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는 왜 건국을 반대했나?
김구는 왜 건국을 반대했나?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 승인 2015.08.10 15:1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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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복기] 김구와 건국 반대 운동 내막

“성시백 동지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북한 노동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세력이었던 김구는 1947년 12월 초까지만 해도 대한민국 건국에 협조적이었다. 김구는 1947년 12월 1일 “이승만 박사가 주장하는 정부는 결국 내가 주장하는 정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오해하고 단독 정부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8년 1월 25일에도 그는 “유엔 감시 하에 수립되는 정부가 중앙 정부라면 38선 이남에 한하여 실시되는 선거라도 참가할 용의가 있다”고 총선 참여 의사를 명확히 했다. 

그런데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다음날인 1월 26일,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하지 않고 있는 남북의 현재 상태로는 자유스러운 분위기를 가질 수 없으므로 두 나라 군대가 철수한 후 총선거를 해서 통일 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발언하여 건국 열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김구의 이 발언이 나온 시기가 절묘했다. 유엔 감시 하에 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1월 8일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했다. 그런데 1월 22일 소련의 주유엔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入北)을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지 4일 후의 긴박한 상황에서 김구의 발언이 나온 것이다. 

남한의 주요 정치 지도자인 김구의 총선 반대 발언과 소련 측의 입북 반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정상적인 임무 수행이 어렵게 되자 “유엔으로 돌아가 다시 훈령을 받아 활동 방향을 정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유엔 감시하의 총선이 가시화되자 월북하여 평양에 있던 박헌영은 남한의 선거를 폭력 수단을 동원하여 저지하기로 결심하고 평양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남로당에게 지령을 내렸다.

지령을 받은 남로당은 1948년 2월 7일부터 2주 동안 전국에서 “유엔위원단 반대”, “남조선 단정 반대”, “미소 양군 동시 철퇴”, “이승만 김성수 등 친일 반동분자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극렬 폭력 시위를 벌였다. 

제주도에서는 ‘인민해방군’이라 불리는 남로당원들이 일본군이 남겨놓고 간 소총과 수류탄, 검 등으로 무장하고 경찰지서를 공격했고, 경찰 및 우익 청년단체를 대상으로 유격전을 벌였다. 남로당의 거센 테러 활동으로 제주도는 통제 불능 상황으로 치달았다. 

소련군정에 놀아난 김구와 김규식 

좌익들의 극렬 폭력 투쟁의 와중인 2월 10일 김구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협력하지 않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일파만파의 충격을 던졌다. 김구는 건국을 위한 고난의 행보에 재를 뿌린 것이다. 그러나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 2월 26일, ‘유엔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안’을 통과시켰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의 지도자들이 만나 진지하게 토의하면 분단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과 희망을 가지고 북측에 남북협상을 제안했다. 북한 공산정권을 로봇처럼 조종하고 있던 소련군정은 횡재를 한 셈이 됐다. 반탁을 주장하며 소련 노선에 정반대 입장을 취했던 김구가 북행하면 결과적으로 소련 노선을 정당화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이다. 

소련과 북한은 납북협상을 북한 공산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평양 주둔 소련군정 민정사령관(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의 일기 형식의 비망록에 의하면 레베데프는 직속상관인 슈티코프 연해주관구 군사정치위원의 지시 하에 남북협상에 참석하는 남측 초청 대상자 선정에서부터 대표자 연석회의 일정과 절차, 회의 참석자들의 발언순서 등 모든 사항을 자신이 각본을 짜서 지휘했다고 밝히고 있다. 

평양의 남북연석회의는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이 채택되어 있었고, 회의 마지막 날(4월 23일) 남북 대표자들이 채택한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조언을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낀 것이었음을 레베데프와 슈티코프는 비망록을 통해 고백하고 있다.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만약 김구나 김규식이 말을 잘 듣지 않을 경우에 대한 대비책을 다음과 같이 세워놓았다. 

“김구와 그의 측근들이 회의를 파탄시키고 퇴장하면 어떻게 하나. ‘나가라’고 하며 그들을 미국 간첩으로 몰자. 그리고 회의는 계속한다. 김구와 대화를 계속한다. …그들이 소란을 피우면 이 대회는 총선을 반대하는 것인데 왜 퇴장하느냐고 몰아붙일 것.” 

소련 군정은 김구와 김규식 일행을 회유하기 위해 김일성을 통해 두 사람에게 직위를 부여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통과된 후 통일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제의했다.

이런 제의에 감동한 김구는 1948년 5월 3일 김일성과의 단독회담에서 “만일 미국인들이 나를 탄압한다면 북한에서 나에게 정치적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가?”라고 월북 의사를 타진했고, 이에 대해 김일성이 긍정적으로 답변했다고 발언한 사실도 레베데프 비망록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5·10 선거가 성공적으로 실시된 후에도 김구는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하는 노력을 계속했다. 김구는 1948년 8월 초, 통일독립촉진회의 대표단을 파리 유엔총회에 파견하여 대한민국 정권을 승인하지 말고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호소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되기 전날, 김구는 기자들로부터 정부수립에 관한 논평을 요청받고는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라는 부정적 논평을 내놓았다. 

대한민국 건국에 재를 뿌린 김구 

독립운동의 상징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두 기둥, 김구와 김규식이 제헌의원 선거를 반대하면서 임정이 제헌의원 선거는 물론 정부 수립에 반대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내 건국사에 큰 상처를 줬다.

두 김 씨는 우익진영 인물이었으므로 그들의 반대는 우익진영을 분열 약화시키고, 단선 반대를 주장하는 남로당과 좌익세력의 주장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힘을 보태줬다. 

김구와 김규식은 일면 만족했는지 모른다. 남북 지도자들이 중대한 고비에 분단을 막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노력했음을 온몸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양 김 씨의 평양회담 참가는 그들이 5·10 선거에 불참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에 하자가 있다는 인상을 줬고, 우익세력이 분열되었으며, 남한의 정치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해방 공간에서 활동했던 허정은 자신의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이승만의 건국 노선과 김구의 건국 반대, 남북협상 노선과 관련하여 이런 평을 남겼다. 

‘요즘도 간혹 백범(김구)의 노선에 따랐더라면, 남북 분단의 장기화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어떠한 형태로든 통일정부가 수립되었을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입장을 말한다면 당시 정세로 보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최선의 길이었다. 그때 만일 남한에 민주정부가 수립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의 공산화는 필연적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지금도 굳게 믿는다.…’ 

허정은 당시에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길이 한 가지 있었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들이 무조건 백기를 들고 공산주의자들에게 투항했다면, 공산정권 수립으로 적화 통일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허정의 증언을 마저 소개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상적으로 말한다면 남북 분단의 비극을 막기 위해 우선 어떤 형태로든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민주주의냐 또는 공산주의냐 하는 이데올로기의 선택은 그 다음으로 미루어 민의(民意)에 맡기거나, 또는 민주 진영과 공산당의 연립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최선의 길처럼 생각될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시기의 늦고 빠름은 있더라도 공산화라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은 2차 대전 후의 동구 제국(諸國)이 보여준 역사적 교훈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백범이 추구하던 노선이었다. 당시의 현실을 괄호 속에 묶어두고 이상만을 앞세운다면 분명히 이것은 최선의 길이었을 것이다.’ 

“역사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소”(이승만) 

허정은 두 사람을 이렇게 평한다. 백범(김구)은 현실을 외면한 채 이상만을 추구하려 했으나 우남(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남한 단독정부안 지지자들은 현실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우리의 소망은 다만 통일정부 수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민주적 통일정부의 수립”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허정의 결론이다.

“백범은 이상을 위해 현실을 버릴 수 있는 스타일의 정치가였다면, 우남은 현실을 위해 이상을 유보할 수 있는 스타일의 정치가였다.” 

8·15 해방이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가져오기는커녕 국토 분단과 외국의 군사점령이라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나가자 이승만은 조속한 시일 내에 독립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안하고, 남북 통일정부 수립이 어려우면 남한에서만이라도 빨리 주권을 회복하여 정부가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통일을 추진할 것을 역설했다. 이승만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40여 년 동안 국제회의마다 애걸하고 다녔다. 우리 조선의 독립을 승인해주시오, 우리 말 좀 들어주시오, 이렇게 애걸복걸하고 다녔다. 그래도 독립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는데 지금 5·10 총선거를 치르면 반쪽 독립이지만 조선은 독립한다.

반쪽이 아니라 제주도에서만이라도 정부를 세워 주권을 갖게 되면 국제무대에서 우리의 주장을 펼칠 수 있지 않느냐? 그런데 이 권리를 통일이란 꿈을 위해서 평양에 가는 것으로 대신하고 포기하려 하는가? 당신들이나 하시오. 역사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겠소.” 

김구와 김규식 등이 주장한 통일우선주의는 심금을 울리는 고귀한 감정의 표현이었지만 그 소망은 실현될 수 없는 꿈이었다. 스탈린이 이미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수립하라”, 즉 북한에 독자적인 공산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 지령이 민족통일의 길을 모두 막고 공산화 된 단독정권이 이미 19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1948년 7월 11일, 자유중국의 유어만(劉馭萬) 주 서울 총영사는 비밀리에 김구와 만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지지하기 바란다”는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뜻을 김구에게 전하고, 김구에게 왜 건국에 반대하는지를 물었다. 김구는 유어만 총영사에게 자신의 속내를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내가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 지도자 회의에 참석한 한 가지 동기는 북한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앞으로 3년간 조선인 붉은 군대의 확장을 중지하고, 그 사이에 남한이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공산군의 현재 병력만한 군대를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러시아인들이 손쉽게 남쪽을 기습할 것이며, 당장 남한에 인민공화국이 선포될 것입니다.” 

간첩 성시백과 김구 

▲ 성시백

이 대화록을 보면 김구는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조만간 남침하여 공산정권을 세울 것이 분명하니 굳이 대한민국을 건국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다면 김구의 통일정부 수립 주장은 군사력이 우월한 북한의 인민공화국에 남한이 편입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국민을 기만한 것이 된다.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김구가 건국을 앞둔 상황에서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한 이유는 임정의 주불(駐佛) 외교위원이었던 서영해와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 성시백에게 포섭 당했기 때문이란 주장이다. 김구의 추종자였던 조경한은 “서영해가 나타나 ‘남북한을 통틀어 총선거를 하면 선생님이 대통령이 되실 텐데 무엇 하러 이승만이 주도하는 남한만의 선거에 참여하려 하십니까.

김일성도 김구 선생을 대통령으로 모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습니다’라고 집요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변심하게 되었다”고 증언했다(이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하), 도서출판 복의 근원, 2013, 210쪽). 

“성시백 동지는 4월 남북련석회의를 성과적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높으신 권위를 가지고 극단한 반동분자로 있던 김구 선생을 돌려세우는 사업체에도 큰 힘을 넣었다.” 성시백은 국회 프락치 사건의 배후인물로서 1949년 5월 15일 체포되어 6·25 남침 이틀 후인 1950년 6월 27일 처형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북한 노동신문(1997년 5월 26일자)이 성시백의 김구 공작에 대해 밝힌 다음과 같은 보도다. 

67년 전에 이런 일을 벌인 사람을 우리는 기념관과 동상을 세우고, 거리 명칭에 그의 호를 새겨 넣어 ‘민족의 참다운 지도자’라고 떠받들고 있다. 그리고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독재자’라는 올가미를 씌워 역사의 음습한 감옥에 가두고 온갖 패륜적인 모욕을 가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부끄럽고 한심한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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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0-03-23 14:15:53
뭔 이런 등신 같은 곳이 있냐

바로알자 2015-08-20 01:49:15
김구가 북한 공산당에 이용 당했지요.

한동철 2015-08-18 18:49:48
이런 귀한 글들과 연구성과들이 우리 젊은이들과 학생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하는데...., 다같이 분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5-08-11 17:04:37
여기 뭐하는 덴가요?

뭐냐? 2015-08-10 18:24:09
와 ..이제 하다못해 김구를 까네 ㅋㅋㅋ