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의 中華(중화) 질서 무너뜨린 청일전쟁
동북아의 中華(중화) 질서 무너뜨린 청일전쟁
  • 김광동 편집위원
  • 승인 2015.07.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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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길] 청일전쟁 120년, 그 후

유럽의 독립적 주권국가 체제는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출발,

동아시아는 250년이 지난 청일전쟁(1895) 종결로 시작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장·미래한국 편집위원

청일전쟁에서 굴욕적으로 패배한 청(淸)이 일본과 맺은 시모노세키(下關)조약의 제1조는 ‘조선은 독립자주국임을 확인한다’는 것과 ‘조선은 청에게 하던 조공·헌상·전례를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청과 일본의 세계사적 전쟁의 결과는 한반도 문제로 귀결되었다. 본질은 중국이 동북아에서도 국제질서를 인정하고 일본을 또 다른 중심축임을 만천하에 고한 것이다. 

그 전까지 청국의 세계관인 천하관(天下觀)이란 중국이란 중심과 주변의 속방과 변방으로 구성된 중화관(中華觀)이었다. 그러나 그런 천하관은 서구 과학문명과 군사력 앞에 지속될 수 없었다. 1842년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하여 국제무대에서의 중화체제는 폐기된다.  

그러나 그것은 유럽국가와의 관계에 한했던 것이다. 동북아 지역에서의 중화체제적 질서는 바뀌지 않다가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하며 중국은 동북아에서도 중화가 아닌, 하나의 국가이고 국제질서의 일부임을 인정했다. 

1895년까지 청과 조선의 관계란 종주국과 속방이자 동이(東夷)라는 중심-주변관계였다. 그것은 조공(朝貢) 관계나 왕과 왕비, 세자에 대한 책봉(冊封) 수준을 뛰어넘어 국방권과 외교권의 배제 수준이었다. 예를 들면 1882년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리훙장)의 오른팔인 원세개(袁世凱·위안스카이)는 몇 백 명의 군사를 끌고 와서 조선 국왕의 아버지(父)이자 최고 실력자인 흥선대원군을 납치해가는 수준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원군은 하루아침에 구금되어 위리안치 신세가 되고 말았고, 청국군에 의해 중국으로 끌려가 천진(天津·톈진) 주변에 구금되었다가 3년 만에 풀려났다. 국왕 고종과 민왕비는 그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고, 혹시 본인도 그렇게 될까봐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무너진 국가 자존 

또 다른 예로 1885년 영국이 지금의 거문도(영국명 Hamilton)에 해군기지를 만들어 러시아가 구축하는 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와 대결하는 과정에서도 영국은 조선에 외교문서를 보내지 않고 청국에 보냈다. 청국은 조선에 문의도 않고 조성되는 해군기지의 사용 목적이 종결되는 대로 가급적 빨리 비워달라는 것만을 영국에 요청했다. 

국왕의 아버지이자 최고 실력자가 몇 년 간 납치 감금되고, 우리 영토가 점령되어 외국군이 주둔하는 상황에서도 모른척하고 있어야 했던 조선에서 주권국가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조선은 중국 질서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다가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에 의해 주권국가의 반열에 올려졌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동아시아에도 국제질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그 결과의 연장선에서 만들어진 나라가 대한제국(1897)이다. 청의 연호를 폐기하고 중국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영은문(迎恩門) 대신 독립문이 세워지고, 봉건적 속방에서 근대적 왕조국가로 재출발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에 근대적 주권국가 체제가 시작되고 조선이 독립국이 된 것은 청일전쟁의 결과다. 유럽의 봉건 영주들 간의 30년 전쟁이 종결되며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지면서 유럽에 독립적 주권국가 체제가 만들어졌던 것이 동아시아에서는 250년이 지난 청일전쟁(1895) 종결로 시작되었다. 

조선이 국제질서의 주권국이 된 것은 스스로의 힘의 아니라 일본이 만든 힘의 결과였다.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명나라에게 보낸 국서에 ‘일본 국왕 신(臣) 미나모토’로 했던 것에서 보듯 일본도 15세기까지는 중국을 종주국으로 대우했지만, 16세기부터 일본은 중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이 조선을 독립국 대우로 만든 것도 대륙 진출을 도모하기 위한 첫걸음이자 발판이었다.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전쟁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만들어진 힘과 위상으로 러시아와의 전쟁(1905)까지 승리로 이끈 이후 조선 합병(1910)과 연이어 만주국(1931)과 중국대륙(1937)은 물론 태평양 전역을 대상으로 침략전쟁(1941)에 나섰다. 청일전쟁까지는 ‘중국의 속방’이던 조선은 주권국가가 되자마자 이번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고 미국에 의한 일본 패망 때(1945)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이 미국에 항복함에 따라 힘의 공백이 생긴 한반도는 다시 스탈린의 야욕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공산제국을 만든 전체주의자 스탈린은 수많은 희생을 치르며 전쟁하던 미국을 대상으로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 무엇을 줄 것이냐고 끈질기게 요구했다. 결국 일본을 대상으로 단 6일간의 태평양전쟁 참전 대가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차지할 수 있었다. 

동유럽 전역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공산군을 주둔시킨 지역은 모두 공산 위성국으로 전락했고 공산주의체제가 태어났다. 한반도의 38도선 이북에 만들어진 김일성 권력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곧 스탈린 체제가 공산제국주의를 만들며 확장시킨 제국의 연장선이었다. 

중화체제 재구축으로 나가는 중국 

1945년, 소련이 만주에 만들어놓은 고강(高岡) 소비에트 정부는 모택동군을 지원하면서 결국 1949년 중국 전역을 공산체제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일본이 빠져나가고 미국이 못 미치는 영역에 중국이든 북한이든 스탈린 공산주의의 힘이 채워진 것이다. 그 중국은 1950년 한국전쟁에 불법 개입하고 20만의 대규모 희생으로 ‘스탈린의 북한’을 ‘모택동(毛澤東·마오쩌둥)의 북한’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비록 스탈린 공산체제의 힘으로 권력도 잡고, 통일도 이룬 중국 공산당이지만 이젠 경제력과 인구를 기반으로 청일전쟁 이전의 동북아 질서로의 복귀를 꿈꾸고 있다. 중국은 일본을 무릎 꿇게 만들고 군 현대화와 해군 투사력의 확장과 공군 전력 강화로 한 발짝씩 나아가며 글로벌 파워로서 미국에 신형 대국관계를 요구하고 있다. 

6·25 전쟁 개입으로 스탈린으로부터 한반도 북부의 헤게모니를 회복한 중국은 이제 한국을 포함한 한반도 전역과 동북아 지역에서 청일전쟁 이전의 중화체제를 재구축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청일전쟁 이후 전개된 동북아 질서와 그 이후 전개된 120년의 질서 변화는 중화질서의 끝단에 붙은 대한민국에게 자주독립과 문명 번영을 위해서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거문도 사건의 진상 

영국과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거문도의 전략적 가치를 주목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이홍장의 추천으로 조선에 와서 외무협판(오늘날의 외교부 차관) 직을 맡게 된 독일인 묄렌도르프는 청국은 일본의 야심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할 힘이 없고, 미국도 군사력이 없으며, 영국은 친일적이니 조선이 자주독립을 유지하려면 강대국인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고종은 묄렌도르프의 건의를 받아들여 청일 간에 전쟁이 벌어질 경우 조선을 보호해줄 것을 러시아에 요청하고, 그 대가로 한반도 내에 부동항을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러시아 정부에 전달하려 했다. 이것이 조선과 러시아의 밀약설이다. 

이 정보가 새 나가자 영국은 러시아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1885년 3월 1일 군함 세 척을 보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고 해밀턴 항이라고 명명했다. 열흘 후 청나라 주재 영국 공사 오코너는 러시아의 불법 점령에 대비하여 잠시 영국군이 거문도에 머무는 것이라고 조선에 알렸다. 그러나 영국군은 그로부터 2년 후인 1887년 2월 27일에 러시아로부터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철수했다.

청일전쟁의 후속편 러일전쟁 

청나라는 신흥국 일본에게 힘 한 번 못쓰고 패하면서 본격적인 서구 열강의 먹잇감으로 전락했고, 오랜 기간 지속되어 온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는 붕괴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급부상은 서양 열강들의 강렬한 견제를 유발시켰다.

1860년대 이후 동진정책을 펴온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 지 1주일 후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요동(遼東·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삼국간섭의 주도권을 행사한 나라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일본의 행동이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던 흑룡강성(黑龍江省·헤이룽장성)을 위협하고 중국 분할의 도화선이 될 것을 우려하여 간섭 정책을 밀고 나갔다.

1895년 4월 23일 히트로보 러시아 공사, 구트슈미트 독일 공사, 알만 프랑스 공사가 일본 외무성을 방문하여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은 ①청나라 수도를 위험하게 하고 ②조선의 독립을 유명무실하게 하며 ③극동의 영구 평화에 장애를 가져온다는 이유를 들어 포기를 권고했다. 일본은 독자적으로 세 나라와 대항하여 싸울 힘이 부족하다는 냉혹한 현실을 절감하고 요동반도를 반환했다.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①요동반도를 타국에 할양하지 말 것 ②요동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은화 5000만 량을 제공할 것 등을  청에 요구했으나 삼국간섭에 의해 ①항은 철회되고 지급하는 은화도 3000만 량으로 감액되었다. 청국은 삼국간섭 덕분에 요동반도를 돌려받았으나, 그 대신 3국에 새로운 이권을 내줘야 했다.

러시아는 만주 동청철도 부설권, 1898년에는 여순(旅順·뤼순)과 대련(大連·다롄)항 조차권을 얻었고, 독일은 산동반도 남쪽의 교주(膠州·자오저우)만을 차지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세력 균형을 위해 1898년 유공도(劉公島·류궁다오)를 포함한 위해위(威海衛·웨이하이웨이) 항만을 조차하여 영국 동양함대의 기지로 삼았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친러 세력이 일어났다. 

일본은 피의 대가로 얻은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열강들의 압력에 의해 반환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품었고, 청일전쟁에 참전했던 100여 명의 장교와 사병들이 자살로 항의했다.

이 사건 직후부터 일본은 “와신상담하여 하루속히 국력을 배양하자”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신무기로 무장한 6개 사단을 증강했고, 해군의 규모도 크게 확장했다. 삼국간섭은 결국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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