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일본이 이길 수밖에 없었던 전쟁
청일전쟁, 일본이 이길 수밖에 없었던 전쟁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7.2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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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 분석] 청일전쟁의 교훈

청일 양국 국가지도부 리더십의 차이가 전쟁의 승패 좌우

● 청국이 일본에 제공한 전쟁 배상금 2억 량은 청국의 3년 치(일본의 4년 치) 세출 예산
● 북양함대의 거함거포에 충격 받은 일본, 해군력 건설에 뛰어들어
● 일본은 천황 주도 하에 인재 해외 유학 보내 서양 학문에 능통한 자가 100여만 명
● 청국군은 오합지졸 무뢰배 집단, 일본군은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정예 국민군 

120년 전 한반도를 놓고 벌인 청일전쟁은 근대 동북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연전연패한 중국(淸)은 떠오르는 태양 일본에게 동북아의 맹주 자리를 내주고 뒷방으로 물러앉았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를 향하는 운명이 된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영 존 알렌과 채이강이 쓴 <청일전기>를 한글로 번역했는데, “이 전쟁으로 한국의 힘과 세력이 약해져 멸망하게 되었고, 이 전쟁으로 한국이 독립을 잃었으므로 한국이 이렇게 된 원인은 갑오전쟁(청일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파했다. 

중국(淸)은 인구와 국토면적, 국력 면에서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대국이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청국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일본에게 패퇴하여 치욕스러운 강화조약을 맺었다. 당시 청국이 일본에 제공한 전쟁 배상금 2억 량은 청국의 3년 치(일본의 4년 치) 세출 예산에 해당하는 엄청난 거액이었다. 중국은 왜 이처럼 참혹한 패전의 수치를 겪어야 했을까. 

우선 양국 지도부의 리더십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일본의 국가지도부는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가쓰 가이슈(勝海舟),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등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뒤질 것이 없는 최강의 면면이었다. 

▲ 청일전쟁에 종군했던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가 그린 풍자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만주족과 漢族의 갈등 

반면, 청국 지도부의 구성을 보면 황실은 만주족이, 군권을 비롯한 실권은 한족(漢族)이 쥐고 있는 등 민족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황실의 리더십도 함풍제(咸豊帝.1850~61 재위)의 후궁 서태후(西太后)가 반세기 동안 섭정을 하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 엉뚱한 인물을 제위에 올리는 등 엉망이었다. 

함풍제의 후궁 서태후는 1856년 황제의 유일한 아들을 낳았다. 황제가 사망하자 당시 6세 된 서태후의 아들이 동치제(同治帝·1861~75 재위)로 즉위하면서 서태후가 섭정을 했다. 동치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제위 계승 원칙을 무시하고 네 살짜리 조카를 양자로 삼아 제위를 넘겨주고 섭정을 했는데, 그가 광서제(光緖帝·1875~1908 재위)다. 

만주족 황실 입장에서 볼 때 일본과 전쟁을 위해서는 군사력을 길러야 했으나, 군권을 운용하는 것은 한족이었다. 때문에 군사력이 강해질 경우 만주족 황실에 도전할 위험이 높아지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특히 청조 말에는 태평천국의 난이 중국 전역을 14년 동안 휩쓸었지만 청국의 정규군인 만주팔기군이 이를 진압하지 못해 망신살이 뻗쳤다. 

이때 한족 출신인 증국번(曾國藩)이 조직한 상군(湘軍), 이홍장(李鴻章)이 조직한 회군(淮軍)이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다. 증국번은 만주족 정권에 도전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자 은퇴했고, 증국번의 군대를 물려받은 이홍장은 실력자로 떠올랐다. 

이홍장은 스승 증국번 사망 후 청국의 군권을 쥔 북양대신에 임명되자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 양무운동을 전개했다. 양무운동은 청국의 정치체계를 유지한 채 군사·과학·산업 분야에서 서구화를 추진하여 외세에 맞서고자 했던 운동이다. 독일, 영국 등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이홍장의 북양군을 훈련시켰고, 서양에서 도입한 무기와 기술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군사력을 손에 쥐게 된다. 

청국이 해군력 건설에 돌입한 것은 1884년 프랑스와 벌인 청불전쟁(1884년 8월부터 1885년 4월까지 베트남 북부의 통킹을 프랑스가 차지하기 위해 청국과 벌인 전쟁)이 계기였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해군력 열세로 속수무책으로 패한 청국은 1885년 진원(鎭遠)·정원(定遠)·제원(濟遠) 등 세 척의 초대형 전함을 구입했고 1887년에는 치원(致遠)·정원(靖遠)·경원(經遠)·내원(來遠) 등 4척을 구입하여 1888년 12월에 북양(北洋)·남양(南洋)·복건(福建)·광동(廣東) 등 4대 함대를 건설했다. 

거함거포 함대 청국이 먼저 건설 

북양함대는 12인치(30.5㎝) 거포를 탑재한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갑 전함인 정원·진원을 주력으로 하는 ‘아시아 최강의 함대’였다. 1886년 북양함대가 일본 나가사키(長崎)항을 친선 방문했을 때 상륙한 청국 수병들이 난동을 부리자 일본 낭인(浪人)들이 청국 수병 5명을 칼로 베는 사건이 발생했다. 격분한 이홍장이 “당장 함포 사격을 하여 나가사키를 부숴버리겠다”고 위협하자 일본 정부가 사과할 정도로 북양함대는 일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북양함대의 거함거포에 충격을 받은 일본도 근대식 함대 건설에 착수했다. 메이지 천황이 함대 건설 성금을 매월 일정액을 지출하고, 문무 관리들도 봉급의 10%를 헌금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일본 의회는 해군 확장 예산이 너무 방대하여 반대했으나 북양함대의 충격으로 해군 확장 예산을 승인했다. 

일본 군부는 정원·진원함 같은 대형 장갑 전함을 단 시간 내에 건설하기는 어렵다고 판단, 빠른 기동력과 속사포로 무장한 쾌속 순양함을 건조했다. 요시노함은 북양함대 주력함과 맞서기 위해 영국 암스트롱 조선소에 주문한 쾌속 순양함으로 배수량 4,160톤, 탑재된 함포는 15㎝ 속사포 4문, 12㎝ 속사포 8문이다. 함포 구경은 북양함대 주력함보다 열세였지만 속력은 22.5노트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군함이었다. 이 배는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1년 전인 1893년 완성되어 일본에 인도되었다. 

청국의 실력자 이홍장은 무기와 탄약을 제조하는 군수공장을 각지에 설립했고, 서양 서적을 번역하고 신식 학교를 설립했으며, 미국과 유럽에 많은 유학생을 보냈다. 그러나 보수 관료들의 반대와 견제로 행정과 정치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양무운동은 체계적으로 추진되지 못했다. 

일본이 강력한 군사력 건설에 매진할 때 만주족 황실은 이홍장의 사병(私兵) 성격이 강한 북양육군과 해군이 증강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 결과 북양함대의 전력 강화를 위한 군함 구입비, 탄약 구입비 등은 모두 서태후의 별장(臣頁和園) 건설비로 전용되어 북양육군과 해군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북양함대 건설 후 10년 동안 청국은 해군에 대한 신규 투자를 하지 못했다. 1891년부터는 함대의 탄약 구입 예산조차 없어 청일전쟁 발발 직전에는 정원과 진원함 주포의 포탄이 세 발밖에 없었다. 일보보다 먼저 거함거포 함대를 건설한 것은 청국이었으나 불철주야 해군 확장에 나선 일본의 노력으로 인해 청일의 해군력은 역전되기 시작했다. 

시중 무뢰배와 정예군의 대결 

청일전쟁에서 청국은 이홍장의 북양육군과 해군이 대부분의 전투를 치렀다. 북양육군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면서 실전 경험은 풍부했으나 정규군 간에 벌이는 본격적인 전투가 아니라 농민 반란군과 싸운 치안유지군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근대적인 정규전을 치르기에는 상당한 문제를 안고 있는 군대였다. 

특히 조선에 파병된 청국군은 정식 훈련을 받지 않은 시중의 무뢰배들이 대부분이었다. 평양 전투에 참전했던 위여귀는 고리대금업이 주업이고 군 지휘관은 부업이었다. 그는 군대 운영비와 병사들의 급료, 식대 등을 고리대금업의 운영자금으로 사용했다.

때문에 위여귀 부대는 청국군 중에서도 군기가 가장 문란하고 부패가 심한 오합지졸의 불량배 집단이었다. 평양의 청군 병력 중 절반 정도가 위여귀의 군대였다. 위여귀는 군비 중 은화 8만 량을 자기 집으로 보내다가 군심(軍心)이 흉흉하자 먼저 달아났다. 

청군은 무기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 어떤 병사는 총, 어떤 병사는 칼과 방패 등으로 무장했다. 또 소총은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서양인들이 쓰다 버린 것을 수입해 온 것으로서, 총과 탄환의 구경이 서로 달라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다. 

청국은 전쟁 준비가 부족하여 외국 상사를 통해 무기를 임시로 조달했는데, 그마저 수송이 제때 이뤄지지 않아 전방에선 총은 있으나 탄약이 없거나, 탄환이 먼저 도착하고 총은 도착하지 않는 등 소동이 벌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청국의 육·해군 장병들은 진법이 무엇인지 모르고, 양식은 중간에서 다 빼앗겼으며 무기에는 이끼와 먼지가 가득했다. 전투에 나선 병사들은 배가 고파 노략질 할 생각만 하고, 적을 만나면 사지를 떨다가 조금이라도 상황이 위태로우면 도주하여 떼강도가 되어 민가를 약탈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오래 전부터 맹훈련을 거듭해 온 정예 병력이었다. 일본군이 무장한 무라타(村田) 소총은 사쓰마 번 출신의 육군 소장 무라타 쓰네요시(村田經芳)가 1880년에 발명했다. 무라타는 1875년 소령 시절 유럽으로 유학을 가서 소총 제조에 관한 연구를 했다.

1880년 직경 6.5㎜ 탄환을 사용하는 단발식 소총을 개발했는데, 이것을 개량해서 1889년 연발식 소총을 새로 만들었다. 무라타 연발총은 후에 이것을 원형으로 한 38식 소총이 개발되기까지 전 세계에서 능률과 정밀도가 가장 우수한 군용 소총으로 꼽혔다. 후에 99식 소총으로 개량되어 1945년까지 일본군의 주력 소총으로 사용되었다. 

인재 양성에서 일본이 청국 압도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러시아 군은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의 지휘 하에 놀라운 기동력으로 육군 강국 프랑스를 격파했다. 당시 프로이센은 신체 건강한 남자를 전원 소집하여 국민군을 건설했고, 이를 바탕으로 전쟁에서 승리했다. 보불전쟁 후 세계 각국은 프러시아 군제를 받아들여 국민군을 건설했다. 

일본도 프러시아 제도를 수용하여 누구나 스무 살이 되면 군 복무를 의무화했다. 기간은 현역으로 3년(해군은 4년) 간 근무한 후 예비군 4년(해군은 3년), 국방의용군으로 5년을 복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17세부터 40세 사이의 모든 남자는 국민군에 편입되었다. 때문에 일본군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병사의 자질이 뛰어났다. 

병사의 자질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전쟁 상대국 관련 첩보에서도 착실한 준비를 해 나갔다.  일본은 15년 전부터 청국 해안을 비롯한 각 지역의 내부 사정을 탐지하여 신문에 자세히 알렸다. 특히 일본 육군 참모본부 소속 첩자들의 활약으로 사전에 군사작전을 위한 지도를 상세히 그려 지휘관들에게 제공했다.

일본군은 모자 속에 청국의 내륙 지도를 가지고 다니다가 어느 지역에 진출하면 그 지방 지도를 펼쳐보며 작전을 펼쳤다. 청군은 자기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지도가 없어 원활한 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일본군은 지도뿐만 아니라 군중의 움직임과 방어할 방법까지도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청국과 일본은 1860년을 전후로 서양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근대화에 나섰다. 양국은 서양 제도를 모방하여 각 급 학교를 설치하고 서양의 명사나 교수 등을 초빙하여 근대식 교육을 시작했다. 청국은 외국어 교육을 위해 북경에 동문관(同文館)을, 상해에는 광방언관(廣方言館), 광주(廣州)에는 서학관을 설치하고 서양 교사를 초빙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청국은 가르치는 시늉만 하고, 학생들을 외국에 유학을 보내 공부 시키다가 한두 번 시행한 후 중지하고 말았다.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恭親王)이 서양 전문가를 초빙하여 군대를 훈련시키고, 무기 제조 전문가를 초빙하여 강남 제조소에서 청국 사람을 가르치고 증기선과 기계를 제조했다. 그러자 일부 대신들이 “대국이 서양 오랑캐에게 배우는 것이 수치스럽지도 않은가” 하고 집요하게 방해공작을 했다. 이로 인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교육기관을 폐지하고 말았다. 

반면에 일본은 1870년에 천황이 수십 명의 국비 유학생을 선발하여 서양에 보내 유명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 후 해마다 많은 인재가 해외 유학하고, 서양인 전문가를 초빙하여 각 관청의 고문관으로 임명하여 근대화를 추진했다.

당시 외국 유학을 다녀온 일본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독일의 명장(名將) 몰트케의 제자다. 일본 정부는 재정을 아끼지 않고 인재를 길렀는데, 해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 학문과 재주에 따라 관직에 임명했다.  그 결과 서양 학문에 능통한 자가 100여 만에 이르렀다. 

또 나폴레옹이 만든 통상법을 비롯한 국제법을 철두철미하게 공부했다. 막부를 타도하고 봉건 일본을 메이지 유신으로 이끈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검술로 명성을 날리던 사무라이였다. 어느 날 그가 긴 칼을 차고 있는 친구에게 “장검의 시대는 지나갔다. 나처럼 짧은 칼을 지녀라”라고 말했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짧은 칼을 찬 친구를 보자 “단검의 시대도 지났어. 나처럼 권총을 갖고 다녀”라고 했다. 세 번째 만났을 때는 책 한 권을 보여주며 “권총도 소용없네. 국제법을 익히게” 라고 했다. 그는 선박의 주권이 선박 소유국에 있다는 국제법에 매료되어 “작은 일본이 국토를 평창하려면 많은 선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국제법 신봉자였다. 

북양함대, 근대식 해전 훈련 부족 

정여창 제독이 지휘하는 북양함대는 당시 12인치(30.5㎝) 거포를 탑재한 세계 최대 규모의 장갑 전함인 정원·진원을 주력으로 하는 ‘아시아 최강의 함대’였다. 정원·진원함은 뱃전의 장갑이 30㎝ 강철판으로 되어 있어 어지간한 포탄에 맞아도 튕겨나갈 정도라서 불침함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좌우 현측에 설치된 주포 4문이 전방을 향해 있고, 뱃머리에 거대한 충각을 장착하여 뱃머리로 적 함정을 들이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빠르게 이동하는 목표물을 조준 사격하는 근대 해전에는 적응하기 어려운 약점을 안고 있었다.  

북양함대의 30㎝ 강철 장갑은 당시 일본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함포로는 파괴할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정원·진원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는 32㎝ 단장포 순양함을 프랑스에 주문했다.

이것이 작은 선체에 거대한 주포를 1문만 달랑 탑재한 마츠시마 급 순양함이다. 마츠시마 급은 총 3척이 건조되었는데, 일본의 3대 명승지인 이츠쿠시마(嚴島), 마츠시마(松島), 하시다테(橋立)의 이름을 따서 지어 이른바 삼경함(三景艦)이라 불렸다. 

그런데 마츠시마 급 순양함은 소형 선체에 대구경 함포 1문을 장비하는 바람에 포탑을 돌리면 배가 기울고 포를 쏘면 배의 침로가 바뀌는 등 문제가 속출했다. 실제로 황해 해전에서 32㎝ 주포를 발사한 숫자가 이츠쿠시마 5발, 하시다테는 4발에 불과했다. 

일본 군부는 정원·진원함 같은 거함을 단 시간 내에 건설하기는 어렵다고 판단, 빠른 기동력과 속사포로 무장한 쾌속 순양함을 건조했다. 일본 해군은 경쾌한 속도와 속사포로 거포로 무장한 청국 전함을 대항한다는 전략이었다. 

북양함대는 영국의 해군 대령 랭 윌리엄을 초빙하여 훈련시켰는데 그의 직책이 처음에는 부제독이었으나 고문으로 내려앉자 사임하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홍장은 랭 윌리엄의 후임으로 프러시아의 육군 엔지니어 폰 한네켄을 기용했다. 폰 한네켄은 포대와 요새 구축 전문가로서 여순과 위해위 포대를 설계하고 축조하는 공을 세웠으나 해군 전투 훈련에는 문외한이었다. 

이밖에도 북양함대에는 외국인 고문으로 독일인 엔지니어 알 브레히트, 독일 포술 전문가 헤크만, 미국인 항해술 교관 필로 맥기핀, 영국 엔지니어 파비스 등이 근무하고 있었다. 해군 출신으로는 영국인 예비역 소위 니컬러스가 있었는데, 그는 중국 해관에서 밀수 단속업무를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이처럼 해군 전문가 아닌 사람들이 근무했기 때문에 북양함대는 근대식 해전 훈련이 부족했다. 

1895년 7월 영국의 <그림그린>이란 월간지는 황해 해전을 자세히 소개했다. 진원함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미국인 필로 맥기핀(미국 해군 소령)은 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내가 진원함 함교에서 부두와의 거리를 측량하고 있을 때 갑자기 일본 함정이 쏜 포탄 한 발이 내가 타고 있는 배를 향해 날아오다 바다에 떨어지더니 다시 솟구쳐 배를 훌쩍 뛰어넘어 물속에 처박혔다. 함정에 타고 있던 장교와 병사들을 내려다보니 기관실에 있는 복주(福州·푸저우) 사람들이 함포를 보호하는 장갑 철판 뒤에 숨어 온몸을 떨며 얼굴은 잿빛으로 변했다.

마침내 일본군의 두 번째 포탄이 우리 배에 명중하여 함정이 크게 요동하자 복주 사람들은 이미 도망하여 어디로 숨었는지 그림자도 볼 수 없고 우리 배의 포성은 그치고 말았다. 

일본 해군, 조함술 뛰어나 

내가 황급히 갑판으로 내려가 함포병을 도와 포를 쏘게 하려 하자 장관 임태증이 어쩔 줄을 모르고 갑판에 배를 깔고 엎드려 나무아미타불을 외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임태증은 군함을 지휘하는 사령관인데, 우는 어린아이 같이 심약하고 겁이 많아 실패할 수밖에 없으니 깊이 탄식할 뿐이었다.… 

마침내 일본군이 쏘는 포탄이 비 오듯 날아오자 청국 수병들이 다리를 떨며 어쩔 줄을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한참 전투가 진행되는 도중에 제원함이 옆에 있다가 진을 뚫고 먼저 도주했고, 평원함도 틈을 타서 달아났다. 북양함대 소속의 배 여섯 척은 압록강 가운데 멀리 떨어져 보면서도 도와주지 않았다. 

북양함대 소속 함정 중 일본 군함과 전투한 배는 여덟 척인데 반해 일본군은 접전하는 크고 작은 군함이 13척이었다. 청국 육군의 포탄은 제조 과정에서 협잡배가 화약은 넣지 않고 진흙과 모래를 집어넣어 전쟁에서 낭패를 당했다.

그런데 해군 포탄은 육군 포탄보다는 성능이 우수했으나 화약의 폭발력이 약해 일본 함정을 맞춰도 파괴력이 없어 낭패를 당했으며, 함정의 기동성이 떨어져 더 많은 피해를 당했다. 

반면에 일본은 조함 실력이 뛰어나 함정 운용을 말 달리듯 하여 모든 동작을 자기들 마음먹은 대로 했다. 전투 중 한 척이 위기에 처하면 두세 척이 달려들어 구원했다. 북양함대의 배는 한 척이 위기에 처하면 다른 배들이 구원하지 못했고, 오히려 일본 함정이 몇 척씩 달려들어 에워싸고 포격을 해댔다.

게다가 청국 함정에는 거포가 없어서 일본 함정을 깨뜨리지 못해 애를 먹었다. 정원, 진원 두 군함은 세계에 제일 견고한 군함이라서 일본군의 함포 400여 발을 맞았으나 크게 파괴되지 않았다.” 

청국은 위해위 전투에서 패전한 후 살아남은 북양함대 함정들은 모조리 일본군에게 노획되었다. 그 배들은 일본 연합함대 소속으로 바뀌어 진원·제원·평원함 등 세 척은 1904년 러일전쟁의 여순 공성전, 황해 해전, 쓰시마 해전에 참전하여 맹활약했다.

제원과 평원함은 러시아 해군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고, 진원함은 러일전쟁 종전 후 이세(伊勢)만에서 침몰했다. 일본 해군은 진원함의 닻과 사슬을 인양하여 도쿄의 우에노공원에 전시해놓았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하여 항복한 후 일본 정부는 중국에 34척의 소형 함정을 배상금 명목으로 반환했다. 그 때 도쿄 우에노공원에 전시해놓았던 진원함의 닻과 사슬, 포탄도 함께 돌려줬다. 진원함의 닻은 현재 북경의 군사혁명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청에 대한 일본의 배상 요구는 지나친 측면이 있었다. 국제법상 승전국이 패전국에 배상을 요구하는 것에는 일정한 한도가 있는데, 일본은 전례가 없는 가혹한 조건을 제시했다. 그 중 대만과 팽호(澎湖·펑후)열도 및 주변 도서를 할양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심각한 영토(영해)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센카쿠 제도(중국명 釣魚島·댜오위다오)가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확장을 경계한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삼국간섭) 일본이 차지한 요동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895년 5월 4일 일본은 러시아·프랑스·독일의 강력한 압력을 받아 요동반도 포기를 결정했다.

일본은 피의 대가로 얻은 요동반도를 반환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청일전쟁에 참여했던 100여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자살로 항의했다. 이 사건 직후부터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신무기로 무장한 6개 사단을 증강했고, 해군의 규모도 크게 확장했다. 

청일전쟁의 교훈을 아는지 모르는지… 

삼국간섭이 성공하여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하자 이에 대한 보상으로 독일은 산동반도 남쪽 지역인 교주(膠州·자오저우)만을 차지했고, 러시아는 여순·대련 두 항구를 조차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세력 균형을 위해 청국에 위해위의 조차를 요구했다. 결국 1898년 영국은 유공도를 포함한 전 위해위 항만을 25년간 조차하여 영국 동양함대의 기지로 삼았다. 일본은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외교전에서 패배한 셈이다. 

청일전쟁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오늘, 동북아에서는 시진핑(習近平)의 중국과 아베 신조(安倍晋三)의 일본이 청일전쟁 당시 빼앗긴 센카쿠 열도를 둘러싸고 격돌을 예고하고 있다. 역사는 돌고 도는데, 그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있던 한반도는 아직도 분단 상태 하에서 지도자들은 국제 정세가 어찌 돌아가는지 관심도 없다. 

정치권은 여야(與野)로, 진보와 보수로, 대통령과 의회로 편을 갈라 물고 뜯는 정쟁(政爭)을 벌이느라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다. 작금의 행태를 보면 우리는 구한말의 고종과 민비, 대원군의 무능한 리더십과 당시 지도자들의 한심한 작태를 비판할 자격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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