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파리 입성하다(1940년 6월 25일)
히틀러, 파리 입성하다(1940년 6월 25일)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6.2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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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현대사 파일

1940년 6월 22일, 독일의 기습 침공을 받은 지 불과 33일 만에 프랑스는 영원한 숙적(宿敵) 독일의 히틀러에게 치욕스러운 항복을 했다. 프랑스 정부로부터 항복 의사를 통보 받은 히틀러는 22년 전인 1918년 11월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의 항복 서명식을 거행했던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80㎞ 거리에 위치한 도시 콩피에뉴의 숲을 항복 장소로 지정했다. 그리고 독일이 패전국으로서 항복 서명을 했던 열차를 끌어와 이 열차의 식당 칸에서 프랑스 정부로 하여금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하라고 명령했다.

정전협전 조인식은 6월 22일 거행하기로 정해지자 히틀러는 비행기를 타고 프랑스로 날아왔다. 이날 프랑스의 항복 장면을 취재했던 미국 CBS 뉴스의 윌리엄 셔러 기자는 이날 콩피에뉴 숲에 정차되어 있던 열차의 창문을 통해 조인식이 진행되는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했던 그는 ‘베를린 일기’라는 책을 통해 프랑스의 항복 장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프랑스 점령 후 에펠탑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하고 있는 히틀러.

‘오후 3시 23분이 되었고, 독일인들이 그 정전협정의 열차를 향해 큰 걸음으로 걸어왔다. 이들은 태양이 쏟아지는 철도차량 앞에서 잠깐 멈추어 잡담을 나눴다. 그리고 히틀러가 차량으로 올라서자 다른 사람들도 따라 올랐다. 우리는 (철도)차량의 유리들을 통해서 아주 잘 볼 수 있었다. 히틀러는 1918년 독일이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 프랑스 야전 원수 포슈가 앉았던 그 자리를 차지했다.…

정확하게 3시 30분이 되자 프랑스인들이 차를 타고 나타났다. 그들은 비행장 근처 보르도 거리를 통해 나타났다. 그들이 걸어오는데 옆에 독일군 장교 3명이 옆에 붙어 있었다. 태양 비추는 개활지에 그들이 똑똑히 보였다. 그건 프랑스 종말의 시간이었다.’

히틀러는 22년 만에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이라는 국가적 수치를 프랑스에게 되갚은 것이다. 프랑스가 항복한지 사흘 후인 6월 25일, 히틀러는 자신이 좋아하는 건축가 알버트 스피어를 비롯한 수행원들과 함께 파리 투어에 나섰다.

스피어는 당시 상황을 자신의 저서 ‘제3제국의 안쪽’에 기록해 두었는데, 세 시간여에 걸쳐 파리 시가지를 둘러본 후 히틀러는 “파리를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꿈과 같아. 오늘 하루 그 꿈을 채운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군”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6월 22일 콩피에뉴 숲의 열차 객차에서 종전협상이 체결되고 전투행위는 6월 25일부로 중단되었다. 이날 히틀러는 새벽 일찍부터 점령지 파리 투어에 나섰다. 파리 오페라 하우스, 엘리제 궁, 에펠탑, 개선문, 무명용사비, 앵발리드 군사박물관을 구경했다. 훗날 히틀러는 독일 장군들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나는 나폴레옹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것이다.”

 

자칭 ‘전쟁 천재’ 히틀러

히틀러는 자신이 ‘전쟁의 천재’인 나폴레옹을 능가하는 희대의 천재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앤드루 나고르스키가 지은 ‘세계사 최대의 전투-모스크바 공방전’에 의하면 히틀러가 군사문제에 관해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히틀러는 군사 전문가들과 논쟁을 자주 벌였는데, 히틀러는 늘 독일의 명장(名將)들의 논리를 압도했다. 장군들은 히틀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의 재무장, 라인란트 점령, 오스트리아 합병, 체코슬로바키아 분할, 폴란드 침공 등은 모두 장군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시하고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단행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폰 만슈타인 원수는 히틀러의 군사적 재능에 대해 이런 평을 남겼다.

“군사 지도자로서의 역할의 관점에서 히틀러를 평가하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상등병’이라는 상투적 용어로 그를 무시할 수 없다. 히틀러는 군비에 관한 기술적 사실과 문제점을 재빨리 이해하는 놀라운 기억력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적의 가장 최신무기의 성능에도 놀라울 정도로 정통했고, 아군이나 적군이 제조한 병기의 수치를 줄줄 읊었다.”

그러나 이 자칭 ‘전쟁의 천재’는 소련을 너무 우습게 본 나머지 방한장구도 갖추지 않고 300만 대군을 소련 영토에 밀어 넣었다가 소련군의 지구전에 말려 강추위가 닥치자 고전했고, 결국 나폴레옹과 똑같이 비참한 패배를 당하게 된다.

그건 후의 일이고,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독일군은 1940년 4월 9일,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5월 10일에는 네덜란드와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침공함으로써 본격적인 프랑스 전투의 봉화가 올랐다. 5월 10일 새벽 04시 30분 독일군 전차들이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었다.

같은 시각, 독일 폭격기들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프랑스의 비행장과 프랑스 후방의 보급로를 공습했다. 독일 공군의 폭격에 이어 낙하산 부대가 강하했고, 그 뒤로 기계화 보병과 차량화 보병, 그 다음에는 보급품 수송차량들이 뒤따랐고, 마지막으로 보병부대가 전진했다.

공군의 지원 하에 독일 전차가 주축이 된 기계화 부대들은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유린하면, 뒤따라 온 보병부대가 후속처리를 하며 패잔병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른바 전차의 기동력과 파괴력을 최대한 활용한 ‘전격전(電擊戰)’ 전술이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불 연합군은 독일군이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똑같이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로 쳐들어올 것으로 판단하고 주력부대를 벨기에 북쪽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이것은 연합군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독일군의 주력은 벨기에 남부에 숨어 있던 독일의 10개 기갑사단이었다.

육군 강국으로 소문난 프랑스군은 독일의 기갑사단이 울창한 삼림 지대인 아르덴느 지역을 통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 소수의 방어 병력만을 배치하고 주력을 벨기에 북쪽에 집결시켰다. 프랑스는 급소를 강타 당했다.

독일의 기갑사단은 아르덴느 삼림 지대를 전광석화처럼 돌파하여 5월 14일과 15일 뮤즈강을 도하했다. 이후 독일군 기갑부대는 불과 열흘 만에 도버 해협에 도달, 영‧불 연합군의 주력을 북쪽으로 포위하면서 프랑스를 남북으로 두 동강 내 버렸다.

프랑스군과 유럽 대륙에 파견된 영국 원정군(BEF‧British Expeditionary Force)은 전쟁 발발 3주 만인 6월 4일, 됭케르크라는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주요 장비를 모두 버리고 몸만 빠져나와 영국해협을 건너 철수했다.

이후 독일군은 프랑스 전역을 무인지경으로 휩쓸기 시작했다. 프랑스 정부는 6월 10일 파리를 무방비도시(Open City)로 선언하고 정부를 보르도로 옮겼다. 이 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영불 연합군에게 선전 포고를 했다.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를 무혈 점령했다. 프랑스는 전쟁 개시 한 달 만에 국가의 심장부인 파리를 독일군에게 내주는 치욕스러운 패전을 하고 말았다. 프랑스 정부는 1차 대전의 영웅이었던 필립 페탱 원수에게 위기의 타개를 요청했으나 패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6월 17일 페탱 원수는 “싸움을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는 저의 마음은 매우 무겁다”는 방송을 통해 항복 의사를 발표했다.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프랑스 정부는 6월 21일, 독일에게 휴전을 신청하는 형국으로 항복했다.

프랑스는 7월 10일 독일군이 점령하지 않은 남부의 소도시 비시를 수도로 정하고 친독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페탱은 괴뢰정권인 비시 정부의 수반이 되어 매국노로 손가락질을 당하는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다.

비시 정부가 독일에 항복하자 영국으로 망명한 샤를 드골은 자유프랑스 국민회의(자유프랑스)를 수립하고 대독(對獨) 항전을 선언했다. 카메룬,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등 일부 프랑스 식민지는 이에 호응하여 자유프랑스군을 형성했고, 국내에선 레지스탕스가 독일군과 비시 정권에 맞서 저항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동안 프랑스군은 전사 및 실종 12만, 부상 24만 명, 항복한 200만 명이 독일군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독일군은 전사 및 실종 3만5000 명, 부상 11만 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전격전의 탄생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불과 한 달 만에 프랑스를 굴복시킨 근본적 이유는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했던 참호전을 피하기 위해 전광석화 같은 기습작전으로 연합군의 허를 찔렀기 때문이다.

이 작전을 입안한 주인공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고, 그가 구상한 작전이 ‘낫질(Sichelschnitt) 작전’이었다. 만슈타인은 기동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전차와 차량화 보병, 급강하 폭격기, 공수부대로 이루어진 부대를 편성할 것을 주장했다.

만슈타인은 이처럼 기동력이 뛰어난 기갑사단을 주공으로 삼아 프랑스의 마지노선과 벨기에 방어선의 연결지점인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재빠르게 치고 나와 대서양 해안으로 진격하여 영불 연합군을 포위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이른바 ‘전격전’의 탄생이다.

당시만 해도 거의 모든 지휘관들의 머릿속에는 전차는 보병의 보호와 엄호 하에 합동 전술을 펴는 것을 기본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만슈타인의 아이디어는 보병부대와 기갑부대를 분리시켜, 기갑부대의 기동력을 극대화하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플랜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휘관들의 눈에 만슈타인의 작전계획은 대단히 위험한 도박으로 보였다. 그러나 1차 대전 당시 참호전에서 부상을 당한 경험이 있는 히틀러는 참호전을 피하고 재빨리 전쟁을 끝낼 수 도 있는 만슈타인의 대담한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독일군이 프랑스와의 전투에서 전차와 기계화 보병, 급강하 폭격기를 활용하여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성을 살리는 작전은 독일어로 ‘번쩍이다’라는 뜻의 ‘블리츠크리크(Blitzkrieg)’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것이 일본에서 ‘전격전(電擊戰)’으로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 것이다.

전격전은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참호전을 돌파하기 위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1880년대에 맥심이라는 사람이 기관총을 발명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전쟁 방식이었던 일렬로 늘어서서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전투행위는 곧 몰살을 의미했다.

기관총의 위력에 노출된 전투원들은 빗발치는 총알을 피하기 위해 땅을 파고 들어가 몸을 숨겼다. 전투원들이 참호에 몸을 숨기자 이번에는 그들을 살상하기 위해 곡사포가 고안되었고, 독가스가 사용되었다.

프랑스는 1차 세계대전 후 아예 어마어마한 예산을 들여 독일과의 국경선 부근 750㎞에 걸쳐 당대의 최첨단 과학과 축성술을 총동원하여 마지노 요새를 건설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참호전 교훈에서 출발한 아이디어였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침략했을 때 마지노 요새에서 총 한 방 못 쏘고 파멸하고 말았다.

참호와 요새를 완전 무력화하는 신전술, 곧 전격전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의 상징어가 ‘참호전’이었다면 2차 세계대전은 ‘기동전’이었다. 이러한 트랜드의 변화에 둔감했던 프랑스, 트랜드의 변화를 재빨리 받아들여 자신들의 전략으로 수용한 독일. 그 순발력의 차이가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참혹한 패전에 대한 반성으로 ‘국립행정학교(ENA)’ 설립

전차의 기동성을 주목한 사람은 영국의 군사이론가 리델 하트였다. 군사이론가 리델 하트는 기갑부대의 기동성을 활용하여 단독으로 적진을 돌파한 다음 적의 배후를 차단함으로써 붕괴를 이끌어내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할 수 있다는 ‘전략론’을 편찬했다. 영국을 비롯한 서방의 군사 전문가들은 어느 누구도 리델 하트의 이론을 주목하지 않았으나, 1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설욕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독일군은 달랐다.

그들은 리델 하트의 이론을 심도 깊게 연구한 다음 리델 하트의 이론과 프로이센식 기동 섬멸전 방식을 접목시켰다. 하인츠 구데리안을 중심으로 창설된 전차부대는 이러한 전격전 전략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를 불과 6주 만에 굴복시킨 것은 전격전보다 더 무서운 프랑스 국가지도부를 비롯한 정치권의 분열과 반목과 무능이었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모로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육군참모본부에서 ‘프랑스 측 관전(觀戰)연락무관(武官)’으로 초빙되어 근무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6주 만에 항복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 ‘프랑스의 비극’(Tragedy in France)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 앙드레 모로아는 프랑스가 독일에게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패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평화지상(至上)주의가 프랑스의 국가수호의지를 약화시켰다.

둘째, 소련을 조국으로 삼는 사회주의자들이 국가를 분열시켰다.

셋째, 군대가 정치에 종속되어 재무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넷째, 영국과 프랑스를 이간질 시킨 나치의 선전전(戰)이 효과를 보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 지도층은 뼈아픈 과거를 복기해 보니 당대의 최강 육군과 독일보다 더 많은 전차를 보유하고도 불과 6주 만에 참혹한 패전을 한 이유는 첨단 군사력이 아니라 지도층의 결연한 의지 부족과, 지도자들이 국익을 지킬 줄 몰랐기 때문이란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를 주도해 나갈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예나(ENA‧École nationale d'administration)’라 불리는 국립행정학교를 설립했다. 프랑스 대부분의 지도적인 정치인과 고급 관료, 유명 기업인이 이 학교 출신이다.

프랑스는 그랑제콜(Grandes Ecoles)이란 교육기관을 통해 국가에 반드시 필요한 엘리트 인재를 육성하고 있는데, 그랑제콜의 양대 산맥이 인문계의 ‘예나’, 이공계의 ‘에콜 폴리테크니크’다.

1794년 나폴레옹이 창설한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이공계 인재들은 국가안보를 책임져야 한다는 뜻에서 재학생 전원이 제복을 입고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독립기념일이 되면 프랑스군과 함께 퍼레이드를 벌인다.

이 학교 역시 지스카르 데스탱을 비롯한 대통령 세 명을 배출했고 조프르, 포슈 등 유명한 군사지휘관, 모리스 알레 등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한 세계적인 물리, 화학자를 배출했다.

비싼 첨단 무기만 사들인다고 국가안보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법적‧이론적으로 무장된 엘리트 인재들이 외교무대, 경제무대, 학술무대, 기업경영에서의 활약을 통해 고급스런 안보를 담보해야 하는 ‘총체적 안보시대’다. 바로 이런 엘리트 인재가 다량으로 배출되는 국가 차원의 시스템과 인프라가 구축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안보는 튼튼해질 것이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의 패전과 항복이라는 국가적 수치로부터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한국은 일제 36년이란 망국, 그리고 6‧25 인민군의 기습 남침이라는 참혹한 수치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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