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사라지고 광복만 남아
건국 사라지고 광복만 남아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8.10 15: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층취재]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논리들

1958년 이후 우리 모두의 기억에서 건국에 대한 기억 사라지고

광복과 건국이 분리되어 광복(해방)만을 경축하는 추세가 60여 년 이어져


단군 왕검의 건국이 진정한 건국이라는 주장 
기원전 2333년 단군 왕검이 아사달에서 조선을 건국함으로써 민족국가 건립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새로 건국된 것이 아니라 단군이 건국한 민족국가를 재건한 것에 불과하며, 1948년 건국을 주장하면 스스로 우리나라를 역사가 매우 짧은 신생국으로 전락시킨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민족이나 국가가 무엇인지 초보적인 상식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망언이다. 모든 민족의 국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우리 역사에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시대의 건국, 고려의 건국, 조선의 건국이 있었다. 어느 역사학자도 그것이 건국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않으면서 왜 대한민국만은 건국을 부정하는 것일까? 

1897년 대한제국 출범이 건국이라는 주장 

1948년 건국을 부정하는 논리 중의 하나가 대한민국의 건국은 1897년 대한제국의 출범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제국이 대한민국 국호(國號)의 원천이며, 대한제국도 민국(民國)을 지향했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든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그 실체가 조선왕조의 연장이며, 정체(政體)가 왕조였다. 반면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제국과는 그 실체가 엄연히 다르다. 

이것은 또 조선왕조가 망하지 않고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왕조의 패망과 일제의 식민 지배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민족 자존심을 지키려는 충정일지는 모르나, 객관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역사를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려는 태도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이 건국이라는 주장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을 대한민국의 건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948년 건국을 인정하는 것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세력을 무시하는 반(反)민족적 책동이라고 비난한다.

어떤 학자는 1948년 건국설에 대해 “1948년 건국설은 1910년에서 1947년까지 한반도에 주인이 없었다는 것이고, 주인 없는 영토에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는 말과 같다”고 비판하면서 1948년에는 단지 대한민국 정부 수립만이 있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일제 치하에서도 우리 민족은 한반도에 살고 있었고, 중국에 임시정부가 있었으니까 국가가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국가와 민족을 혼동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민족은 존재했지만 우리의 민족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1948년 건국에 대한 부정은 이승만 등이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해온 민족사관과 직결된다. 민족사관론자, 혹은 민중사관론자들은 한국 현대사를 반민족 친일(親日)세력이 미국과 결탁하여 민족 분단을 초래하고 독재와 장기집권 등으로 이어온 부끄러운 역사라고 주장한다. 

1919년 건국을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로 1987년 6공화국 헌법 전문(前文)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구절을 제시하기도 한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헌법 개정 협상 당시 정치적 대타협을 위해 여당은 야당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했기 때문에 그 같은 문언(표현)이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선언적 의미가 있을 뿐, 실질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직후 “문민정부는 상해 임시 정부의 법통을 바로 이어받았다”고 선언함으로써 이승만 정부를 위시한 전임 정부들의 정통성을 사실상 부정했다.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최초의 제헌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한다”고 명문화해 놓았다. 즉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실체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주권 회복을 위해 벌인 3·1운동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한다고 선포한 것이다. 

1948년 건국을 부인하는 이들 중에 현재의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인하는 좌파와 그 동조세력이 많다. 그들 주장대로 대한민국이 1919년에 수립되었다면 현재 평양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국가보안법과 관계없이 반역집단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평화공존이니 민족공조니 하면서 북한 정권을 싸고돈다. 

해방 직후 김일성, 박헌영, 여운형 등 좌익세력이 상해(중경) 임정을 하나의 독립운동단체 이상으로 인정할 수 없다면서 그 법통성을 부인했다. 그들은 임정의 법통성을 부인하면서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을 급조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국가인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가 구성에 필요한 4개 요소들을 모두 갖춘 국가이기 때문에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이 곧 대한민국의 건국이며, 따라서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재중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것이므로 1948년 8월 15일은 건국이 아니라 정부수립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것은 허위 억지 주장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임시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대한인민으로 조직함,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在)함, 제3조는 대한민국의 강토는 구한제국의 판도로 정함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제1조와 제3조에 천명된 인민, 국민과 강토, 영토는 임시정부가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국민과 영토가 아니었다. 그것은 장차 국가를 건국했을 때 지배하고자 희망하는 국민과 영토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제2조는 장차 건국할 국가의 주권이 전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의 원리를 천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는 임시헌법에서 주권자로 천명된 인민 전체의 주권적 행위에 의해 구성된 정부가 아니다. 양동안 교수의 ‘대한민국은 언제 건국되었나’라는 논문에 의하면 임시정부는 임시헌법에 의해 영토로 천명된 한반도에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능력을 가진 정부가 아니라 단지 문서로 선언된 명목상의 임시정부였을 뿐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상해 임시정부는 3·1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실효성 있게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임시정부 형태를 갖추고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애국지사들의 단체였을 뿐, 국가구성의 4대 필수 요소(영토, 국민, 정부, 주권)와 실체를 갖추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 정신을 이어받을 수는 있으나 법통을 이어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독립투쟁 정신과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고 그 민족정기와 민족의 얼은 이어받아야 하지만, 국가로서의 실체가 없던 그것을 건국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 양동안 교수나 이영훈 서울대 교수 등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상해 임시정부는 국가구성의 4대 필수요소를 모두 결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어느 나라도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다. 해방 후 남북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개최된 미소(美蘇) 협상에서나 기타 어떤 국제회의에서도, 상해 임시정부 대표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표권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국가 구성에 필수적인 4개 요소가 모두 갖춰진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면서도 국가 구성의 4개 요소 중 어느 하나도 구비하지 못한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주장하는 그 심리기저는 무엇일까?

1948년 8월 15일은 ‘건국일’이 아니라 ‘정부수립일’이라는 주장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연합국 간에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노력이 실패하자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이관했고, 유엔총회의 결의를 거쳐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표들이 국회를 결성하고(1948년 5월 31일), 그 국회에서 헌법이 제정 선포되었으며(7월 17일), 유엔이 규정한 ‘국민적 정부를 수립’하는 일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기념식(8월 15일)으로 거행되었다.

즉 유엔총회의 ‘한국 독립을 위한 계획’에 근거하여 유엔 감시 하에 주민 총선거, 국회 결성, 헌법 제정, 정부 수립이란 일련의 과업이 차례로 수행되고 마무리되는 전체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유엔한국임시위원회로부터 일련의 과정을 보고 받은 유엔총회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총회 결의 제195호 제2항에 의해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의가 가능했으며 또 한국 국민의 대다수가 거주하고 있는 한국의 지역에 대해 실효적 지배권과 관할권을 가진 합법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과, 동 정부는 한국의 동 지역의 유권자 자유의사의 정당한 표현이자 임시위원단에 의해 감시된 선거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과, 또한 동 정부가 한국 내의 유일한 그러한 정부라는 것을 선언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유엔은 1950년 6·25 남침이 시작되자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발동하여 한국을 지원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국은 유엔의 도움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고 한국의 주권 보전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은 ‘유엔의 자손’이라는 평을 듣는다. 

1949년 8월 15일은 제1회 독립기념일이었다. 당일 정부는 정부가 주도하는 독립1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오늘은 민국건설 제1회 기념일”이라고 선언했다. 당시 언론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에서는 건국, 독립, 정부수립은 모두 같은 뜻의 동어 반복이었다. 

국회에서 독립기념일 명칭 광복절로 변경 
1949년 6월 2일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되었다. 당초의 회부된 원안에 제시된 4대 국경일은 3·1절, 헌법공포기념일, 독립기념일, 개천절이었다. 법사위는 논의 과정에서 수정안을 마련했는데 ‘헌법공포기념일’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명칭 변경하자는 것이었다. 

이 법안이 1949년 9월 21일 본회의에 회부되었는데, 당시 제헌의원들은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명칭 변경하는 데 별다른 이의가 없어 가 81, 부 4, 기권 23으로 수정안대로 명칭 변경되어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이 수정안의 채택은 두고두고 후환을 남겼다. 독립기념일과 광복절은 그 역사적 함의가 달랐기 때문이다. 

광복이란 일제의 압제라는 암흑의 역사를 부정하고 다시 이전 시대와 같은 광명의 역사를 회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광복은 1945년 8월 15일의 해방, 또는 그 해방을 위한 독립운동, 즉 나라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지향적 취지의 뜻이다.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광복의 상징이었다. 

이와 비교하면 독립 혹은 건국은 미래지향적이고 가치 지향적 의미를 담은 용어다.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건국은 단순히 원상회복으로서의 광복이 아니라 봉건적 조선왕조의 신민, 제국주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 민주사회의 자유인으로 완전히 바뀜, 즉 혁명을 의미했다. 

우리 사회는 20세기 초까지 반상(班常)의 신분질서가 엄격했다. 양반을 제외한 일반 백성과 서자(庶子), 여자, 노비는 극심한 차별을 받았기 때문에 ‘같은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군주와 백성의 주종관계로 살아오면서 근대 국민국가 경험이 없었던 한반도에 현대적 개념의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한 전대미문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이 혁명적인 이유는 이전 왕조국가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근대화 된 정치체제나 제도적 기반이 성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스스로 사회적 능력을 배양하여 자기 운명을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주권적 주체로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근대적 개념의 국민으로 새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대한민국 발전의 비결’이라는 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이 향유하는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한민국 건국 초창기에 집권한 ‘국정의 주역들’이 갑신정변, 갑오경장,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조선왕조의 근대적 개혁 전통과 독립 운동가들의 신국가 건설 청사진에 바탕을 두고 전체 국민의 사회적 능력(social capability)을 극대화함에 필요한 일련의 제도개혁을 단행함으로써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새로운 국민’을 창출했다. 이 ‘새로운 국민’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의 기적적인 발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대한민국 초창기에 국정 주역들이 추진하여 성사시킨 제도개혁은 한국 역사상 미증유의 혁명적 개혁들이었다. 또한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탄생한 140여 다른 신생국에서는 대체로 시도되지 못한, 오로지 대한민국에서만 성공적으로 추진된 개혁들이었다. 

대한민국 초창기에 국정 주역들에 의해 추진된 제도개혁이야말로 한민족이 유사 이래 처음으로 누리는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를 가능하게 만든 최대 요인임과 동시에, 1945년 이후에 탄생한 여러 신생국 가운데 유독 대한민국만이 경제발전과 정치 민주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용문에서 보듯 1948년의 건국은 일제가 병탄하기 이전의 조선왕조를 복구하거나 그 시대의 문명의 회복이 아니라 과거와의 확실한 단절이자 신생(新生)이었다. 그래서 광복이라는 과거 지향적 용어가 아니라 건국, 혹은 독립이라는 용어의 획득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건국은 사라지고 광복만 남다 
1949년 9월 국회에서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변경하여 통과된 이후 광복절로 용어가 통일되었고, 광복절의 기년(期年)도 1945년 8월 15일로 굳어졌다. 이에 따라 광복절에 대한 국민적 기억도 광복절이 당초 ‘독립기념일’로 제정되었다는 사실은 잊혀졌다. 그리고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해방의 기쁨에 대한 경축으로 굳어졌다. 

다만, 1958년 ‘정부수립 10주년’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민국이 10년 전 이날에 성립되었다”고 기념사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여전히 광복절보다 독립기념일을 선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뿐만 아니라 장면 부통령의 1958년 8월 15일 기념사도 “건국 10주년을 맞이하는 금년의 광복절은 일층 뜻 깊은 날”이라고 했고, 이기붕 국회의장도 “오늘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어 민주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수립한 지 10주년을 맞이하는 날”이라고 했다. 

건국 10주년을 기념하는 정부의 경축 행사로 1948년 8월 15일에 출생한 건국동이 소년소녀 194명을 선발하여 여러 대의 꽃수레에 분승시켜 서울 시가를 행진했다. 같은 해 10월 정부는 <건국 10년 행정화보>라는 건국 10주년 백서를 출간했다. 

1958년 이후 우리 모두의 기억에서 건국에 대한 기억은 잊혀져 갔다. 광복과 건국이 분리되어 광복, 곧 해방만이 일방적으로 경축되는 추세가 60여 년 이어져 온 것이다. 그 사이 단 한 번도 1958년처럼 건국을 내세워 경축하는 정부의 공식 행사는 없었다. 그리고 4·19와 5·16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건국은 공식적으로 망각되었다.

본 기사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의 고유 콘텐츠입니다.
외부게재시 개인은 출처와 링크를 밝혀주시고, 언론사는 전문게재의 경우 본사와 협의 바랍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