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예배가 사라지고 있다
한국 교회, 예배가 사라지고 있다
  • 미래한국
  • 승인 2015.06.2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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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특집] 10년 후 한국의 교회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5000만 명 이상의 인구와 2만 달러 이상의 소득을 동시에 기록하고 있는 일곱 나라 중 하나다. 2011년에는 세계질서를 만드는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개발 의제를 주도하기도 했다.

20세기 중엽 우리나라는 전 세계의 동정과 연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나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했다.

한국은 가장 많은 국가들과 FTA를 체결했고, 세계에서 경제 영토가 가장 넓은 명실상부한 FTA의 허브 국가가 되었다.

한국은 OECD로부터 선진국이 개발도상 국가들에게 주는 경제개발 원조인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를 받은 경험이 있다.

그러나 2010년에는 1인당 GDP가 3만 달러에 육박하여 30년 전의 13배에 이르는 가파른 상승을 이뤄냈다. ODA를 수령하던 나라에서 ODA의 주요 기부 국가가 된 것이다.

한국은 현대사에서 일제 식민지배, 해방 후의 혼란기, 6.25 전쟁 중 국토의 피폐화 등 재난의 아픔을 연속으로 겪었다.

일본 경제학 교수인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는 ‘일본인이 가지고 있지 못한 글로벌 표준 유전자(Global standard DNA)를 한국인이 가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한국인이 글로벌 시대에 최적의 체질을 가진 민족이라는 뜻이다.

영국, 캐나다, 스위스의 대학들이 발표한 세계인의 IQ를 보면 한국은 홍콩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중국은 5위인데, 홍콩은 국가가 아닌 중국의 자치구이므로 사실상 IQ 최상위 국가는 대한민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가장 포괄적이고 적극적인 미래를 평가를 한 것은 3만5700명의 직원들을 거느리고 있는 골드만 삭스다.

골드만 삭스는 한국이 통일이 된다면 2025년까지 캐나다를 추월할 것이고, 2035년에는 이탈리아를 앞지를 것으로 내다봤다.

또 2050년에는 한국인 1인당 GDP가 9만 달러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하며, 30~40년 사이에 G7 중 미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을 앞질러 신용등급 AAA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현대 사회와 교회의 정체성 

기독교 2000년 역사상 가장 급성장한 한국 교회가 지금 흔들리고 있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에 의해 산업사회에서 후기 산업사회로 옮겨가고 있는 현대 사회는 컴퓨터에 의해 주도되기 때문에 정보화 사회라고도 한다. 

과학기술 문화와 물질문화의 충격이 너무 커서 초자연적 세계관을 가진 교회는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디지털 문화가 사회 각 계층에 스며들면서 대중문화의 물결 속에서 전통적 종교가 영향력을 상실하는 위기를 맞고 있다.

미국의 독일계 종교 철학자 폴 틸리히는 ‘흔들리는 터전’(Shaking Foundation)이라는 명언으로 이 시대를 진단했다.

세속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교회가 세속적 인본주의, 상대주의, 물질주의의 포로가 되어 자기정체성을 상실한 채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교회 아닌 교회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현대 교회들이 하나님 중심 예배보다 인간 중심 예배로 그 형태가 변질되어 가고 있다. 예배 과정에서 성령 춤, 드라마, 유머가 담긴 촌극 등을 첨가하여 흥미를 돋운다.

시각적인 것을 첨가하여 슈퍼볼 필름을 보여 주고 깃대를 꽂으며, 오순절 체험을 한다면서 웃음을 한바탕 쏟아놓고 팝콘을 나눠준다. 


예배가 변질되고 있다 

전통적 예배 의식을 퇴색시키고 예배 의식을 자유롭게 하여 강단에서 성경봉독과 기도는 최대한 짧게 한다.

설교는 신학적 설교나 주석적 강해설교보다, 심리학적 또는 실용적인 방법을 안내하는 설교를 지향한다. ‘스트레스와 돈과 시간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등의 주제가 설교의 주를 이룬다. 성찬식은 새로운 축제나 상징성으로 대치하거나 생략하는 교회가 늘어갈 것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음악에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음악의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어진다. 

악기가 다양화되고 음악의 스타일이 달라진다. 전통적 찬송가나 클래식 음악의 분위기보다는 팝 또는 록 음악으로 변화되어 간다. 

2010년 세계로잔 3차대회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다. 5000명의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집회에서 찬송을 부르는데, 광란의 도가니였다.

찬송을 인도하는 젊은이들은 오르간이나 피아노 대신 기타를 메고 나와 ‘We have a hope’를 열창하는데, 자기 도취에 빠진 것일 뿐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눈을 감고 인상을 찌푸리고 몸을 비틀고 손을 휘저으며 춤을 췄다. 이에 그치지 않고 회중을 일으켜 세워놓고 어깨동무를 하고 앞발을 내디디며 좌우로 몸을 흔들고 악을 쓰면서 노래를 부르게 했다.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음악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고,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에 기도로 다이얼로그(dialogue)를 이뤄 예배의 중심을 찬양과 경배로 이룬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의 음악은 하나님의 임재를 중재하는 새로운 성례식이 되었고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에 신비적 연합을 이루게 하려 하고 있다.

눈을 감고 손을 공중에 뻗고 예배자들이 황홀경에 몰입하여 단순한 시구를 반복적으로 부르며 주문을 암송하듯 하고 있다.

현대 교회의 예배자들은 운동장의 응원단처럼, 박수 없는 찬송이 불가능한 것처럼 변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예배엔 박수가 없다.

그들의 찬송은 리듬이 단조롭다. 그래서 하나님은 찬송의 가사에 ‘동의합니다’ ‘순종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을 은유적으로 손뼉 치며 노래하라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신 말씀을 성도는 뒷골목으로만 다니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이듯,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해석해야 한다.

현대 교회들이 예배 인도자 자리에 안수 받은 목사 대신 찬양 인도자 또는 평신도를 동원시키고 있다. 예배시간을 주일에서 금요일로 변경시키고, 주일 찬양 예배는 가정에서라는 미명하에 생략하는 교회가 늘어날 것이다.

성탄절 준비는 많은 시간을 공들이면서, 막상 성탄절엔 예배가 없는 교회도 생겨나고 있다. 수요 예배도 점차 모임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엄청난 변화들이 예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도 않고, 편리하고 보기 좋은 대로 따라갈 것이다.


왜 예배가 이처럼 변하고 있는가? 

현대 교회 목회자들이 그들의 공예배를 목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긴급한 것, 가장 영광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고, 주변적인 것, 심지어 무익한 것, 지루한 것, 부적절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많은 목회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크리스천의 삶과 경험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공예배를 축소시키기 위해 우리의 삶 전체가 예배이고, 전체 회중이 함께 모여 예배하기보다 소그룹으로 모여 성경 공부 친교, 기도회를 갖는 것이 중요한 예배의 다른 형태라고 강조한다.

소그룹 모임은 더 친근감이 있고 의미 있는 교제,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가르침이 이뤄지는 장점이 있다고 가르친다.

요한 칼빈은 성경을 읽는 것보다 함께 더불어 설교를 듣는 것이 영적(靈的)으로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현대인들은 별로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현대 교회 지도자들이 전도한다는 이유로 공예배를 변경시키고 있다. 전도가 지상명령이라는 이유로 세상 사람들을 얻기 위해 세상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상식이라 생각한다. 

오늘날 TV나 영상물은 거의 전능자의 수준의 힘을 갖고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흥미가 있어야 하고 오락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미국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 예배당 없이 텐트를 치고, 오르간이나 피아노 대신 기타를 치며, 시편 찬송 대신 와트와 웨슬리의 복음 송을 부르며, 부흥 송으로 찬송을 대신하고, 예배 의식도 없이 설교만 있으면 예배라 부르던 미국의 소위 변방예배(Frontier Worship)가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퍼져나가고 있다. 

오순절 카리스마적 교회의 예배 형태를 자연스럽게 교회 부흥이라는 명분으로 받아들였다. 70% 이상이 장로교회인 한국 교회가 실제로 오순절파 신학을 포용한 것인가?

예배 전통 가운데 설교사역이 뜨거워지는 것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예배 의식도 없이 상가의 지하실에서, 또는 야영 집회를 예배로 대치하는 탈(脫)예전적 예배는 심한 갈등을 일으켰다.

예배 분위기는 기도, 찬양, 성경봉독까지도 설교를 듣기 위한 준비행위로 격하시키고 주된 관심은 예배보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에 있었다.

한국 교회는 성경을 처음 번역할 때부터 예배라는 말을 멀리했다. 한 세기 동안 한국 교회에서 읽혀진 개역성경(구약)에서 예배라는 단어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예배를 대신하여 경배, 섬김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는 겨우 14번을 찾아볼 수 있다. 영어권의 흠정역(King James Version)에서는 예배(Worship)라는 단어가 구약에서 115회, 신약에서 75회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예배라는 이름을 남발하고 있다. 집회와 예배를 구별하지도 못하고, 설교만 있으면 경건회도 예배라 부른다. 생일 예배, 개업 예배, 축하 예배, 출판 예배 등이 있다.

예배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기리면서 그분만 영화롭게 하고 기쁘시게 하는 경배, 찬양, 감사, 봉헌, 참회, 간구의 행동을, 말씀을 받고 응답행위로 하나님께 쏟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의 종교 한복판에 정령을 숭배하고 달래는 무당이 있었듯이 가무를 통해 그리고 제물을 바침으로 정령의 노를 푸는 역할을 오늘날 목사가 대행하는 샤머니즘적 예배 형태가 도처에서 행해지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가 음악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 교회는 찬양대라는 말보다는 대부분의 교회가 성가대로 부른다. 이는 예배적으로는 부적절한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시편)이 아니면 하나님을 바로 찬송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의 말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였다.

종교개혁 이전까지 복음 송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복음 송이라는 것은 세속화된 교회의 유행가로 분류되어야 한다.

예배 시 음악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고, 성전 예배 때 사용된 악기와 그렇지 않은 악기들이 구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사찰이나 무당들이 사용하는 악기들이 예배에 동원되고 있는 것은 또 하나의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고, 드리는 기도를 찬양으로 올려야 할 예배자들이 음악을 성례식으로 승화시켜 황홀경에 몰입시켜 하나님의 임재의 도구로 삼고 있다.

법과 질서, 조화와 미, 그리고 목적이 있는 예배 음악을 눈을 감고 손을 공중에 흔들고 자기 도취의 표현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손뼉 치며 노래한다’는 시편(47:1) 말씀은 기쁨의 한 외적(外的) 표현이다. 유대인들의 예배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손뼉 치는 일은 없다.

손뼉 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환영과 존경, 지지, 보답을 의미한다. 이런 정신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라 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찬양 인도자는 운동장의 응원단장이 되어가고 연예인처럼 청중의 흥미를 돋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이처럼 예배와 음악이 생각 없이 변하고 있다.

심지어 예배의 날 변경까지 제시하는 목회자가 있다. 주5일 근무제로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 주일에 이어지는 황금 연휴를 교회가 뺏는 것은 착취라고 하면서 주일 예배시간 대신 금요일 밤 예배로 대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탈(脫)성경적 발상까지 내 놓고 있다.

향후 10년을 바라보면서 한국 교회는 영(靈)과 진리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다른 형태로 변질시키거나 소진시키는 길로 점점 나가고 있다.


기독교는 쇠퇴할 것인가? 

세계 기독교 2000년 역사상 가장 급성장한 한국 교회도 130년을 고비로 벌써 쇠퇴기에 접어든 것인가? 보수주의 교회는 성장하고 성경을 문학작품 중 하나로 본 자유주의 교회는 쇠퇴했다는 서구의 논리는 이미 퇴색되었다.

1960년대까지 미국이나 유럽 교회에서는 이 등식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보수주의도 자유주의도 모두 쇠퇴하고 있다는 통계는 우리를 긴장시키고 있다.

사회의 산업화, 기술사회로의 변천, 교회의 세속화, 대중교육의 확산, 좌경화된 신학, 변화된 사회에 대한 교회의 부적응, 주류 교회의 교회성 상실, 교육 부실, 전도 열심 쇠퇴, 기도 열심 퇴보, 교회 분열, 도덕성 상실 등 여러 이론이 현대 교회의 쇠퇴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미국 PCUSA(미국장로교회)에서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교인 감소의 원인은 사회적 영향이나 교회가 사회에 부적절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는 응답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교인들의 학력 향상으로 대학에서 무신론 교육의 영향이라는 응답도 소수였다. 신학적 입장 차이도 별 영향이 없었다.

이 설문 조사에서 교회를 이탈한 궁극적 원인은 ‘신앙의 가치 부재’로 나타났다. 교인들의 신앙이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 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교리의 타당성을 교회에서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부분 종교를 도덕성 함양 정도로 이해하고 가정에서 종교적 대화를 거의 하지 않거나, 종교에 대한 적극 권유가 사라지고 있는 현상도 교회 이탈의 중요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환생 교리에 대한 매력으로 심판, 부활, 천국과 지옥 같은 교리는 믿지 않으려 하고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 해결 없이 한국의 기독교 재부흥은 기대하기 어렵다.

교인들의 의식 계몽은 역사적 추세다. 21세기 기술문화 발전과 더불어 교인들의 요구는 더 증대될 것이다. 시대에 적합한 신학을 교회가 제시하지 못하면 교인들의 교회 이탈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대안(代案)은 있는가? 

오늘날 자유주의, 복음주의, 개혁주의로 세계 신학을 대분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인한다.

복음주의는 성경의 권위, 영감은 믿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믿고 플러스 알파(α)가 더 요구된다고 한다. 개혁주의는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목회도, 사회 변혁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다섯 개의 기둥 즉,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오직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을 추구하는 개혁주의 신학으로 돌아와야 한다. 

한국 교회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장로교가 오늘날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한국 교회를 소생시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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