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인민군 전차부대, 48km 진격에 사흘 걸린 이유
6.25 인민군 전차부대, 48km 진격에 사흘 걸린 이유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6.25 09: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6·25 발발 65주년 특집] 남침 초기 인민군 전차부대 미스터리

게릴라전에 능숙한 중공군 출신 지휘관들, 전차전 특유의 기동력과 파괴력 전혀 못살려

6월 25일은 6·25 남침 65주년 되는 날이다. 인민군은 6월 25일 새벽, 소련이 제공한 T34 전차와 SU 76 자주포를 앞세워 국군을 유린하고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기습을 당한 국군 입장에서 볼 때 철갑을 두른 채 내달리며 포를 쏴대는 북한 인민군 전차는 공포 그 자체였다. 

소련이 제공한 T34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에서 독일 기갑군단을 격파한 막강한 전차였다. 북한에 제공된 T34/85형 전차는 대구경 85㎜ 주포를 탑재하고 철갑 두께도 75㎜에서 110㎜로 개량했으며, 탑승병 5명을 태우고 최대 시속 53㎞, 작전 반경 400㎞에 달하는 괴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격돌한 소련군은 전차의 위력과 효용성을 적나라하게 체험한 후 지상전에서 기갑부대를 대대적으로 강화했다. 1949년 1월 평양에 도착한 소련군 사절단 40명은 대부분 기갑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북한에 기갑부대를 창설하여 전차를 제공하고 전차대원들을 소련으로 데려가 훈련시켰다.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이날 오전 중앙청에 인공기를 게양한 주인공은 인민군 제105 전차여단의 107연대 1대대장 김영 소좌였다. 김영은 일제 시대 삿포로제국대학 농학과에 다니던 중 해방 후 귀국하여 인민군 기갑부대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스탈린그라드 기갑학교에서 1년 동안 교육을 받은 후 6·25 남침 때 제105 전차여단의 선봉 대대장으로 활약하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에게 귀순했다. 

반면에 국군은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정찰과 병력 수송용 장갑차 37대(M8형 그레이하운드 27대, M3형 반궤도 장갑차 12대)가 전부였다. 인민군의 남침 작전계획인  ‘선제타격계획’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영웅 칭호를 받은 바실리에프 원수가 작성한 것이다. 그리고 180대의 각종 항공기와 T34 전차 242대, SU 자주포 176대를 지원했다. 1950년 5월 1일 평양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메이데이) 행사 때 소련으로부터 제공받은 거대한 T34 전차부대가 평양 시가지를 누비며 퍼레이드를 벌였다. 전차부대는 그 길로 38선으로 내려가 6·25 남침에 투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인민군은 기갑부대를 선봉으로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인민군 제105 전차여단의 주력은 중부전선에서 6월 26일 오후 의정부를 점령했다. 105 전차여단 작전장교로 남침했다가 후에 국군에 귀순한 오귀환은 인민군 전차의 작전에 걸림돌이 거의 없었다면서 “쇠몽둥이로 솜뭉치를 뚫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 6.25 전쟁 당시 남한을 기습 침공한 북한군의 T-34 전차부대 모습. 인민군은 '선제타격계획'이라는 남침 작전계획대로 남침했다. 하지만 인민군은 전차전에 대한 개념이 부족했고, 유엔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면서 대부분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굼벵이처럼 기어 온 인민군 전차 

여기서 잠시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38선에서 서울까지의 최단거리는 불과 48㎞인 반면, 인민군 T34 전차의 최대 속력은 시속 53㎞였다. 만약 인민군에 전격전(電擊戰)을 창안한 독일의 구데리안 장군처럼 전차전의 특성을 꿰뚫어 본 지휘관이 있었다면 전차부대를 보병과 분리시킨 다음 고속으로 돌격시켜 국군 지휘부를 강타하고 지휘통신기능을 와해시키는 작전을 구사했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다면 서울은 6월 28일이 아니라 남침 개시 후 3~4시간 후 우왕좌왕하는 군 수뇌부와 대한민국 정부, 국회를 단숨에 점령했을 것이고, 이승만 대통령이 6월 27일 새벽 3시 30분, 특별열차 편으로 피난을 떠나지도 못했을 것이며, 6월 28일 새벽 한강 다리를 폭파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생명은 6월 25일 정오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인민군의 주공로였던 동두천-의정부-서울 축선(3·4사단과 제105 전차여단 전차 100대)이나, 개성-문산 축선 공격부대(인민군 1·6사단, 전차 50대)는 강력한 전차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전차를 활용한 기동전이 아니라 보병부대를 앞세워 공격했다. 전차는 보병부대의 후위에 배치하여 보병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춰 서울로 들어왔다. 이 문제에 대해 정일화 씨는 <휴전회담과 이승만>에서 ‘어떤 절대적인 힘이 인민군 탱크의 브레이크를 계속 누르거나 뒷걸음질 치게 한 결과로 얻어진 기적’이라고 썼다. 

그렇다면 인민군 전차부대는 전격전을 벌이거나 기동력을 살리지 못하고 왜 보병의 뒤를 따라 굼벵이 속도로 내려온 것일까. 정일화 씨의 분석에 의하면 첫째, 김일성이 소련으로부터 전차는 받았지만 전차전의 특성 자체를 몰랐기 때문이다. 둘째는 침략전쟁의 일선에서 전투부대를 지휘한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을 비롯한 주요 지휘관들은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잔뼈가 굵은 중공군(팔로군) 출신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보병 위주의 게릴라식 전투를 벌였다. 전차의 특성을 몰라 보병전투의 보조수단으로만 사용했기 때문에 전차의 위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38선 북쪽 최전방에 포진해 있던 인민군 21개 보병연대 중 거의 절반인 10개 연대가 중국에서 건너온 조선족 부대(조선의용군)였다. 인민군 4사단장 이건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12사단장 전우 등이 조선족 출신 장군들이었다. 김일성의 6·25 침략전쟁을 위한 작전계획은 소련군이 작성해서 줬지만 이를 현장에서 실행한 일선 지휘관들은 거의 다 중공군 출신의 게릴라전 전문가들이었다. 

조선족 출신들로 편성된 인민군 4사단 18연대는 동두천 북방에서 38선을 남하하여 의정부를 점령한 후 서울로 진격하여 중앙청을 최초로 점령했다. 한강을 건넌 18연대는 오산에서 미군의 스미스 대대를 격파했고, 이후 대전 점령, 추풍령에서 미군 보급기지를 습격하는 전과를 올려 근위연대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연대장 장교덕은 영웅 칭호와 함께 사단장으로 승진했다. 

전차전 개념을 전혀 몰랐던 중공군 출신 지휘관들 

인민군 6사단은 중국 인민해방군 166사단이 북한에 들어와 옷만 인민군으로 갈아 입은 부대다. 이 사단은 6월 25일 당일 개성을 점령한 후 13연대는 인천 점령, 15연대는 강화도 점령 후 김포반도로 진출했다. 이후 한강을 건너 영등포-안산을 거쳐 오늘날의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충남 서부지역-호남평야 등을 놀라운 속도로 휩쓴 다음 하동-진주 방면으로 진출했다. 김일성은 6사단 전체 군인에 대한 1계급 특진, 6사단 전체 병력의 월급 50% 인상, 방호산 사단장을 중장으로 승격하고 2중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중공군의 전술은 적과 정면으로 맞붙는 방식이 아니라 교묘하게 우회 침투하여 상대방을 둘러싼 후 포위 공격을 하는 방식이다. 인민군은 남침 초기 ‘측방 기동에 의한 후방 차단 작전’을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즉 전차부대와 이를 따르는 보병이 전면을 공격하는 동안, 양쪽 날개로 보병이나 차량화 보병을 우회시켜 포위한 다음 적을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효과는 확실하나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포천-의정부 축선 공격을 담당했던 인민군 4사단은 전차를 동반했으나 전진 속도는 보병의 속도를 넘지 않아 서울까지 48㎞를 진격하는 데 3일이나 걸렸다. 4사단장 이건무는 전차를 보병과 함께 이동시키면서 보병이 먼저 공격했고, 국군이 반격하면 후미에 있던 전차부대를 동원해 강력한 포격을 가하고 밀어붙여 전선을 붕괴시켰다. 심지어 전차부대가 너무 앞질러 전진하면 뒤로 후퇴시켜 보병부대와 대열을 맞추기도 했다. 

인민군은 보병-포병-전차의 밀집대형을 유지하면서 포위하고 우회하면서 신중하게 전진하느라 전차전 고유의 기동력과 파괴력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그들이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대한민국 정부와 군 지휘부는 서울을 빠져나가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었다. 

국군의 영웅적인 저항 

또 한 가지, 북한의 전차부대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영웅적인 전투를 벌인 국군의 역할이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기록에 의하면 인민군 전차가 축석고개를 넘어 의정부로 전진하자 금오리에서 국군포병학교 제2포병대 대대장 김풍익 소령이 105㎜ 포를 끌고 나와 직격탄을 발사하여 파괴시켰다. 

다른 한 대는 의정부를 점령한 후 서울을 향해 의정부 교량 앞을 넘어오다가 국군 25연대 2대대 5중대 화기분대장이 2.36인치 로켓포를 전차 가까이 들고 가 발사하여 파괴했다. 김풍익 소령이나 25연대 화기분대장은 적 전차를 파괴한 직후 후속 전차부대가 발사한 포와 기관총에 맞아 현장에서 전사(戰死)했다. 

영웅적인 전투에도 불구하고 중과부적으로 의정부를 잃은 국군은 후퇴하여 창동-미아리 고개에 저항선을 구축했다. 6월 27일 오후 7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인민군은 전차를 앞세워 정면공격을 했으나 국군은 적 전차에 육탄 공격을 감행하는 등 완강하게 저항했다. 

인민군은 국군의 저항선을 뚫지 못하자 2대의 전차와 소대 병력을 서울 동북쪽 홍릉 지역으로 우회시켜 6월 28일 새벽 2시 시내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등 뒤에 적 전차가 나타나 마구 포를 쏘아대는 바람에 미아리 고개 저항선이 무너지자 국군 지휘부는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 교량들을 폭파했다. 

6·25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 1등서기관이었던 해롤드 노블은 자신의 저서 <이승만 박사와 미국 대사관>에서 남침 초기 기습을 당하고도 용맹하게 분전한 국군의 활약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공산군이 그날 밤(6월 25일-필자 주) 서울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들이 48시간을 지체한 것이야말로 한국군이 항복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겠다는 용기와 각오를 가졌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한국의 보병과 포병들은 서울 북방에서 영웅적으로 싸웠으며,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북한 전차 지휘관들은 보병부대의 지원을 앞질러 휩쓸고 나갈 용기가 없었으며, 그들의 진격을 보병의 이동과 보조를 맞춰 나갔다. 

비좁은 의정부 회랑 전투야말로 근대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것 중의 하나였다. 어떻게 유 장군(당시 의정부 전선을 맡았던 유재흥 국군 7사단장을 지칭-필자 주)과 그 부하들이 보다 우수한 대포와 한국군에 없는 비행기와 탱크를 가진 북괴 인민군을 저지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용기와 헌신적인 애국심으로 가득 찬 하나의 드라마였다. 

훨씬 뒤에 북괴군을 능가하는 대포와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들마저도 북괴군에게 남쪽으로 밀리고 나서야 비로소 의정부 근처와 춘천, 그리고 임진강 아래서 싸운 한국군의 영웅적 행동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한국군을 염두에 둔 외부 사람들은 별로 없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한국군의 명예는 초기 며칠간의 그릇된 관념들로 먹칠을 당하고 있다.’ 

제공권에 무너진 북한 전차부대 

서울시내에 돌입한 인민군 전차대와 보병은 패주하는 국군에 대한 추격을 멈추고 6월 28일 11시 30분 서울시청 앞에서 서울 점령식을 거행했다. 한강교 폭파로 인해 다수의 군인들은 한강을 건너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서빙고, 한남동 등지에서 간신히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넜다. 만약 인민군 전차가 즉시 한강으로 달려가 도강을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국군을 공격했다면 끔찍한 살상극이 벌여졌을 것이다. 

육군 공병대는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에 놓여 있는 한강대교와 광진교, 그리고 3개의 기차 철교 등 모든 교량을 폭파시켰다. 그 중 철교 한 곳에 설치된 폭약이 제대로 터지지 않아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인민군은 몰래 철교를 복구하고 철교 레일 위해 두꺼운 목재를 깔았다. 7월 3일 새벽, 복구된 철교를 통해 전차 4대가 한강을 건너 영등포로 돌진하자 국군의 한강 방어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한강을 도하한 인민군 전차는 오산 죽미령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를 유린한 다음 천안-대전 지역을 전차로 밀어붙이기 위해 평택 부근에 전차부대를 도열시켰다. 7월 10일 오후 미 공군 전투기가 흐린 날씨를 뚫고 평택 상공을 비행하던 중 평택 지역에 일렬로 늘어선 대규모 전차와 차량부대를 발견했다. 보고를 받은 미 5공군은 B29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무자비한 공중폭격을 퍼부어 인민군 전차 38대, 자주포 9대, 트럭 117대를 파괴했다. 

이날 이후 인민군 전차는 낮에는 과수원이나 터널, 건물 속에 숨어 있다가 야간이나 새벽에 기동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제공권이 없는 T34의 위력은 이때부터 주춤하기 시작했다. 이 틈을 이용해 미군은 8월 7일과 8월 16일, 최신예 M26, M46 전차를 보유한 4개 전차대대를 태평양을 건너 부산에 급파했다. 

M26 퍼싱 전차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전설적인 타이거 전차에 대항하기 위해 설계된 전차로, 90㎜ 주포를 탑재하여 파괴력이 T34보다 훨씬 강했다. M46 패튼 전차는 1949년에 실전 배치된 미군의 최신예 전차였다. 8월 18일부터 8월 23일까지 한미 연합군은 다부동 지역에서 T34 전차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북한군 전차부대를 격파했다. 

만약 김일성이 전차부대를 대전-대구-부산 한 방향에 집중하여 고속기동 돌파작전을 감행했다면 미군의 최신예 전차부대가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낙동강 전선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전차전이라는 현대전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