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건국의 아버지와 건국일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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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한국
  • 승인 2015.08.06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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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언] 광복절을 건국절로!

건국일을 국가 명절인 건국절로 제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정통성과 정체성 확고히 하는 작업

▲ 김길자 대한민국사랑회 회장

2015년 8월 15일은 해방 70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가슴 깊이 기억해야 할 날이 또 있다. 3월 26일과 7월 19일이다.

3월 26일은 이승만 건국대통령 탄신 140주년이 되는 날이고, 7월 19일은 서거 50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러나 대한민국과 국민 중 이 날을 기억하여 기념하고 추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은 건국의 아버지를 버렸고 건국한 날을 버렸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이승만은 배재 학당의 문을 두드림으로써 문명개화와 독립, 자유민주주의의 문으로 들어섰다. 개인 혼자서만 그 문으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절반을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 바탕으로 하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건국하여 통째로 그 길로 인도하고 안내했다. 이승만의 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20세의 청년 선비 이승만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한 서양 선교사와 스승 서재필과의 교분을 통해 민주정치, 평등사상, 인간의 자유, 기독교 등 생소한 서양문화와 문명에 눈을 뜬다. 그것은 곧 대륙문명과 단절하고 해양문명과 만나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출발점이었다. 왕정과 양반 정치에 실망한 이승만은 사회 개혁과 백성 계몽을 위해 한글전용의 일간지 매일신문을 창간하여 백성들의 눈을 뜨게 하는 노력을 한다. 

그는 왕정을 폐지하고 민주공화정으로의 개혁을 꿈꾸다 역모죄로 체포되어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5년 7개월의 감옥 생활 동안 그는 한시도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그는 몰래 서양 열강과 같은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자 하는 뜻을 담은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수많은 개화 논설을 써서 바깥으로 밀반출하여 신문에 실었으며, <청일전기>를 번역하고, 옥중에 서당과 도서실을 개설하였으며, 함께 수감되어 있던 이상재, 유성준 등 양반 지도층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민주주의와 세계 정세 꿰뚫어 보다 

청년 개혁가 이승만의 꿈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쇄국으로 폐쇄된 이 나라를 개방과 통상국가로 개혁하고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산업국가로 탈바꿈하여 서양 열강과 같은 부강한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기회가 미국 유학이라는 현실로 다가왔다. 

민영환의 밀사로 뽑혀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은 무일푼으로 고학을 해 가며 당대 미국 최고 일류대학에서 학사(조지 워싱턴 대학), 석사(하버드 대학), 박사(프린스턴 대학) 과정을 6년 만에 마치고 국제정치와 통상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인 최초의 미국 박사 1호였다. 그것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받은 것이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가 몇 년 후 미국 대통령에 오르고, 후에 노벨상을 수상한 우드로 윌슨이다. 

그는 미국 유학을 통해 세계 정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과 통찰력을 길렀고, 미국에서 33년간의 망명 생활을 통해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제도의 본질을 몸에 익혔다. 그리고 미국을 움직이는 엘리트 인재들과 광범위한 학맥과 인맥을 형성했다.

맥아더 장군, 덜레스 미 국무장관, 세브란스를 비롯하여 당대를 주름잡던 기업가, 교수, 정치인, 변호사, 목사, 외교관 등 수많은 미국의 오피니언 리더들과의 폭넓은 교우는 후에 대한민국 건국과 6·25 남침에서 한국을 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미국 사회를 움직이는 인물 그 누구보다 미국의 역사와 철학, 미국식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본 미국 전문가 이승만은 주한 미국대사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놀 정도였고, 한국을 지키기 위해 온 3성, 4성 장군들에게 호통과 야단을 칠 정도로 기개가 드높았다.

이승만에게 야단을 맞은 미국의 최고 지휘관들은 구박을 심하게 받으면서도 세계 정세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식견과 민주주의의 이상에 대한 드높은 정신, 그리고 조국을 지키기 위해 강철 같은 신념으로 무장한 ‘반공의 화신’ 이승만을 무한히 존경하고 신뢰했다. 

이승만은 세계 최고의 산업력과 기술력, 그리고 외교력과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의 심장부에서 최고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다. 그는 한 나라가 근대화를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국가의 운명을 헤쳐 나가는 핵심 본질은 외교에 있다는 것을 심층적으로 꿰뚫어 봤다.

그리고 국제정치와 통상을 전공한 전문가로서 칸트의 영구평화론의 핵심이 개방과 통상이며, 기독교 정신으로 자본주의의 기둥을 삼아야 한다는 점을 파악했다. 

외교독립의 최전선에서 싸우다 

이승만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열강으로 떠오른 일본을 불과 기백 명의 무장도 안 된 군대로 무장투쟁을 벌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일본을 도덕적으로 공격하는 작업에 돌입한다. 일본을 조선의 기독교를 박해하는 사탄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것이 이승만 외교독립의 전술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국제 전략이 열강들이 장악한 전 세계의 식민지를 해방시켜 개방과 통상을 하는 나라로 만든다는 전략임을 간파하고, 미국의 힘을 빌려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고도의 외교전을 전개한다. 그가 꿈꾸던 나라의 건국은 1948년에 비로소 현실화되었다.   

1910년 학위를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YMCA에서 유수한 청년들을 가르치던 중 1912년 기독교의 민족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일본의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이를 피해 이승만은 5월 세계감리교 총회의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명목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1913년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매진한다. 하와이에서 <한국교회 핍박>이란 책을 저술하여 일본을 기독교 탄압국으로 고발하고, 교민 자녀들을 위한 교육사업, 그리고 ‘태평양 잡지’ 발간에 매진하던 중 고국에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4월 13일 서재필의 거주지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열어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국가 설립을 의논한다. 

대회 도중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대통령에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며 이 때부터  워싱턴 DC를 임시정부의 근거지로 대한공화국 대통령으로 활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1920년 12월, 상해로 밀항하여 1921년 초부터 임시정부 초대대통령으로서의 집무를 시작한다. 그러나 신채호를 포함한 대부분의 임정요인들의 무장투쟁론과 공산주의자들의 비협조로 어떤 일도 하기 어렵게 되자 5개월 만에 워싱턴으로 돌아온다. 

임시정부에서 물러난 이승만은 힘겨운 외교독립론을 펼치지만 막강한 일본의 힘 앞에서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그는 일본의 미국 침공이 임박하자 1941년 여름 <일본, 그 가면의 실체를 벗긴다(Japan Inside Out)>를 출간하여 일본의 미국 공격을 예언한다.

그 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 미 해군기지를 공습하면서 전쟁이 발발하여 이승만의 예언은 적중했다. 이승만은 이제야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다고 확신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한다. 

천신만고 끝에 대한민국 건국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 지지를 위한 여론 조성을 위해 이승만은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를 결성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 미 국무부와 국회를 통해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노력을 지속한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소련에 대일전(對日戰) 참전을 요청했고, 소련은 일본이 항복하기 불과 6일 전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공격했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러시아의 한반도에 대한 야욕을 독립협회 동지들과 막아 낸 경험이 있는 이승만의 염려대로 일본이 항복도 하기 전인 8월 12일 소련군은 북한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항복하자 38선을 봉쇄하고 소련에서 훈련시킨 한국인 공산주의자들을 북한에 투입하여 공산화를 추진한다.

한편 미군은 9월 7일에야 인천에 상륙하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염려한 이승만은 하루속히 귀국하려 했으나, 미 국무부 내의 친소련 인사들의 방해 공작으로 10월 16일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게 된다. 해방은 되었으나 국내는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졌다. 이승만은 신탁통치 회오리와 좌우합작을 통한 정부 수립이라는 미군정의 노선과 정면 충돌을 벌여가며 건국의 기틀을 잡아나갔다. 

20대 청년 시절부터 꿈꿔 왔던 ‘국민이 주인이 되는 자유민주국가’ 설립을 위한 이승만의 신념은 어느 누구도 막거나 꺾을 수 없었다. 1948년 자유선거를 반대하는 공산세력들은 제주도에서 북한의 지령에 따라 선거를 거부하는 4·3 폭동을 일으켰으나 혼란한 사회를 잘 수습하고 5월 10일 자유 보통선거를 거쳐 5월 31일 198명의 당선자로 국회를 구성했다. 천신만고 끝에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헌법기초위원들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7월 17일 헌법을 공포했으며, 7월 20일 이승만을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8월 15일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20세 이후 이역만리 타국에서 평생에 걸쳐 꿔 오던 꿈이 내 조국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 고문이었던 올리버 박사에게 “나는 상황이 아닌 신념으로 일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사명 수준을 넘어 소명 의식으로 평생을 애국애족을 위해 몸과 마음과 목숨을 내놓은 분이다.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5000년 간 왕의 백성으로서 종이나 노예처럼 살던 우리 민족을 해방시킨 해방자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못한 우리 민족을 국가의 주인이 되는 국민으로 만들어준 혁명가였다. 

건국절 제정은 국가의 정통성 확고히 하는 일 

반만년 동안 대륙에 매달려 강대국으로부터 잦은 침략과 온갖 수탈을 연이어 당하고 가난에 시달리던 우리 민족을 해양문명권으로의 대변혁을 통해 오늘의 자유와 번영과 풍요를 누릴 수 있게 해 준 구원자였다.

그는 선각자이며 예언자였다. 일본이 미국을 침략할 것을 예언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한반도를 장악할 것을 예견했으며, 공산주의가 생겨나던 그 시기부터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주의는 필경 망할 것이라고 이 세계 어느 지성인보다 먼저 예언했다.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극심한 경제 불황과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세계는 평등하게 골고루 잘 살수 있다는 공산주의가 생겨나 한반도 주변의 북한과 몽골과 중국과 소련 동구라파 후에 동남아시아까지 공산화가 진행되었다. 공산주의가 남한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에서 반공 반소(反蘇)정신으로 자유민주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세계적인 거인 이승만 덕분이다.

그의 자유민주국가 건립의 꿈은 지속된다. 농지개혁, 의무교육, 문맹퇴치, 70만 대군 육성. 6·25 동란 때 공산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킨 호국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원자력연구소 개설, 영동선 영암선 개통, 충주·나주 비료공장 설립, 문경 시멘트공장 설립, 한국 판유리 공장 등 실로 오늘날 대한민국의 산업 근간을 다져 놓은 대한민국의 아버지이시다.

어떻게 세운 대한민국인데 공산군에게 빼앗길 수 있겠느냐는 일념으로 75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장을 누비며 국군을 격려하고 용기를 준 그는 초인(超人)이었다. 

청년 시절에는 개혁 계몽운동가로, 중년에는 독립운동가로, 노년에는 건국과 호국의 아버지로 대한민국을 위해 일생을 바친 그의 생애는 애국애족의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말년에 나이가 들어 국정을 원활하게 집행하지 못하고, 인(人)의 장막에 가려져 자유당의 권력 쟁탈을 위한 극심한 선거 부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4·19 학생운동이 발발하고 많은 학생이 희생되었다. 이 와중에 한일회담을 12년간 성사시키지 않아 미국의 정책에 차질을 빚게 한 이승만을 미국이 때를 맞춰 실각 시키는 일에 가세하게 된다. 자유당 총수로서 학생들의 희생에 책임을 지고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한다”는 말과 더불어 그는 이화장으로 떠났다. 

사회 일각에서는 이처럼 평생을 통해 애국애족 하신 분을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지워버리려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워싱턴 한국공사관 앞에 이승만 대신 서재필 동상을 세웠다. 최근에는 이승만 동상이 세워져 있는 여의도 국회 로텐더 홀에 신익희 동상을 세웠고, 그 홀 이름을 신익희 홀로 바꾸려 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이승만을 국부(國父)로 모시는 일을 서둘러야 하며, 그분의 애국애족정신의 결정체인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하루속히 국가 명절인 건국절로 제정하여 온 국민이 경축해야 한다. 

이 일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일이며, 이 일이 선행되어야 자유통일을 이룰 수 있다. 남북통일은 그의 숙원이었으며, 북한 동포를 폭압에서 해방시키고 반드시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고 외쳤다. 

서거 50주기를 맞아 죄송하고 아린 가슴으로 그 분의 일생을 정리해 보며, 그 분이 한반도에 태어나신 것은 우리 국민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경인여대 설립자, 초대학장
우리민족 서로돕기 공동대표
(현)경인여대 명예총장
(현)대한민국 사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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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브라즈 2015-08-11 16:01:22
건국이라구요...? 나라를 세운다는건데... 너무 나가시는 것 아닌가요? 국권회복일을 건국일로... 초대 대통령을 건국 대통령이라고 하시니... 이름 바꾼다면 건국일 대신 국권회복일로 그리고 건국 보다는 그냥 초대 대통령이 맞는 것 같아요.. ㅎㅎ.. 항상 건강하시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애써 주시기 바랄게요.^^

박기보 2015-08-07 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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