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민주화가 잘못된 정책이었음을 시인하고 ‘줄푸세’ 환원 선언해야
‘준비된 여왕.’
영국 엘리자베스 1세에게 바쳐진 헌사(獻詞)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大選)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신의 롤 모델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국가와 결혼했다”고 말했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파산 직전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 그런 엘리자베스 여왕과 박근혜 대통령 간에는 비운으로 일찍이 부모를 잃었던 가정사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준비된 여왕’인지는 확실치 않다. 박 대통령에게는 여왕적인 카리스마와 단호함이 있었다. 2002년 한나라당이 ‘차 떼기당’이라는 오명(汚名) 속에 존폐 위기를 겪었을 때 박근혜 대통령은 당사(黨舍)를 천막으로 옮기며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십을 보여줬다. 이후 2004년 총선을 비롯, 당이 위기에 놓일 때마다 그녀는 ‘선거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들으며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박근혜’라는 이름 석 자는 대한민국에 ‘준비된 대통령’을 의미했다. 이를 증명하듯 박 대통령에게는 ‘묻지마’ 지지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레임덕에 들어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사가 난맥이었다. 동시에 ‘창조경제’라는 박근혜노믹스는 정작 경제부처 장관들도 국민들에게 속 시원하게 그 개념을 설명하지 못했다.
![]() |
▲ 박근혜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이었으나 ‘준비된 여왕’은 아니었다. 임기 반환점을 돈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메르스 사태 등 연이은 대형 악재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어려움에 직면했다. |
대통령의 첫 미국 순방에서 ‘대통령의 입’인 청와대 대변인은 성추행 사건에 연루되어 망신살을 탔다. 경제 민주화는 ‘세금 없는 복지’라는 모순적 정책을 만나 허구성이 드러났고, 결국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카드로도 연결되었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났다. 국정원 선거 댓글 사건이 정치권을 블랙홀로 빨아들였다.
그나마 고질적인 종북(從北)세력으로 지목되었던 통합진보당의 RO(Revolution Organization·혁명조직) 이석기의 내란음모가 유죄로 판결나고, 통진당 위헌(違憲)정당 해산 청구가 헌법재판소의 해산 판결로 종결되면서 박근혜 정부에 새로운 동력이 생기는가 싶더니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
세월호는 대한민국을 삼켰다. 대통령의 ‘7시간 추문’이 루머로 확산되었고 한일(韓日)관계는 얼어붙었다. 한미(韓美) 안보관계는 미사일 방어망(MD)을 둘러싼 중국과의 줄다리기에서 눈치 보기로 전락했고, 이완구 총리로 국정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성완종 리스트가 터져 새누리당과 청와대는 그야말로 초상집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메르스 사태로 박근혜 정부는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그렇게 집권 중반에 들어섰다.
하나의 위기가 정리될 무렵이면 다른 위기가 왔다. 반복되는 위기의 순간마다 대통령의 화법은 ‘유체이탈’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6월 중순,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30%대에 이르고 있다. 겉보기에는 그럭 저럭인 것 같지만 ‘박빠’의 지지율을 빼면 바닥 수준이다. 이는 분명한 위기 조짐이다. 박근혜 정부가 한국 정치지형에 건강한 보수정치 세력의 진화와 성장을 견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의 위기 반복에는 스마트한 지지층의 이념적 동조가 부재(不在)하다는 점이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반공 이념은 보수 시민들로부터 공통된 지지를 얻을 수 있지만, 사회·경제정책의 지지를 얻으려면 반공 이념 외에 언론과 오피니언 리더들의 이론적 지지가 중요하다.
경제철학의 不在가 불러온 위기
박근혜 대통령의 초기 경제이념 ‘줄·푸·세’(정부 지출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세금은 낮추자)는 자유시장경제의 성공을 위한 올바른 아젠다였지만, 이를 신자유주의로 매도하는 좌파들의 부당한 공격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2008년 미국 발(發) 금융위기와 2010년 그리스에서 촉발된 유럽 경제위기를 목도했던 공포감에 기인한 바가 컸다.
하지만 미국과 그리스, 스페인 등의 잘못된 정부 규제와 비효율적 복지정책, 비대한 재정지출 등의 문제가 원인이었다는 것을 ‘줄푸세’ 원리로 설명이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경제위기가 ‘줄푸세’의 원칙을 그 나라 정부들이 배반했기 때문이라는 점도 명백했기에, 이는 이념 투쟁으로 돌파할 수 있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런 이념적 대항논리를 가지고 있었던 자유주의 진영을 박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무시했다는 점에 있다. 대신 박 대통령은 2011년경 ‘복지와 재분배’라는 포퓰리즘적 아젠다로 자신의 대권 공약의 이념성을 교체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다는 평가들이 있지만,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복지와 재분배’ 아젠다를 내세웠음에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에게 막판 역전 당하는 위기에 몰렸다. 결국 통진당 이정희 후보의 독단과 ‘나꼼수’로 대변되는 진보좌파의 도가 넘는 반(反)민주주의적 행위에 위기를 느낀 보수진영의 막판 결집이 근소한 차이로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다. 지난 대선에서 야권의 실책이 없었다면 박근혜 대통령도 없었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 시절 내내 보수진영은 여권의 포퓰리즘에 우려를 나타내야 했다. 새누리당은 좌클릭하고 있었고, 2012년 총선에서 박 대통령의 친위대였던 ‘친박연대’가 궤멸한 까닭에 새누리당은 의석수가 줄었다. 그리고 통진당이 대약진을 이뤄냈다. 새누리당의 좌클릭과 박근혜 후보의 ‘복지 분배’, ‘경제민주화’는 국민들로 하여금 대한민국 경제 성공의 이념을 내부로부터 부정하고 통진당에 이끌리던 민주당에게 정책적,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복지 포퓰리즘의 몰락 불러온 비스마르크
국민들 입장에서 복지와 재분배를 하고, 부자들을 옭아매서 서민들을 살찌우겠다면 왜 새누리당을 지지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 의문에 박근혜 후보나 새누리당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다름 아닌 독일 비스마르크의 등극과 몰락에서 그 역사적 교훈을 안겨준다.
낙후된 독일은 보불전쟁의 승리로 프랑스로부터 전쟁 배상금 50억 프랑을 받아 뒤늦게 산업화에 성공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경험했다. 당시의 체제는 자유시장체제였다. 여기에 사회주의 세력이 1875년, 정당을 결성해 독일제국에 등장했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탄압법’을 제정해 독일 사회주의 세력을 억압했고, 그 효과를 봤다. 그런데 불황이 찾아왔다. 비스마르크와 보수 정권은 거리에 넘쳐나는 실업자에 당황했다. 사회주의 세력은 그들 속에서 다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1883년 비스마르크는 고심 끝에 소위 채찍(Peitsche)과 사탕과자(Zuckerbrot)라는 두 가지 상반된 정책을 고안하기에 이른다. 사회주의 정당에 가입하지 않은 노동자를 대상으로 1883년부터 건강보험과 재해보험, 노령보험이라는 3대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했다. 그것이 근대 최초의 사회보장제도와 복지정책의 기원이 됐다.
하지만 당시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엉뚱했다. “노인들은 돈을 준다고 하면 쉽게 설득할 수 있다”라는 비스마르크의 유명한 발언은 현실주의자 비스마르크가 궁극적으로 포퓰리즘에 빠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은 비스마르크의 복지정책에 대해 “한마디로 지배 권력이 지지를 얻기 위해 국민에게 사회적, 정치적 뇌물을 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사탕과자’ 복지정책으로 비스마르크는 성공할 수 있었을까?
사회보장 실시 12년만인 1890년 사회주의 탄압법은 폐지됐고 독일 사회주의당은 마르크스 노선을 공식화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 의해 해임되었다. 복지 수혜를 입은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하에서는 이보다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꾐에 대부분 넘어갔다.
독일제국 초기에 자유주의와 연대했던 비스마르크는 시간이 흐르면서 보호관세를 채택하고 오히려 자유주의를 억압했다. 교회에도 박해를 가했다. 결국 채찍과 사탕과자라는 비스마르크의 복지 포퓰리즘은 사회주의 좌파에 의해 평등의 사회권으로 포장되기에 이른다. 현실주의자인 비스마르크는 이념전(戰)에서 사회주의에 패배했고 교회와 기업가, 그리고 주류세력으로부터도 배척됐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보수 포퓰리즘 교훈은 박근혜 정부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고 있다. 정치는 타협의 대상일 수 있어도 경제 원칙은 타협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경제에는 원리(Principle)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리를 무시한 포퓰리즘 타협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리 만무하다.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의 경제 참모들이 대개 낡은 케인즈식 경제 또는 노동경제학, 후생경제학, 복지경제학과 같은 시장원리로부터 벗어난 경제론자들이라는 점에 있다. ‘사회적 경제’를 주창하는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문제점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총체적 난국을 빚을 수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그가 박근혜 정부의 경제 밑그림을 그린 경제 브레인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유 보수 진영이 반대하는 새누리당의 ‘사회적 경제’에 그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고 있다. 경제에 대해 근본적인 사유가 잘못되었거나, 없는 것 아닌가 의심이 된다. 이제 와서 ‘규제 해제’, ‘경제 활성화’를 정책적 목표로 지향하고 있지만, 그것이 경제민주화와 어떤 관계인지 국민들은 헷갈린다. 자동차의 브레이크와 액셀러레이터를 동시에 밟겠다는 것으로 비쳐질 뿐이다. 그러니 국민들에 대한 소구력이 있을 리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가 잘못된 정책이었음을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고백하고 다시 ‘줄푸세’로 가겠다고 천명하는 것이 소통에 도움이 된다. 그래야만 스마트한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재계와 기업들이 호응해 줄 것이고, 그들이 광고주이기에 언론들도 재계와 기업의 목소리를 반영하게 된다. 성장이 없다면 분배할 것도 없다. 국민들에게 그러한 진실을 설득해야 한다.
![]() |
▲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은 친중-반일, 그리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다. |
박근혜 정부의 또 다른 시급한 문제는 한미(韓美)간, 그리고 한일(韓日)간의 외교안보 교착 상태를 타개하는 일이다. 박근혜 정부는 지나치게 친중(親中) 외교에 기울어져 있다고 보는 것이 미국과 일본의 공통된 시각이다.
혹자는 한국의 대(對)중국 수출과 경제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중국이 우리의 제품과 서비스를 필요로 해서이지, 우리가 중국이 필요 없다는 물자를 생산해서 마치 조선시대 조공(朝貢) 무역하듯이 팔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과 교역에서 중국이 무역 적자를 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사실 중국의 기업들은 한국의 반제품을 사들여 완제품으로 미국과 유럽에 팔아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한국과의 무역 적자가 문제라면 중국이 이를 용인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중국의 눈치를 과도하게 볼 필요가 없다.
더구나 일본과는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한일 간의 국익거래라는 외교의 기본 문제를 아예 포기하고 말았다. 국가 간 외교란 철저하게 국익을 놓고 협상하는 것이며, 어떤 외교적 행위에도 그 목적이 분명하게 정의되어 있어야 한다. 중국의 경우 일본의 과거사를 문제 삼는 것은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견제하고, 아시아를 중화경제권에 포획하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작동하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 일본과 과거사 논쟁을 통해 얻으려는 국익이 무엇인지 모호하다.
외교를 국내 정치의 모멘텀으로 삼으려는 정치는 미숙한 것이다. 국익은 여야를 초월해 추구되는 것이지, 국익을 정권의 지지와 바꾸려는 행위는 어떤 점에서는 매국적이고 반역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 국가의 지도자에게는 ‘국익의 원칙’이 있어야 한다.
슈뢰더의 교훈
2002년 독일이 통일로 심각한 경제 불황에 놓였을 때 당시 사회민주당(SDP)의 수장(首長)이었던 슈뢰더 총리는 ‘아젠다 2010’(Agenda 2010)이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독일병 대수술에 나섰다. 복지를 축소하고 노조의 쟁의권한에 규제를 가했으며, 긴축과 규제 해제를 추진해 나갔다.
이를 두고 독일 노조와 좌파는 ‘동지로부터 등에 칼을 맞았다’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정책’을 편다는 비판이 쇄도했다. 하지만 슈뢰더 총리는 단호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 연연하지 않았다. 결국 슈뢰더 총리는 사민당의 가장 유력한 지지 세력으로부터 버림받는 길을 택하는 조건, 즉 그들이 사민당을 버리는 조건으로 개혁을 성사시켰다. 그 결과 독일 경제는 살아났고, 슈뢰더와 사민당은 다음 총선에서 몰락했다.
미국의 네오콘을 이끈 보수주의 정치철학의 대부 레오 스트라우스는 1958년 <마키아벨리>라는 책에서 마키아벨리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참된 군주란 (마키아벨리의 주장처럼) 백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