭 무너질 것이다.”

나치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도 히틀러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는 종이로 만든 집처럼 무너질 것이다”

이것이 육군 상병 출신의 ‘자칭 전쟁 천재’ 히틀러의 한계였고, 히틀러 개인적인 독단을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나치 독일 지도부의 시스템상의 한계였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빌헬름 폰 레프 원수의 북부집단군(북러시아로 침입하여 레닌그라드 점령), 페도르 폰 보크 원수의 중부집단군(러시아 중서부로 진군하여 모스크바 공격), 그리고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남부집단군(소련 최대의 곡창지대이며 공업지대인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해 키에프 공략 후 남러시아 초원을 지나 볼가강까지 진군) 등 세 방향으로 정해졌다.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특히 전차부대의 기동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독일군이 소련 침공 초반에 빛나는 승리를 거둔 이유는 스탈린이 1930년대 후반에 군부 대숙청을 단행하여 우수한 지휘관들이 거의 대부분 총살되거나 군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붉은 군대에서 육군 원수 5명 중 3명, 군사령관 15명 중 13명, 해군 제독과 1급 해군 장성을 포함한 9명 중 8명, 군단장 57명 중 50명, 사단장 186명 중 154명, 그리고 하급 계급의 병사들까지 처형, 체포, 수용소에 수감했다. 

너무 많은 지휘관과 군인들이 처형되는 바람에 붉은 군대는 내전에서 경험을 쌓은 간부급들을 다 잃은 상황에서 히틀러의 독일군을 맞게 되었다. 

게다가 소련군 정예부대는 노몬한 전투 이후 일본군과 대치중인 시베리아와 만주방면에 배치되어 있었다.

 

스탈린 아들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

초반전에는 독일군의 대공세에 밀려 소련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스탈린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아 수많은 병사들에게 총도 지급하지 않은 채 맨몸으로 전장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프랑스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면에서 달랐다. 스탈린 독재체제의 정치적 능력과 전쟁 동원능력은 독일 지도부의 평가나 판단보다 훨씬 강력했다.

러시아의 군 역사학자 보리스 네브조로프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점령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군도 이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으로 쳐들어간 독일군 중 최강의 정예부대는 모스크바 점령 임무를 맡고 있는 중부 집단군에 배치되었다.

덕분에 독일 중부 집단군의 진격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중에서도 최선두에 선 지휘관은 ‘전격전의 아버지’ 구데리안이었다.

구데리안은 기갑부대를 유효적절하게 지휘하여 소련군을 유린, 불과 17일 만에 소련군 포로 30만 명을 사로잡았고 전차 2500대, 야포 1400문을 노획했다.

7월 경 제14기갑사단의 중위로 참전한 스탈린의 장남 야코프가 비텝스크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되었다.

그는 “나는 스탈린의 아들이다. 우리 부대에 후퇴는 없다”고 선언하고 끝까지 싸우다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이 스탈린의 아들을 포로로 잡은 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하자 스탈린이 격노하여 소리쳤다.

 

“바보 같은 놈, 자살도 못하다니!”

내무인민위원회는 야코프의 아내이자 스탈린의 며느리인 율리아를 체포해서 2년 동안 수용소에 가두었다. 

후에 독일군은 1943년 1월 31일 스탈린그라드에서 생포된 독일 육군 원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야코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를 거절했고, 몇 개월 뒤 야코프는 전류가 흐르는 독일 포로수용소의 철조망 울타리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아버지의 소망을 이루어주었다.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구데리안 기갑부대의 전광석화와 같은 진격으로 모스크바 공략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히틀러는 갑자기 구데리안의 기갑부대를 빼내 남부 집단군의 키에프 공략과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지원부대로 투입하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의 이 명령이 나치 독일의 패망을 가져오는 결정적 패착이었다. 모스크바 점령을 눈앞에 두고 구데리안은 다른 곳으로 이동함으로써 전격전의 전략적 파워를 상실했다. 

소련군의 지연 전술로 인해 겨울이 시작되었고, 혹독한 추위에 독일군은 예봉이 꺾였다. 

12월 5일 모스크바에서 주코프 원수가 대반격작전을 시작하면서 독일군은 패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겨울 추위와, 소모전의 덫에 빠져든 것이다.

그 후 4년에 걸친 히틀러와 스탈린의 전쟁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대규모 살육전이었다.

독일은 350만 명의 전사자와 민간인 53만 명이 희생되었고, 소련은 군인만 2000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군 1명을 죽이기 위해 소련군은 18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독일군의 패착은 전력을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분산한 것이었다. 그 바람에 주요 목표를 결정적으로 공략하는 데 실패했다. 

만약 구데리안이나 만슈타인,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취의 의견처럼 뛰어난 기동성을 보유한 북부, 중부, 남부집단군이 모스크바를 목표로 세 방향에서 일제히 공격했더라면 전쟁은 쉽게 결판났을 것이다.

리처드 오버리가 지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에 의하면 세계 최강의 부대로 알려진 독일 기계화 사단이 소련에서 비참하게 패배한 이유는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 추위나 독일군의 보급품 부족이 아니라 히틀러의 무모한 욕심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오버리는 소련이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원동력으로 러시아인들의 ‘애국심’을 꼽았다. 

스탈린은 어머니 같은 조국 러시아에 대한 러시아 인민들의 사랑을 통찰하고 애국심에 호소한 결과 빛나는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조국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목숨은 얼마든지 희생되어도 좋다는 러시아인들의 애국심과 희생정신, 그리고 생산력. 이것이 나폴레옹 군대와 나치 독일의 군대를 패배로 몰아넣은 원동력이었다. 

독일군은 죽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불을 뿜는 기관총 앞으로 돌격을 감행하는 소련군을 보면서 경악했다.

히틀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스탈린은 선언했다. “인류 역사상 무적의 군대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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