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청국보다 먼저 조선 파병
일본, 청국보다 먼저 조선 파병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7.2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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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 일본군의 조선 파병과정 정밀 복기

일본의 계략에 넘어간 원세개, 청군 조선 파병 결정. 

일본 군부, 이를 이용하여 조선에 대부대 

파병 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전쟁 일으켜   

지금으로부터 121년 전인 1894년 6월 5일, 일본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가 지휘하는 제9혼성여단 병력 5000여 명이 제물포(현재의 인천항)에 상륙했다. 상륙 목적은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주(駐) 조선 공사의 귀임 보호 명목이었다.

이어 6월 28일과 7월 10일에 연이어 일본군 대부대가 상륙했다. 7월 10일 상륙한 병력은 혼성여단 전투요원과 전선가설대, 군악대, 운송선 승조원 등이었다. 전선가설대와 군악대 등은 파병 목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병력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군 병력 수는 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지금까지 우리는 1894년 6월 일본군의 조선 파병은 동학 농민운동의 진압을 위해 조선 조정이 청국에 파병 요청을 했고, 청국이 파병하자 일본군도 천진(天津)조약에 의거하여 조선에 병력을 보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정황을 정밀 복기하면 일본이 청국보다 먼저 파병을 결정하고 대병력을 먼저 조선에 보낸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 드러난다. 

▲ 청일전쟁 당시 영국 주간지 <더 그래픽>의 특파원으로 종군한 프랑스의 풍자화가 조르주 비고가 청일전쟁 무렵의 동북아 정세를 그린 그림. 작은 나라 조선을 낚고자 하는 일본과 청국, 그리고 틈만 나면 옆에서 가로채고자 하는 러시아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원세개, 일본 계략에 넘어가 청군 조선 파병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공격한 1894년 5월 31일, 일본 의회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여 메이지 정부 최대의 정치적 위기가 닥쳤다. 이 와중에 조선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한다는 극비 정보를 입수한 일본 정부는 이것이 의회와 국민의 관심을 해외로 돌릴 수 있는 하늘이 준 기회라고 판단했다. 

6월 2일 일본 외무성은 주조선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의 급전(急電)을 통해 조선 조정이 원세개(袁世凱)에게 청국군 파병을 요구하려 한다는 정보를 보고 받자 수상 이토 히로부미는 각료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육군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는 청일 양국이 조선에 파병하면 전쟁은 피할 수 없으며, 이 경우 단기전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일본 외상 무쓰 무네미쓰(陸奧宗光)의 회고록 <건건록(蹇蹇錄)>에 의하면 6월 2일 밤 외상 관저에서 무쓰 외상과 가와카미 참모차장, 하야시 다다스(林董) 외무차관이 참석한 비밀회의가 열렸다. 회의 주재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승리하기 위한 방법”의 논의이었다. 

조선 정부는 6월 3일에 정식으로 청국에 파병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것은 주조선 일본 대리공사 스기무라 후카시의 계략에 원세개가 넘어간 결과였다. 스기무라는 일본군의 조선 파병 기회를 만들기 위해 원세개에게 “귀국 정부는 어찌하여 조선의 난을 평정하지 않는가”하고 원세개를 부추겼다. 이 말을 들은 원세개는 청국군을 동원해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여 종주국의 권위를 과시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6월 4일 원세개로부터 파병 요청서를 받은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李洪章)은 동학 농민군을 빨리 진압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 안정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청국 정부는 6월 5일 정식으로 조선에 파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다음날인 6월 6일 섭사성(葉士成)이 선발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발했고, 주일 청국 공사 왕봉조(汪鳳藻)에게 훈령을 내려 천진조약에 따라 청군의 조선 파병 사실을 일본에 통지했다. 

일본, 청군보다 먼저 조선에 대병력 보내 

일본 군부의 팽창주의자들은 동학 농민군의 봉기 시초부터 조선에서의 난리를 이용하여 한반도에 출병하기 위해 비밀리에 행동을 개시했다. 일본 참모본부는 6월 1일 ‘육군 대연습’ 명목으로 일본 우선(郵船)회사의 선박을 징발했다.

6월 2일 일본 내각은 천황의 재가를 거쳐 영사관과 교민 보호 목적으로 조선 출병을 결정했고, 6월 5일에는 참모총장, 참모차장, 육군대신, 해군 군령부장 등으로 구성된 전시(戰時) 최고 지휘기관인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했다.

대본영은 전시 또는 사변(事變) 중에 설치하는 일본 육·해군의 최고 통수 기관이다. 일본 군부가 6월 5일에 대본영을 설치했다는 뜻은 조선에서 청국과 전쟁에 돌입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일본 정부는 청국으로부터 “조선에 파병한다”는 정식 통보가 오기도 전에 조선에 일본군 출병 결정을 한 후 6월 5일 오후 4시, 주조선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가 요코스카항을 출발할 때 그의 귀임 보호 명목으로 육군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가 이끄는 전투 병력을 조선에 파병했다. 

[표1]을 보면 일본은 조선 조정이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기 하루 전에 출병을 결정했다. 그리고 청국 군대가 출발하기 하루 전, 왕봉조가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에 파병을 통지하기 하루 전에 이미 조선으로 병력을 출발시켰다. 이는 일본군의 조선 파병이 청군의 파병에 따른 피동적 행위가 아니라, 치밀하게 준비해온 명백한 선제 도발행위였다. 

6월 2일 일본은 각료회의를 열어 의회를 해산하고 조선 출병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각료회의에서는 “조선에서 청일 양국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소규모 병력을 보내는 단순 출병이었을 뿐 전쟁을 위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육군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는 생각이 달랐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임오군란, 갑신정변 때 조선에서 청국군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전략 단위의 일본군을 투입하여 청일 양국의 균형을 확보하고, 충돌 교전의 빌미가 생기면 전력을 다해 청국군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와카미는 자신과 생각이 같은 외상 무쓰 무네미쓰를 찾아갔다. 

가와카미는 일본군이 조선에 파병되면 청군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므로 단 한 차례의 공격으로 압승할 수 있는 병력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제에 의하면 평화 시에는 1개 여단 병력이 2000명이지만 전시(戰時)에는 혼성여단으로 편제를 확대한다.

즉 보병 1개 연대(총 6000명)에 기병, 포병 1개 대대, 공병, 수송대, 위생대, 야전병원, 병참부 등 7000명의 대병력으로 구성하여 독립적으로 전투를 수행한다. 이런 제도상의 허점을 이용하여 가와카미 소로쿠는 수상 이토 히로부미에게는 조선에 파병할 병력 수를 “1개 여단”이라고 보고하고, 실제로는 혼성여단 병력인 7000명의 대부대를 파병했다. 

일본 헌법의 맹점-천황과 군부가 전쟁 결정 

일본 군부가 이처럼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고 멋대로 행동할 수 있는 근거는 헌법상의 규정 때문이다. 1889년 2월에 공포된 대일본제국 헌법은 프러시아 헌법을 참고로 하여 제정했는데, 일본 제국헌법 제11조는 “천황은 육해군을 통수한다”, 제12조는 “천황은 육해군의 편제 및 상비병의 규모를 정한다”고 되어 있었다. 이 조항에 의거하여 군 통수권은 참모총장, 군령부장의 보좌를 받아 천황이 수행하고, 이를 내각의 직무 밖에 둬 국무대신이 그 책임을 지지 않도록 제도화했다. 

그 결과 국방 계획과 작전 계획, 용병 등은 ‘통수권의 행사’로서 국무로부터의 독립이 헌법상 보장되어 소위 ‘이중 내각’이 만들어졌다. 수상이 간섭하지 못하는 별개의 행정기관이 내각의 내부에 존재하게 된 것이다. 

또 제국헌법은 제13조에 “천황은 교전을 선포하고 화전 및 조약을 체결한다”고 규정했다.  즉 외교 중에서도 국가적으로 가장 중요한 선전포고, 휴전, 강화 등은 천황의 권한에 속했다. 이러한 외교 대권 설정으로 인해 의회는 외교를 통제할 수단이 사라졌다. 그 결과 국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이에 천황과 군부의 결정만으로 전쟁에 휘말려들 위험에 빠진 것이다.

이런 헌법상의 문제 조항들로 인해 군부가 천황을 등에 업고 제멋대로 청일전쟁, 러일전쟁은 물론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결국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 패망하게 된다. 

일본 군부의 프러시아化가 가져온 비극 

더 심각한 문제는 ‘군부의 프러시아화(化)’였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보불전쟁에서 강력한 프랑스 육군을 단숨에 격파하고 유럽 최강이라는 명성을 얻은 프러시아의 군사제도를 도입했다. ‘국가의 모든 기능을 국방 한 곳에 집중시킨다’는 명제가 프러시아주의의 핵심이다. 이 때문에 프러시아는 국가가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게 아니라, 군대가 국가를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프러시아주의의 핵심을 일본 장교들에게 가르친 사람은 군사교관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몰트케 장군의 수제자 클레멘스 빌헬름 야콥 멕켈 소령이었다. 멕켈 소령의 지도를 받은 일본군 고급 장교들은 독일로 유학을 가서 프러시아주의의 핵심을 연구하고 귀국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가와카미 소로쿠였다. 

가와카미는 1887년 1월부터 1년 반 동안 독일 베를린에 유학하여 프러시아군 참모본부의 조직과 운영을 연구했고, 귀국 후 육군 참모차장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일본 내의 프러시아’라는 말을 들었다.

가와카미는 참모본부의 활동이 정치의 울타리를 벌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현실에서도 항상 그 테두리를 벗어나 군이 국가를 이끌고자 했다. 이런 사고 방식은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국가와 육군 참모본부의 관계를 규정했다. 

프러시아주의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초전에 적의 허를 찌르는 선제 기습 공격을 당연시했다. 이를 위해 평시에도 적국에 대한 첩보 수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가와카미는 휘하의 참모 장교 중 가장 우수한 자를 적지에 잠입시켜 현지에 대한 모든 사항을 탐지하고 준비시켰고, 전쟁이 시작되면 현지 사정을 훤히 꿰고 있는 이들이 작전을 지휘하도록 했다. 

1887년 7월 일본 참모본부는 야마모토 기요카타 중령, 후지이 시게타 대위, 시바야마 히사노리 대위 등을 북중국에 파견하여 상륙지 선정, 군대 수송, 상륙 후의 전략목표 등을 정했다.  또 인천에서 천진(天津·톈진)으로 이동하여 대고(大沽·다구) 포대를 견학하고, 북경(北京·베이징)을 거쳐 산해관(山海關·산하이관)까지 비밀 첩보활동을 벌였다. 

일본 군부는 오래 전부터 중국과의 전쟁을 대비하고, 연구해 왔다. 오가와 유지(小川又次) 소장이 <청국정토책안(淸國征討策案)>을 완성한 것이 1887년이다. 1893년 4월에는 ‘출사(出師) 준비품취급위원회’를 조직하여 무기와 군수품을 비축하기 시작했고, 5월에는 ‘전시 대본영 조례’를 제정했다. 참모차장 가와카미 소로쿠 중장은 조선과 청국을 여행하면서 진공작전의 전략을 구상하고 군사 탐정망을 조직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6월 5일에 대본영 설치 

조선에 대병력을 파병한 일본 참모본부는 6월 5일 대본영을 설치했다. 대본영 설치는 ‘전시(戰時) 대본영 조례’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야 설치가 가능하다. 그런데 청일전쟁과 관련한 선전포고는 이로부터 거의 두 달 후인 1894년 8월 1일에 발표됐으므로 대본영 설치는 위법이었다. 그러나 대본영 설치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본의 조선 출병은 명분이 없어 국제 여론이 들끓었다. 무쓰 외상은 외교적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6월 16일 주일 청국 공사 왕봉조에게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안했다. 청국은 “조선의 종주권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공동 내정 개혁은 불가능하다”고 거절하여 결렬되었다.

일본 정부는 청국이 제안을 거절하자 6월 22일, 제1차 절교서를 보내 “조선 주둔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 단독으로 조선 내정을 개혁할 것”이라고 선언했다([표 2] 참조). 

무쓰 외상은 6월 22일 오토리 게이스케 주조선 일본 영사에게 “개전은 피할 수 없으니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개전 구실을 만들라”는 극비 훈령을 내렸다. 훈령에 따라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는 7월 3일 5조 27항의 내정개혁안을 조선 조정에 제출했고, 7월 14일 일본 정부는 청국에 제2차 절교서를 보내 “양국 간에 예측할 수 없는 변이 발생하더라도 일본은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7월 17일 일본은 최초의 대본영 어전회의를 열어 개전은 되돌릴 수 없다고 결정했다. 일본은 7월 23일 새벽 4시, 경복궁을 점령하여 조선군을 무장 해제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친일 괴뢰정권을 출범시켰다. 

6월 2일 일본 각료회의에서 조선 파병을 결정했을 때 일본 해군 함정들은 태평양 곳곳에 흩어져 작전 및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즉시 사세보(佐世保)항으로 집결하라”는 긴급 명령을 받았다. 함정들이 사세보로 집결한 것은 각료회의에서 파병을 결정한 후 1개월 반이 지난 7월 19일이었다.

대본영은 먼저 도착한 함정들로 함대를 편성(이 때문에 일본이 한반도 해역에 파견한 함대에 연합함대라는 명칭이 붙었다)하고 해군 중장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를 사령장관으로 임명한 다음 “연합함대를 지휘하여 조선국 서해안을 제압하라”는 명을 내렸다. 다음날인 7월 20일 대본영은 조선에 파병된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적이 증가하기 전에 주력 부대로 전면의 적을 격파하라”는 명을 내렸다. 

7월 23일 오전 연합함대의 선발대가 사세보항을 출항했고, 7월 25일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일 양국은 8월 1일 상대방에 선전포고를 했으니, 풍도 앞바다에서 청국 군함에 대한 공격은 국제법 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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