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과 일본이 부추긴 동학 농민봉기
대원군과 일본이 부추긴 동학 농민봉기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7.24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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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동학 농민운동과 대원군과 청일전쟁

대원군은 재집권 위해, 일본은 파병 구실 만들기 위해 동학 농민봉기 촉발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되어 있다.’ 

동학 농민운동을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1894년 2월 하순,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고부군의 동학교도들과 농민들이 봉기할 때만 해도 그 뜻이 숭고했다.

그런데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뭉친 농민군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로 무장하고 5월 31일(음력으로는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면서 외세 개입이라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전주성이 함락되기 20일 전인 5월 10일, 동학 농민군은 오늘날의 전북 정읍시 이평면 황토현에서 이틀에 걸친 처절한 전투 끝에 관군에 대승을 거뒀다. 그 유명한 ‘황토현 전투’다.

황토현에서의 참패는 조선 조정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된 홍계훈의 경군(京軍)은 5월 28일 장성에서 농민군과 접전했으나 대패했고, 여세를 몰아 3만여 농민군은 5월 31일 장날 장꾼들 틈에 섞여 전주성 안으로 들어온 다음 순식간에 성을 점령했다. 

고부 봉기 이후 3개월 만에 조선왕조의 발상지이자 전라도 감영이 설치되어 있는 수부(首府)도시를 농민군들에게 무력으로 빼앗기자 농민 봉기조차 진압할 힘이 없던 조선 조정은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은 각의에서 재빨리 파병을 결정했고, 군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조선에서 청국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계획했다. 당시 일본은 조선에 출병할 구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농민 봉기로 인해 절호의 기회가 굴러온 것이다. 

동학 농민운동은 부패한 지방 관리들의 학정에 견디다 못해 농민들이 봉기한 사건인데, 결과적으로는 이 땅에 청일 양국 군대를 불러들여 전쟁을 야기한 도화선이 되었다.

일본은 청일 양국군이 동시에 조선에 파병되면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보고, 이 기회에 조선에서 청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대병력을 먼저 파병했다. 조선에 청일 양군이 파병되어 충돌 위험이 높아지자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외세에 군사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 

대원군과 전봉준 공모설 

흥미로운 것은 1894년 농민 봉기 과정에서 대원군이 동학 접주 전봉준과 전라도 고부의 유생들과 공모하여 농민 봉기를 촉발시켰을 가능성이다. 배항섭이 ‘역사비평’ 잡지에 쓴 〈전봉준과 대원군의 ‘밀약설’ 고찰〉(1997년 겨울호)에 의하면 1893년 2월 광화문에서 동학교도의 복합 상소가 일어났을 때부터 중앙 정계와 서울에 주재한 각국 외교관들 사이에 동학교도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배항섭은 또 전봉준이 젊은 시절 사회개혁의 뜻을 품고 여러 지방을 순회할 때 서울에서 대원군을 만난 기록도 있다고 밝혔다. <동학과 동학란>의 저자 김상기도 대원군과 전봉준의 밀약설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전봉준이 전주 구미리에 살던 때 대원군의 밀사 나성산이 전봉준을 찾아와 얼마 동안 머물면서 전봉준·김개남·송희옥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모의하던 것을 목격하였다. 하여 대원군과의 내응밀약이 갑오 이전에 맺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와 천도교 기록을 종합해 보면 전봉준은 1891년부터 1893년까지 대원군의 거처인 운현궁의 문객(門客)이었는데, 대원군은 전봉준의 애국충정에 감명을 받고 민 씨 척족 정부에 반기를 들도록 권유했다.

전봉준은 대원군과 밀약을 한 다음 귀향하여 전주 근처 구미리에서 김개남, 송해옥 등과 동학 농민군 봉기를 모의했다. 대원군은 이때 밀사 나성산을 구미리에 보내 전봉준의 거사를 지원했다. 그 결과 동학 농민군은 고부에서의 1차 봉기 때 민 씨 척족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권좌에 복귀시킬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대원군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출동한 청국군에게 체포되어 중국으로 끌려가 4년여 감금 생활을 하다가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며 재기를 도모하던 중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의기투합 가능성이 상존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 팽창주의자들은 동학 농민군 봉기 시초부터 조선의 난리를 이용하여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진출하기 위해 비밀리에 행동을 개시했다. 

구한말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사의 특파원으로 조선에서 취재 활동을 벌인 프레드릭 매켄지는 자신의 저서 <대한제국의 비극>에서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의 공통된 견해에 의하면 동학도들의 봉기는 청국과 문제를 야기하려는 일인들에 의해 조장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군국주의 단체들, 동학군 내에 침투 시도 

작가 천순천(陳舜臣)도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동학에 접근하려 했음을 자신의 작품 <청일전쟁>에서 주장하고 있다. 일본 군국주의자 입장에서는 동학당이 계속 문제를 야기해야 일본군의 조선 출병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군국주의 행동대들이 동학군 내에 침투하여 그들을 지도하려 했다는 것이다. 

천순천은 천우협(天佑俠)이라는 일본 우익단체 소속의 다나카 시로(田中侍郞),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구츠우 슈스케(葛生修亮) 등 결사대원들이 1894년 5월 10일 벌어진 황토현 전투 당시 보부상으로 가장하여 침투하려 했으나 일본인에 의한 동학당 조종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록으로 미뤄볼 때 일본 군국주의 단체들이 어떤 형식으로든 동학 농민군에 접근하여 농민 봉기를 부추겨 일본의 출병을 유도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전봉준은 1894년 12월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전한 후 전라도 순창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당시 법부대신 서광범과의 독대에서 대원군과의 접촉 사실을 끝까지 부인했다. 다음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이다. 

‘서광범 :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봉준 : 어찌 척양척왜(斥洋斥倭)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 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 있는 몇 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기존 내각을 무너뜨리고 대원군을 친일 개화파 정부의 총리에 임명했다. 일본은 대원군을 배후조종하여 일본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자신의 집권 이틀 후 일본군이 풍도 앞바다에서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대원군은 앞에서는 일본에 협조하는 척하면서 뒤에서는 일본에 저항하는 양면적 처신으로 맞섰다. 

대원군은 평양에 집결한 청군이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판단, 극비리에 평안감사 민병석에게 서한을 보내 청국 군대가 승리하길 고대한다는 밀서를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국(上國)은 많은 원병을 보내시어 우리의 종사와 궁전을 보호해 주시고, 또 일본인에게 아부하여 매국행위를 감행한 간악한 무리들을 하루빨리 일소하여 이 위기를 구제해 주시기를 피눈물로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 

▲ 공주 우금치 전투 민족기록화.

동학군 2차 봉기 부추긴 대원군 

그러나 평양전투에서 청군은 대패하여 조선에서 물러났고, 대원군이 청국 사령관에게 보낸 밀서는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에게 노획되었다. 대원군은 또 삼남 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군과 함께 일본군을 협공하기 위해 삼남 지방의 명망 있는 양반관료의 후예 및 동학교단 지도자들에게 밀사를 보냈다. 

양상현·왕현종·정진영이 공동 연구한 ‘농민전쟁기 국내 지배세력의 동향’에 의하면 대원군이 1894년 8월 선무사를 파견하여 전봉준, 김개남 등 농민군 지휘부와 접촉하여 농민군 봉기를 논의했다고 한다.

대원군이 선무사로 보낸 이건영이 전봉준에게 “왜구가 궐내를 범하고 종사에 화가 미쳐 명맥이 조석에 달려 있으니…너희들이 만약 (서울로) 오지 않으면 화환이 기필코 당도할 것”이라는 내용의 밀서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또 이건영을 김개남에게 보내 “기병(起兵)하여 서울에 올라오라. 이것이 바로 국태공(흥선대원군)의 진의(眞意)”라고 의병 궐기를 호소했다고 한다. 

이러한 대원군의 호소가 전봉준의 마음을 움직여 10월 중순부터 동학의 남접(南接)세력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했다. 남접의 봉기에 자극받은 손병희 등 북접(北接) 동학 지도부도 전봉준과 협력하여 궐기했다. 그 결과 11월 7일경 16만7000명에 달하는 대규모의 동학 항일의병이 논산에 집결, 북상을 시도했다. 

일본은 9월 하순 대원군과 동학도 간의 비밀 접촉 사실을 파악하고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동안 대원군을 두둔했던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가 본국으로 소환되고 10월 27일 일본 정계의 거물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신임 공사로 부임했다.

이노우에는 일본에서 파병된 1000여 명의 후비보병 제19연대를 동원하여 동학 의병 토벌에 나섰다. 동학 의병은 11월 18일부터 12월 31일까지 공주와 천안 사이에서 잘 훈련되고 우수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조선 관군을 맞아 결전을 벌였으나 참패했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군은 12월 4일부터 7일까지 공주 근처의 우금치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조직과 훈련의 미숙, 화력의 절대 열세로 대패했다. 전봉준은 12월 27일 밤 전라남도 순창에서 유생 한신현이 이끄는 지방 민병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또 다른 동학 의병 지도자 김개남은 전봉준이 생포된 날 태인에서 붙잡혀 즉결 처형되었다. 그의 잘린 머리는 1895년 1월 22일 서울 거리에 내걸렸다. 

대원군과 그의 손자 이준용은 11월 말 자진 사퇴를 강요당했으며, 12월 17일에는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 개화파 관료 김홍집, 박영효를 중심으로 친일 내각이 출범했다. 이들은 삼국간섭 직후인 1895년 4월 23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을 처형함으로써 청일전쟁 중 조선에서 벌어졌던 항일운동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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