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개전 이래 연전연승
일본군, 개전 이래 연전연승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7.30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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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청일전쟁의 주요 전투

일본군, 풍도해전, 성환전투, 평양전투, 여순, 위해위 등지에서

청국군에게 압승 거둬

풍도 해전(1894년 7월 25일)
청국 정부는 조선 조정으로부터 파병 요청을 받자 북양해군 소속 순양함 제원(濟遠), 포함 광을(廣乙), 연습선 위원(威遠), 운송선 조강(操江)호 등을 파견했다. 제원호는 방백겸(方伯謙) 함장 지휘 아래 병력 수송선인 애인(愛仁)·비경(飛鯨)·고승(高陞)호 등 청국 정부가 용선한 3척의 영국 상선을 호위하여 조선으로 향했다. 

일본 연합함대 제1유격대 소속의 요시노(吉野)·나니와(浪速)·아키츠시마(秋津洲) 등 순양함 세 척은 7월 25일 새벽 풍도 앞바다를 수색하던 중 오전 6시, 아산에 병력을 상륙시키고 중국으로 귀환하던 제원·광을호를 발견했다.

일본 전함들은 선전포고도 없는 상황에서 두 척의 청국 함정을 향해 발포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불의의 공격을 당한 제원호는 몇 분 만에 백기를 올리고 도주, 요시노의 추격을 간신히 따돌리고 모항인 여순(旅順)항에 입항했다. 포함 광을호는 아키츠시마와 나니와호의 화력에 밀려 도주하다가 화약고가 폭발하여 침몰했다. 

지원 병력 1116명을 태운 수송선 고승호와 무기를 실은 구식 목조 포함 조강호가 아산을 향하던 중 7월 25일 오전 8시경, 나니와호에게 발각됐다. 고승호의 영국인 선장 갤스워시가 국제법에 따라 선박을 정지시키려 하자 승선해 있던 청군 지휘관이 아산으로 계속 항해하든지 중국으로 귀환을 요구하며 선원들과 맞섰다. 

네 시간 정도 대치했으나 청군이 계속 저항하자 오후 1시경 나니와호의 함장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대좌(러일전쟁 때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는 고승호를 향해 어뢰와 함포를 발사하여 오후 1시 30분 격침시켰다.

나니와호는 구명정을 보내 영국인 선장을 비롯한 외국인 선원 10명(영국인 7명, 독일인 3명)만을 구조하고 바다에 빠진 청국군은 방치하여 국제적으로 큰 비난을 받았다. 청군은 다음 날 외국 선박이 지나가다 구조한 245명을 제외한 871명이 수장(水葬)됐고, 고승호에 실려 있던 14문의 대포도 선체와 함께 가라앉았다. 

풍도 해상에서 고승호가 조사받는 것을 목격한 조강호는 회항을 시도했으나 아키츠시마호의추격을 받아 오후 2시경 포획되어 일본 항구로 압송되었다. 고승호가 일본 해군에게 발각된 것은 고승호의 출항시간이 천진(天津)에 잠복해 있던 일본 첩자에게 탐지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대본영은 청국 병력수송선 출항 정보를 입수하자 7월 23일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伊東祐亨)에게 작전명령을 내렸다. 이토는 전함 15척, 어뢰정 6척을 끌고 사세보항을 출항하여 풍도 부근에서 병력수송선과 호위함들을 공격했다. 

청일전쟁의 개막인 풍도해전에서 일본군 측 피해는 전무했으나 청국은 광을호와 상선 고승호가 격침되고 제원함은 대파, 운송선 조강호는 일본에 나포되었다([그림 1]) 참조.

성환 전투(1894년 7월 29일)

청국군이 아산에 상륙한 것은 조선 남부지방의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동학 농민군이 5월 31일 전주를 점령하자 청일 양국이 대군을 파견하는 등 국제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조선 조정 대표와 농민군은 1894년 6월 전주에서 만나 정부의 폐정 개혁과 농민군 해산을 약속하는 전주화약(和約)을 맺었다. 그 결과 전라도에 집강소가 설치되어 폐정 개혁안이 실천되었다. 

그러나 양국 군대의 조선 출병은 일본의 예측대로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국과 일본이 패권을 다투는 전쟁으로 비화되었다. 아산에 상륙한 섭지초(葉志超)제독 휘하의 청군은 일본군의 남하 정보를 입수하고 성환 부근에서 이들을 저지하기로 했다.

청국군은 지원 병력이 도착하기를 학수고대했으나 7월 25일 풍도 해전에서 병력 수송선 고승호가 격침되어 동료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아산 지역의 청군 병력은 총 3500명, 야포는 8문에 불과했다. 

남하하는 일본군은 최정예 부대인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휘하의 8000여 명이었다. 이홍장은 수적 열세에 놓인 지휘관 섭지초에게 “일본군과 맞서지 말고 해로(海路)로 평양으로 철수하여 본국에서 보내는 증원 병력과 합류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섭지초 제독은 “해로 철수는 일본 해군 때문에 위험하다”면서 청군을 2개 부대로 분할, 섭사성(葉士成)이 지휘하는 2000여 명은 성환을 방어하고 자신은 1500여 병력을 지휘하여 공주를 지키기로 했다. 

섭사성은 성환역 동북쪽 월봉산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7월 29일 새벽 3시 20분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전투 초기에는 청군이 우세한 지형과 어둠을 이용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섭지초 제독은 초기 전세를 과장하여 본국에 승전보를 날렸는데, 이 소식을 접한 청나라 황제가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청군은 후속 지원부대가 없는데다가 소수의 병력을 과도하게 분산시킨 것이 문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병력 수와 무기, 전투역량 등 모든 면에서 우세한 일본군이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청군을 포위해가자 청군은 오전 6시 30분, 포 8문을 버리고 도주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성환전투의 사상자는 청군 500여 명, 일본군은 장교 6명과 병사 82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평양 전투(1894년 9월 15일)

청국과 일본 양국은 8월 1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성환 전투에서 참패한 청군은 공주로 후퇴했고, 섭지초는 공주 수비를 포기하고 평양으로 이동하여 평양의 청군과 합류하기로 했다. 8월 3일, 이홍장은 성환에서의 초전 승리 보고를 그대로 믿고 황제 광서제(光緖帝)에게 승전보를 올려 상금 2만 량을 하사받았으나 그 후 현지 부대와 연락이 두절되었다. 

8월 2일 공주를 출발한 섭지초 부대는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먼 거리를 우회했다. 그들은 청주-진천-괴산-충주로 이동하여 한강을 건넌 후 원주-금화-수안-상원을 거쳐 8월 21일과 28일 평양에 도착, 좌보귀(左寶貴)가 인솔하는 청군과 합류했다.

이홍장은 8월 25일 섭지초를 평양 주둔 청국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성환에서 패전하여 도주하듯 이동해 온 사람을 동아시아의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전투의 지휘관으로 삼은 것이다. 

이홍장은 평양에 총 1만4000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평양성 성곽을 이용해 방어진지를 구축라고 명했다. 최고사령관 섭지초 제독은 지휘관 회의에서 보급의 어려움과 탄약 부족, 현지 지리에 어두운 점 등을 이유로 평양 전투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압록강 이북으로 후퇴하여 만주에서의 결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주전파인 좌보기 등이 이 의견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때부터 총사령관 섭지초의 위신이 추락하여 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9월 1일 일본 대본영은 조선에 선발로 투입된 5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3사단을 증파하여 제1군을 구성하고 1군 사령관에 현직 추밀원(천황의 직속자문기구) 의장이자 일본 육군 창설자인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를 임명했다. 그 결과 조선에 파병된 일본군의 총 병력 수는 1만6000명이었다. 9월 8일 일본은 대본영을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옮기고, 9월 15일 메이지 천황이 히로시마로 이동하여 전쟁을 지휘했다. 

일본군은 청국 북양함대의 출몰을 두려워하여 3사단과 5사단 증원 병력을 평양 접근이 용이한 서해로 해상 수송하지 못하고 부산과 원산에 상륙시켰다. 8월 무더위 속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느라 병사들은 지치고 조선의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보급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비해 청군은 휴식을 취하며 진영 구축에 나섰다. 평양성 북문은 좌보귀·풍승아·강자강이 맡았고, 서쪽과 서남쪽은 위여귀, 남쪽과 대동강 우안은 마옥곤(馬玉昆)이 담당했으며, 사령관 섭지초는 성 내부에서 전군 지휘를 맡았다. 

9월 15일 새벽 동이 트는 것과 동시에 평양성 공격을 개시한 일본군은 성벽을 이용하여 저항하는 청군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모란대와 을밀대, 현무문을 지키는 좌보기의 활약이 눈부셨다. 좌보기는 병력을 진두지휘하여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 용맹하게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일본군의 한 부대가 악전고투 끝에 모란대 요지를 점령하고 현무문을 돌파했을 때 일본군은 탄약이 다 떨어져 백병전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청군이 백기를 내걸었다. 일본군이 어리둥절 하는 사이, 총지휘관 섭지초는 그 틈을 이용해 탈출했다.

청군은 혼란 속에서 의주대로를 따라 북쪽으로 탈출하던 중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사망자 2000여 명에 포로 500여 명, 대포 35문을 빼앗기는 등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사상 및 실종자가 698명에 불과했다. 일본군은 다음날(9월 16일) 아침 평양을 점령했다. 

황해 해전(1894년 9월 17일) 

일본군이 평양을 점령한 다음날인 9월 17일, 세계 역사상 최초로 증기선 함대가 격돌한 황해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에서는 황해 해전, 혹은 압록강 해전으로 명명한 반면 중국에서는 이를 대동구(大東溝) 해전이라고 부른다. 참가 세력은 청국은 기함인 정원(定遠)을 비롯한 14척, 일본은 기함 마츠시마(松島)와 순양함 요시노 등 총 12척이었다. 

황해 해전에 참전했던 청국 군함 중 가장 큰 함정은 자매 함정인 정원함과 진원함으로, 배수량이 7430톤이었다. 일본 군함 중 가장 큰 것은 하시다테(橋立), 이츠쿠시마(嚴島)함으로 배수량이 4277톤이었다. 일본 해군은 북양함대의 정원과 진원함에 필적할 만한 대형 장갑 전함은 없었지만 여섯 척의 쾌속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요시노함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속력이 빠른 전함이었다. 

일본 연합함대는 함포의 위력 면에서는 북양함대에 뒤졌으나 군함의 속력과 속사포 능력에서는 우위였다. 일본 연합함대가 장비한 속사포는 청국 군함이 포 한 발을 쏠 때 8발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투함의 속도는 전투력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다. 속도 면에서 일본 함대는 북양함대를 앞섰다.

정리하자면 북양함대는 대구경 중포 우세, 일본 함대는 속사포와 속도 면에서 우세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 해군은 함대를 둘로 나누어 현란한 기동전술로 대응한 반면, 북양함대는 경험 부족으로 작전이나 전술면에서 문제를 노출했다. 

9월 17일 오전, 일본 연합함대는 조선의 압록강과 가까운 대동구(大東溝·다동거우) 밖에 정박 중이던 북양함대를 발견했다. 양측은 즉각 전투 준비에 돌입, 정오 무렵 북양함대의 정원함이 거포를 발사하면서 황해 해전이 시작되었다([그림2] 참조). 

덩치는 크지만 속도가 느린 북양함대는 일렬횡대(횡렬진) 진형을 갖추고 정면에서 포격과 함수의 어뢰를 발사하는 진형을 택했다. 군함은 정면에서 보면 폭이 좁기 때문에 횡렬진은 적의 사격에 의한 피해를 줄일 수 있지만, 반면에 함수 쪽에 있는 포만을 사용할 수 있어 화력이 약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맞서 일본 함대는 일렬종대로 늘어서는 진형(단종진)을 택해 고속으로 이동하면서 속사포로 맞섰다. 단종진은 적의 주포 앞에 자신의 옆구리를 노출시키는 위험이 있지만, 함정에 탑재된 모든 포를 총동원할 수 있어 화력이 극대화되는 장점이 있다. 

북양함대 세력 중 상대적으로 구형인 순양함 초용(超勇)과 양위(揚威)가 집중포화를 맞아 초용은 침몰했고, 양위는 대파되어 퇴각하다 해안가에 버려졌다. 치원(致遠)도 대파되자 함장 등세창(鄧世昌)은 정면에 있던 요시노를 향해 돌격했으나 충돌에 실패하면서 침몰했고, 치원함 함장 등세창은 배와 함께 수장됐다. 경원(經遠)도 포탄 세례를 받고 격침됐고, 광갑(廣甲)도 암초에 부딪쳐 기동이 어렵자 자폭시켰다. 

전투 후반부에는 정원과 진원 두 거함이 서로 응원하며 일본 함대와 맞섰다. 일본 군함들은 정원과 진원을 포위하고 집중 포격을 가했는데, 수백 발의 포탄 세례를 받고도 두 거함이 버티자 일본 함정들이 전투 해역에서 이탈하면서 해전은 막을 내렸다. 

5시간 정도 진행된 황해 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증기철갑선 함대 간의 첫 번째 대규모 해전이었다. 양측이 격렬하게 부딪친 결과 민첩한 기동성과 속사포를 보유한 경함대가 중장갑 거포를 갖춘 함대에 승리할 수 있다는 사례를 입증했다. 북양함대는 초용·양위·치원·경원·광갑 등 주력함정 5척 침몰, 나머지는 대대적인 수리에 들어가는 바람에 제해권이 일본 해군에게 넘어갔다. 

일본 측은 마츠시마·히에이(比睿)·아카기(赤城)·사이쿄마루(西京丸) 등 4척이 대파되었으나 격침된 배는 없었다. 기함 마츠시마는 정원함이 쏜 거탄에 맞아 승조원의 31%에 해당하는 113명의 사상자를 냈고, 아카기도 큰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은 황해 해전 이전까지는 북양함대의 위협 때문에 부산, 원산 등 원거리에 병력을 상륙시켰으나 황해 해전 이후에는 요동반도 공략과 직예평야 결전을 위해 제2군을 편성하여 발해만에 상륙시켰다. 제2군사령관은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대장이었다. 

압록강 전투와 여순(旅順) 점령(1894년 10월 24일~11월 21일)

천신만고 끝에 평양성을 탈출한 청군은 북으로 퇴각하여 압록강을 건넌 다음 중국 쪽 압록강변에서 방어태세를 갖췄다. 9월 17일 일본 해군이 황해 해전에서 승리한 직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는 일본군 제1군은 청군을 추격하여 만주로 진격했다. 국경지대인 의주 맞은편에는 청군이 약 16㎞의 방어선에 100개의 보루를 설치하고 북양군벌 병력까지 합세, 총 2만3000명이 방어에 나섰다. 

10월 24일 야음을 틈타 일본군은 압록강에 배로 연결한 임시 다리를 설치하고 감쪽같이 강을 건너자 청군은 보루를 버리고 후퇴했다. 일본군은 인력 손실 없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 영토로 침공해 들어갔다. 

군사적 요충지인 여순(旅順·뤼순)의 가치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이홍장이었다. 그는 여순이 천혜의 요새임을 파악하고 1881년 해군기지 건설에 착수, 1890년 완성했다. 항구 주위에는 10개의 포대를 설치하여 요새화했다. 여순항은 북양육군과 해군의 근거지로서 북양함대의 도크와 공창이 위치한 만주 최대의 군사 거점이었다. 일본군은 여순항을 ‘아시아의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이라 부를 정도였다. 

10월 24일 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제2군이 요동반도 남쪽의 화원구(花圓口)에 상륙하여 11월 6일 금주(金州·진저우) 점령, 다음날인 11월 7일에는 대련(大連·다롄)을 점령했다.  일본군이 물밀 듯 진격하자 여순 지역의 청군 지휘관은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는 바람에 일본군은 11월 21일 단 하루 만에 손쉽게 여순을 점령했다. 

일본 언론은 “여순의 대승은 대일본 팽창사의 첫 페이지에 특기할 만한 대사실”이라며 기뻐했다. 일본은 ‘북경과 천진의 관문’인 여순을 점령하여 전쟁의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 여순을 점령한 일본군은 11월 21일부터 24일까지 사흘 간 대학살을 자행하여 2만여 명의 무고한 중국인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일본군의 잔인한 학살행위는 외신보도를 통해 전 세계로 보도되어 국제적인 공분(公憤)을 일으켰다. 

위해위(威海衛) 전투(1895년 1월 20일~2월 14일) 

일본이 청국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자 서양 열강들은 “이러다 일본이 단독으로 청국을 차지하는 것 아닌가” 하고 우려하며 강화를 중재하겠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개입이 본격화되기 전에 속전속결로 전쟁을 결판내야 했다. 일본 대본영은 북양해군의 본거지인 위해위(威海衛)를 점령하여 종전(終戰)을 압박하기 위해 12월 14일 위해위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여순 함락으로 격노한 광서제는 북양함대 지휘관 정여창을 파직하고 그를 문책하려 했다.  그런데 일본 함대가 위해위를 압박하자 죄인 정여창에게 다시 북양함대를 맡아 일본군에 맞서라는 명을 내렸다. 

중국 산동(山東)반도 북쪽 연안에 위치한 항구 도시 위해위는 요동반도의 여순과 마주보는 발해만 입구의 요충지로, 배로 20분 거리에 위치한 유공도(劉公島·류궁다오)는 북양함대의 모항(母港)으로서 북양함대 사령부(북양수사제독서)와 수사학당(해군사관학교에 해당)이 있었다. 

그 무렵 북양함대의 주력인 정원과 진원함은 황해 해전 당시 입은 피해 복구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일본 제2군은 1895년 1월 20일부터 24일까지 산동반도 동쪽의 영성만(榮成灣)에 상륙하여 격렬한 전투 끝에 2월 2일 위해위 주변 포대들을 모두 점령했다. 이로써 유공도에 있던 정여창의 북양함대와 수비대는 완전 고립되어 일본군에게 육상 및 해상으로 포위되었다. 

2월 4일 밤 일본 어뢰정이 유공도 항구 내로 몰래 진입하여 북양함대를 기습했고, 다음 날 밤 어뢰정이 정원함에 두발의 어뢰를 명중시켰다. 거함 정원은 침몰하지는 않았으나 항해 불능 상태가 되자 해안에 정박시킨 후 포대로 사용했다. 2월 6일 밤 또 다시 일본 어뢰정의 기습으로 내원(來遠)과 위원함이 격침됐다. 청국도 어뢰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나 어뢰정 지휘관 왕평(王平)이 전투 중 어뢰정을 이끌고 도주하는 와중에 다수의 병사가 투항하거나 포로가 되었다. 

2월 11일 밤 정원함의 포탄 저장고가 바닥나자 정여창 제독은 정원함을 자폭시키고 자신은 대량의 아편을 먹고 자살했고, 다른 지휘관들은 항복했다. 2월 17일 위해위가 일본군에게 함락되면서 전투는 막을 내렸다. 

청국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근대 해군을 건설했으나 풍도 해전, 황해 해전, 위해위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허망하게 패전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북양함대 소속 함정 중 살아남은 진원·제원·평원(平遠)·광병(廣丙)·진동(鎭東)·진서(鎭西)·진남(鎭南)·진북(鎭北)·진중(鎭中)·진변(鎭邊)호 등은 일본군에 나포되었다.

전투 중 대파된 진원함은 여순에서 수리한 후 일본으로 끌어갔고, 연습선 강제(康濟)호는 자살한 정여창 제독의 시신과 항복한 청군 및 외국인을 운송하기 위해 남겨졌다. 이로써 청국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을 상실하여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에 나서면서 청일전쟁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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